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골산 칼럼 제1895호 / 가나안 땅에서 머물기를 원한다면

작성시간12.08.29|조회수5 목록 댓글 0

창골산 칼럼 제1895호 / 가나안 땅에서 머물기를 원한다면

                 

 

  제189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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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나안 땅에서 머물기를 원한다면

 

 

 

 

    여호수아 17장은 므낫세 반 지파의 기업(산업)으로 남은 반 지파는 일찍이 다른 두 지파와 함께 요단 동편에 기업을 얻은 바가 있다. 이 두 지파 반은 스스로 자기를 위하여 택하고 하나님께서 그 몫(분깃)을 주심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러기에 얼마 되지 하여 악의 지팡이가 그들 스스로가 택한 땅(영지) 위에 떨어졌다.

 

    악인의 규가 의인들의 땅에서는 그 권세를 누리지 못하리니 이는 의인들로 하여금 죄악에 손을 대지 아니하게 함이로다. (시 125:3)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땅을 주신 것은 살아갈 수 있는 영토를 확장시켜 주는 의미도 있지만 죄악을 범하지 않게 하시려는 목적과 의도를 안다면 내게 보내주신 영혼(마음의 땅을 가진 존재)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아야 된다.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땅을 빼앗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마귀사탄의 작전에 휘말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가나안 땅에서 분배를 받아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법에 따라 범죄 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애급에서 옛 사람의 모습을 버리고 새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배려하신 것이다. 옛 사람이 죽어야 만이 새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죽는다는 것은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야만 죽어지는 것이다. 과거에 내 혼과 몸과 영이 서로 따로 놀며 움직이는 상태가 바로 죽은 상태였다. 여기서 죽는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져야 만이 다시 부활할 수 있다는 것인데 내 안에 살아계신 주님과 함께 연합되어지는 상태가 바로 생명을 얻은 상태다.

 

   그리스도 안에서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나야만 한다. 그런데 자라기 위해서 내 안에 옛 사람과 새 사람이 끊임없이 충돌하며 영적 전쟁에 항상 임해야 할 것이다. 또한 내게 보내주시는 존재를 살려내기 위해서 무서운 전쟁을 치러야만 한다. 내 안에 있는 마음의 땅과 내게 보내주시는 존재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그 분의 철저한 다스림과 통치 아래 살아가야 한다.

 

   16장과 17장에 기업(산업)이 그 가족에 따라 분배되었다고 했다. (17:2, 16:5, 8) 이는 그들의 필요한 양을 뜻하며 각 가족이 그 필요에 따라 충분하게 공급했다. 민 26:54와 같이 수가 많은 자에게는 기업을 많이 줄 것이요, 수가 적은 자에게는 기업을 적게 줄 것이니 그들이 계수된 대로 각기 기업을 주되 오직 그 땅을 제비 뽑아 나누어 그들의 조상 지파의 이름을 따라 얻게 할지니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에베소서에는 산 자의 받을 몫(분깃)은 그 필요에 비례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의 부(副) 하심에 따라 주어진다고 강조했다. 에베소서 1: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도달되어진 상태를 의미한다.

 

   슬로보핫의 다섯 딸의 행동은 신앙의 모범이 될 수 있는 사례다(3, 4, 6) 슬로보핫에게는 기업을 이을 남자가 없었기 때문에 이 다섯 딸이 대담하게도 모세에게 기업을 청구하고 모세는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그들에게도 분깃(산업)을 나누어 주도록 약속했던 것이다.(민 27:1~11) 어쩌면 15장의 갈렙의 딸 악사의 신앙을 본받았을 가능성도 엿보인다.

 

   신앙생활에 따라 행동으로 옮길 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을 토대로 실행해야 된다. 영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이루어가시기를 원하시는 것은 우리와 함께 즐기시려고 하는 의도와 목적을 갖고 있다. 신앙으로 이어져야 하는 생명의 줄기를 끊어지지 않게 하신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귀중하게 여겨야 할 것이다.

 

   슬로보핫의 딸들이 행한 일을 다시 기록함에 있어서 다만 이들 현명한 여자들의 신앙뿐만 아니라 그들의 이름까지도 들어 기록하셨는데 그들의 이름이 네 번이나 기록되어 있다. (민 26:33, 27:1, 36:11) 신앙으로 현명하게 행동함에 따라 이렇게 성경에 여러 번 언급할 뿐만 아니라 역사 속에 길이 남아 지금도 우리에게 유효한 상태라는 것이다.

 

   신앙으로 본받아야 할 인물의 모범 사례들이 우리들에게 무엇을 인식하려고 하는가? 슬로보핫 딸들과 함께 연합된 주님께서 그들과 더불어 이루어내신 사건들은 단순히 역사의 기록이 아니다. 과거에 일어난 사건이 기록되어 우리들에게 알려주는 것은 그 사건이 내 안에서 일어나야 만하는 사건으로 기록된 성경이 내 안에서 이루어져 가야 내용이다.

