엡 1:1-6절) 감사할 수밖에 없는 이유 34. 사도 바울은 이 에베소서를 로마 옥중(獄中)에서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에베소서와 빌립보서 골로새서를 옥중서신(獄中書信)이라고 부릅니다. 에베소서는 이사야의 고린도라고 부를 정도로 세속적으로 타락한 항구도시였습니다. 에베소에는 거대한 아데미 신전(神殿)이 있었는데, 그곳은 우상숭배와 음란(淫亂)의 중심지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큰 부흥을 일으켰을 때, 마술사(魔術師)들이 마술 책을 모두 다 불태우고, 예수 믿는 놀라운 사건도 있었습니다.
또 사도 바울은 에베소의 두란노 서원이란 곳에서 2년 동안 많은 제자들을 길러 인근 도시에 목회자나 전도자로 파송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편지를 보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이 교회와 비슷한 문제가 다른 교회에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문제 첫째는,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 사이의 문제였습니다. 그 당시 교회는 아직 교파분열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에는 도저히 하나가 될 수 없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즉 그들이 생각하는 것이나, 생활하는 것이나, 문화적 풍습들이 너무나 달랐습니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왜 이방인 교인들을 용납해야 하는지? 이방인 신자들의 입장에서는 왜 유대인들을 배척해서는 안 되는지? 분명히 깨달아야만 했던 것입니다.
신앙은 우리는 우리끼리만 믿는 것이 아니라, 거대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의 한 백성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거대한 하나님 나라의 축복에 대하여 우리는 알 필요가 있습니다.
둘째는, 믿지 않는 자들과의 생활방식의 차이였습니다. 그 당시 믿지 않는 자들의 생활은 말 그대로 음란하고, 방탕하고, 거짓말하고, 술 취한 생활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들은 믿고 난 후에 왜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지를 가르칠 필요가 있었습니다.
아무리 예수 믿는다 해도 우리 안에는 죄 짓고 싶은 마음이 있고, 다른 믿지 않는 사람들처럼 타락하여 살고 싶은 본성이 있습니다. 그것에 대해 왜 우리는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지를 알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셋째는 우리에게는 한 영혼을 빼앗으려는 무서운 영적 전쟁이 있습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사람들과의 싸움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사탄과의 전쟁입니다. 특히 에베소와 같이 세속적이면서도 부흥이 일어나는 곳에서는 사탄과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 치열한 영적 전쟁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영적 전쟁에서 철저하게 무장되어 있어야 하고, 영적인 고지(高地)를 정복해야 합니다.
실제로 우리가 살고 있는 주위에는 타 종교와 미신(迷信)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곳에서 부흥이 일어날 때는 반드시 치열한 영적 전쟁에서 이겨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내가 이것을 하고 싶어 한다”든지 혹“나는 이런 것을 죽어도 싫어한다.”는 식으로 나 중신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뜻에서부터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에베소서의 장점(長點)은 오늘날 이 시대 현실에서 겪고 있는 문제들을 우리의 입장에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수직적(垂直的)으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풀어내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풀어야 할 자신의 문제가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왜 내가 건강한 몸을 가지지 못했는지, 이해되지 않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도대체 하나님께서 이 복잡한 시대에 나를 향한 계획이 무엇인지? 알기를 원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해답을 찾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베소서는 성경의 많은 서신들 중에서 가장 깊이가 있고, 실제적인 장점(長點)을 가지고 있습니다.
I.하나님의 뜻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사도 바울은 먼저 에베소 교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이렇게 인사하고 있습니다. 1:1절)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그는 먼저“하나님의 뜻”에서부터 답(答)을 찾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무엇보다 로마에 가서 복음 전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는 로마 감옥(監獄)에 갇혀 있습니다. 이 모순(矛盾)을 그는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으로 사도가 된 나 바울”입니다.
