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33:1-25절) 므낫세의 반항 정치 유다의 정치(政治)에서는 다른 나라와는 달리 종교적인 부흥(復興)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다른 나라는 국가가 부강(富强)하기 위해 군사력(軍事力)이나, 경제력(經濟力)에서 큰 부흥이었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신앙적인 부흥이 일어나면,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축복(祝福)이 나타나면서 부흥(復興)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유다의 왕(王)들 중에는 이런 사실을 확실히 믿지 못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유다 왕(王)들도 머리로는 하나님의 말씀만 붙들면, 하나님이 부흥을 주신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현실적으로는 그것을 끝까지 밀어붙이지를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신앙(信仰)의 길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유다는 부흥(復興)되었다가는 다시 쇠퇴(衰退)하는 악순환을 반복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길로 충실하게 행했던 왕(王)이 있었는데, 그가 곧 히스기야입니다.
그는 유다의 부흥(復興)의 비결을 잘 알고, 그대로 실행한 사람이었습니다. 히스기야는 유다의 왕(王)이 되었을 때, 거의 망(亡)하다시피 한 나라를 물려받아 영적(靈的) 부흥(復興)으로 이끌었습니다. 즉 예배로 남북(南北)을 하나로 통합시키고, 우상숭배(偶像崇拜)의 기회를 차단 시켰으며, 유윌절 정신으로 돌아가서 완전히 신앙의 기초부터 다시 시작하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히스기야는 유다 역사상 가장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그 만큼 온갖 연단(鍊丹)을 감당했던 사람입니다. 앗수르는 유다를 쳐들어오지 않는 조건으로 유다에서 많은 돈을 밭아갔지만, 약속(約束)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히스기야는 돈만 떼인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쳐들어온 앗수르 군대에게 온갖 모욕(侮辱)을 당하고, 멸망(滅亡)의 공포에 떨어야만 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히스기야는 죽을병에 걸려서 이사야 선지자로부터 사망(死亡)선고를 받기까지 했습니다. 그 대신 히스기야는 고생한 이상으로 하나님의 엄청난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에워쌌던 앗수르 군대가 단 하루 만에 18만 5천명이 죽임을 당하는 기적을 체험했고, 히스기야가 죽을병에 걸렸다가 기도로 치료되었을 때, 아하스의 일영표(日影表)가 10도나 뒤로 물러나는 기적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히스기야는 욕을 얻어먹은 이상으로 유명하게 되어 전 세계에서 사신(使臣)들이 찾아와 히스기야를 칭송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의 이 놀라운 부흥(復興)과 축복(祝福)은 아들 므낫세에 의해서 완전히 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므낫세는 자기 아버지 히스기야와는 정반대로 철저하게 우상숭배(偶像崇拜)정책을 써서 히스기야가 일으켰던 부흥(復興)의 불을 완전히 꺼버린 정책(政策)을 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므낫세 때,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도 포기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유다의 생명은 므낫세에 의해서 완전히 끝나버리고, 그 후의 역사는 멸망(滅亡)을 위한 마무리에 불과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훌륭한 히스기야에게서 도대체 어떻게 므낫세 같은 아들이 태어나 아버지가 일으킨 부흥(復興)을 단번에 꺼버릴 수 있었을까? Ⅰ.므낫세의 반항심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자신이 실제로 하나님을 체험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만 붙들고 살아가는 건 불가능합니다. 즉 하나님을 실제로 체험해보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價値)를 알 수도 없고, 특히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삶의 능력이 될 수 있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거의 대부분의 유다 왕(王)들은 처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출발했다가 나중에 가서는 끈기가 부족해서 세상으로 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므낫세는 아예 처음부터 적극적인 우상숭배(偶像崇拜)정책을 썼습니다.
33:2절)므낫세가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십이 세라 예루살렘에서 오십오 년 동안 다스리며” 므낫세는 아주 어린 나이인 12세에 유다의 왕(王)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므낫세는 55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유다를 다스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오랜 시간 유다를 다스리면서 결코 행복(幸福)하지 않았습니다. 너무나도 고통스럽고, 지루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사람이 어렸을 때는 주입(注入)하는 대로 모든 것을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자녀들은 거의 무비판적(無批判的)으로 부모의 신앙이나 가르침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청소년(靑少年)시기가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까지 자기가 배운 것에 대하여 회의(懷疑)를 품게 됩니다.
