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골산 칼럼 제1927호 / 절약하는 생활

작성시간12.10.02|조회수5 목록 댓글 0

창골산 칼럼 제1927호 / 절약하는 생활

 

  제192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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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약하는 생활

 

 

 

 

 

    요즘에는 너무 절약하며 살아도 흉이 되는 세상인 것도 같다. 나는 어려서부터 형제자매가 많아 넉넉하지 못하게 자란 탓에 절약하는 것이 몸에 배어 있다. 어려서 가난하게 자랐다 해서 모두가 어른이 되어서 절약하며 사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주위에서 보면 어려서 부잣집에서 풍족하게 자란 사람이 어른이 된 후에 쫄딱 망하여 공과금 낼 돈도 없이 살면서도 여전히 어렸을 때부터 쓰던 습관이 있어 쉽사리 절약하지 못하고 신용불량자가 되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다른 한 편 넉넉하면서도 어려서 가난함을 몸소 체험하며 살았던 탓에 자린고비처럼 절약만 하며 사는 자들도 꽤 있다. 둘 다 병폐이다. 절약과 소비는 적절히 해야 한다.

 

   요즘 우리나라에는 과소비가 유행처럼 번져나가고 있다. 전적으로 과소비 때문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오늘날 우리나라의 가계 빚은 위험수위에 도달했다고 뉴스에서는 연일 말하고 있다. 또한 명품 바람이 전염병처럼 번져나가 빚을 지면서까지 명품을 소유하려는 풍조가 만연해 있다고 염려한다. 하여튼 나라가 가계 빚으로 휘청거리는 판에 제발 좀 절약을 하여 빚을 줄여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오늘은 우리 교회의 절약생활에 대하여 말하고자 한다. 2012년 9월 2일, 우리 부부는 주일오후예배를 마치고 병문안을 가기로 했다. 우리 교회 어느 집사님의 남편이 어지럼증으로 길에서 쓰러져 많이 다쳐서 전북대학병원에 입원했다. 5시쯤 성도들을 대동하지 않고 단출하게 우리 부부만 가기로 했다. 구이쯤 가고 있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순천에 사는 내 친구의 남동생이었다.

 

“네가 웬일이니?”

“정읍에 문상을 왔다가 누나네 교회에 들렀다 가려고 왔어요.”

 

   처음으로 우리 교회를 찾아온 친구 동생이라서 헛걸음시킬 수가 없었다. 우리는 차를 돌려 교회로 왔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고 했더니 그는 우리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 교회의 이곳저곳을 구경했노라고 말했다. 사택으로 들어가 과일을 먹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에어컨 설비업자라서인지 사택에 들어와서 둘러보더니 말했다.

 

  “교회당에는 에어컨이 있던데 사택에는 없네요.” 내가 말했다.“에어컨 없이도 올 여름을 잘만 났는걸.”“너무 알뜰한 사모님 때문에 목사님이 고생이 많으시겠네요. 여름에 말씀 준비하다가 더우면 에어컨 시원하게 틀어 더위를 식혀야 할 텐데요.”“아냐. 사실 나보다 목사님이 더 절약한단다.”목사님이 말했다.“더울 때 차가운 지하수 물로 샤워하고 나면 아주 시원합니다. 올해처럼 더웠어도 에어컨 생각 안 나던데요.”

 

    정말 못 말릴 부부라는 듯이 번갈아보며 빙긋이 웃고 나서 말했다.“교회를 돌아봤더니 구석구석 목사님의 꼼꼼한 손길이 안 미친 곳이 없데요. 정말 아름다운 교회인 것 같아요. 곳곳에 따뜻함이 배어 있어요.”“뭐, 시골 교회 다 그렇지.”

 

       “교회가 참 푸근한 느낌이 들어요. 모든 게 목사님과 성도님들이 손수 꾸민 것이 눈에 보여요. 부엌이며, 식당 꾸며 놓은 것을 보니 훈훈한 마음이 느껴져요. 특히 교회의 나무 난로가 마음에 드네요.”그가 이번에 온 것은 사실은 나무 난로를 보러 온 것이었다. 작년에 순천에 사는 친구 집에 놀러갔다. 닭을 키우는 내 친구가 석유 값이 비싸서 양계장에 난방비가 너무 많이 들어 이익이 별로 없다고 푸념을 했다.

 

   목사님이 나무 난로를 권했다. 겨울에는 30일 정도 키우는 닭의 양계장에 드는 기름 값이 1,000만 원 정도 든다고 했다. 나무 할 일이 걱정이긴 하지만 한 달에 500만 원 정도 절약을 할 수 있다면 나무 난로를 놓겠다고 하더니 곧 나무 난로를 설치했다. 그 후부터 난방비를 절약하므로 수입이 많이 늘었다고 친구는 일 년 동안 희희낙락하였다.