물론 바울도 인간이기 때문에 감옥(監獄)에서 이렇게 고생하는 것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한 평생을 다니면서 복음 전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캄캄하고, 외로운 감옥(監獄)에 갇혀 있고,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물론 그는 처음에 감옥(監獄)생활에 굉장히 답답하기도 했을 것이고, 감옥(監獄)안의 부당한 일들에 대하여 분노(忿怒)를 느끼기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도“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보통“하나님의 뜻”이라면, 체념적(諦念的)의미로 사용할 때가 많습니다. 즉 자신이 이런 형편에 있는 것에 대하여“무슨 하나님의 뜻이 있겠지”라는 식으로 체념(諦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결코 감옥(監獄)안에서 체념하지 않았습니다. 감옥(監獄)이라는 어려운 환경에서 하나님의 말씀 속을 깊이 들어가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믿는 우리들 마음속에 부어진“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란 것을 캐내게 되었습니다.
한 걸은 더 나아가 이 세상에 있는 교회가 얼마나 영광된 집단이며, 복(福)받은 공동체인지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죄(罪)가 가득한 이 세상에서 믿음의 선(善)한 싸움을 싸우는 것이 얼마나 멋진 일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황무지(荒蕪地)에서 성(城)의 아름다움이 잘 보이고, 들판에 있기 때문에 성(城)안의 등불이 더 뚜렷하게 보이는 것처럼, 사도 바울도 감옥(監獄)안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복(福)을 더욱 잘 깨달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찾고 있습니다. 마치 금(金)을 캐는 사람이 금덩이를 찾아 땅 여기저기를 파헤치듯이, 왜 우리가 여기에 살아야하며, 하나님은 나를 어디에 쓰시려고 하는지? 하나님의 뜻을 찾고 있습니다. 이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아무데나 파헤친다고 다 금(金)이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또 무턱대고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기를 기다려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속사람을 하나님의 영적(靈的)복(福)으로 채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금덩이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금(金)덩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말씀으로 변화된 우리들이 모인 교회가 영원히 빛나는 시온성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교인들을 향해“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실 에베소와 성도는 잘 어울리지 않는 실체였습니다. 왜냐하면 에베소라는 도시는 그 당시에 가장 세속적인 타락(墮落)한 도시였습니다. 즉 술집이 많고, 마술(魔術)하는 사람들이 많고, 음란(淫亂)한 짓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사는 크리스천들이“성도(聖徒)” 즉“거룩한 자들”인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도저히 사람 살 곳이 되지 못하는 에베소에 사는 교인들에게’라고 하든지, 아니면“도저히 그런 곳에서 어떻게 아직까지 견디고 있습니까? 라고 에베소 교인들에게 말할 것 같은데, 사도 바울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은 더 이상 이 세상의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곳에 살든지, 당당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 수 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크리스천을“성도(聖徒)”라고 불렀다고 해서 죄가 조금도 없는 완전히 거룩한 자들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물론 교인들 중에는 아직도 세상 버릇이 남아 있는 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즉 한 잔씩 술을 걸치거나, 욕하기도 하고, 좋지 못한 구경거리를 찾아다니는 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성도(聖徒)”인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당장 세상 적 모든 나쁜 습관들을 다 때려 부수고, 하루아침에 천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안에는 아직 죄(罪)의 습관들이 남아있고, 죄에 대한 미련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죄의 유혹에 넘어가 죄짓는 행위를 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결코 이 죄가 우리를 기쁘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즉 죄가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의 기쁨을 빼앗아 가고, 우리를 거의 질식시킬 정도로 답답하게 만듭니다.
결국 우리 안에 있는 죄를 모두 다 토(吐)해 내기 전 까지는 성령의 기쁨이 회복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곧 우리 안에 하나님의 거룩한 영(靈)이 계신 증거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기쁘고, 성령 충만하다가도 혈기(血氣)를 부리거나, 음란(淫亂)한 생각을 하거나, 거짓말을 하면, 한순간에 이 기쁨이 소멸되어 버리는 것을 느낍니다.
마치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 같고, 내 속에는 성령이 안 계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감동을 회복하려면, 죄지은 것 이상으로 울어야 하고, 고백해야 하고, 눈물을 짜내야 합니다. 그러면 겨우 예전의 그 기쁨이 다시 회복됩니다.