즉 자기가 지금까지 알고 있고, 배우고 있는 것이 진정으로 옳은 것인지? 아니면 어른들로부터 억지로 주입(注入)된 것인가를 다시 확인하기 위하여 의심(疑心)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대개 어렸을 때부터 신앙생활을 해온 사람들 중에서 청소년(靑少年)기에 위기를 겪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렸을 때, 배우고 지켜온 것들 중에서 의심이 생기거나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부정(否定)하려는 것입니다. 이때 아주 이해심이 많고, 지혜로운 스승이 있어서 그런 자세를 잘 포용해주고, 이해시켜 주면, 위기를 잘 넘기고, 오히려 더 성숙한 신자가 될 수 있습니다. 특히 이때 의심(疑心)을 이길 수 있는 강한 성령의 체험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강한 성령의 체험은 젊은이들을 지키는 능력입니다. 그러나 이때 어른들이 부정적인 모습을 보여주거나, 의심하고 회의(懷疑)하는 것을 정죄(定罪)한다든지, 강요하면, 신앙적으로 반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므낫세가 유다의 왕(王)이 되었을 때, 그는 열두 살이었습니다. 이 시기는 한창 자기가 배운 것에 대하여 의심하고, 바른 신앙에 대해서 반발할 나이입니다.
특히 므낫세는 이후 가장 중요한 시기인 청소년(靑少年)기에 나라를 다스리게 됩니다. 안타깝게도 므낫세는 신앙에 대한 회의(懷疑)와 반발(反撥)이 너무나 심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한 번 씩 회의(懷疑)에 빠지거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반발(反撥)을 해보지 않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므낫세는 반발의 정도가 너무나 심해서 극단적인 단계로 발전했습니다. 그리고 역대기(歷代記)에는 열왕기(列王記)에 없는 내용이 나오는데, 그것은 곧 므낫세가 포로로 붙들려 갔다가 실컷 고생한 후에 회개(悔改)하고 돌아오는 내용입니다.
므낫세가 회개하고 돌아온 것까지는 좋은데, 방황했던 기간이 너무나도 길어서 유다를 신앙적으로 회복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교회(敎會)에서 청소년(靑少年)기나 청년기(靑年期)에 바른 말씀을 들으면서 신앙생활 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의심(疑心)과 반발(反撥)이 너무나도 심해서 돌아오지 못하거나, 아니면 아주 늦게 돌아오게 되어 이미 그 손실(損失)을 회복할 수가 없게 됩니다. 사람들이 같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신앙생활의 양상(樣相)이 각각 다르다는 걸 알 필요가 있습니다. 즉 어떤 두 사람이 길을 걸어갈 때, 여러 가지 방식으로 걸어갈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두 사람이 너무나 가까워서 꼭 껴안고 가거나, 혹은 등에 업고 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때 이 두 사람 사이에는 거의 틈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두 사람은 같은 길을 가면서도 멀찌감치 떨어져서 서로 얼굴만 쳐다보면서 가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꼭 붙어서 가길 원하십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에게는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自由)가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붙들고 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되려면,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이 있어야 하고, 특히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있는 생명을 발견하는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특히 하나님과 꼭 붙어서 가려고 하면, 우리는 많은 연단(鍊丹)을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연단(鍊丹)이 우리를 하나님께 밀착을 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체험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범위 안에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면서 살아갑니다. 이런 경우는 하나님과 느슨한 관계에 있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은 그저 참고 사항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느슨한 관계에 있으면, 유익한 점도 있습니다.
세상의 좋은 것들을 취하고, 많은 유익을 얻을 수 있고, 또 일반적인 복(福)을 많이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 대신 진정한 부흥(復興)의 불이 붙거나, 기적적인 기도의 응답은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유다의 많은 왕(王)들은 처음에는 하나님께 꼭 붙어 가다가 나중에는 느슨한 관계가 되어 실패(失敗)할 때가 많았습니다.
