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골산 칼럼 제1901호 /열심히 믿는 신앙으로 천국을 가는가?

작성시간12.09.05|조회수7 목록 댓글 0

창골산 칼럼 제1901호 /열심히 믿는 신앙으로 천국을 가는가?

 

  제190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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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심히 믿는 신앙으로 천국을 가는가?

 

 

 

 

 

   과거에는 볼 수 없는 책이 되어버렸지만 영어 왕도라는 책이 있었는데 요즘은 단종된 책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신앙에는 왕도가 없는데 있는 줄 알고 이리저리 찾아다니는 무리들이 얼마나 많은지 거기서 못 찾으면 이단에게까지 가서 찾았다고 기뻐하고 난리다. 신앙에 왕도가 있다고 하는 것이 바로 넓은 길이요 넓은 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렇게 말해도 있다고 빡빡 우기며 붙잡고 늘어지고 있는 꼴불견을 자주 엿볼 수 있다. 이미 산성토양이 되어버린 상태에서 영성이 자라난다고 한다면 정상적으로 자라는 것이 아니다. 이상한 물체가 나오는 것인데 그것을 직시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자연적으로 성장해서 올바른 영양분을 가진 것이 아닌 비정상적이며 불균형적으로 나온 것이다.

 

    기독교에 관련된 여러 매개체에서 신앙에 절대적인 왕도가 있다고 우기며 광고를 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있다. 또한 교회마다 교단마다 자신들만이 절대적인 왕도라고 여기며 권위를 내세우고 있는 실정이다. 영적인 목회가 아닌 혼적인 목회로 인해 생겨난 병리현상으로 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병에 걸리지 않은 것처럼 태연작약하고 있다.

 

   오랫동안 신앙 생활하면서 교회에 찬양대원, 교사, 여전도회 임원, 각종 모임에 중요 직책을 맡아오던 어느 집사가 기도의 응답에 불신과 구원에 대한 우울증, 공항장애로 인해 정신병원에 와서 의사와 상담했다. 상담한 의사도 교회 장로로 너무나 난감한 진료가 되어 담임목사에게 문의했지만 답을 얻지 못하다가 영성운동을 전개하던 의사에게 문의하게 되었다.

 

   그 분은 상담의사에게 먼저 산에 가서 하나님께 매달리며 기도하셔야 되며 어떻게 하면 되는지 질문하며 답을 얻어야 된다고 했다. 그날부터 상담의사는 산에 올라가 하나님과 관계를 형성하며 대화의 시간을 가졌으며 그 환자를 치료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상담한 의사는 그로인한 계기로 지금까지 산에 올라가 기도하는 삶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우울증에 걸리거나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는 교인들이 답을 얻지 못하면 교회를 떠나거나 이단으로 좇아가는 경우가 생겨나고 있다. 왜 이단을 가는가? 이단 쪽에서 해답을 줄 뿐만 아니라 확실한 증거를 보여주기 때문에 쏠리게 되어 있다. 구원에 대한 의심을 가진 성도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울증이 심각해진 목회자사모들이 많다는 것이다.

 

  위에 거론된 집사만이 아니라 문제가 생기면 금식기도하고 특별헌금하며 선교사지원을 하는 등 아주 열성적인 신앙하던 분이 있었다. 난관에 부딪히면 예언가에 찾아가서 문제를 상의하여 거금의 헌금을 했는데 문제해결은 되지 않는 회의적인 상황이 왔었다. 다시 예언가에 찾아가서 들은 답변을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예언 성취에는 믿음의 전제조건으로 이루어지는 것인가? 믿음의 조건 때문에 구원을 받았는가? 기도의 응답에도 믿음의 조건으로 얻어지는 것인가? 하는 질문에 재검토를 해야 할 것이다. 믿음이 부족한 탓으로 돌린다면 그동안 해왔던 믿음의 행위는 물거품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에 회의를 느껴 깊은 슬럼프에 빠지게 되어 있다.

 

   목이 쉬도록 기도했는데 응답이 안 오면 기도하는 척했거나 기도를 안 한 결과일 뿐이다.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는 말씀을 의지하고 기도했는데도 응답이 없다고 믿음이 부족한 탓으로 돌린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권위는 어떻게 되며 그 약속은 실효성이 없는가?

