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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봄에 텃밭에 수수를 심었다. 근래에 수수가 사람의 몸에 좋다고 방송에 나왔노라면서 전주에 사는 형님이 작년에 나에게 수수를 구할 수 없느냐고 물었더랬다. 그래서 수수를 심은 건 아니고 나는 원래 잡곡을 좋아한다. 특히 수수, 조, 기장을 넣은 밥을 좋아한다. 그래서 텃밭에 수수를 꽤 많이 심었다.
수수밥, 수수부꾸미, 수수경단을 만들어 먹어야겠다고 생각하고서. 수수를 많이 심어 놓고 가을이 되면 풍성한 양을 거두리라 기대하면서 마음이 부풀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진짜 농부가 아닌 우리 부부가 작년에는 수수를 늦게 심어서 겨우 종자할 정도의 수수알갱이만을 추수했던 터라 올해에는 일찍 심느라고 한 것이 너무 일찍 심었다. 가을 초입이 되자 다른 사람의 밭에 있는 수수는 이삭이 올라오지도 않았는데 우리 밭의 수수는 익어서 고개를 숙이는 것들이 눈에 띄게 되었다.
며칠 후에 수수를 베러 가보니 고개를 숙인 수수 알갱이를 익어가는 윗부분에서부터 새들이 쪼아 먹었다. 익는 족족 새들은 우리 밭에 날아와서 수수를 실컷 포식했다. 새들은 밭 옆의 숲에 있는 나뭇가지에 앉아 알갱이가 태반이나 빈 수수를 베고 있는 우리를 조롱하듯이, 혹은 경계하듯이 지절거렸다. “수수는 우리 거야, 수수는 우리 거야”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얌체들 같으니라고, 나는 돌멩이를 던져 새들을 멀리 쫓아버렸다. 하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경작할 능력을 안 주셨으니 인간이 경작해놓은 것을 먹으라고 허락하신 게 아닐까 생각하며 싱겁게 웃었다.
새가 먹고 남은 나머지를 조금 수확하면서 나는 예수님께서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6:26)”고 가르치신 장면이 생각났다. 예수님께서는 또 들의 백합화를 예로 들어 말씀하시고서 사람들에게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마6:30~31)”고 경계하셨다.
그러나 우리의 삶 속에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살기는 쉽지 않다. 성경 속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하여 모세를 따라 가나안을 향해 나아가면서 때로는 목이 마르다, 고기가 먹고 싶다, 왜 이리 길은 거칠고 험한가 하면서 불평하고 원망하고 모세와 하나님께 대항하기도 했다.
나는 성경 속의 인물들 가운데서 야곱과 요셉을 대조적인 면에서 둘 다 좋아한다. 젊은 시절의 야곱에게서는 나에게서도 발견되는 작은 분량의 믿음으로 좌충우돌하며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자기의 경험과 지식으로 헤쳐 나가려는 저급한 신앙의 삶을 통해 나의 부족한 모습에 대한 위안을 삼곤 한다. 가끔은 하나님께 떼를 쓰듯 하는 모습이 나 자신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버리지 않으시고 그의 부족함 가운데서도 그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그를 조금씩 성화시켜 나가시는 것에 위로를 받는다. 반면에 요셉은 그가 형들의 시기로 애굽에 종으로 팔려가 종살이를 할 때나 그곳에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혀 지내면서도 근심하거나 염려하지 않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의뢰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에게도 원망하지 않고 묵묵히 자기의 할 도리를 다하는 모습에서 감명을 받으며 나의 신앙의 본보기로 삼고 싶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성도들의 삶을 살펴보면 양면성이 있는 것 같다. 젊은 시절의 야곱과 요셉의 신앙의 면면들이 교차되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나는 주변의 어느 누구에게서도 온전히 요셉의 성품을 닮은 사람을 발견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예수님의 성품을 닮은 사람을 만나기는 더욱 희귀한 일이다.
사람은 대개 자기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는 잘 보는 법이다. 어쩌면 그것이 인간으로서는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안 보이는 것이 자기의 눈이 아닌가. 우리의 육신의 눈은 대체로 상대편을 바라보도록 만들어져 있다. 그러나 영의 눈은 자기 자신의 내면을 더 잘 바라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신의 눈이 아니라 영의 눈으로 보는 사람이 된다면 좋으리라.
“너희는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마6:34상)”는 성경을 읽으면서 맞는 말이다, 싶으면서도 실제 삶 속에서는 그렇지 못한 면이 많이 있음을 고백한다. 대학을 졸업한지도 수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비정규직을 전전하는 딸과 진로의 방향을 잘못 정해 대학을 자퇴하고 이제 제대하면 진로를 어떻게 해야 할지 정하지 못한 군인간 아들에 대한 일들이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려야지 하다가도 가끔 불끈하고 걱정이 솟구친다.
남편은 전혀 염려가 안 된다는데 왜 나는 온전히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는 걸까 하면서 내가 믿음이 부족해서일까 자문해본다. 사실 자녀들 문제에 있어서 아버지들은 어머니들보다 훨씬 더 대범한 것 같다. 아니, 여러 가지 삶의 문제들을 대하는 방식에 있어서 부부 중 남편들이 아내들에 비해서 염려를 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아니면 사람의 성격 차이일까, 혹은 믿음의 분량 차이일까.
어느 장로님과 권사님 부부가 있다. 장로님이 60대에 사업의 큰 실패로 빚을 많이 지게 되었다. 10여 년 동안은 혼자서 어떻게든 해결해 보려고 안간힘을 썼는데 오히려 빚만 눈덩이처럼 커졌다. 70대 초에서야 아내가 알게 되었고 자녀들이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자녀들이 십시일반으로 매 달 돈을 거두어서 빚을 갚아나가고 있다.
자녀들의 불만이 없을 수 없다. 남편과 자식들 사이에서 아내인 권사님은 늘 그 문제로 근심하고 염려한다. 그러나 정작 일을 만든 장본인인 남편은 천하태평이다. 속은 어떨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겉으로는 아무 염려도 걱정도 하지 않고 살고 있으니 아내와 자녀와 목회자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가 크게 빚져서 생활이 어려운 줄을 알지 못한다. 오죽했으면 친척 누님이 되는 어느 분이 싱글싱글 웃으며 전도하는 그에게 “자네는 그렇게 빚을 많이 지고도 무엇이 그리 좋아서 싱글거리는가?”라고 핀잔을 하기도 했다.
어느 성도님은 젊어서 노후 준비를 못했다. 이제 나이는 들고 힘이 없어 노동일을 할 수도 없고 공장에 가서 일을 할 수도 없다. 60대 후반에 이른 그는 사무직으로 취직할 수도 없다. 그동안 동생들의 도움으로 살아왔는데 이제 동생들도 더 이상 도울 수 없노라고 통고를 했다. 이곳저곳 이력서를 넣었으나 힘이 덜 드는 곳에서는 오라 하지 않고 오라는 곳에 가보니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힘든 일뿐이었다. 그를 바라보는 나의 마음에는 걱정의 구름이 일어난다.
목회를 하노라면 성도들 가운데 이러저러한 이유로 어려움에 처한 성도들이 눈에 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도하면서 다방면으로 그의 어려움을 헤쳐 나갈 길을 모색해본다. 어려움에 처한 당사자나 그를 도와야 하는 목회자의 입장에서 마태복음 6장 25~34절의 말씀을 묵상할 때 마음이 무겁다.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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