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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십일조 정신
신앙생활에 관한 상담을 하다보면 거의 단골로 이슈가 되는 것은 ‘온전한 십일조’에 관한 질문입니다. 개인별로 아무리 여러 사람에게 설명해 주어도 계속 나오는 질문이 ‘십일조'문제라는 생각이 들어, 우리 교회를 출석하는 모든 분들에게 공통된 대답을 드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 목양실에 실어 봅니다. 사실 십일조 문제는 신앙생활의 바로미터와 같습니다. 성숙한 신앙은 십일조 하는 정신과 자세에서 벌써 판가름 나기 때문입니다. 기쁨으로 바치느냐, 억지로 바치느냐, 자원하여 다른 것을 쓰기 전에 먼저 드리느냐, 아니면 인색하게 마지못해 두려워서 드리느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쓰고 남은 돈으로 십일조 한다는 것은 실제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 까닭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돈이란 언제나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까딱 잘못하면 못 바치게 되거나, 또 바쳐도 온전한 십일조가 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원래 '온전한 십일조'의 의미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요, 다 주님의 것이라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따라서 십일조를 할 수 없다는 뜻은 '나의 삶의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고, 다 주님의 것이라는 믿음이 아직 부족하다'는 신앙의 연약성에서 비롯됩니다. 물론 십일조를 드렸으니 나머지 9/10는 내 마음대로 써도 된다는 생각도 잘못된 자세입니다. 오히려 9/10를 올바르게 쓰고 십일조를 드리는 생활이 더 중요합니다.
치약제조 판매로 대성한 콜게이트라는 한 크리스천은 기업을 시작하기 전 먼저 두 개의 돈주머니를 따로 마련했다고 하는데, 하나는 수입의 주머니요, 다른 하나는 십일조 주머니였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합니다.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포도즙이 넘치리라(잠언 3:9)' 그러므로 십일조는 먼저 떼어 놓는 것을 드리는 정신이 중요합니다. 나 쓸 것 먼저 계산하기 시작하면 언제나 십일조 정신이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는 십일조를 떼서 자기 마음대로 활용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꼭 교회에 바쳐야 되냐고 반문하면서, 십일조를 선교비나 구제비, 건축비 등의 선행에 쓰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좋은 것 같으나 인간적 생각의 불신앙에서 나온 행위라고 생각됩니다. 십일조는 '주의 것(말 3:8-9)이고 하나님의 것(마 22:10)입니다' 만약 내가 생색내기 위해서라든지, 공명심으로 한다면, 그것은 영적인 도적질이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우리가 국가에 낼 세금을 동네 도로 포장하고 불우 이웃돕기 했다고 세금을 면제해 주시는 않습니다. 이유야 어찌됐든 너희의 십일조를 선행에 쓰라고 하시지 않고 제단에 드리라고 명하신 의미를 깊이 생각해야겠고 교회는 이를 바르게 집행해야 하겠습니다. 내가 뜻이 있어 선행이나 기타 선한 일을 위해 쓰려면 십일조 외에 다른 돈을 절약해서 쓸 줄 알아야겠습니다. 수입의 3/10을 선교로 쓰는 회사도 있습니다. 저는 이왕이면, 온전한 십일조를 드림으로 개인이 신앙은 물론, 주님의 교회가 건강히 세워져 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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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생활은 감사하는 생활이 특징이다. 성도에게는 구원의 은혜와 일상생활에서 베푸시는 은혜에 대한 감사로 범사가 감사의 대상이 된다. 마음속에서 느껴지는 감사는 보통 몸을 드리는 것과 물질을 드리는 것을 통해 밖으로 표현이 된다. 물질을 드리는 것의 대표적인 것은 십일조이다. 그래서 성도들은 당연히 십일조 생활을 해야 하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온전한 십일조의 액수를 정하는 과정에 있어서는 모든 수입의 십일조를 드릴 것인가, 필요 경비를 제외한 순수입의 십일조를 드릴 것인가. 손해를 보는 경우에도 십일조를 해야 하는가 하는 등의 여러 가지 관련된 문제들로 인해 어려움을 겪을 때가 있다.
