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1:1-12절) 욥의 역사적 배경 아마 가족들 중, 텔레비전 드라마를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드라마를 너무나 좋아해서 가족끼리 정상적인 대화가 안 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좋아하는 드라마가 무슨 거창한 전쟁 영화도 아니고, 무슨 대단한 작품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라마를 좋아하는 이유는 이것이 우리가 시대를 살아가는 또 다른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또 다른 삶의 모습에 대해 관심을 가지거나, 흥미를 느낄 때가 많습니다.
그런 점에서 욥기도 고대(古代)의 드라마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 중에서 솔로몬 때는 지혜 문학이 가장 꽃피울 때였습니다.
마치 우리나라도 어느 탁월한 작가를 중심으로 소설이나 시(詩)가 전성기를 이룰 때가 있었듯이 솔로몬 때는 지혜 문학이 전성기를 이루었습니다.
구악 성경에서 지혜 문학이라면 전도서, 욥기, 아가서, 잠언 이 네 가지를 들게 됩니다. 그 중에서 전도서가 인생론이고, 잠언이 교훈집이라면, 아가서와 욥기는 일종의 드라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욥기의 특징은 등장인물에 대한 특별한 성격 묘사에 있지 않습니다. 아마 그렇게 했더라면, 욥기는 세익스피어를 훨씬 능가하는 작품이 되었을 것입니다.
욥기는 등장인물이 한사람씩 번갈아 가면서 등장해서는 자신의 신앙에 대해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등장인물들이 설명하는 신앙은 뚜렷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욥기의 가치(價値)는 신(神)이 있다거나, 없다거나, 하는 논쟁이 아닙니다. 그런 논쟁이라면, 우리 주위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고, 욥기가 만일 그런 작품이라면, 결코 수준이 높은 작품이라고 말할 순 없습니다.
하지만 욥기는 같은 하나님을 믿는 등장인물들이 나타나서 자기가 믿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아주 열심히, 또는 온 힘을 다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들이 모두 옳으면서도 뚜렷한 차이를 보이고 있고, 그런 중에도 대화가 점점 더 높은 수준으로 발전하고 있는 점입니다.
욥기의 대화들은 참으로 훌륭한 신앙 중에서도 누구의 신앙이 더 역동적이고, 더 하나님의 뜻에 가까운가? 하는, 신앙의 열렬한 콘테스트(contest)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욥과 세 친구들 중에서 누구의 말이 옳고, 누구의 말이 틀린가? 하는 수준이 아니라, 다 옳고 훌륭한데, 누구의 신앙에 더 하나님의 뜻에 가까운가? 하는 것을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욥기는 하나님에 대한 바른 신앙을 가장 자연 스럽게 표현하면서도 가장 드라마틱하게 표현한 가장 수준 높은 글입니다.