 

   요셉의 자손은 분배된 몫(분깃)에 만족하지 않고 다시 초대부터 유다와 경쟁하여 온 지파로 유다지파의 갈렙이 청구한 것을 배웠을 런지도 모르지만 갈렙도(14:9) 므낫세 지파의 딸들도(17:6) 또 레위인들도(21:2) 모두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대담하게 청구하여 온 것인데 요셉의 자손들은 교만과 불안에서 청구해 온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께 허락한 약속이 아니라 억지로 기업을 물려받고자 한다면 이미 받은 기업마저도 빼앗길 수 있다. 그래서 마태복음 1장 족보 장에 야곱의 아들 중에 유다가 들어가고 요셉이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여호수아는 산지가 네게 너무 좁을 진대 브리스 사람과 르바임 사람의 땅 살림에 올라서 개척하라고 했다. (15)

 

   그들이 그곳 거민(토착민)들이 철 병거를 가지고 있다고 하여 망설이고 있는 듯이 보이자 다시 반(半) 비웃는 식의 말까지 써서 그들을 격려했다(16~18) 여호수아는 다시 에브라임 출신이었지만 그는 자기 지파라고 해서 특별취급을 하거나 역성들지 않았다. 참 지도자는 자기가 속해 있다고 해서 자기에게 유리한 편을 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들도 적을 겁낼 것 없이 신앙으로써 개척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국교회에서 개척교회가 아주 작은 교회만이 개척교회가 아니다. 신앙으로 개척해 나간다면 크기에 상관없이 어느 교회라도 개척교회임을 자부해야 할 것이다. 요셉의 자손의 자부심과 불만 불신앙과 자만심 및 비겁한 일은 요셉 지파의 한 사람인 여호수아에게 반(半) 멸시로써 비난을 받게 된 것이다.

 

   신앙과 복종이 있는 곳에 풍부한 축복이 보장되어 있다. 이 원칙은 모든 때, 모든 시대에 진리이다. 요셉의 기업은 요단에서 지중해까지 퍼져 있었다. 한 끝은 자기의 죽음을 암시하고 다른 끝은 하나님의 사랑을 암시하고 있다. 경계는 다른 지파와의 접촉을 뜻한다. 크리스천이라고 한다면 날마다의 교통에 있어서 자기를 죽는데 두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 길이와 높이를 아는 것은 그 교제를 감미롭고 유익케 하는 데 필요하다. 하나님의 넓이는 십자가의 오른 편, 길이왼 편을 의미하며 깊이는 십자가의 밑 부분으로 높이는 십자가의 윗부분을 의미하고 있다. 십자가의 사랑을 그 어떤 것으로도 측량할 수 없는데 그것을 측량하려고 하는 것이 인간들의 억측이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기를 원한다면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가장 무서운 고난이다. 즉 자기 자신이 끊임없이 날마다 죽어야 하는 것이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도 나무 십자가를 지거나 주위 사람들의 운명이나 팔자를 내가 대신한다고 하는 착각 속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상을 배워서 책임지고 익혀나가면서 주님의 그늘 밑에 거하는 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것이며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고난이다. 이 고난을 통해 자신을 하나님 사상으로 올바로 세워지기까지 잘 감당하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말씀의 멍에를 혼자 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멍에를 메고 가기 때문에 지기 쉽고 가볍다는 것이다.

 

   여호수아 15장에도 유다지파가 예루살렘 여부스 족속을 쫓아내지 못하였고, 16장에는 에브라임 지파가 게셀에 거주하던 가나안 족속이 쫓아내지 못했고, 17장에도 므낫세 지파가 벧 스안과 이블르암, 돌의 주민, 엔돌주민, 다아낙 주민, 므깃도 주민들을 쫓아내지 못하였던 부분들이 나오고 있다. 하나님의 온전한 명령을 순종하지 않았던 것이다.

 

   가나안 땅에 거주하던 모든 거민들을 모조리 쫓아내라고 했던 하나님의 명령을 자기 마음대로 쫓아내지 못한 주민들로 인해서 이스라엘 민족들이 겪어야 할 빌미를 남기고 말았다. 주님과 연합되어 한 몸으로 살아가는 과정이 가나안 땅에서 살아가는 과정과 같다면 내 안에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를 철저하게 내몰아야 한다.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 

 

 

 

필    자

프 로 필

이준호목사/창골산 칼럼니스트

ljh4183@hanmail.net

장로회신학대학교 대학원, 예장 통합 거룩한 빛 광성교회 협동목사
장로교연합신문 편집국장, 한국 성경본문연구원 원장
바이블 앤 라이프 대표 010-9600-5727 (카톡으로 문자 환영)
매주 목요일 오후 7시 바이블아카데미에서 성경공부 강의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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