세상적인 복(福)은 많이 받는데, 심령 부흥(復興)의 불은 약(弱)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므낫세 같은 경우는 하나님과의 느슨한 관계 정도가 아니라, 너무나 반발을 심하게 했습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아버지 히스기야와 비교되는 것이 너무나도 싫어서 반항(反抗)했을 수도 있습니다. 또 므낫세의 성격 자체가 상당히 삐뚫어졌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므낫세는‘내가 하나님을 인정하기 이전에 한번 하나님을 철저하게 부정해보자’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므낫세는 그 반발이 너무나 심해서 넘어서는 안 될 선(線)을 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유다의 부흥(復興)의 불은 므낫세에 의해서 완전히 꺼버리게 됩니다. 2-5절)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본받아 그의 아버지 히스기야가 헐어 버린 산당을 다시 세우며 바알들을 위하여 제단을 쌓으며 아세라 목상을 만들며 하늘의 모든 일월성신을 경배하여 섬기며 여호와께서 전에 이르시기를 내가 내 이름을 예루살렘에 영원히 두리라 하신 여호와의 전에 제단들을 쌓고”
므낫세의 행적을 보면, 완전히 반발심에서 나왔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즉 므낫세는 아버지 히스기야가 헐어버린 산당(山堂)을 다시 세우고, 바알과 아세라를 다시 허용했습니다.
또 여호와의 성전(聖殿)들에 바알 제단과 아세라 제단을 쌓고, 심지어는 동방 사람들이 섬기는 태양신, 달신 별신을 위한 제단을 성전(聖殿)뜰에 세웠습니다.
아마 므낫세는 어렸을 때부터 훌륭하게 정치(政治)했던 아버지 히스기야에 대한 이야기가 있을 때마다 므낫세에게 “당신의 아버지는 이러이러한 훌륭한 정치를 했고. 이런 놀라운 일들을 해냈다” 는 말을 했을 것입니다.
므낫세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기는 죽어도 아버지를 흉내 낼 수 없다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이럴 때, 사람은 정반대되는 일을 해서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싶어 할 때가 있습니다.
므낫세는 아버지와 같이 훌륭한 왕(王)이 될 수 없다면, 완전히 반대로 나가서 자신이 그렇게 바보가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자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우리는 주위에서 흔히 겪는 일들 중에서 아버지가 유명하고, 훌륭하면, 자식이 오히려 삐딱하게 나가서 반항적인 삶을 사는 것을 보게 됩니다.
즉 자기 재주로는 도저히 아버지를 따라갈 수 없으니까 오히려 정반대로 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자기 자신을 찾으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 자신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祝福)과 능력(能力)을 받는 방법은 탁월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들릴 때, 우리는 축복과 능력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므낫세의 정치(政治)는 아버지 때처럼 영적(靈的)이고, 종교적(宗敎的)인 성향은 있지만, 방향은 정반대였습니다. 그리하여 아버지나, 기성세대에 대한 반발심 때문에 아버지의 신앙을 버리거나, 잠시 세상나라의 통치를 흉내 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유다의 왕(王)이라면, 바알과 아세라를 허용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므낫세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을 두는 성전(聖殿)에 우상(偶像)의 제단(祭壇)을 두었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들만 골라서 했는데,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아들을 산채로 불에 태우는 의식도 행하고, 점(占)치거나, 무당(巫堂)짖 하거나, 귀신(鬼神)을 부르는 모든 것들을 다 끌어들인 것입니다.
이것은 의도적으로 행했다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아마 유다의 민족들이나, 지도자들도 므낫세가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을 것입니다. 사람은 겉만 보아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므낫세는 왕(王)이 된 후에 완전히 딴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즉 므낫세는 하나님과 유다 백성들 앞에서 온 나라와 성전(聖殿)을 기만(欺滿)했습니다.
이것은 마귀(魔鬼)의 교활(狡猾)한 전략(前略)이었습니다. 마귀(魔鬼)는 어린 왕(王)의 반항심을 부채질해서 유다 전체를 자기 손아귀에 넣으려고 한 것입니다.
10절)여호와께서 므낫세와 그의 백성에게 이르셨으나 그들이 듣지 하니하므로” 모든 폭군(暴君)들이 그렇듯이 므낫세도 바른 길로 돌이키도록 권한 사람들을 제거해버렸습니다.
