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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대한 사모함이 기독교인들에게만 있다고 하면 착각이다. 고대 그리스 종교나 페르시아 종교에서도 십자가가 있었으며 샤머니즘 안에도 십자가 표식을 하는 종교도 있다. 성경의 십자가는 신앙의 마크라고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표출한 것이며 분신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이 서려 있다. 주님께서 죽으심은 그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있는 명백한 사실이다. 그런데 주님의 죽으심만 기억하거나 숭상한다면 그것이 바로 우상이 되는 것이다. 주님의 죽으심의 분명한 목적과 이유는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과 함께 죽으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십자가의 죽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임이요, 나의 죽음인 것이다.
이 죽음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인정하지만 거기에 나의 죽음을 포함시킬 수 없다고 항변할 수 있을 것이다. 신성한 예수의 죽음에 부정한 나의 죽음을 함께 동등한 선상에 놓게 할 수 없다고 할 것이다. 인간적인 측면에서는 얼마든지 거론할 수 있는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예수의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사해졌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길을 만드셨다는 것에 대해서 절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 근거한 십자가만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통로다. 기독교와 가톨릭까지 십자가를 상징으로 마크로 여기고 있는 실정이다.
심지어 신앙인들의 귀걸이, 목걸이, 차 안에나 집집마다 장식용으로 설치하고 십자가를 묵상하고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표시할 때가 있다. 만약에 기독교에서 십자가를 빼면 과연 무엇이 남아 있을까? 기독교의 존재성에 아주 큰 타격을 입을 것이다. 십자가가 없다면 그 다음에 일어나는 부활은 너무나 허무한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가 내세우는 십자가의 죽음을 헛되이 하는 경향이 너무나 허다하여 기독교가 개독교로 전락하고 있다. 성도들이 열심히 전도를 해서 갖다 놓은 영혼들을 일부 목회자들이 다 잡아먹고 있으니 개탄할 노릇이다. 영으로 살려 놓으면 영으로 양육해야 하는데 도루아미타불 육으로 전환시켜 버리고 만다.
어느 사역자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눈물 밖에 나오지 않는다고 한 말 가운데 주님께서 내딛을 교회가 아주 극소수라는 것이다. 겉은 진짜 같은 목사인데 속은 얼마나 가짜 목사가 많은지 한숨 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평신도들이 물질과 시간을 내서 전도해 살려낸 영혼들을 더욱 더 장성한 분량으로 키워내지 못하고 오히려 시들시들 죽여 버리는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이러한 행동을 하면서 십자가를 흔들고 다니지 마라. 오히려 영혼을 죽이고 있는 짓을 하고 있다면 목회자라는 직분을 과감히 버려라. 진정 목회자 되지 말았어야 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의 죽음을 헛되이 만들어 버리는 행위는 예수님을 다시 못 박는 정도가 아니라 그 이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시편 23편에 나오는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한다는 말씀 속에서 십자가의 개념과 의미를 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십자가의 정신이 내 속에 없다면 그리고 가슴에 십자가가 달려 있지 않다면 십자가를 흔들고 다니지 마라. 에스겔 37:17에 두 막대기가 서로 연합하여 하나가 되리라는 말씀은 십자가로 전환된다는 의미다.
예수의 아픔이 내 아픔이요, 예수의 죽음이 내 죽음이라는 의미 속에 주님 안에 들어가지 않으면 십자가의 본질과 원형을 알아낼 수 없는 것이다. 영의 말씀을 사람의 지식과 이성의 판단으로 깨달을 수 없는데도 알고 있는 척 하는 것은 영으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육과 정신으로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은 하나님의 구속사를 완전히 망쳐버리는 것이며 예수의 죽음을 헛되이 만들어 버리는 꼴이 된다. 마치 어린 아이가 장난감을 갖고 놀다가 싫증이 나서 팽개치는 모습을 우리는 주위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십자가는 내가 갖고 노는 장난감이 아니다. 액세서리도 아니고 장식용도 아니다.
나의 골수에 사무치는 삶이 되어야 하고 항상 뼈저리게 감동 속에 붙들고 나가야 하는 목표요, 마지막 결승점이 되어야 한다. 십자가 위에 온전한 구원을 이루신 완성된 은혜를 내가 요리를 하거나 개발을 해서 어떤 사상을 펼치거나 행동을 전개할 필요가 전혀 없다. 그런데 현재 기독교가 얼마나 많은 이벤트와 사상들을 만들어 내고 있는가?