우리는 결코 완전하기 때문에 성도(聖徒)인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성도(聖徒)인 것입니다. 결국“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우리의 운명(運命)을 결정하는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결국 인간의 운명(運命)은“그리스도 안과 그리스도 밖” 둘로 나누어집니다. 즉“그리스도 밖”에서는 아무리 훌륭하고, 인격적인 사람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만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도(聖徒)는 결국“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인 것입니다. 또“신실한 자’로 번역된 헬라어‘피스토스’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①믿는 자” ②우리 번역처럼“신실한 자”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 번역은 믿는 자라고 하지 않고,“신실한 자”라고 했습니다.
결국 우리 신앙에는 두 가지가 모두 다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믿는 자들”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것은 그들이 예수를 믿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습니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을 믿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백성을 세상 사람들과 영원히 분리시키는 것은 곧 이“믿음”입니다. 하지만 이“믿음”은 우리를 다른 사람으로 변화시키기 시작합니다. 즉 이 믿음이 우리를“신실한 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즉 변덕이 심했고, 이기적이었으며,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믿음이 우리를 보석(寶石)같이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곧“신실한 자”입니다.
이 세상에 다른 것들은 결코 오래가지 않습니다. 즉 쇠붙이들은 강하지만 얼마 있지 않으면, 녹슬어버립니다. 그러나 보석(寶石)은 아무리 오래가도 그 찬란한 빛이 없어지지 않고,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되었을 때, 보석(寶石)같이 됩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며, 우리 한사람 한사람은 대단히 가치(價値)있는 사람으로 변하게 됩니다.
2절)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먼저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 지어다”라고 인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좋은 인사(人事)를 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왜냐하면 인사(人事)하는 것이 서로를 축복(祝福)하는 것이며, 그대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심지어 우리는 서로에 대하여 좋은 생각만 가져도 그대로 이루어질 때가 많습니다. 하물며 이것을 말로 표현했을 때는 더 잘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많은 인사가 필요하지만, 그 중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은혜와 평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서“평강”은 소극적으로 내면적(內面的)갈등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즉 평강이 없다는 것은 갈등 가운데 있고, 내면적 분쟁이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 몸에 좋지 않은 바이러스(virus)가 들어오게 되면, 몸은 그것을 막아 내느라고 몹시 아픕니다. 열이 나기도 하고, 콧물이 흐르기도 하고, 몸에 통증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몸이 그 바이러스(virus)를 이겼을 때는 온 몸이 상쾌하고, 정신도 맑아지고, 아주 힘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사탄은 자주 우리에게 정신적 독(毒)을 주사해서 마음을 아프게 하고, 영혼을 병들게 합니다. 심한 경우는 우리를 영적 침체(沈滯)에 빠뜨리기도 합니다이때 우리가 이 독(毒)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아주 강력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즉 아주 강한 페니실린(penicillin)주사를 맞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같은 아주 강(强)한 주사를 맞으면, 아무리 독한 바이러스(virus)라 하더라도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무조건 체념(滯念)하고 꾹 참는다 해서 평강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진리(眞理)로 우리를 이해시켜 주셔야 합니다. 또 어려움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르는 길을 처음 갈 때, 굉장히 마음이 불안합니다. 때로는 식구들끼리 다툴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원하던 표지(標紙)판이 나오면, 기뻐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바른 길을 가고 있는 것이 확인되기 때문입니다. 가끔 많은 성도들이 어려움 중에서 말씀을 듣고, 굉장히 기뻐하면서 감사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이유는 자신들이 이런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이고, 하나님께서 축복(祝福)하시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까 적어도 자신들이 올바른 길을 가고 있다는 확신이 드는 것입니다. 그때, 눈물을 흘리면서 기뻐하고 좋아합니다. 이것이 평강(平康)입니다.
또한“은혜”라는 것은 사탄의 공격으로부터 우리도 모르게 보호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대기(大氣)위에는 오존(ozone)층이 있어서 몸에 해로운 방사선(放射線)이 들어오면, 차단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혹은 운석(隕石)이 떨어지면, 대기(大氣)가 태워 버려서 우리를 안전하게 합니다.이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쿠션(cushion)같은 역할을 합니다. 그러기에 높은 데서 떨어져도 부러지지 않고, 뼈가 부러지지 않고, 혹은 무슨 물건이 떨어져도 우리가 크게 다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지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가운데, 얼마나 많은 위기로부터 보호받고 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은혜는 우리를 보호하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힘을 주고, 지혜(智慧)를 주어서 어떤 위기를 능히 이기게 합니다.