본문 말씀에는 하나님께서 므낫세와 유다 백성들에게 선지자를 보내서 말씀하셨지만, 저희가 듣지 않았다고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열왕기(列王記)를 보면, 그 정도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16절)여호와의 제단을 보수하고 화목제와 감사제를 그 제단 위에 드리고 유다를 명령하여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하매” 므낫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전하는 자들을 무수히 죽였습니다. 전설(傳說)에 의하면 이사야는 므낫세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 고 했는데, 므낫세는 이사야 선지자를 산 채로 톱으로 켜서 죽였다고 합니다.
Ⅱ.하나님의 언약이 깨어짐 므낫세가 행한 악행(惡行)중에서 가장 심한 것은 하나님의 성전(聖殿)을 더럽힌 것이었습니다. 4절)여호와께서 전에 이르시기를 내가 내 이름을 예루살렘에 영원히 두리라 하신 여호와의 전에 제단을 쌓고” 하나님은 솔로몬이 지은 성전(聖殿)에 영영히 내 이름을 두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예루살렘 성전에 오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죄를 용서받을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에게 가장 치명적인 것은 죄(罪)를 씻을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악(惡)한 생각과 충동(衝動)이 생겨서 죄(罪)를 짓는데, 인간들은 이 죄를 씻을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도덕(道德)이나 철학(哲學)은 이런 죄를 보이지 않도록 덮어 두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성전(聖殿)의 성령의 생수는 완전히 소방호수와 같아서 인간의 마음을 깨끗하게 씻어주십니다. 찬송가 287장 *예수 앞에 나오면*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새로 태어나는 것이고, 하나님의 진노(震怒)를 축복(祝福)으로 바꾸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므낫세는 성전(聖殿) 뜰 안에 우상(偶像)의 단(壇)을 쌓음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해버렸습니다. 므낫세는 다른 곳에도 바알 제단(祭壇)이나, 일월성신(日月星辰)의 단을 쌓을 곳도 많이 있었을 텐데, 왜 하필이면, 성전(聖殿) 뜰에 이것들을 세웠을까?
그것은 하나님을 향해서 “이제는 유다에서 손을 떼시라”는 뜻인 것입니다. 즉“이제부터는 내가 하나님의 간섭을 받지 않고, 나라를 다스릴 테니까 하나님은 더 이상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지 말라”는 뜻이었습니다.
유다에서 죄(罪)를 씻는 곳이 봉쇄(封鎖)되니까 유다는 금방 죄의 쓰레기로 뒤덮이게 되었습니다. 어느 나라든지 중요한 것이 쓰레기를 처리하는 것입니다. 특히 서울 같은 대도시에서 일주일이라도 쓰레기를 처리하지 않으면, 온 도시가 썩은 오물로 뒤덮이게 될 것입니다.
죄(罪)의 쓰레기를 처리 할 수 없는 유다의 영적(靈的)상황은 그야말로 오물천지가 되었습니다. 드디어 므낫세는 유다의 가장 중요한 기초(基礎)까지 무너뜨리려고 했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유다를 지탱해온 두 개의 기초인 모세의 법과 다윗 언약이 폐기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8절)만일 이스라엘 사람이 내가 명령한 일들 곧 모세를 통하여 전한 모든 율법과 율례와 규례를 지켜 행하면 내가 그들의 발로 다시는 그의 조상들에게 정하여 준 땅에서 옮기지 않게 하리라 하셨으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건 유일하신 하나님만 섬기도록 하기 원해서 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만 섬기면, 영원히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이방 우상(偶像)을 섬기면 가나안 땅에서 쫓겨나야 마땅합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은 그 당시 가장 노른자 위 땅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주변에 있는 몇몇 강한 민족들은 그 땅을 차지하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땅을 수백 년 동안 차지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약속(約束)하셨기 때문입니다. 애국가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므낫세는 어리석게도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면서 가나안 땅만 차지하려고 했는데,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면, 더 이상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기업(企業)을 누릴 자격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9절)유다와 예루살렘 주민이 므낫세의 꾀임을 받고 악을 행한 것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멸하신 모든 나라보다 더욱 심하였더라”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족속들이 우상숭배(偶像崇拜)를 너무나 심하게 해서 가나안 땅에서 쫓아 내셨는데, 므낫세 때, 유다와 예루살렘 백성들은 가나안 족속들보다 더욱 심해진 형극이었습니다.