그래서 욥기는 문학 장르로 보면, 드라마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두 사람이 번갈아가면서 대화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 좀 길게 이야기를 하면, 그 다음 사람이 그 말을 받아 좀 길게 이야기하는 식으로 이루어진 고대(古代)극의 일종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Ⅰ.욥의 신앙 성경에 보면 욥에 대하여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1:1절)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욥은 우스 땅에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서 우스가 어디냐? 하는 문제가 생기는데, 대개 우스를 에돔 북부 지방으로 보고 있습니다. 욥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에돔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아주 잘 믿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흔히 우리가 생각하기는 옛날 팔레스타인 땅에는 오직 이스라엘 사람들만 하나님을 믿은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결코 그렇지 않았던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에 대한 지식(智識)이나, 계시(啓示)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집중되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방인들 중에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욥기의 한 가지 놀라운 특징은 등장하는 인물들이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욥기에서는 욥이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에돔 사람인데, 하나님을 아주 잘 믿는 주인공으로 나타나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것은 이미 고대(古代)에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이스라엘 사람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을 잘 보여 주는 증거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궁금한 것은 과연 욥은 언제 사람이며, 누가 욥기를 썼느냐? 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분명한 근거는 없습니다. 다만 제 생각으로는 욥은 실제로 있었던 실존(實存)인물인데, 그 사람을 소재로 다른 극작가(劇作家)가 솔로몬 시대에 썼다고 보는 것입니다. 즉 누군가가 전혀 존재하지도 않았던 가공(加工)의 인물인 욥을 만들어 욥기라는 작품을 만들어 쓴 것이 아니라, 욥이라는 인물이 실제로 있었는데, 누군가가 그의 이아기를 듣고, 자신이 살을 붙여서 이런 드라마 형태의 작품을 만들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욥이 아브라함이나, 모세 때,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계보(系譜)가 아닌, 이방인 중에서 아주 진실한 신앙을 가졌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곧 이 욥기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욥이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라,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더욱 흥미진진한 드라마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성경은 욥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소개했습니다. 이것이 나중에도 욥을 설명할 때마다 계속 후렴(後斂)처럼 나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사탄 앞에서 욥을 칭찬하시면서 8절)...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여기“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것” 이 당시 바른 신앙의 표준이었던 것 같습니다. 즉 누군가가 “바른 신앙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것” 이 자동적으로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신앙(信仰)이라고 하면“하나님을 경외(敬畏)하는 것”이 가장 먼저 나와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에도 보면“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했습니다.
놀랍게도 욥기에는 신앙에 대해“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세 번째로 나옵니다. 우리는 다른 모든 것이 하나님을 경외(敬畏)하는 데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즉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거짓말을 못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마음이 온전 하려고 애를 쓰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악에서 떠나려”고 합니다.
그러나 욥기는“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처음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세 번째 나오고 “온전한 것”이 가장 먼저 나옵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아마 이때 사람들은 그만큼 온전한 신앙을 사랑했던 것 같습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고, 적어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 마음이 깨끗해야 하고,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하며. 악한 것은 모두 버리고 떠나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욥기에서 보는 신앙은 이방인으로서 처음 하나님을 믿는 그런 단계가 아니라, 하나님을 다른 어떤 것보다 사랑하고, 하나님 앞에서 온전 하려고 무지 애를 쓰는 단계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온전한 것이 무엇일까? 마음속에 욕심이 없는 것입니다. 욥 시대 사람들은 적어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 마음이 온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마음속에 구질구질하게 욕심이나 야망(野望)이나 정치적(政治的)욕망(慾望)을 갖고 있다는 것은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정직(正直)했습니다. 정직(正直)하다는 것은 사실을 그대로 다른 사람에게 다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보통 거룩에 대한 열정을 갖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웬만한 것은 말하지 않거나, 과장(誇張)함으로 진실하게 말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욥은 정직했습니다. 또 하나님을 경외(敬畏)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을 인식하고,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악(惡)에서 떠났습니다. 일단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악(惡)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있으면,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일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그러나 저는 욥만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당시에 바른 신앙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면, 다 이렇게 살았던 것 같습니다. 즉 서로 경쟁하듯이 더 온전 하려고 했고, 더 정직하려고 했고, 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서로가 악(惡)에서 떠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성경은 욥이 그렇게 했다고 되어 있지만, 적어도 욥의 세 친구들이나, 당시 바른 하나님의 신앙을 가진 자들은 그렇게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이 표현이 마치 후렴(後斂)처럼 계속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예(例)가 웨슬리 형제들이 옥스퍼드에서 만들었던 ‘홀리 클럽’과 같은 것입니다. 이들은 서로 약속을 하고 더 경쟁적으로 기도하고, 금식하고, 전도하고, 교도소에 방문을 했습니다. 미국의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는 혼자 하나님 앞에서 결심을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몇 시간 이상씩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나쁜 습관을 멀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결심(決心)과 약속(約束)이 좋지 않은 점도 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율법주의로 빠질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홀리 클럽 멥버 중에서 조지 휫 필드는 너무 금식을 많이 해서 거의 병들어 죽을 지경까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홀리 클럽에서 일찌감치 빠져 버렸습니다.
