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골산 칼럼 제1987호 / 말 ‧ 말 ‧ 말

작성시간12.12.11|조회수11 목록 댓글 0

창골산 칼럼 제1987호 / 말 ‧ 말 ‧ 말

                 

 

  제198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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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 ‧ 말 ‧ 말

 

 

 

 

 

   말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만 주신 특별한 은총의 산물이다. 물론 어떤 언어학자들은 동물에게도 그들 나름의 언어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인간의 의사소통과 같은 종류의 언어는 아니다.인간의 삶에서 언어생활이 차지하는 중요성이 큰 만큼, 언어로 인한 폐해 또한 크다. 말 한마디로 사람을 죽이고 살린다는 말이 있다. 특히,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언어생활은 아주 중요하다. 그리하여 성경에는 말에 관한 내용이 많이 있다.

 

   교회 안에서 성도들 간에 말로 인하여 빚어지는 일들이 많으므로 우리 교회목사님은 종종 말에 관한 설교를 한다. 의도적이든 의도적이 아니든 말로 다른 성도를 실족케 하는 일이 가끔 일어난다.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눅 17:1)”라고 했다. 또한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약 3:2)”는 말도 있다. 확실히 말을 많이 하는 자는 실수가 많다. 말을 줄이면 실수도 줄일 수 있다.

 

   어느 교회의 사모님은 추수감사절 찬양드림에 나가려고 성도들에게 율동을 가르쳤다. 대부분이 70대, 80대인 성도들은 박자감도 없고 기억력도 부족하여 몇 번을 연습해도 진전이 없었다. 드디어 찬양의 날이 다가왔다. 주일오전예배시간에 목사님이 광고했다. “오늘은 점심식사를 마치고 연습을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그 말에 이어 사모님이 방정맞게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연습하면 뭘 해. 아무리 연습해도 그게 그건데, 대충 하지 뭐.” 바로 그 때 곁에 앉았던 50대 성도가 그 말을 듣고 얼굴색이 변했다. 그 성도도 참가자 중의 하나였다. 그 성도는 자존심이 상해서 찬양드림에 참가하지 않았다. 그 후 그 성도가 다시 은혜를 회복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사모님은 그 일로 인하여 목회 현장에서 말을 예쁘게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절실하게 깨달았다.

 

   옛날에 갓 시집 온 며느리는 ‘벙어리 삼 년, 귀머거리 삼 년, 장님 삼 년’을 보내야 한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목사나 사모 또한 그래야 하는 모양이다. 말을 적게 하고 보아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 해야 하리라. 또한 목회자는 말을 많이 하기보다는 말을 많이 듣는 편이 더 낫다.

 

   얼마 전에 만났던 어느 목사님은 목요일마다 1시간씩 〇〇중학교에 가서 상담을 한다고 했다. 청소년 상담에 관심이 많은 내가 물었다. “상담을 어떻게 하나요? 좀 가르쳐 주세요.” “그들의 말을 많이 듣지요. 저는 별 말을 안 한답니다. 실컷 얘기하도록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준답니다. 그 녀석들은 신나게 말을 하지요. 몇 개월 후에 그 아이들이 많이 변했다고 교장선생님이 좋아하더군요.”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에서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듣고 행할 때 역사가 일어난다. 듣기만 하고 실행하지 않으면 역사는 일어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역사하지 않는 곳에 사탄이 활개를 친다.

 

   말에 관한 설교를 한 어느 주일 다음날인 월요일이었다. 저녁때 교회 옆길에서 시끄러운 싸움 소리가 나서 나가보았다. 우리 교회 어느 권사님이 동네 사람하고 다투고 있었다. 권사님이 우리가 그 사건을 목격한 것을 알까봐 얼른 안으로 들어왔다. 싸움이니까 서로 사나운 말이 오고 가는 소리가 사택에까지 크게 들렸다. 바로 어제 설교가 <부드러운 말>에 관한 말씀이었는데 그런 광경을 보게 되니 매우 민망하고 슬펐다.

 

  ‘하나님의 말씀이 다 흘러 떠내려가는 구나’하고 생각하니 자괴감이 들었다. 그 후로 몇 달 동안 그 권사님은 기도회에도 나오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은 ‘오비이락’이 아닌가 하고 말하며 너무 민감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고 의아해 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목회 현장에서 주의 종의 입을 통해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는 성도에게서 믿음도 식어지고 은혜도 식어지는 일이 많음을 경험하며 살고 있다.

 

   어느 교회에나 말을 예쁘게 하는 성도가 있고, 말을 밉게 하는 성도가 있다. 자칭, 타칭으로 믿음이 좋다고 인정하는 권사님이나 장로님도 말을 밉게 하는 습관이 있으면 다른 성도들의 신뢰를 받지 못한다. 많은 봉사, 섬김, 헌신이 말로 인하여 헛수고가 되는 수가 많음을 본다. 반면에 말을 예쁘게 하는 성도는 다른 성도들에게 덕을 끼친다.

 

   우리 교회 어느 성도님 부부는 주일 아침에 나의 승용차로 모시고 온다. 아내가 5년 전에 뇌졸중으로 쓰러져 반신불수가 되었다. 몸이 성하지 않으니 남편의 보살핌이 많이 필요하다. 몸이 건강할 때에는 아내가 살림을 도맡아 했다. 이제는 남편이 아내를 도와주어야 한다. 가방 하나라도 남편이 챙겨 들어야 한다. 어느 날 겨우 지팡이에 의지하여 차에 올라탄 아내는 옆자리에 탄 남편에게 묻는다.

