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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2012년 7월) 어느 날, 한 권사님이 목사님의 생일이 음력인지, 양력인지를 물었다. 느낌에 무슨 계획이 있지 싶어 내가 “우린 생일 대충 지나가요. 목사님 생일 신경 쓰지 마세요”라고 했다. 한 권사님은 “사모님은 신경 안 써도 여전도회에서는 신경 써야지요”라고 했다. 우리가 이 교회에 부임한지가 11년째인데 웬일로 올해에는 목사님 생일을 다 챙기시나 하는 생각을 했다. 전 목사님께서는 은퇴 직전이라 연세가 많으셔서인지 생일 때마다 교회에서 장만을 하여 온 교인 잔치를 하는 것을 보았다.
우리 가족은 셋이 7월 중에 생일이 들어 있다. 아들의 생일이 양력으로 7월 9일, 남편의 생일은 음력으로 5월 27일인데 대체적으로 아들의 생일과 비슷한 시기에 해당되고, 내 생일이 음력으로 6월 13일인데 대개 양력으로 7월 중에 걸린다. 딸의 생일은 10월이다. 원래 우리 가족은 생일을 그다지 거창하게 지내지 않는다. 그냥 생일을 즈음하여 가족끼리 레스토랑에 가서 이탈리안 포크커틀릿을 칼로 잘라 먹는 것이 전부이다. 왜 레스토랑인가 하면 아빠를 제외한 세 식구가 칼질 하는 것을 좋아하니까.
생일을 간단하게 지내는 이유를 곰곰이 따져보면 어린 시절과 관계가 깊은 것 같다. 내 어린 시절에 어머니는 큰 아들인 오빠의 생일에는 떡도 하고 미역국도 끓이고 생일상을 잘 차려주었다. 그러나 나의 생일은 해마다 한 번도 기억하지 못했다. 아니, 기억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에는 그것이 엄청 서운하고 화가 났다. 왜 그랬을까, 지금도 나는 친정어머니에게 그것을 물어보지 못하고 있다. 나 혼자서 추측하는 정황은 있다. 오빠의 생일은 봄철이다.
그때에는 쑥이 나는 계절이어서 떡을 하기가 맞춤했고, 농촌에서 아직 일손이 바쁘지 않은 때라 어머니는 음식을 장만할 여유가 있는 때였다. 내 생일은 한여름이다. 농촌에서 눈코 뜰 새 없이 가장 바쁜 때이다. 하루 세 끼 식사 챙겨 먹는 시간도 아껴야 할 정도로 바빠서 그깟 딸 정도의 생일쯤이야 기억할 수도 없었으리라. 어머니는 아들은 귀하게, 딸은 그저 그렇게 여기는 한국의 전형적인 어머니였다. 허나, 그로 말미암아 나는 더욱 화가 났다. 어머니에게 나는 하찮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 바쁨에 밀려난 존재, 농사일에 밀려난 존재라는 것을 가벼이 받아 넘기지 못하는 꽁함을 간직하고 살았다.
그런데 사람은 참 희한한 존재임에 틀림없다. 나의 어린 시절에 생일로 인하여 받은 상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혼해서 나의 가정을 이룬 후에 그것을 시정하여 가족들의 생일을 잘 차려주어야 할 테지만 그렇지 못한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는가 보다. “어려서 사랑을 받아본 자라야 커서 사랑을 할 수 있다.” 조금 바꾸어 말하면 이렇다. “어린 시절에 생일상 차림을 받아본 자라야 어른이 되어서 다른 사람의 생일상을 잘 차려줄 수 있다.”
어쨌든, 그리하여 올해에는 여전도회에서 목사님 생일을 기억하고 꽤 거창하게 차려주었다. 다행이다. 내가 하지 못한 일을 대신 해주어서 나는 고마웠다. 몇몇 성도님들과 우리 부부는 목사님 생일을 즈음하여 맛있는 훈제 오리고기와 냉면을 먹었다. 그리고 목사님의 여름 양복도 사주었다. 오랜만에 자기의 생일을 기념하여 거창하게 대접을 받은 목사님은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그러고 나서 며칠이 지나 내 생일이 다가오건만 남편은 아무런 계획이 없어 보였다. 남편의 생일 후 2주일이 지나면 내 생일이다. 나는 은근히 다시 그 옛날의 상처가 되살아났다. 두고 볼 요량이었지만 분위기라고는 전혀 없는 남편은 눈치를 못 채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사택의 거실 벽에 걸린 달력에 큰 글자로 “내 생일”하고 써놓았다. 그래도 이 남자는 전혀 반응이 없었다.