 

  열심히 믿는 신앙으로 기도 응답을 받을 수 있는가? 구원에 대한 확신을 보장해 주는가? 라는 질문에 회의를 갖지 않고 있다면 우울증에 안 걸렸다고 기뻐할 일인지 아니면 감각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배짱이 두둑한 것인지,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것인지 알 길이 없다. 과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신앙의 본질과 원형이 무엇인가?

 

   신앙의 열심을 가진 분들을 볼 때마다 주위에서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열심적인 신앙의 소유를 갖고자 열망하고 있다. 그런데 로마서 10:2에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신앙적)열심히(을) (갖고)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라고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지식이란 “하나님의 의를 아는 것”으로 여겨야 하는데 그 지식을 따라가지 않고 있다.

 

   열심 그 자체만으로 볼 때는 너무나 훌륭한 것이며 대단한 것으로 여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열심히 믿는 신앙이 믿음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열심히 믿는 신앙은 그냥 믿음과 상관없이 열심일 뿐이다. 따라서 신앙과 열심은 상관관계를 가지지 않을 뿐 아니라 전제조건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열심히 믿는 신앙이 얼마나 위험스러운 것인지 깨달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이런 열심 때문에 그들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탄식하며 피력한 말씀이다. 이러한 열심은 반드시 주위의 칭찬과 인정이 뒤따라야지만 더욱 더 열심히 믿는 신앙으로 자기 의를 세워가게 된다. 이런 신앙을 율법적인 신앙생활이라고 치부할 수밖에 없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하늘에서 끌어내리려는 것이나 음부에서 끌어올리려는 것과 같은 상황이다.(6~7)

 

    왜 구원에 확신이 없는지, 기도의 응답이 없는지 이제 겨우 알게 되었다면 이때까지 율법적인 신앙생활, 아니 종교생활을 해왔다는 증거다. 그 열심이 오히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롬 10:3)는 말씀과 같이 열심히 믿는 신앙은 자기의 의를 세우게 되며 하나님의 의에 불복종하게 되어 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른다는 말은 하나님의 의에 원형과 본질이신 그리스도를 모른다는 뜻이다. 그리스도 그 분 자신이 하나님의 의가 된다면 누구에게 복종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사울 왕처럼 자신의 혼에 의한 판단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했던 것이다. 한국교회가 사울 왕처럼 열심히 있는 믿는 교회가 되지 않았으면 한다.

 

    그 이유는 로 10:4에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고 강조하고 있다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는 말을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열심의 마침이 되셨다는 말씀이 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자신이 하나님의 의가 되고 열심의 종지부를 찍었기 때문에 내가 하는 열심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이 된다.

 

       아직도 열심을 내는 신앙으로 예수를 믿고 있다면 구원과 아무런 관련이 없을 뿐만 아니라 기도 응답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내가 몇 시간 기도했다고 자기 의를 내세우거나 구원을 받기 위해 직분생활, 교회봉사, 선교헌금, 금식, 철야, 새벽기도를 내세우는 것이 믿음으로 여기고 있다.

어쩌면 예언자들이 ‘믿음이 부족하다’는 말을 제대로 한 것인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의를 믿지 않았다고 하는 뜻은 아닐 것이다. 이때까지 구원과 상관이 없는 구원과 거리가 먼 믿음의 행동을 해 온 것이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의로 믿는 믿음뿐인데 그 믿음을 열심히 믿는 신앙으로 성립하거나 인정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믿음의 원형과 본질은 하나님의 의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이며 그 분을 의로우신 분으로 믿는 믿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신앙의 근본을 올바르게 깨달아야 한다. 자기 의를 내세우는 열심히 믿는 신앙은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복종하지 않게 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는 뜻이다.

 

    강한 믿음을 요구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믿는 믿음이며 그 분이 하나님의 의에 본체가 되신다. 우리가 이루어야 할 율법의 행위에 대한 마침이 되어 주심과 동시에 믿는 자들에게 의가 되어 주신다. 따라서 로마서는 율법을 강조하는 교리책이 아니라 영적 지침서이며 복음의 설명도 있지만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책으로 간주해야 한다.