 

   “가방 잘 챙겼어요?” 남편은 무엇이 못마땅한지 퉁명스럽게 꽥 소리를 지른다. “그려~.” 아마도 아내의 잔소리가 귀찮은 모양이었다. 사모에게 남편의 거친 언어생활을 들킨 아내는 민망해했다. 아내는 눈시울을 붉히고 한숨을 쉬며 푸념했다. “말 좀 부드럽게 하면 어디가 덧나나. 저이는 항상 저렇게 퉁명스럽다니까. 30년이 넘게 살면서 저이의 부드러운 말은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어.” 어색해진 분위기에 내가 말했다. “집사님, 그래도 가끔은 부드럽게 말하더만 뭘 그러세요.”

 

   우리 교회에 이사 온 지 몇 달 되는 박 권사님은 말을 참 예쁘게 하신다. 71세이신데 꼭 10대처럼 아양스러운 말투를 사용하신다. 시골 사람들은 마음은 그렇지 않으면서 말을 퉁명스럽게 하는 경향이 있다. 박 권사님이 소녀처럼 말을 귀엽게 하시니까 가끔은 다른 권사님들의 놀림감이 되기도 하고 부러움의 시샘을 받기도 한다.

 

  우리 교회에서는 김장철을 맞이하여 교회에서 김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권사님 또는 집사님들이 자원하여 자기 집 김장을 할 때 교회 김치냉장고의 김치통을 하나씩 가져가 김치를 담아 가져온다. 자원하는 자가 많아 해마다 김치는 김치냉장고를 다 채우고도 남아 김장을 못하는 다른 사람에게 주기도 한다.

 

   며칠 전 금요일 기도회에 오시면서 새로 오신 지 일 년도 못된 박 권사님도 자기 집 김장 김치를 한 통 가져왔다. 한 권사님이 말했다. “다른 사람들이 김치냉장고 다 채웠어요. 박 권사님까지 김치 가져올 필요 없는데 왜 가져왔어요?” 박 권사님이 말했다. “나도 가져오고 싶어서 조금 가져왔어요. 그리고 올해 우리 집 김장 김치가 맛있게 담아졌어요.” 시골에서는 대체로 자기 집 김치에 대해서 맛있다고 천연덕스럽게 말하지 않는다.

 

   맛있는 김치이면서도 ‘사모님, 김치가 맛이 없어도 드셔보세요’라고 말씀하시곤 한다. 자기 집 김치가 맛있다고 천진스럽게 말하는 박 권사님의 말을 들은 한 권사님은 말했다. “권사님은 애기 같아. 권사님이 고등학생인가?” 박 권사님은 그 얘기도 순진하게 받아들인다. “나, 초등학교 6학년생이야.” 우리는 오랜만에 깔깔 웃었다. 박 권사님의 순수한 말투는 종종 우리 교회 성도들에게 웃음을 선사한다.

 

   며칠 전부터 어느 집사님이 잠이 안 오고 가슴이 벌렁거려서 큰 병에 걸린 게 아닌가 하고 염려를 많이 하셨다. 병원에 다녀왔다는 소식을 듣고 전화를 걸어 의사가 무슨 병이라 하더냐고 물어보았다. 의사가 화병이라 한다고 대답했다. 화병이라면 이유가 있을 텐데 무슨 일이 있으신가 물어보았다. 그리하여 얘기를 들어본즉, 도시에 사는 친척에게 말린 토란줄기를 판 일 때문에 억울한 일을 당하여 며칠 동안 속을 끓여왔다고 했다.

 

   집사님이 손수 베어서 껍질을 벗겨서 말린 토란 줄기를 손아래 친척이 원해서 팔았다. 도시 사람인 친척은 말린 토란 줄기 삶는 방법을 몰랐던 모양이다. 아무리 삶아도 삶아지지 않는다고 중국산이라며 다시 보내왔다. 집사님이 자기 방법대로 삶아보니 잘 삶아졌다. 그래서 중국산을 사다가 팔았다는 누명을 벗으려고 전화로 그런 설명을 했더니 소다를 넣어 삶아서 잘 삶아진 것이 아니냐고 했다. 이래저래 오해와 누명과 상한 자존심에 순진한 시골 집사님은 속이 많이 상했다. 그나마 손아래 친척에게서 오해와 누명을 뒤집어쓰면서 험한 말을 들은 것을 생각하노라니 밤잠이 오지 않더라는 것이었다.

 

   그 집사님의 속상한 일을 들으면서 그분이 작년에 이웃 성도와 크게 다투었던 일이 생각났다. 그 다툼으로 인하여 10여 년이나 연상인 늙으신 집사님이 상처를 받고 몇 달 동안 속앓이를 하며 교회를 나오지 않았던 일이 있었다.

 

  성경에서 야곱이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이고 하란으로 도망가 20년 동안 살면서 삼촌에게 여러 번 속으면서 억울해하던 일을 거울삼아 우리의 인생 여정에서도 이와 같이 행한 대로 받는 것을 명심해야 하겠다. 살다 보면 이웃 간에 이해관계가 얽혀 험한 말을 하면서 언성을 높여 싸우는 일이 종종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세상 사람은 그럴지언정 성도끼리는 이웃 간에 싸워서도 안 되고 설령 싸울 일이 있을지라도 험한 말과 거친 말로 오랫동안 싸워서는 안 된다.

 

   성도들은 한 몸인데 손이 발과 싸우고 눈이 입과 싸우면 피차 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 마을에 사는 성도가 싸우고 소원한 관계를 갖게 되면 그 동네는 전도가 막히고 성도들은 불신자들에게 비난과 비웃음을 받게 된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받게 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워진다. 성도는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돌리는 것이 마땅하다.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 

 

 


 필      자

 양애옥 사모

정읍시 옹동면 비봉리 산성교회 

 (창골산 칼럼니스트)

 ao-ya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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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골산☆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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