이들은 참 이스라엘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버린 이스라엘이 어찌 이스라엘이라 일컬음을 받을 수 있을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율법만 지키면, 절대로 망(亡)하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約束)하셨습니다.
물론 아무리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율법(律法)을 지켜도 연단(鍊丹)은 올 수는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가나안 땅에서 쫓겨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즉 그들이 정신을 차려서 다시 하나님의 말씀만 붙들면, 얼마든지 다시 부흥(復興)이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므낫세 왕(王)의 반항(反抗)과 불신앙(不信仰)으로 유다 백성 전체가 이스라엘으로서의 특권(特權)을 박탈당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므낫세 왕(王)의 강력한 리더십을 백성들이 따른 결과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약속하시기를 비록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더라도 왕(王)한 사람만이라도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부흥(復興)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므낫세 왕(王)이 앞서서 하나님을 배반(背叛)했기 때문에 백성들은 다윗의 축복(祝福)도 받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Ⅲ.므낫세가 당한 환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났을 때, 하나님이 내리시는 가장 무서운 심판(審判)은 소리 없는 심판(審判)입니다. 겉으로는 아무 이상이 없어 보이지만, 영적(靈的)인 부흥(復興)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게 됩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뜨거운 마음 중심으로 드리는 예배가 사라지고, 당연히 감격도 없고, 기도 응답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련한 인간들은 당장 손해를 보거나 살 집(아파트)값이 올라가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평안하다, 평안하다”하며 안심(安心)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소리 없는 심판(審判)도 잠시, 얼마 가지 않아 이젠 눈에 보이는 큰 재앙(災殃)이 터지기 시작합니다. 그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무리 하나님 앞에 울며. 불며 매달려도 소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므낫세의 철저한 반항(反抗)정치가 시작되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하나님은 앗스르 군대를 일으키셔서 므낫세를 포로로 붙들려가게 하셨습니다. 11절)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의 군대 지휘관들이 와서 치게 하시매 그들이 므낫세를 사로잡고 쇠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끓고 간지라” 전에 므낫세의 아버지 히스기야는 앗수르 산헤립의 군대 18만 5천명을 하룻밤 사이에 죽게 했습니다. 당시는 하나님의 성전(聖殿)이 살아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성전(聖殿)이 살아 있다는 것은 성전(聖殿)에서 올바른 말씀이 선포되고, 올바른 예배가 드려지고, 중심으로 토(吐)해내는 눈물의 기도가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올바른 말씀이 있고, 올바른 기도가 있는 성전(聖殿)은 어떤 세력도 이기지 못합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므낫세 왕(王)의 권력(勸力)으로 성전(聖殿)의 기능을 마비시켜버리자 성전(聖殿)은 더 이상 하나님의 능력의 원천(原泉)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 결과는 처참했습니다.
앗수르 군대가 다시 쳐들어와서 왕(王)을 바벨론으로 끌고 간 것입니다. 이때만 해도 앗수르가 바벨론보다 더 강해서 바벨론까지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왕(王)이 쇠사슬에 묶여 끌려갔으니, 백성들은 얼마나 많이 끌려갔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 죄(罪)의 대가가 이렇게 참혹한 것입니다. 12-13절)그가 환란을 당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간구하고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앞에 크게 겸손하여 기도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의 간구를 들으시사 그가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다시 왕위에 앉게 하시매 므낫세가 그제서야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더라”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반항(反抗)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한 므낫세인데도 그가 회개(悔改)하자 용서해 주셨습니다.
므낫세가 그동안 하나님께 그렇게 반항(反抗)했던 것은 그가 진정 고생을 해보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므낫세는 자기가 왕(王)이라는 것만 생각하고, 모든 것을 우습게 여기고, 자기 마음대로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가서 온갖 고생을 다 하고, 죄인 취급을 받는 동안 자기가 붙들 수 있는 건 오직 하나님 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들었던 하나님의 말씀이 이제야 효력(效力)이 나타난 모양입니다. 그래서 므낫세는 자기 힘으로는 절대로 돌아올 수 없는 포로 지(地)에서 교만(驕慢)했던 지난날을 회개(悔改)했습니다. 그랬더니 기적(奇績)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포로(捕虜)에서 풀려나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고, 다시 왕(王)으로서 통치(統治)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므낫세가 그제서야 여호와께서 하나님인 줄 알았다고 했습니다. 므낫세는 그 동안 여호와가 하나님인 줄 믿지 못해서 그렇게 반항(反抗)하고, 그렇게 많이 죄(罪)를 짓고 고생했던 것입니다.
