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28호 본 메일은 님께서 카페가입시 동의 하였기에 발송되었으며 수신을 원치 않으시면 카페 내정보에서 수정해 주세요 | |||||||||
지난번에 그리스도 안에서 확정된 내용을 언급했다. 이번에 에베소서 1:15에서 시작되는 사도 바울의 기도에서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하는 네 가지가 있다. 사도 바울이 왜 기도했어야 했는지를 밝히는 중요한 내용의 편지로 주님 안에서 확정되어진 우리의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듣고 감사하기를 마지아니하고 기도한다는 것이다.
17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셨다”는 것이다. 왜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야 하는가? 그것도 지혜와 계시의 영을 받아서 하나님을 알아야만 하는가?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이며 사람은 하나님을 담는 그릇으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
하나님은 사람 안에 들어오시기 위해 사람 안에 영을 집어넣은 것이다. (창 2:7) 우리 안에 들어오신 하나님을 알아낸다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다. 아무리 우리의 인식 차원에서 하나님을 발견한다는 것이 만만치 않는 것이다. 성경을 읽어도 영의 차원에서 이해하지 않고 혼의 차원에서 이해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혼적으로 발견하게 된다.
그렇게 만나고 발견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여긴다면 죄송하지만 헛 다리를 짚는 것이다. 그렇게 말씀을 이해하고 풀어내는 것이 창세기 3장에 나오는 뱀(나하쉬 vx'N")의 사명인 것이다. 영으로 전달되어지는 말씀을 혼으로 이해하고 땅의 지식으로 풀어내는 것이 뱀의 역할이고 사탄의 방법인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영으로 이해하려고 하다가도 혼으로 이해하고 인식하는 차원에서 머물게 되는 것이 인간의 습성이다. 성경을 인간의 혼적이며 인식의 잣대로 이해하고 깨달으려고 하는 것이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영의 세계와 영적인 차원에서 안다는 것이 내 안에서 존재하시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한 몸이 되어 깨닫는 것이다.
오십년간 부부로서 오랫동안 살아왔지만 부부 싸움을 한 후 찾아와서 하는 말이 살다가 살다가 이 양반 속을 알 수 없다는 말처럼 하나님과 함께 오랜 세월을 동행 했지만 하나님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오래 믿었다고 해서 하나님을 잘 아는 것이 아니다. 얼마나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문제다. 18절에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하나님께서 왜 당신을 부르시고 있는가? 불려진 이유를 모르고 있는가? 아니면 부르신 것을 외면하고 살아가고 있는가? 과거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고 난 뒤 숨기고 있던 분들에게 “왜 하나님의 부르심에 거역하십니까?” 라는 질문에 자신이 하나님께 서원을 숨겨왔는데 지적되어 소명의 불을 일깨운 몇 사람이 기억이 난다.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늘의 비밀을 알려주신 것은 자신에게 이득이 되기 때문이 아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 10:10) 우리의 삶이 풍성하게 되기 위함인데도 그 사실을 모르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마태복음 5장 산상수훈에 언급된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을 받을 것이요.”라는 말씀은 우리가 온유해질 것이라는 전제 하에 주신 말씀이다. 그러나 짐승인 우리가 온유해 질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한데 왜 이런 말씀을 주셨을까? 인간 스스로나 자의반, 타의반이라고 할지라도 온유해 질수 없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배우라”(마 11:29)고 하신 말씀에서 온유와 겸손 그 자체인 예수님에게 배워야 할 온유와 겸손이 무엇인가? 그리고 배워서 나오는 온유와 겸손이라면 어떻게 배워야 하는가? 인간의 노력으로 온유와 겸손이 나오는 것이 아닌 줄 알면서 온유와 겸손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짐승인 우리가 짐승으로 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사람들마다 짐승의 띠를 갖고 태어난 운명을 거부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람은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과 같다”(시편 49:20)에 강조하고 있듯이 사람은 아무리 공부를 하고 지식을 쌓아도 짐승이다. 아무리 돈과 명예와 권력으로 짐승의 굴레를 벗어나려고 해도 안 된다.
“온유”(프라에이스 praei/j)라는 단어는 “짐승을 철저하게 길들여지는 상태”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데 하나님께로부터 철저하게 길들여져야 만이 하나님의 기업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과 나의 형상이 하나가 되어지는 것도 온유한 상태가 되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는 의미다.
기업이란 단어만 나오면 이 땅에서는 기업하는 분들에게 주는 말씀으로 착각하고 있는데 그런 의미가 아니다. 기업의 영광은 이 땅에서 사업을 잘해 많은 소득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로 인해 얻어지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온유한 자는 땅이 기업을 얻는 다는 것은 마음의 바탕에 하나님의 생명이 온전히 역사하는 것을 뜻한다.
사람 마음 바탕에 하나님의 임재하심 가운데 주님과 연합되어 온전한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신 기업이라 할 수 있다. 주님의 계획에 따라 우리가 확정(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어졌으며(11절) 부르심의 소망에 의하여 풍성한 삶을 누리는 우리의 본분이다.
또한 우리의 기업의 보증이 되어주시고자 진리의 말씀, 구원의 복음을 듣고 약속의 성령으로 인 치심을 받으며 얻으신 것에 속량하심에 감사하여 찬송과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거저 주시는 바에 대해(6) 은혜의 영광을 찬송해야 하며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창세)전부터 바라던 것을 영광의 찬송을 불러야 한다.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들이 성경 안에 얼마나 많겠는가? 사도 바울이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간절히 촉구하는 내용의 말씀을 토대로 알아야 하며 그 말씀대로 살아가기를 소망하고 있다. 다음 글에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을 얼마나 위대한지 살펴보면서 그 능력의 위력에 역사하심을 검토하기로 하자.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