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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 15장 1~12절은 유다지파의 산업의 경계선을 설정해주는 내용이며 13~19절은 갈렙의 분깃을 정해주는 동시에 웃니엘이 기럇 세벨을 공격하여 갈렙이 승전의 결과로 갈렙의 딸을 부인을 맞이하는 내용이다. 20~62절은 유다지파가 116 성읍을 기업으로 얻었으며 63절은 여부스 족속을 쫓아내지 못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유다는 왕이 될 지파로 과거에 서울 중앙극장에 6개월이나 상영되었던 벤허도 유다 지파사람이었으며 예수 그리스도도 유다지파에 계열로 속해 있다. 유다 벤허, 유다 예수라고 불리는 것이 익숙하지 않을 뿐이다. 요셉은 르우벤이 잃은 장자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두 지파는 가나안 복지에 들어오는 지파 중에 최초로 분깃을 얻게 되는 행운을 안게 되었다.
야곱의 열 두 아들 중에 네 번째 아들인 유다가 족보에 기록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스라엘 왕이 될 수 있었으며 메시아인 예수 그리스도로 이어지는 은총을 얻게 되었는가? 유다는 자신의 며느리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뒤 아이를 벤 다말을 집안에서 퇴출시키려고 하다가 현명한 다말의 충고를 듣고 회개하는 유다였기 때문에 그런 은총을 얻은 것이다. (창세기 38장)
본 장은 하나님께서 주신 땅을 얼마나 올바르게 분배하고 있는 내용을 접하는 것을 행복하게 여겨야 한다. 그러나 실질적인 삶 속에 적용되는 내용이 아니라서 많은 독자들이 이 부분을 놓치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에게 얼마나 공평하게 분배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귀한 은총인지 깨달아야 할 것이다.
우리의 눈으로 보고 있는 땅의 분배도 중요하지만 사람의 마음 밭인 내면세계를 부여하는 것으로 의미하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시는 사람의 마음인 땅을 분배를 받기 위해서 우리는 유다지파의 계열에 속해 있어야 할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왕이 된다는 것은 아무나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지역에서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내게 맡겨주신 영혼을 책임지고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사명이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보내주시는 자 중에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다시 살려내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귀중한 사역으로 여기고 있다. (요 6:39~40)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부하시게 함에 있어서 모든 것은 참되고 바르며 현실적이다. 또 분명하게 분배하시고자 유다지파에게 116 성읍을 명백하게 셈하여 주신 축복을 기록한 것을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공평하게 분배하신다는 것은 사람의 방법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져야만 올바른 분배가 되는 것이다.
마태복음 20장에 포도원의 품꾼들에 비유를 기록하고 있다. 한 데니리온을 약속하고 들어가서 일을 했는데 나중에 온 일군이 한 데나리온을 받으니 먼저 온 일군들은 더 주는 줄 알았다. 그런데 나중에 온 일군들과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받게 된 것을 불만 불평하였다. 한 데나리온을 받는다는 것은 일한 만큼 내 영혼이 살이 찌는 은총을 받는다는 의미다.
포도원에 들어가 일을 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 말씀을 익혀 나가며 삶 속에 적용시켜 나가는 일을 하면 하나님의 법에 매달려 익히고 적용한대로 영혼이 올바르게 살이 찌게 되는 보수를 주겠다는 약속을 의미하는 것이다. 15절에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하는 것이 내 마음인데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고 꾸중한 장면이 나온다.
포도원 주인은 먼저 온 자들의 임금을 착취해서 나중에 온 자들에게 임금을 준 것이 아니라 포도원에 들어와서 일한 만큼 약속한 대로 영혼을 살찌게 하여 주겠다고 약속한 대로 주신 것을 의미한다. 포도원에 들어와서 일한 시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만큼 말씀을 삶 속에 적용하고 익혀서 육의 속성을 깨뜨리고 영혼이 살졌느냐가 중요한 말씀의 포인트다.
교회생활, 수고, 봉사, 헌신, 믿음의 연조, 직분, 중직을 맡아 섬기는 것에 따라서 보상을 받는 것으로 착각하지 말았으면 한다. 구원을 받았다면 당연히 내가 할 일이지 그런 일을 했다고 해서 더 나은 보상을 얻는다는 보장도 약속을 한 적이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듣고 설교, 성경공부에 대한 지식 풍부, 공로가 지대하다고 해서 특혜를 받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런 특혜를 받는 줄 착각하고 있는 부류들의 사람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로서 이에 대해 예수님은 그들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정죄하고 있다. 그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중심으로 살았으며 겉으로 보기에는 완벽하며 철저하게 율법대로 살았다고 주장해왔다. 그런데 그들은 왜 예수님으로부터 정죄를 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는가?
그리스도 예수께서 말씀이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것은 종교의식 종교제도에 사로 잡혀 있는 자들을 구원하여 자유하게 하시려는 목적과 의도를 갖고 있다. 영혼이 살찌는 것은 종교행위로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먼저 믿고 나중에 믿고 순서와 상관없이 공평하게 분배하는 하나님의 방식이라는 것을 엄중하게 보여주는 내용이다.
하나님과 함께 한 축복의 생애에 명백한 경계가 있음은 마치 유다지파의 몫으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경계가 있음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그 생애의 운명을 정하신 일도 분배의 한 부분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아야 하는 구역과 그 제한을 만족치 않으면 안 되도록 되어 있음을 강조하게 되어 있다.