주일날 밤에 운동 삼아 둑길을 걸으면서 내가 물었다. “당신, 요즘 사택 거실 벽에 붙은 달력 봤어요?” “아니.” “아이, 짜증나. 달력도 좀 보고 살아요.” “그래? 그럼 이따 가서 볼게.” 한참 더 걷다가 남편이 말했다. “달력에 뭐가 있는데? 궁금하니까 지금 그냥 말해 봐.” 나는 분통이 터져서 말을 해버렸다. “7월 31일이 내 생일인지 알고 있어요? 내가 당신 보라고 달력에다 며칠 전부터 큰 글씨로 ”내 생일“이라고 써 놨다고요. 당신 생일은 성도님들이 챙겨줬으니 내 생일은 당신이 챙겨줘야 하잖아요.” “그래? 그럼 뭘 해줄까?” “뭘 하긴, 레스토랑에 가서 외식이나 한 번 해야지요. 당신이 나에게 사줘야지요.”
그리하여 우리 부부는 7월 31일, 화요일 점심 때 나의 생일을 기념하여 외식하기로 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전날 이웃 교회 목사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주 작은 규모의 교회에서 목회하는데 전주 시내 어느 식당의 짬밥을 거두어다가 개를 키워서 살림에 보태는 분이다. 자기가 개를 한 마리 낼 테니 어디 시원한 데 가서 물놀이도 하며 천렵을 하자는 것이었다. 남편은 나와의 약속은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그러마고 했다. 화요일이 되자 여기 저기 몇 군데 전화를 하여 함께 할 만한 성도들을 초대했다. 김 집사님 집에서 모여 된장과 생강을 넣고 개를 푹 삶아 수육으로 쌈을 싸서 잘들 먹었다. 나는 개고기를 못 먹는다. 나는 뒷자리에 앉아 참외만 깎아 먹었다. 오후에는 우리 동네의 강 가운데에 평상을 놓고 앉아 놀았다. 물속에 발을 담그고 있으니 더위가 싹 가셨다.
내 생일날을 그렇게 지낸 다음 날 나는 이제나 저제나 남편의 다음 계획 발표를 기다렸으나 아무 말이 없었다. 그 대신 그는 몇 달 전부터 성도들이 늘어나서 실내 화장실이 두 개로는 모자란다고 새로 화장실 하나를 증축해야 할 필요를 느꼈는데 수요일에 그 일을 시작했다. 목요일 오전 내내 일을 하다가 점심 때 방에 들어왔다. 내가 말했다. “오늘 점심 때 정읍 나가서 외식할까요?” 남편은 “오늘은 안 돼. 일을 시작했으니 마저 끝내야지.”라고 말했다.
나는 드디어 화가 폭발했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내가 왜 이 남자랑 결혼했을까? 무드라고는 눈곱만치도 없고, 맨날 일만 하고, 아내보다 일을 더 좋아하고, 아내의 생일도 기억 못하고……’ 그에 대한 불만이 수십 가지도 넘었다. 나는 화가 나면 입을 꼭 다물어 버린다. 전혀 대꾸를 안 한다. 5일 동안 일체의 대꾸를 안 하고 뾰로통하게 대했다.
목석같은 이 남자가 다음 주 화요일이 되어서야 뭔가 감을 잡은 모양이었다. 얼추 화장실 작업이 마무리된 모양이었다. 남편은 일을 한 번 시작했다 하면 끝을 볼 때까지 다른 것에는 신경을 안 쓰는 경향이 있다. 이제야 화장실 일이 끝난 모양이었다. 화요일 오후 1시쯤에서야 일을 마치고 방에 들어와 샤워를 하고 난 후, 방에 들어온 그에게 눈길도 안 주고 책만 읽고 있는 내게 말했다. “오늘 저녁에 전주 나가서 식사할까?” 흥! 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지금이라도 생각이 났다니 눈물 나게 고맙네, 하는 생각이 들어 알았다고 했다.
전주에 가면 남편이 꼭 챙기는 사람이 있다. 바로 신 전도사님이다. 신 전도사님은 남편과 함께 총신 신대원에 입학했으나 1학년 2학기 때 휴학을 하고 난 후 지금까지도 복학을 하지 않아 여전히 전도사로 남아 있는 사람이다. 중학생인 딸과 함께 단칸방에서 살고 있다. 남편이 말했다. “신 전도사하고 함께 식사하면 어떨까?” 누가 말려, 전주로 가자고 할 때부터 내 그럴 줄 알았어, 라고 생각하며, “좋지요, 뭐. 그러고 보니까 신 전도사님과 그 딸의 생일이 이 즈음인 것 같네요. 작년에도 이때쯤 전주에서 함께 냉면 먹었잖아요.” 전화를 하니 봉사하느라 늘 바쁘신 신 전도사님이 집에 있었다.
