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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시드니에서 온 이백 마흔 세 번째 편지
예수님께서 한 번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참 좋으신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이런 이야기를 소개해 주셨는데 그 내용은 우리가 잘 아는 탕자의 비유입니다.
어느 부자가 살았습니다. 그 부자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작은 아들이 아버지 에게 자신이 받을 유산을 미리 달라고 요구합니다. 유산이란 부모님께서 돌아가신 후에나 자식들이 받을 수 있는 것인데 아버지에게 유산을 요구했다는 것은 이 땅에서의 아버지의 존재 자체를 무시하는 것으로 이 아들은 불효자 중 불효자입니다.
이 탕자는 나중에나 받을 수 있는 유산을 아버지에게 강탈하듯이 빼앗고 머나 먼 땅으로 가버렸습니다. 탕자는 그곳에 가서 자기 멋대로 살다 얼마 안 가서 빈털터리가 되어 그만 거지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거기서 탕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유대인들이 하지 않는 돼지 치는 일이었습니다. 밑바닥 인생을 전전하며 탕자는 돼지들이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려 하지만 그마저도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제서야 탕자는 아버지의 품을 그리워하며 자신의 잘못을 뉘우칩니다. 좋으신 아버지의 사랑을 절실히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회개의 길로 돌아 서며 아버지의 품으로 탕자는 돌아 옵니다.
좋으신 아버지는 그 탕자를 잊지 못하시고 어제도 오늘도 돌아 오기만을 학수고대하며 기다리고 계십니다. 동구 밖에 까지 나가 혹시나 오늘은 아들이 돌아오려나 하고 목이 빠져라 기다리는데 멀리서 초라한 행색을 한 사람이 동네 안으로 들어 오는 것을 발견합니다. 아버지는 직감으로 그 걸인이 자신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고 체면도 불사하고 그에게로 달려갑니다. 그 걸인이 자신의 잃어 버렸던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것을 확인한 순간 아버지는 주변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더러운 옷과 악취 나는 냄새에도 괘의치 않고 반갑게 목을 안고 입을 맞춥니다.
좋으신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목욕을 시키고 제일 좋은 옷으로 내어다가 입혔습니다. 돌아온 아들의 손에 아버지는 가락지를 끼워줌으로 돌아온 아들에게 자신의 아들임을 다시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풀며 아들의 돌아옴을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뻐했습니다. 이 탕자의 이야기에서 예수님께서는 특별히 좋으신 아버지로 하나님을 이렇게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좋으신 아버지는 아들 자체를 기뻐합니다. 좋으신 아버지는 아들이 성공했다고 해서 좋아하고 실패했다고 해서 아들을 미워하는 그런 아버지가 아닙니다. 바로 좋으신 아버지란 아들 자체를 기뻐했기 때문에 좋으신 아버지인 것입니다. 우리가 성공했을 때만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고 우리가 실패했을 때에는 우리를 미워하신다면 하나님 앞에 설 사람은 이 땅에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실패와 성공과는 상관 없이 우리를 기뻐하시는 참 좋으신 우리의 아버지시인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좋으신 아버지는 그 아들이 돌아오기를 끝없이 기다려 줍니다. 한없이 오래 오래 기다려 주십니다. 며칠, 몇 달, 몇 년만 기다리고 마시는 그런 아버지가 아니라 아들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리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서 잘 되며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에 잘되기를 그렇게 한 없이 한 없이 기다려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 이십니다.
우리의 좋으신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 올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다 갖추어 놓고 계시는 아버지이십니다. 미리 준비했다가 돌아오기가 무섭게 다 베풀어 주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이런 아버지가 바로 우리들의 아버지 곧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다 준비하여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돌아오기만 해라 내가 다 부어 주시겠다.’ 그렇게 오늘도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렇게 좋으신 아버지도 나 자신이 좋으신 아버지로 깨달았을 때만이 나에게 해당됩니다. 탕자가 배고픔과 외로움과 고달픔 속에서 아버지가 참 좋으신 아버지였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리고 그가 아버지 품으로 돌아 왔을 때, 탕자에게 그 아버지는 좋으신 아버지였던 것입니다. 만약 탕자가 그 좋은 아버지의 사랑을 잊어 버리고 계속 자기의 길을 갔다면 그 좋으신 아버지도 그냥 한 탕자의 아버지로 밖에 남아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좋으신 아버지에게 또 한 명의 아들이 있습니다. 바로 탕자의 형입니다. 이 아들은 아버지가 좋으신 아버지가 아니라 무서운 아버지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자기 멋대로 돈을 챙겨 집을 나간 아들을 기다리시는 아버지가 아니라 영원히 자식과의 관계를 끊어 버리는 그런 아버지이기를 바랬습니다. 아들이 돌아와도 과거의 잘못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고 아들을 받아들이지 않으시는 매정한 아버지이기를 원했습니다. 설령 받아들이신다 해도 그 죄에 대한 합당한 벌을 내리시는 그러한 심판의 아버지이기를 바랬습니다.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그 분이 참 좋으신 하나님 임을 깨닫고, 하나님의 품 안에 돌아왔을 때만이 이 하나님께서 좋으신 하나님이 되십니다. 그렇지 않고 내가 방탕한 길로, 죄악 된 길로 고집하며 계속 살아갈 때는 이 하나님은 그냥 무서운 하나님으로 그리고 심판의 하나님으로 밖에 계시지 않을 것입니다.
혹시 우리들도 큰 아들처럼 나에게만 좋으신 하나님이 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무서운 하나님으로 남아 주기를 바라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는 것을 꺼려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만 하나님의 사랑을 독차지 하겠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한 하나님이십니다.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아버지 품으로 돌아 오기만 하면 좋으신 하나님이 되지만 아버지 품으로 돌아 오지 않는 사람에게는 무서운 하나님으로 남아 계실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키우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사1: 18-20)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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