예수의 죽음을 헛되이 만들어 내는 행위와 말들이 얼마나 무수한지 얼마 전 인천에서 가장 큰 교회가 방문한 적이 있다. 금요일 구역장들이 모임 후인 것 같은데 잠시 카페에 몰려들더니 수많은 여성 직분자들이 한꺼번에 쏟아내는 수다들의 내용이 하나로 뭉쳐 빠져나가는 현상을 보면서 들려온 말씀은 영으로 훈련을 받고 난 뒤 육으로 빠져나가고 있다는 음성이었다. 얼마나 끔찍스러운 장면이었는지 모른다.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를 먹고 죽은 이스라엘 민족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죽어가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를 먹으면 죽지 않는다고 했는데(요 6:50) 왜 죽었는지 설교시간에 질문하면 묵묵부답이다. 목사의 설교를 듣고 육의 생각을 하게 되면 즉시 사망에 이르는 것인데(롬 8:5, 6) 딴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면 듣고 나와서 육의 생각과 말을 쏟아낼 때 그 즉시 죽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수많은 고통과 아픔을 감수하며 물과 피를 흘리며 죽으신 예수의 죽음을 불쌍하게 여기지만 하지 그 아픔이 내 아픔이요, 그 고통이 내 고통으로 경험하지 못하니 예수의 죽음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이다. 말씀을 들으면서 내 속에 있는 짐승의 속성을 죽이지 못하면, 아니 죽여 달라고 해야 한다.
금식한다고 짐승의 속성이 죽어지지 않는다. 다만 죽어진 것처럼 보일 뿐, 허기가 져서 성질이 나오지 않고 있을 뿐, 몇 숟가락 밥만 들어가면 본래 성질이 또 나오게 된다.
하나님의 성품에 도달한다는 것이 내 성질을 바꾸는 차원이 아니다. 주님과 내 몸이 연합하여 하나가 되지 못하면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거하는 차원이 되지 않으면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사건이다.
십자가에서 주님과 덜 죽어서 아직도 나의 옛 사람의 성격이 나온다면 십자가에서 당장 죽어야 한다. 목사는 나무 목(木) 죽을 사(死) 십자가라는 나무에 죽어야 되는 존재다. 죽어진 것처럼 보일 뿐 아직 덜 죽어서 고통에 의하여 고함만 치는 것이다. 사실 지난 번에 언급한 내용이지만 “죽음”이란 히브리적인 의미로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 하나님께서 정해진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 죽임이다.
아직도 도달되지 않았는데 도달된 것처럼 천국을 갔다 왔다고 천국과 지옥 간증을 하는데 겨우 천국 문 앞마당이나 지옥 문 앞마당 정도에 갔다 온 정도 밖에 안 된다. 갔다 가 다 보고 온 것처럼 얘기를 하니 얼마나 한심스러운지, 아무리 하나님의 손을 잡았을 정도로 체험을 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너무나 위험천만한 간증을 서슴지 않고 한다면 하나님 앞에 가서 무엇이라고 변명하려는지 사도 바울은 삼층 천을 갔다 왔지만 그 어느 곳에도 천국을 갔다 왔다고 언급한 내용이 없다는 것이다.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는 사도 바울은 세상의 지식과 경험을 자신의 배설물로 여길 만큼 내세우지 않았다는 것을 명심하라.
아무리 십자가에 대해서 말씀을 증거 하고 십자가형으로 된 장식들을 달고 다니며 모으고 탄복할 만큼 십자가를 만든다고 할지라도 십자가의 정신인 화합, 평화, 화목이 되지 않고 불협화음과 분열을 일으켜 내분이 일어나게 한다면 죄송하지만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간 것이다.
앞에서는 십자가를 얘기하면서 뒤에서는 십자가를 빌미로 돈을 뜯어내거나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통해 이상한 하나님을 소개하는 짓을 하고 있다면 십자가의 죽음을 헛되이 하는 것이다. 양의 탈을 뒤집어쓰고 나타나는 이리는 하나님을 만나게 해 준답시고 가로 막아 하나님의 것을 탈취해 버리는 존재들이 너무나 많다.
하나님의 이름 빙자하거나 예언을 해 준답시고 하나님의 명칭을 거들먹거리며 자신의 주머니를 채우기 위한 언행을 일삼는 무리들이 얼마나 많은지 이들로 인해 기독교가 개독교로 변하고 목사가 아닌 먹사로 불리는 존재들 가운데 그 어느 누가 하나님 앞에 떳떳하게 설 수 있는지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십자가의 죽음을 헛되게 하는 존재들이 반드시 악행이 드러난 자들만의 것이 아니다. 입이나 겉으로는 십자가를 말하지만 속과 깊은 내면에는 십자가가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영달만 사수하려는 모습만 보일 뿐, 사도 바울처럼 십자가만 자랑할 수 있는 내면이 안개로 덮여 보이지 않는다면 십자가의 죽음을 헛되게 하는 것이다.
십자가만 드러나고 나는 온데간데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 마치 에녹(하노크)이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그의 몸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만 드러나고 에녹은 그 뒤에 감춰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의미다. 이 글을 쓰는 필자도 나를 드러낼 때가 너무나 많다. 오직 그 분만 드러나는, 그 분만 존재하게 되는 삶이 절실하다.
십자가의 죽음 헛되지 않게 하는 것은 마치 삭개오 앞에 키가 큰 서 있는 것처럼 내가 삭개오 앞을 가로 막아 삭개오 나무에 올라가게 만드는 형국을 양산시키는 것이다. 삭개오와 같은 친구들이 올라갈 수 있는 나무 역할을 할 수만 있다면 그로 인해 예수님을 만나는 역사로 그 집에 거하는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기를 바란다.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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