이것이 복음적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욥의 이런 결심이나 생활을 귀하게 보셨습니다.
우리는 한 번씩 이런 결심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니엘도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갔을 때, 바벨론 왕의 진수(珍羞)를 먹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물론 우리가 행위(行爲)로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백성이고, 자녀로서 한 번씩 나의 삶 가운데,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것들을 찾아서 청산하고, 다시 한 번 거룩을 향한 열정을 가지는 것은 대단히 좋은 일이요, 개인의 신앙 심령 부흥을 위해 아주 필요한 일입니다.
아마 욥은 어느 순간 친구들과 같이했는지, 아니면 자기 혼자 했는지, 모르겠지만, 하나님 앞에서 깨끗한 믿음을 가지고 정직하며, 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악(惡)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열심히 지키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욥은 하나님으로부터 얼마나 복을 많이 받았는지, 사실 이 세상에서는 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2-3절)그에게 아들 일곱과 딸 셋이 태어나니라. 그의 소유물은 양이 칠천 마리요, 낙타가 삼천 마리요, 소가 오백 겨리요, 암나귀가 오백 마리이며, 종도 많이 있었으니.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자라”
사실 욥이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부족한 것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욥은 마음이 깨끗한 자였고, 도덕적으로도 흠이 없었고, 물질적으로도 많은 복(福)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아마 신앙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잘 믿고, 물질적으로 복(福)받고, 자식들이 잘되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욥기1:1-3절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그 뒤에는 더 읽어 볼 것도 없고, 생각할 것도 없습니다. 즉 하나님을 잘 믿고, 물질적으로 복(福)받고 자식들 잘되면, 되는 것이지, 더 필요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미 욥 당시나, 솔로몬 당시에 바른 신앙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 보편화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질문은 욥이 도덕적으로 완전하고, 하나님을 잘 믿으며, 자식도 열 명이나 되고 물질적으로도 많은 복(福)을 받았다면,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는 것이 아닐까? 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욥의 신앙의 진정성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문제가 제기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즉 한편으로 욥이 복(福)을 받은 부자(富者)로서 온전하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惡)에서 떠난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니까 거짓말 할 필요도 없고, 더 욕심을 낼 필요도 없고, 악(惡)을 떠나는 것이 아니냐? 는 비판도 가능합니다. 사람은 참 이상한 것이 남이 잘되고, 성공하는 것을 좋은 눈으로 보고, 기뻐하고, 축복(祝福)하는 사람도 있지만, 전혀 생각하지 못한 부정적 시각(視覺)으로 보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똑 같은 것이 하나님 앞에서도 문제로 제기되고 있습니다.