 

    작년에 친구네 집에 나무 난로를 설치하는 날이었다. 마침 서울에서 보일러와 에어컨 사업을 하는 바로 그 남동생이 쉬러 누나네 집에 와 있었다. 나무 난로를 설치하면 나무 하랴 밤에도 불을 안 꺼트리고 때랴 고생이 많을 텐데 뭐 하러 고생을 사서 하느냐고 불평을 했다. 누나 고생하며 사는 것이 마음 아파서 그랬을 것이다. 그는 고생을 많이 하고 살아온 누나를 애틋하게 생각하는 남동생이었다.

 

    그 후에 그가 남원에 폐기된 공장을 사서 리모델링을 하여 여동생 부부가 관리하며 살게 되었다. 거실이 매우 넓어 여름에는 시원해서 살기 좋은데 겨울에는 추워서 살 일이 걱정이라고 여동생이 말했다. 내 친구는 나무 난로가 사용해보니 좋다고 거실에 나무 난로를 설치하라고 했다.

 

    그러나 남동생은 반대했다. 세 남매가 그 일로 오랫동안 티격태격하더니 결국 두 자매가 이겼는지 직접 우리 교회에 와서 나무 난로를 살펴보고자 했던 모양이었다. 다 살펴보고 난 결론으로 자기네 집에도 나무 난로가 적격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10월 중순쯤에 나무 난로를 설치하는데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우리 교회에 나무 난로를 설치하게 된 까닭은 바로 겨울의 추위 때문이었다. 우리가 10여 년 전에 이 교회에 부임하여 보니 교회당 건물의 단열설비가 부실했다. 지을 때 부족한 예산으로 짓다 보니 벽은 얇고 천장은 얇으며 높고 유리창은 홑창이었다. 그나마 바닥은 마루였다.

 

   그러니 겨울이 되면 유리창 틈으로, 벽으로, 천장에서, 바닥의 틈새로 겨울의 매서운 바람이 솔솔 침입했다. 겨울에는 너무 추워서 예배 시간에 성도들이 예배에 집중하지를 못했다. 나이든 분들은 추위를 많이 타신다. 어서 예배가 끝나 따뜻한 아랫목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서 예배가 빨리 끝나기만을 바라는 표정들이었다.

 

   그리하여 바로 다음 해 봄에 단열설비를 보완했다. 벽에 한 겹 더 스티로폼을 넣고 벽돌로 쌓고, 유리창은 이중창으로 하고, 마루를 뜯어내고 바닥을 흙으로 채운 후 시멘트로 바르고 보일러 설비를 하고 장판을 깔았다. 그러나 재정이 열악한 시골 교회 형편에 보일러를 땔 수 없었다.

 

    그 때 떠오른 아이디어가 나무 난로를 설치하는 것이었다. 목사님이 손수 나무 난로를 제작하였다. 고물상에 가서 중고 쇠로 된 커다란 파이프를 사다가 필요한 구멍을 뚫고 용접을 하여 난로를 제작했다. 벽을 뚫고 아궁이를 만들어 불은 밖에서 땐다. 교회당 뒤쪽 귀퉁이에 난로를 놓았다. 겨울에는 난로 하나만 피워도 교회당 안이 후끈하여 성도님들이 두꺼운 겉옷을 벗는다.

 

   ‘스스로 돕는 자를 하늘이 돕는다’는 말이 있다. 나무 난로를 설치하고 나서 나무를 어떻게 조달할 것인가 고민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근래에 우리나라의 산에는 나무가 너무 우거져서 산림조합에서는 매년 번갈아가며 간벌을 한다. 간벌한 지 일 년쯤 된 나무는 잘 말라 있다. 겨울에 산에 가서 베어 놓은 나무를 가져다 땔 수 있다. 그러므로 나무를 구하기는 쉽다. 하지만 나무를 산에서 끌어오는 것이 힘이 든다. 힘 안 들고 절약할 수는 없다. 일하기 싫은 자는 나무 난로를 설치할 수 없다. 몇몇 교회에서는 나무 난로를 부러워하면서도 나무를 해댈 사람이 없으므로 나무 난로를 설치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 교회는 교회에 나무 난로가 있고, 사택에는 나무 보일러가 있다. 식당 방에만 기름보일러가 설치되어 있다. 일 년에 난방비 50만원이면 충분하다. 목회도 형편에 맞게 해야 한다. 시골 교회에는 자녀들의 용돈으로 살아가는 노인 성도들이 주를 이룬다. 그들은 자녀들이 주는 용돈에서 일 만원, 이 만원의 십일조를 한다. 수입이 없는 성도들이 많으니 교회의 재정은 빠듯하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절약하는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시골 교회 목회자 가족들은 절약하는 생활이 몸에 배어 있다. 15년 전쯤에 우리가 작은 시골 교회에서 평신도로 있을 때 그 교회 목사님 아들이 청년이었는데 함께 레스토랑에 간 일이 있다. 그는 그 날 처음으로 돈까스라는 걸 먹어 보았다고 말했다.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 

 

 

 필      자

 양애옥 사모

정읍시 옹동면 비봉리 산성교회 

 (창골산 칼럼니스트)

 ao-ya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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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골산☆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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