전주에 가서 신 전도사님과 딸을 차에 태워서 아주 맛있는 돈까스와 소바를 먹을 수 있는 식당으로 갔다. 신 전도사님이 물었다. “갑자기 웬일이세요? 이 더운 날 전주에 오시고?” 내가 대답했다. “아, 신 전도사님과 한나 생일이 이 즈음이잖아요. 그래서 밥이나 함께 먹으려고요.” 전도사님은 엄청 놀라고 감격을 하셨다. “아니, 사모님께서 어떻게 그렇게 기억을 잘 하세요? 정말 감동, 감격입니다.” “작년에 우리 함께 전동에 있는 <화평동 왕 냉면> 집에서 큰 양푼에 담아준 냉면 먹었잖아요. 그때 두 분 생일이 앞 뒷날이라고 했던 것 기억나요. 그리고 이 즈음이어서 냉면 먹었던 것도요. 갑자기 오다가 생각해보니 그렇더라고요.” “그래요. 맞아요. 내일이 제 생일이고, 모레가 한나 생일이예요.”
둘씩 짝을 지어 치즈 고구마 돈까스와 비빔 소바를 시켜 부부끼리, 부녀끼리 나눠먹었다. 사실, 이 집에서 음식을 시킬 때는 고민이 된다. 치즈 고구마 돈까스도 먹고 싶고 비빔 소바도 먹고 싶으니까. 이 집에서는 직접 농사지은 메밀로 소다를 넣지 않고 직접 반죽을 하여 생면으로 뽑아 준다고 플래카드에 쓰여 있는데 먹어 보면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생면으로 뽑은 탓인지 면발이 부드럽고 맛있다. 돈까스도 가끔 직접 만들고 있는 것을 구경할 수 있다. 손님이 뜸한 시간에 직원들이 홀 의자에 앉아 치즈 한 덩어리와 고구마 한 도막을 돼지고기에 싸서 돈까스를 만든다. 그것도 상술의 한 방법인 것 같기도 하다. 만드는 걸 보고 있으면 음식에 신뢰가 간다. 남편이 말했다. “와, 오늘 대박이네. 일석삼조잖아. 당신 생일, 전도사님 생일, 한나 생일을 한 번에 축하할 수 있으니.”
그 집의 치즈 고구마 돈까스와 비빔 소바는 정말 맛있었다. 반찬도 깔끔하고 맛은 좋고 값은 싸니 이것 역시 일석삼조였다. 이 집은 점심, 저녁 식사시간에는 손님이 너무 많아서 빈자리가 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곳에 갈 때에는 일부러 식사 시간을 약간 비켜서 간다. 점심은 11시, 혹은 2시에 가서 먹고, 저녁은 5시에 가면 빈자리가 넉넉하다. 가까운 곳에 값싸고 맛있고 건강에도 좋은 음식을 사 먹을 수 있는 식당이 있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일단 올해의 나의 ‘생일증후군’은 가라앉았다. 아마도 내년 이맘때쯤에 또 도질지도 모른다. 이것은 나의 어린 시절의 ‘사랑 결핍 콤플렉스’로부터 발단된 증상이다.
요즘 이민아목사의 글을 읽다가 고개를 끄덕이게 된 이야기가 있다. 그녀가 변호사 시절에 30대 중반의 부부가 이혼 상담을 하러 왔다고 한다. 남편과 아내를 따로 만나 상담을 했다. 남편의 말은, 자기는 새벽부터 밤중까지 오로지 아내를 위해, 자식을 위해 돈을 버느라고 쉬지도 못하고 살고 있다고 했다. 아내의 말은, 남편이 결혼 전에 연애를 할 때는 함께 바닷가에 놀러 가서 백사장을 거닐며 오순도순 얘기를 나누고 그랬는데, 결혼을 하더니 맨날 일만 하고 따뜻한 한 마디의 대화도 없이 삭막한 삶을 살고 있으니 이혼을 해야겠다는 것이었다. 이민아씨가 제 삼자로서 둘의 얘기를 들어보니 해결책이 나왔다. 둘을 앉혀놓고 해결책을 제시했다.
둘이 휴가를 내어 바닷가에 가서 백사장을 거닐며 속을 터놓고 대화를 나누고 와서 다시 상담을 하자고 했다. 그 부부는 바닷가에 갔다 온 후 이 변호사를 찾아와서 “이젠 이혼할 필요가 없어졌어요. 우리는 서로 깊이 사랑하고 있더라고요. 감사합니다, 변호사님.” 그러더라는 것이다. 이민아 변호사가 그들에게 조언했다. “가끔 둘이 바닷가에 가서 백사장을 거니는 것 잊지 마세요.”
부부관계라는 것은 아주 복잡하면서도 단순하다. 조금만 배우자를 배려하고 역지사지(易地思之)한다면 모든 것이 순조로워진다. 그리고 아내는 남편에게 거창한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특히, 남편이 목회자일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대개 목회자 남편의 호주머니가 두둑하지 못하다는 것을 아내인 사모가 모르겠는가? 그 마음이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도 성도들에게 마음을 달라고 요구하시듯이 아내 역시 남편에게 마음을 요구한다. 나는 여자이니 남편도 아내에게 마음을 요구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를 읽으면 알 수 있으려나.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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