Ⅱ.욥의 완벽주의 우리가 욥기 1:1-3절까지 내용만 보면, 욥의 신앙에서 전혀 문제점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욥이 생각하고,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 4절부터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불완전(不完全)성에 대한 욥의 고민입니다. 4-5절)그의 아들들이 자기 생일에 각각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그의 누이 세 명도 청하여 함께 먹고 마시더라. 그들이 차례대로 잔치를 끝내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하게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욥의 고민(苦悶)이 어디에 있습니까? 인간은 아무리 결심하고, 노력을 해도 결코 온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아무리 노력하고, 결심을 해도 죄(罪)를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죄(罪)가 우리 마음속에 있고, 언제나 죄(罪)를 지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는 죄(罪)를 짓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마음으로는 이미 죄(罪)를 짓습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입으로 죄(罪)를 짓습니다. 때로는 죄(罪)인 줄 알면서도 죄(罪)를 짓습니다. 즉 우리는 죄(罪)를 좋아하고, 어느 때는 너무나 죄(罪)를 짓고 싶어 견디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욥의 고민(苦悶)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즉 인간은 도저히 온전할 수 없고, 정직(正直)할 수 없고, 하나님 앞에서 완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고민했던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론적(理論的)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여러 가지 어려움에 대해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모든 위험으로부터 지키시며, 적(敵)의 공격으로부터도 막아주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이론적(理論的)으로는 그렇다 해도 아무리 이스라엘 백성이라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죄(罪)를 짓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죄(罪)를 지으면, 하나님의 징계(懲戒)가 오고, 여러 가지 어려움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을 쳐도 결국 실패하므로 징계를 당하고, 말씀대로 살아도 나중에 징계가 오니까 어차피 징계가 올 것이면, 아예 말씀을 버리고, 세상으로 가자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려고 무진 애를 쓰는 데도 불구하고 넘어지고, 연단 받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훈련입니다. 이것은 정상적으로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재대로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크면서 자꾸만 넘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이상 크면, 넘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예 말씀을 버리고, 세상으로 가는 것은 멸망(滅亡)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살려고 애를 쓰지만, 어려움이 오고, 연단(鍊丹)이 오는 것은 받아 들여야 합니다. 그것은 결코 나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을 믿지 못해서 세상으로 나가서 잘 되는 것은 망(亡)하는 일입니다.
욥의 고민(苦悶)이 무엇입니까? 자식들이 아무리 죄를 짓지 않는다 하더라도 잔치하면서 농담(弄談)하고, 헛소리해서 마음속으로는 분명히 죄(罪)를 지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욥은 자식들이 마음으로 지었을 죄(罪)를 위해 자식 수만큼 번제(燔祭)를 드렸습니다. 이것은 물론 하지 않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만, 욥의 완벽주의(完壁主義)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욥의 마음속에는 지금의 축복(祝福)이 불안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많은 축복(祝福)을 받았지만, 혹시라도 마음이나, 입으로나, 행동으로 죄(罪)를 지으면, 지금의 복(福)을 다 날릴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있었던 것입니다.
욥의 고민은 인간은 결국 죄(罪)를 지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언제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祝福)을 거두어 가시고, 심판(審判)하실지 모르는 불안한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욥은 모든 것을 다 가졌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은 불안(不安)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죄(罪)를 지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욥은 어떻게 해서든지 자식들도 완전해지도록 생일만 되면, 자식 수대로 번제(燔祭)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우리도 어느 날 하나님의 복(福)을 많이 받았을 때, 감사하기보다는 어떻게 해서 나 같은 죄인이 이런 복을 받았을까? 갑자기 하나님께서“네 받은 복을 다 내 놓으라”고 하시면, 어떻게 할까? 하는 불안이 있을 것입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이 주신 복(福)을 우리가 인정하고, 감사하면서 누리자고 말하면서도 그것이 너무나도 힘들 때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이렇게 많은 복(福)을 받을 자격이 없으며, 이런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가 믿음으로 해결되어야만 정신병에 걸리지 않고, 아름다운 믿음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요셉이나, 에스더는 노예나 전쟁 포로로 있다가 최고의 자리로 올라간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신에 대해 얼마나 심한 정체성의 혼란이 있었겠습니까?
그렇지만 그들은 정신병에 걸리지 않고, 자신들의 사명(使命)을 잘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신들의 내면(內面)을 빚었기 때문입니다.
즉 한 번 더 치밀한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으로 우둘투둘한 내면(內面)을 섬세하게 깎아서 멋진 속사람을 만들었기 때문에 그 복(福)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복(福)만 주신 다고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복(福)과 함께 우리를 사랑해 주셔야 하고, 내면(內面)을 아름답게 만들어 주셔야 가능한 것입니다.
Ⅲ.천상의 회의 여기서 욥기는 엄청난 비약(飛躍)을 하게 됩니다. 저자(著者)는 카메라를 이 지상(地上)에서의 욥 모습을 보여 주다가 갑자기 하나님 앞으로 옮겨 비추어 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욥의 문제가 어떻게 비추어지며, 다루어지는지 보여 주고 있습니다.