 

   기도를 해보긴 해보는데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하면 교회를 떠나거나 다른 곳으로 가버린다. 기도의 응답에 가장 중요한 조건이 무엇인가? 응답이기 이전에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으로 그것이 내 안에서 이미 이루어진 것인데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작업으로 여긴다면 이미 응답을 받은 것이 아닌가?

 

    목이 쉬도록 기도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나의 뜻이 관철되기를 원하는 것인가? 아니면 마치 어린 아이가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해주지 않으면 바닥에 누워서 발버둥 치며 악을 바락바락 쓰면서 해달라고 떼를 쓰는 것과 별만 차이가 없다. 이런 모습을 본 불신자들이 종교적인 기독교인들을 싫어하며 거리를 두는 것이다.

 

   데살로니가후서 1:11 사도 바울이 기도하는 목적을 분명히 제시하고 있다.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여기는 것이다. 우리를 왜 부르시는가? 뭐가 잘 났거나 쓸 만하거나 학벌이나 족보가 좋아서 부르신 것이 아니다. 모세를 부르신 것도 탁월한 지도자이거나 왕족이어서 아니면 미디안 광야에서 훈련을 쌓았기 때문에 부르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직접 봤기 때문에 그 분의 소명을 따른 것이다.

 

   그렇게 직접 봤지만 도망갈 궁리만 했고 요리조리 피해 보려고 별래별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잔머리를 굴렸던 모습을 성경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모세는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기를 거절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급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상 주심을 바라보는 신앙”(히 11:24~27)으로 여정을 걸어왔다.

 

   지금을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왜 기도를 하는가? 나를 불러 주신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겨 주심에 감사하며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는가? 이것을 모르고 있는 소명자들에게 알려줘야 하는 것이 바로 선이다. 이것을 기뻐하신다고 하면 그 기뻐하시는 그 분의 의도를 알고 선을 행해야 할 것이다.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려고 기도해야 한다. 무엇이 믿음의 역사인가? 누구든지 믿을 수 있는 것을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라고 전제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나의 혼속에 있는 세 난장이인 생각과 감정과 의지에 의해 믿는 것이 아니다. 혼으로 믿는 것은 성경에 요구하는 신앙의 근본이 아니다.

 

   내 안에 믿음의 존재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 자체 믿음인 것이다. 그 분을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요 6:29) 믿음의 역사는 반드시 하나님의 사랑이 전제 하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 없이는 믿음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믿음을 겸한 사랑(엡 6:23) 없이는 믿음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약 2:18, 20, 22)

 

    신앙의 왕도는 오직 한 길 뿐이다. 하나님의 의를 믿는 믿음이다.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 외에는 없다는 것이다. 바로 이 길이 좁은 길이며 좁은 문인 것이다. 어쩌면 그 길은 혼의 눈으로 보이지 않는 길로 오직 영의 세계가 열려야만 보이는 길이다. 이 길을 따라오라고 하면 따라 가기 싫다고 하여 다른 사람들이 몰려드는 길과 문으로 몰려가고 있다.

 

    태양을 멈추기 위해 집중해야 되는 것처럼 하나님을 향해 집중해야만 된다. 주변을 살피며 가는 길이 아니다. (여호수아 10장) 영의 세계를 열려져야 영이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이 길 말고 다른 길이 전혀 없다. 영의 세계를 열어주시고자 예수님께서 이 땅에 그리고 나의 내면세계에 내주하신 것이다. 그 분과 더불어 살아가지 않으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신 예수여! 만약 당신이 없었다면.......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 

 

 

필    자

프 로 필

이준호목사/창골산 칼럼니스트

ljh4183@hanmail.net

장로회신학대학교 대학원, 예장 통합 거룩한 빛 광성교회 협동목사
장로교연합신문 편집국장, 한국 성경본문연구원 원장
바이블 앤 라이프 대표 010-9600-5727 (카톡으로 문자 환영)
매주 목요일 오후 7시 바이블아카데미에서 성경공부 강의 중
지하철 2, 3 호선 을지로 3가역 10번 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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