Ⅱ.하늘에 속한 신령 복 이제 드디어 우리는 에베소서의 진수(眞髓)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즉 이제 우리는 드디어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들어 볼 수 없는 천상(天上)의 소리를 오늘부터 듣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이 말씀이 너무나 아름답고, 놀라워서 우리를 멍하게 할지도 모릅니다우리는 이것이 가지는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하나님의 지성소(至聖所)에서 들을 수 있는 최고의 복(福)된 말씀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3절)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여기서 놀라운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보고, 듣고, 갖기를 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복(福)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좋은 것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즉 이 세상에 자연(自然)이나, 땅은 너무나도 아름다운 것들입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스칼렛의 아버지 오하라 씨는“땅이야 말로 그것을 위해 노력하고 애쓰다 죽을 유일하게 가치가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세상의 부귀(富貴)와 영화(榮華)도 얼마나 아름답고 좋습니까? 이 세상에서 많은 지식(知識)을 가진다는 것이 얼마나 사람을 빛나게 만듭니까? 그리고 땅 속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보석(寶石)들이 가득 들어 있습니다. 즉 금(金)이나, 은(銀)이나, 금광석(金鑛石), 석유(石油)같은 것들은 모두 땅 속에서 나오는 것들입니다. 아마 인간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죽지 않고, 살라고 하면, 제일 좋아할 것들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 모두 진짜 축복(祝福)이 아닙니다. 단지 우리 인간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굶어 죽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주신“비상식량”에 불과한 것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식(知識)이나 돈이나 부귀(富貴)나 영화(榮華)모두 이 짧은 인생을 사는 동안 필요한 것들이지, 우리를 영원히 가치 있게 하지는 못합니다.
사람들이 등산(登山)할 때, 비상식량을 충분히 가지는 것은 조난(遭難)당했을 때, 유리합니다. 그러나 비상식량이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죽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또 아무리 비상식량이 많아도 산(山)에서 길을 찾아 내려오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죽음의 자리에서 인도해 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비상식량이 아니라, 우리 내면(內面)을 영원히 빛나게 할“하늘의 복”을 주셨습니다. 그럼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복(福)이 무엇일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知識)입니다. 이 지식(知識)은 우리 맹인(盲人)의 눈을 뜨게 했습니다. 우리로 영원한 세계를 보게 한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知識)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知識)이 너무나도 고상(高尙)해서 세상의 모든 자랑을 배설물(똥)같이 버렸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또 우리에게 주신 복(福)이 무엇입니까? 성령을 주셔서 죄(罪)로 인해 타 버린 우리의 속사람을 다시 만들어 주셨습니다.
전에 불에 타 버린 남대문 같은 우리 속사람을 성령이 오셔서 다시 전보다 더욱 완전하고, 아름답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또 하나님은 우리 안에 지혜(智慧)를 주셨습니다. 마귀를 이길 힘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영원한 성품(性品)을 부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보물(寶物)창고 안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복(福)을 마음껏 다 가져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즉“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입니다.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 은 이 세상에 속한 육적(肉的)인 복(福)과는 구별되는 것들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복(福)은 모두 진짜 복(福)이 아니라, 그림자 복(福)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림자가 진짜인 것처럼 자랑하고뽑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 복(福)은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우리에게 세상적 복(福)을 많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적인 복(福)을 거두어 가기도 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세상적 복(福)에 배불러 있으면, 신령한 복을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것들을 다 잃어버려도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만 붙잡으면, 가장 복(福)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보물(寶物)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자신이 보물(寶物)인지도 모르기 때문에 무엇인가 가져야 가치(價値)가 있다고 착각합니다. 즉 돈이 있어야 가치가 있고, 학벌(學罰)이 있어야 가치가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 자신이 보물(寶物)이기 때문에 다른 것의 도움을 빌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이 짧은 세상을 살면서 할 수 있는 한, 하나님의 보물(寶物)로 우리 속을 가득 채워야 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서 나그네 인생으로 살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채웠습니다. 그랬더니, 삶 전체가 기적(奇蹟)이었고, 능력이었고, 축복(祝福)이었습니다.