6-7절)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탄도 그들 가운데에 온지라.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땅에 두루 둘아 여기저기 다녀왔나이다.” 대개 이 세상의 문학(文學)에서는 세상 이야기를 하다가 천상(天上)의 이야기로 넘어가면, 실제성이 많이 떨어지면서 무엇인가 공상(空想)속의 이야기 같은 비(非)현실적 이야기로 비추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욥기의 분위기는 다릅니다. 욥기는 이미 하나님 앞에서 더 거룩하고, 온전하게 살려고 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경쟁하는 자들을 염두(念頭)에 두고 쓴 것이기 때문에 천상(天上)의 회의(會議)는 엄청난 충격으로 받아 들여 지게 됩니다.
과연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바로 믿으려고 애쓰고, 지은 죄(罪)마다 회개(悔改)하고, 번제(燔祭)물을 드리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어떻게 비추어 질까?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아니하셨습니다.
결국 우리에게 궁금한 것은 욥이 이 세상에서 온전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惡)에서 떠나며, 자식들을 위해 생일마다 번제(燔祭)를 바친 것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결과를 가져왔느냐? 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보류(保留)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의 믿음이나, 제사를 온전하다고 판단하신 것이 아니라, 놀랍게도 사탄(詐誕)의 견해(見解)를 물어보신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놀랍게도 욥의 모든 불행(不倖)은 하나님께서 사탄(詐誕)앞에서 그의 믿음을 칭찬하셨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욥을 칭찬하지 않으셨다면, 사탄(詐誕)이 욥을 그만큼 물어뜯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탄(詐誕)에게 욥을 칭찬하시면서 사탄(詐誕)의 견해(見解)를 물어 보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사탄(詐誕)의 직책(職責)이 무엇이었나? 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탄(詐誕)에게“어디서 왔느냐?”고 물어 보시니까 사탄(詐誕)은 7절)...땅을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다”고 했습니다.
사탄(詐誕)의 직책(職責)은 요즘으로 치면, 형사나 검사와 같은 것입니다. 즉 천사나 인간이나 다른 피조물 중에 죄를 지은 일이 있으면, 하나님 앞에 가지고 와서 고발(告發)하는 직책(職責)입니다.
그래서 사탄(詐誕)의 0|름의 뜻을“참소 자”인데, 다른 말로하면 고발 자(告發 者)입니다.
하나님께서 사탄(詐誕)의 견해를 물어보신 것은 반드시 사탄(詐誕)의 의견(意見)이 있어야 한다거나, 욥의 신앙을 몰라서 물어 보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욥의 신앙에 대해 자신이 있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께 인정받으려면, 사탄(詐誕)앞에서 아무 흠이나 티끌이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탄(詐誕)을 두신 이유는 적어도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고 하면, 사탄(詐誕)이 아무리 현미경(顯微鏡)을 갖고 죄를 파고 들어도 깨끗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탄(詐誕)이 가진 믿음에 대한 놀라운 정의(正義)가 나옵니다. 9-10절)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심 때문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의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의 소유물이 땅에 넘치게 하셨음이니이다.”
사탄(詐誕)이 욥을 고발하는 방식이 몇 날 며칠 욥이 다른 사람들 몰래 이차원적으로 욥의 신앙을 공격하면서 하나님을 충동(衝動)질했습니다.