이제 무엇이 온전한 십일조인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1. 십일조의 기원
고대 이집트나 시리아를 중심한 많은 나라들에서는 국민들에게 정치적인 성격의 십일조를 요구했다. 사무엘 선지자의 예언을 보면, 이스라엘 왕들도 왕실을 유지하기 위해 국민들에게 십일조를 요구했던 것으로 보인다(삼상 8:15, 17). 현재에도 우리나라나 다른 여러 나라들은 부가가치세 등에서 보는 것과 같은 정치적 세금 형태의 십일조를 여전히 국민들에게 부과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명령하고 있는 십일조란, 재산이나 소득의 십분의 일을 종교 기관이나 종교적 목적을 위해, 또는 기업(재산이나 직업)이 없는 레위인(목회자)들을 부양하기 위해 바치는 것을 의미한다.
십일조에 관한 규정은 광야에 머물고 있던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여러 하나님의 계명들과 함께 처음으로 등장한다(민수기 18장과 레위기 27장). 그리고 가나안을 눈앞에 둔 여리고 맞은편에서 다시 한 번 십일조에 대한 계명이 반복된다(신명기 14, 26장). 하지만 십일조 제도는 이미 오래 전부터 시행되고 있었다. 아브라함은 전쟁에서 노획한 전리품 중에서 십분의 일을 제사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는 사람인(히 7:1) 살렘 왕 멜기세덱에게 드렸다(창 14:20). 이 전통에 따라 야곱도 벧엘에서, 모든 소득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릴 것을 서약했다(창 28:22).
십일조는 신약 시대에도 계속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십일조 제도가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무관하게 행해지는 것을 안타까워하시면서,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지니라”(눅 11:42)고 십일조를 지칭해서 말씀하셨다. 이것은 십일조 제도가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함께 지켜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신 것이었다. 그러나 죄로 어두워진 사람들은 심지어 우상에게까지 십일조를 바쳤다(암 4:4). 또 부패한 대제사장의 탐욕 때문에 가난해진 제사장들은 백성들에게서 강제로 십일조를 강탈하다가 예수님께로부터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 23:23, 33 참조)라는 책망을 듣기도 했다.
초대교회 이후부터는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군이 저 먹는 것을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마 10:10), “일군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눅 10:7), “누가 자비량 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실과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때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고전 9:7)고 하신 말씀들을 근거로 해서, 드려진 십일조를 목회자의 생활비를 충당하는 데 아무런 이의 없이 사용을 해왔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예에서 보는 것 같이, 일부의 사람들은 자기의 생활비를 스스로 마련하는 경우도 없지는 않았다.
2. 십일조의 종류
성경에는 다음 세 가지 경우의 십일조를 바치도록 명령되어 있다. 그러나 이 세 종류의 십일조는 모두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께 드려진 것이기 때문에, 셋으로 나눌 수 없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1) 땅의 소산과 육축의 십일조(레 27:30~33)
모든 소유가 하나님의 것임을 표하고, 또 늘어나는 소득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임을 표하는 십일조이다. 땅에서 추수한 곡식과 나무에서 수확한 열매의 기름을 하나님께 십일조로 바쳤다. 만일 이것을 속하려면, 그것의 가격에 오분의 일을 더해야 했다. 소나 양은 막대기 아래로 지나는 열 번째 것으로 십일조를 드렸다. 십일조의 성물로 정해진 소나 양은 어떠한 경우에도 다른 것으로 바꿀 수 없었다. 만일 바꾸게 되면, 둘 다 거룩하게 여겨져 일체 속할 수 없도록 했다. 이 십일조는 신 26:1~15에 나오는 첫 이삭을 드리는 명령과 동일하게 여겨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미 족장 시대부터 이러한 십일조가 드려졌다고 할 수 있다.