지금 현재 내가 원해서 좋은 부모를 만났거나 환경을 얻게 되었거나 좋은 학교를 가제 된 것이 아니다.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던져진 존재로서 저주아래 태어난 내가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를 만나서 팔자가 펴진 것뿐이다. 인생에 재역전이 된 것을 모르고 옛 자아가 튀어나와 불만불평을 하게 되는 옛 사람의 본성인 가시와 엉겅퀴가 자라난 것이다.
갈렙의 딸 악사는 아버지에게서 얻은 남방 땅을 가나안 사람들에게 빼앗길 것이 아님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자신의 토지를 비옥하게 할 샘물까지도 그녀의 아버지에게 구하는 신앙과 총명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따라 그녀의 아버지는 딸의 신앙과 총명을 기뻐하여 그녀가 구한 것 이상의 것을 물려주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살이 찌며 영혼이 자라나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의 예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주권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창세전에 내가 받아야 할 권리를 되찾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신앙이며 능력인 것이다. 하나님의 닮음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에 완전히 도달했다는 것이 바로 은혜를 받았다는 뜻이다.
비옥한 남방 땅임에도 샘물이 필요했다. 성령 없이는 가장 행복한 환경의 생활은 있을 수 없으며 은사로서 하는 봉사도 할 수 없고,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옛 자아의 상태에서도 은사가 나타날 수 있으며 열매를 맺는 행복도 누릴 수 있으며 천국 문 앞에까지는 갈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은혜의 샘물 없이는 도저히 하나님 안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갈렙이 자신의 딸 악사에게 약속한 땅과 함께 샘물을 준 것 같이 악한 사람이 그 자녀에게 좋은 것을 아낌없이 준다면 하물며 하늘의 아버지는 그를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는가? (마태 7:11) 여호수아 15장은 갈렙과 악사 및 웃니엘은 성령의 은총 아래 놀라운 신앙의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갈렙의 신앙은 약속 그것을 요구하고 약속에 매어달리며 또 약속을 받는 것을 즐거워한다. 갈렙은 그 땅에 있는 거인들을 상관하지 않고 염려하는 일 없이 모세로부터 네가 밟는 땅을 다 허락한다는 약속아래 이 산지를 내게 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신 1:36, 수 14:9, 12) 이러한 갈렙의 신앙을 본받은 악사의 믿음으로 귀중한 땅과 샘물을 얻게 된 것이다.
이에 본받은 악사는 자신이 받은 전 영토를 비옥한 땅으로 만들기 위해서 샘물을 요구함으로서 약속에 매어 달렸다.(19) 그러나 악사의 믿음은 단지 샘물 하나를 요구했는데 이에 따른 응답으로 갈렙은 그의 딸에게 위샘과 아래 샘을 주신 것이다. 웃니엘은 전투에 있어서 담대함을 나타냈는데 악사는 기도에 있어서 담대함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웃니엘은 이스라엘 최초의 구원자요 또는 지배자로써 하나님께 향한 신앙은 더욱 더해졌다.(삿 3:9) 사사기 1:12~15에 거듭 언급하면서 기럇세벨을 점령하는 자에게는 갈렙의 딸 악사를 아내로 주겠다고 한 약속을 받게 되었다. 악사가 출가할 때 아버지에게 밭과 함께 샘물을 요청하여 얻게 되는 믿음을 보여주고 있는 귀한 장면을 반복하고 있다.
악사의 신앙과 웃니엘 전투의 담대함이 서로 역동적인 관계를 갖고 이루어진 것이 하나의 미담이 아니라 우리들이 가져야 할 신앙의 표본이다. 어느 누가 믿음의 싸움을 하게 되면 한 쪽은 반드시 기도하는 존재가 필요하다. 담대함을 자신감만 갖추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하는 존재와 연합되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감에 있어 영적승부근성을 가져야 한다.
20절에서 62절까지 116 성읍을 완전히 정복하였지만 예루살렘 주민 여부스 족속을 좇아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움을 갖게 된다. 마지막까지 최후 승리를 얻는다는 것이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스라엘 대왕의 모형인 다윗이 그들을 몰아낼 때까지 이스라엘 민족들은 여부스 민족들과 함께 생활해야 하는 고충을 겪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들이 최초로 정복했어야 하는 여부스 족속을 남겨둠으로 인해 고진감래해야 되는 상황이 우리들 삶 속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따라서 성경에 나오는 사건들을 기록한 것은 단순히 역사의 업적을 더듬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와 같은 상황이 또다시 재발되지 않기 위한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이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영적 긴장감을 풀지 말아야 되는 이유를 몇 번을 강조해도 무례하지 않을 것이다. 전쟁을 하거나 경기에 임하는 군인이나 선수들이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신앙생활 하는 그 어느 누구든지 마찬가지로 긴장감을 풀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나 혼자 긴장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하나가 된 상태에서 같이 긴장하고 있는 것이 주님의 은혜요, 능력이다.
마지막까지 싸워야 되는 신앙생활이라면 한시라도 긴장을 풀어서 안 된다. 그래서 끝까지 견디는 자는 영적 긴장감을 풀지 않고 주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데 하나님의 도구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는 존재를 의미한다. 최후의 승리를 얻기까지 주님과 함께 하심을 잊지 말아야 하며 십자가를 붙들고 나아가야 할 것이다.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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