즉 욥이 이렇게 훌륭한 신앙을 가진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너무나 사랑하시고, 그의 생명(生命)과 재산(財産)을 너무나 끔찍하게 지켜 주셔서 그런 것이 아니냐? 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탄(詐誕)의 신앙에 대한 기준(基準)이 나오게 됩니다. 즉 신앙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복 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정직하고, 온전한 것으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 신앙은 누구든지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적어도 진짜 신앙인이 되려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가져가시고, 징계하시고, 벌거숭이로 만들어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온전하여 악을 떠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축복하셔서 잘 믿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탄(詐誕)이 말하는 바른 신앙은 어떤 시련(試鍊)이 오고, 어려움이 닥치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아무리 부당한 일을 하셔도 그분을 사랑하고, 입으로 범죄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경외해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탄(詐誕)은 무엇이라고 하나님을 충동(衝動)질 합니까? 11절)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여기서 우리가 놀라게 되는 것은 사탄(詐誕)이 갖고 있는 신앙의 정의(正義)가 우리보다 훨씬 더 높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결국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고, 죄를 버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요일4:10절)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찬송가 310 *아 하나님의 은혜로* 그러나 사탄(詐誕)은 그것이 바른 신앙이 아니라는 말합니다. 적어도 바른 신앙이 되려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가져가시고, 우리를 가장 비참(悲慘)하게 만드셔도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사탄(詐誕)이 가진 신앙의 정의(正義)입니다.
그러니까 사탄(詐誕)이 가진 신앙에 의하면, 우리는 모두 엉터리 신앙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고민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일단 사탄(詐誕)의 기준(基準)이 옳다고 여기지는 않지만, 일리가 있다고 보십니다.
욥의 신앙은 사탄(詐誕)의 기준(基準)도 능히 통과한다고 믿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욥이 더 높은 신앙의 시험(試驗)을 받기 위해 고통당할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굉장히 아프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고민은 욥의 신앙을 이 세상에서 온전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惡)을 떠난 신앙으로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다시 한 번 불 시험(試驗)을 통과해서 어느 누구도 감히 넘겨 볼 수 없는 최고의 신앙의 자리로 올라가게 하실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불 시험(試驗)을 아무도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모두 불 시험(試驗)을 당하지 않고, 그렇다고 해서 최고의 신앙도 가지려고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욥 시대의 신앙의 주제(主題)는 누가 가장 거룩한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욥이 마음속으로 가장 갈망(渴望)했던 것이 있었다면, 하나님 앞에서 가장 거룩한 자가 되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본인(本人)이 전혀 원하지도 않는 복(福)을 주시려고 이런 시련(試鍊)을 허락하셨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욥은 원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욥은 구체적으로는 잘 몰랐을 것입니다. 이제 드디어 하나님의 허락(許諾)이 떨어졌습니다. 12절)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탄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
하나님께서는 욥이 최고로 어려운 시험(試驗)을 통과하도록 사탄에게 허락을 내리셨습니다. 이제 욥은 하나님 앞에서 바른 신앙이 무엇인지, 가장 경건한 것이 무엇인지, 고도의 훈련(訓練)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탄(詐誕)에게 두 가지는 손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는 욥의 목숨이고, 다른 하나는 욥의 신체(身體)였습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알아서 하게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연단(鍊丹)받을 때,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죽지 않을 정도로 굴려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교만(驕慢)과 거짓과 위선(僞善)의 기름이 완전히 다 짜져서 없어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신앙은 단순히 하나님이 복(福)을 주셔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아무것이 없어도 심히 부당한 취급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것입니다. 이것을 이겨내지 못하면, 상(償)이 없을 것입니다. 욥의 경건(敬虔)은 보류(保留)되었습니다. 즉 이 모든 시험(試驗)을 이긴 후에 상(償)을 주시려고 보류(保留)된 것입니다.
우리는 조금만 억울한 일을 당해도 화가 나서 견디지 못합니다. 즉 입에서 말할 수 없는 저주(咀呪)를 쏟아 내야만 직성이 풀릴 것입니다. 그때 사탄(詐誕)은“또 한 명 실패했다”고 좋아 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다시 한 번 누구를 대상으로 믿어야 할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들인가? 아니면 교회 건물인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인가? 를.... 찬송가 545장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다음카페 교회갱신 성경연구원 카톡 선교회 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