즉 이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도 아름답고, 능력 있는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보물(寶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세는 가진 것이 지팡이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처음에 모세가 세상의 학식(學識)이나 경력(經歷)으로 자신을 치장했을 때, 애굽 사람 하나를 죽이고, 도망치는 신세에 불과 했습니다. 그러나 광야를 40년 동안 방황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속에 채우고, 하나님으로 자신을 채웠을 때는, 지팡이 하나로 열 번의 기적이 일어나게 했습니다.
그 이유는 모세 자신이 보석(寶石)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치 있고, 능력 있는 삶을 사는 비결은 직장이 아닙니다결혼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신령한 복(福)으로 나 자신을 채우는 것입니다. Ⅲ.하나님의 예정 우리는 오늘 더 놀라운 하나님의 비밀(秘密)을 듣게 됩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가 이 시대에 태어나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축복(祝福)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예 창세전(創世前)에 하나님의 예정(豫定)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4-5절)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擇)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豫定)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즉 만들어지기도 전에 우리를 미리 축복의 자녀로 예정하시고 택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의 입이 다물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 아예 창세전에 나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하셨다고...?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을까? 사실 이 예정(豫定)의 교리보다 하나님을 더 분리하게 하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미리 예정(豫定)하시고, 택(擇)하셨다면, 택하지 않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즉 왜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골고루 기회를 주지 않으시는 것일까? 왜 하나님은 어떤 사람들만 편애(偏愛)하시는 것일까? 그러면 인간의 의지(意志)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 아닐까?
기왕 예정(豫定)되지 못한 자라고 하면, 아무리 믿으려고 해도 안 될 것이고, 예정(豫定)된 자라면, 굳이 믿으려고 하지 않아도 어차피 운명적으로 믿게 되지 않을까? 이것이 궁금합니다.
사실 이 예정론(豫定論)만큼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 의문을 토(吐)하고, 불만을 쏟아내는 말씀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예정(豫定)은 비밀(秘密)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믿지 않는 자들에게 예정(豫定)을 이야기해서는 안 됩니다 단지 그들의 죄(罪)와 그들에게 임할 무서운 심판(審判)만 말해 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 믿고 난 후, 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게 될 때, 나타나게 되는 것이 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計畫)은 창세전부터였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만들어지기도 전(前)에 이 놀라운 복(福)을 받을 자들을 계획(計畫)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내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즉 이미 그때 하나님은 나의 이름을 아셨고, 나의 존재를 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인간이 너무나 악(惡)해서 그냥 두면, 저절로 하나님을 믿을 자가 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계획(計畫)을 아예 창세전부터 세워 놓으셨습니다. 그리하여 도저히 빠져 나갈 수 없는 은혜(恩惠)로 우리를 인도하셔서 결국 항복(降伏)하게 하시고, 예수를 믿게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온 지난 길을 보면, 나는 아무렇게나 살아온 것 같은데, 하나님은 치밀하게 우리의 삶을 따라오셨습니다. 즉 눈에 보이지 않는 그물로 우리를 몰아오셨던 것입니다.
바다에 아무리 물고기가 많아도 그물이나, 낚시 없이는 한 마리도 잡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은혜(恩惠)의 그물로 잡으셨던 것입니다. 즉 내가 방황하고 있을 때, 조용히 따라오시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손을 보이시고, 창에 찔린 옆구리를 보이시면서 우리를 한순간에 낚아 채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다음 절에서 가장 놀라운 결론(決論)이 나옵니다. 5절)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같은 죄인(罪人)들을 하나님의 아들들로 삼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감히“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이 실감이 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에베소서를 읽은 교인들에게는 정말 실감나는 단어(單語)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당시는 로마의 지배 아래 살던 때였는데, 이 시대의 가장 놀라운 복(福)이“왕족이나 귀족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즉 입양(入養)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왕(王)이나, 귀족(貴族)이나, 부자(富者)들 중에서 자식(子息)이 없는 사람은 노예나 친척 중에서 양자(養子)를 택(擇)했습니다. 그러면 그는 아버지의 지위(地位)와 재산(財産)을 그대로 물려받았습니다. 놀라운 것은 로마 황제(皇帝)중에서 친 자식보다 양자(養子)가 왕(王) 위를 물려받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때 로마가 로마다울 때였습니다.