십일조는 반드시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예루살렘)에서 바치고 먹어야 했다. 따라서 멀고 행로가 어려울 경우에는 그것을 돈으로 바꾸고, 예루살렘에 가서는 그 돈으로 다시 마음에 드는 것을 구하여 바쳤다.
2) 레위인을 위한 십일조(민 18:21~32)
가나안에 들어 간 이후, 모든 지파들에게는 땅이 분배되었다. 그러나 레위인에게는 예외적으로 땅을 분배하지 않고, 전적으로 성전의 일만을 맡게 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른 지파의 사람들이 십일조를 드려 레위인의 생활을 책임지도록 했다. 레위인은 땅의 소유주이시며 땅의 소산을 주시는 하나님을 대표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이 십일조도 결국은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였다. 한편, 레위인은 자기들이 받은 십일조 중에서 다시 십분의 일을 구별하여 제사장들에게 바쳤다.
3) 가난한 자를 위한 십일조(신 14:28~29)
매 삼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일조를 드려 저축하였다가,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 성중에 우거하는 고아와 과부들을 배부르게 하는 데 사용한 십일조이다. 매 삼년마다 가난한 자를 위한 별도의 십일조를 했는지, 아니면 다른 두 해의 십일조 중에서 일정량을 모아두었다가 가난한 자들을 돌보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3. 십일조의 목적
십일조의 목적은 앞에 말한 십일조의 종류에서 잘 드러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가진 모든 소유물이 하나님의 것임을 깨닫게 하기 위해, 소득의 증가가 하나님의 복에 의한 것임을 깨닫게 하기 위해, 종교적 일에만 전념하는 레위인의 생활을 유지하게 하기 위해, 그리고 소득도 돌볼 사람도 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돌아보게 하기 위해 십일조를 명령하셨다. 그러나 이러한 목적들은 하나님의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도록 하기 위한 것, 즉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확인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소유물을 사용하게 하려는 한 가지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십일조를 전혀 드리지 않거나,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 심각한 책망과 저주가 뒤따르게 된다(말 3:8, 9). 반면에,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반드시 그 소유의 복을 넘치도록 주실 것임에 대한 확신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말라기 선지자의 입을 통해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암 3:10)고 말씀하셨다.
4. 온전한 십일조
온전한 십일조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모든 헌금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액수보다는 그 정신에서 찾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의도가 빠진 십일조는 온전한 십일조가 될 수 없다. 십일조에는 반드시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 베풀어 주신 복에 대한 감사, 내리신 명령에 대한 즐거운 순종이 배어 있어야 한다.
자원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드리는 자세 또한 온전한 십일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께서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7)고 말씀하셨다. 온전한 십일조는 정해진 액수대로 하는 십일조여야 한다. 자기 소유와 소득의 십분의 일이 그 정해진 액수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의 삶은 과거와는 달리 정해진 액수를 계산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이런 경우에는 세금이나 공제금을 포함하여 필요 경비를 제외한 순수입의 십일조를 하면 무난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정해진 액수를 계산할 때, 무엇보다 먼저 우리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임에 유념을 해야 한다. 십분의 일뿐만 아니라 십분의 십 전체가 하나님의 것이다. 십분의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최소한의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십분의 일을 계산하기 어려울 때에는 십분의 일 이상이라도 드리겠다는 넉넉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래서 십분의 이를 드리겠다는 목표를 가져 볼 수도 있다. 