므낫세는 포로에서 돌아오고 난 후, 정신을 차렸습니다. 그래서 므낫세는 예루살렘의 성(城)도 쌓고, 여호와의 전(殿)에 있는 우상(偶像)도 없애 버렸습니다.
그러고 다시 여호와의 전(殿)에 단(壇)을 만들어서 화목제와 감사제를 드리고, 백성들에게도 하나님 여호와만 섬기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기에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박한 멸망(滅亡)을 돌이킬 수는 없었습니다. 22-23절)그의 아버지 므낫세의 행함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아몬이 그의 아버지 므낫세가 만든 아로새긴 모든 우상에게 제사하여 섬기며 이 아몬이 그의 아버지 므낫세가 스스로 겸손함 같이 여호와 앞에서 스스로 겸손하지 아니하고 더욱 범죄하더니” 므낫세의 반항(反抗)과 타락(墮落)은 그의 아들 아몬에게 그대로 영향을 주었습니다. 사람은 좋은 영향보다는 나쁜 영향을 더 빨리 받아들이는 법입니다.
므낫세는 실컷 반항하고, 고생하다가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돌아왔지만. 이미 그 아들 아몬은 아버지의 나쁜 영향에 젖어있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도 명시된바 십계명“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자식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라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끼친 나쁜 영양력은 그대로 자식에게 배어드는 법입니다.
즉 아버지가 우상(偶像)을 만들 때, 자식의 마음속에는 이미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마음이 뿌리를 내리기 때문에 나중에 아버지가 정신을 차린다 해도 자식이 돌아오기는 힘듭니다.
벌써부터 마음이 교만(驕慢)해진 자식은 아버지가 회개(悔改)하고 겸비(謙卑)하는 모습을 보면서 오히려 조소(嘲笑)할 것입니다.
결론(結論) 히스기야 같이 신앙적으로 탁월한 왕(王)의 아들이 므낫세 같은 반항(反抗)자였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아버지의 신앙이 탁월하고 훌륭하다 하더라도 자기 자신이 스스로 겪어보지 않으면, 그 믿음의 길이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에 따르고 싶어도 그럴 용기를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부모의 신앙이 좋고, 교회가 성경적이라 하더라도 완전히 의심하지 않거나, 흔들리지 않고, 처음부터 똑바로 믿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회의(懷疑)를 하더라도 할 수 있으면, 좀 더 어릴 때, 하는 것이 좋습니다. 나이가 들어 중책(重責)을 맡기 전에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넘어서는 안 되는 선(線)들이 있는데, 그것을 넘을 정도로 죄를 지으면서 방황(彷徨)하는 건 자기를 파괴적(破壞的)인 행위입니다.
우리는 므낫세의 반항(反抗)과 하나님의 심판(審判)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서는 계급(階級)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즉 아무리 왕(王)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율법(律法)을 어기면, 포로(捕虜)로 붙들려가서 비참한 밑바닥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못된 짓 많이 하고, 하나님을 대적(對敵)했던 므낫세가 회개했을 때, 용서해주시고, 다시 왕위(王位)를 시켜주셨습니다. 그나마 므낫세가 회개를 했기에 유다의 역사가 조금 더 연장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의 아들 아몬이 아버지 같이 우상숭배(偶像崇拜)를 하지만, 2년 만에 자기 부하(部下)에게 죽임을 당하고, 곧 유다의 마지막 불꽃인 요시야가 등장하게 됩니다.
언제라도 회개(悔改)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은혜를 주십니다. 므낫세는 인생의 밑바닥에서 늦게야 하나님께 회개(悔改)했습니다. 오히려 고생이 신앙에 도움이 될 때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너무나 편하게 살려고 애쓰지 말고, 고생 좀 하더라도 심령(心靈)이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그분의 임재가 있는 예배를 갈망하는 성전(聖殿)중심의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찬송가 600장 *교회의 참된 터는* 다음카페 교회갱신 성경연구원 카톡선교회 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