나중에 진짜 자식들에게 물려주었을 때, 로마는 쇠퇴(衰退)하기 시작했습니다. 자기 핏줄보다 능력 있는 자에게 아들을 물려준다는 것이 로마의 정신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입양(入養)이라는 것은 어마어마한 출세(出世)요, 축복(祝福)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로 입양(入養)이 되었습니다. 즉 왕족(王族)이나, 귀족(貴族)이 아니라, 천사들보다 훨씬 더 높은 하나님의 아들들로 입양(入養)이 된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제기하는 모든 윤리적 문제가 모두 다 풀리게 됩니다. 즉“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으니까 하나님의 아들답게 행하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원래 예수님이 가지셨던 그 어마어마한 영광과 능력과 지위를 그대로 물려받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것이 우리의 신분(身分)이요, 위치(位置)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이 세상에서 얼마 있지 않으면, 썩어 없어질 것들에 목매단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우리가 가난해도 얼마든지 당당할 수 있고, 세상 적으로 인정받지 못해도 충분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란 지위(地位)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계실 때, 학벌(學罰)을 가지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지혜(智慧)가 탁월(卓越)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아들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가난과 질병과 외로움과 소외도 모두 다 이기셨습니다. 그는 또 부자(富者)들에게 굽신 거리지도 아니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의 인정(認定)을 받으려고 쫓아다니지도 아니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하나님의 아들의 존귀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세상의 것들을 주고, 하나님의 아들의 지위를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만족하겠습니까? 그것은 정말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우리는 지금 천사들보다 더욱 높은 지위(地位)를 얻은 자들입니다. 이제 하나님을 친아버지로 부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를 택(擇)하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잘 살고, 행복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①우리로 거룩하고 흠(欠)이 없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우리로 전혀 흠(欠)이나, 티가 없는 완전한 자로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과연 그것이 우리에게 가능한 일일까? 우리로서는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흠(欠)이나 티가 없어지기 보다는 표범같이 얼룩무늬로 만들어진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세상에 살면서 우리를 흠(欠)없는 어린 양(羊)으로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세밀한 성형수술입니다.
②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그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즉 그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자체만 생각해도 찬송이 저절로 나오는데, 그분이 우리에게 향하신 그 은혜가 우리에게 가져온 영광과 축복을 생각하면, 더욱 찬송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죄가 가져온 치명적인 결과는 자신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 자신에 대해 너무나 많이 생각합니다. 그러면 찬송이 나오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의 시선(視線)을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즉 우리 자신을 잠시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러면 영원 전부터 하나님이 나를 예정하시고, 또 이 시대에 태어나게 하셔서 얼마나 세밀(細密)하게 나를 인도하셨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자신을 붙잡고 있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는 자신을 하나님의 은혜의 강(江)물에 풍덩 던져버려야 합니다. 이제는 얕은 물가에서 찰랑거리면서 있지 말고, 깊은 은혜의 바다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제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計畫)에서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놀라운 충격을 받습니다. 이제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을 찬양(讚揚)해야 합니다. 이것이 새 아들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변화된 우리 자신이 가장 놀라운 찬송(讚頌)일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노래를 부르는 것도 찬송이지만, 진정 은혜로 변화된 그 자체가 찬송이요, 그것에 감격해 하고, 감사하고, 누리는 것이 찬송입니다. 우리는 범사에 감사할 것 밖에 없습니다. 만약 감사가 사라졌다면, 우리는 사탄의 독(毒)에 쏘인 것입니다. 즉 우리 안에 평강이 없고, 우리는 지금 마귀의 독(毒)과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부터는 이 엄청난 진리(眞理)로 마귀의 독(毒)을 모두 다 이기시고, 기쁨과 감격을 회복(回復)하시길 바랍니다. 찬송가 40장 *찬송으로 보답할 수 없는* 다음카페 교회갱신 성경연구원 카톡선교회 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