이런 자세를 갖는다면, 손해를 보는 경우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생각에서 조금도 부담을 갖지 않고 일정액의 십일조를 드릴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액수의 세밀한 계산은 정확한 순종의 믿음에서 나오기보다 인색함에서 비롯되는 것이 대부분임을 쉽게 경험하고 있다.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는 생활은 복을 받기 위한 조건이라기보다, 성도가 해야 할 마땅한 본분이다. 성도는 십일조를 통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는 믿음을 확인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이웃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야 한다. 그리고 자원하는 즐거운 마음으로, 정해진 액수의 온전한 십일조를 드림으로써, 예수님을 기쁘시게 했던 과부의 두 렙돈 같은 십일조가 되게 해야 한다. 우리는 십일조가 어떻게 사용되는가에 대한 관심으로 자신의 역할을 계산하기에 앞서서, 하나님의 것을 마땅히 하나님께 드린다는 생각을 가져 한다. 십일조를 드린 사람에게 쌓을 곳이 없도록 복을 주시지 아니하나 시험하여 보라고까지 함에야, 어찌 십일조 생활을 주저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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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권 장로
온전한 십일조
신앙생활의 기본은 주일성수와 십일조의 이행이다. 주일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시간이 모두 주님의 것이라고 인정하는 것이고, 십일조를 온전히 바치는 것은 모든 물질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주일성수는 잘 하지만 십일조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교인들이 적지 않다. 그들은 삶의 어떤 영역에서는 하나님의 주권을 전적으로 부인하는 것이다.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지 못하는 것은 물질관에 문제가 있음을 드러낸다. 돈의 위력이 그만큼 강하기 때문이다. 돈은 그 효력이 즉시 나타나기 때문에 돈맛을 아는 사람은 좀처럼 포기하기가 어렵다. 가진 자가 더 무섭다고 하지 않는가?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한 성경의 비유는 너무도 적절하다. 사람들은 자기 생명보다도 돈을 더 사랑할 지도 모른다. 그래서 교회 생활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헌금 문제로 시험에 든다.
그러나 십일조를 온전히 드리면 땅에서 그만큼 복을 받는 것이다. 모든 물질이 하나님의 것인데 그분이 무엇이 부족해서 자녀들에게 넉넉하게 주시지 않겠는가? 물질이 주님의 것이라고 진실하게 보여드릴 때 그 풍성함을 누리게 된다.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했지만 십일조만큼은 시험해 보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확실하게 복을 받는 것이다.
사람이 먼저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렸다. 하나님께서 먼저 요구하신 것이 아니다. 그 기원은 아브라함이 롯의 가족과 재물을 찾아 돌아오는 길에 예수님으로 예표되는 멜기세덱을 만나서 바친 것이다. 그리고 야곱이 형을 피해 하란으로 가는 도중에 벧엘에서 서원한 것이 바로 십일조다. 믿음의 조상이 하나님께 서원한 것이므로 믿음의 후손인 우리가 마땅히 드려야 한다. 아담이 범죄함으로 모든 인류가 죄를 범한 것과 같은 원리이다. 바치겠다고 약속했으므로 하나님의 것으로 되었다. 그러므로 십일조를 드리지 않으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 된다.
세금을 떼기 전의 소득에 대해 십분의 일을 바치는 것이 옳다. 모세 시대부터 십일조의 의무를 가르쳤다. 가나안 땅에서 국가가 형성되기 전에는 세금을 내지 않았다. 사무엘 시대에서야 비로소 국가에 대한 세금이 언급된다. 그는 왕을 세우기를 원하는 백성들에게 소산의 십분의 일을 추가로 낼 의무를 알렸다. 따라서 세금을 떼고 난 금액에서 십분의 일을 계산하는 것은 온전하지 않다.
십일조를 다른 헌금으로 사용하는 것도 바르지 않다. 감사헌금, 구제헌금, 선교헌금, 건축헌금, 장학헌금 등은 십일조 외에 드려야 한다.
이 세상에서 생활하는데 물질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가 태어날 때 빈손으로 나왔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 땅에서 먹고, 마시고, 입으면서 살고 있다. 물질의 영역에서 바르지 못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두 주인을 겸하여 섬길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주권을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인정하는 것이 성도가 드릴 영적 예배이다. 온전한 십일조로 땅의 기름짐을 한껏 누리는 복을 누렸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