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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일영/기간제 생명

작성자이덕대|작성시간26.06.09|조회수25 목록 댓글 0

기간제 생명/견일영

 

 5년 전 혈액암으로 치료를 받았다. 흔히 말하는 백혈병으로 누구나 두려워 했다. 죽음과 너무 가까운 이 병명을 루키미어라고 원어로 말하여 조금이라도 거리감을 두려는 사람도 있다.

 다행이 나는 4차 항암 치료를 받고, 다 나았다는 판정을 받았다. 그러나 정기적인 검사는 계속되었다. 처음에는 한 달 간격으로 검진을 하다가 3, 6달로 연장이 되었다.

 그때마다 의사는 틀에 박은 듯이 말한다.

 “많이 좋아졌습니다, 좋습니다.”

 나는 학교에서 자로 가득 찬 성적표를 받은 기분으로 병원 문을 나섰다.

 달력에는 검진일과 진료 시간이 적혀 있다. 나는 그것을 볼 때마다 그 기간 동안에는 내가 안전하리라는 생각도 들고, 그 기간이 최소한의 생존 기간이 된다는 느낌도 들었다.

 

 젊은 시절, 내가 가르쳤던 제자가 오랜만에 찾아왔다. 기간제 교사를 희망했다. 여러 학교에 연락하여 빈자리가 있을 때마다 그 곳에서 근무하게 했다. 기간이 다 되어 가면 내가 더 조바심이 나서 미리 자리를 알아보곤 했다. 그런 생활이 몇 년을 반복했다.

 수십 년 전, 그가 남녀 공학인 시골 고등학교에 다닐 때 남학생을 제치고 늘 수석을 했다. 매사에 적극적이고 인기도 좋았다. 교육대학에 진학하여 교사가 되었다는 것까지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40대에 접어든 그가 새삼스레 왜 기간제 교사를 해야 하는지 궁금했지만 물어볼 수가 없었다. 혹시 그의 마음에 상처를 줄 것 같아 가정 형편을 물어볼 수가 없었다. 만날 때마다 묵은 역사책 보듯 옛날 학교 이야기만 했다.

 

 내가 백혈병을 앓게 된 지 5년이 지났다. 꿈같은 세월이었다. 반년 만에 완치가 되고,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게 된 것은 기적이었다. 나는 하나님께 그리고 가족과 모든 주위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나는 이 기간, 재생의 기쁨으로 무엇인가 값진 일을 해 보고 싶었다.

 수필집을 냈다. 인생에 대한 감동을 절실하게 표현하고 싶었다. 서문에 그 느낌을 썼다.

 -영혼은 아름답고 소중하다. 모든 것은 떠나지만 영혼은 남는다. 이제 간이역에 잠시 머무르다 곧 떠나야 할 짧은 시간에 철로 가에 핀 작은 들꽃을 본다. 지난날 보잘것없던 그 작은 꽃이 지금은 왜 그렇게 아름답게 보이는 걸까. 모든 것은 떠날 때 아름답게 보이고 또 그것이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글을 쓰면서 나는 울었다. 내가 사선(死線)을 넘고, 기간제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는 데 대한 감동과 그 감동이 글이 되어 오래 이 세상에 남게 된다는 데 대한 감격이었다.

 

 이 감동의 열기가 아직 식지도 않았는데, 정확히 5년 만에 백혈병이 되살아났다. 재발 치료는 처음 발병했을 때보다 더 힘 든다고 했다. 항암 치료를 계속 6번이나 했는데 병이 나을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검사 결과 이상이 없으니 치료를 중단하자고 한다. 그러면서 매일 먹는 약을 주는데 그 약은 비습관성 진통제였다. 결국 내 병은 완전히 낫지 않는다는 뜻이 아닌가. 평생 진통제를 먹고 아픔만 겨우 참고 견뎌야 한다고 생각하니 불안한 마음만 밀려들었다.

 제자는 기간제 교사를 반복하다가 소식이 뚝 끊어졌다. 기간이 끝났는데 소식이 없다. 명절이 되어도, 스승의 날이 되어도 전화 한통이 없다. 서운한 생각이 들었다. 전화를 해 볼까 하다가도 그의 남편이 어떻게 생각할까 하고 괜한 걱정만 했다.

 몇 년이 지났다. 우연히 들려오는 소식에, 대구 지하철 화재 사고 때 세상을 떴다고 했다. 내가 어떻게 그렇게도 몰랐을까. 사망자가 너무 많아 명단을 끝까지 읽어 보지 못한 것이 후회되었다. 미안한 생각이 가슴을 꽉 채운다.

 

 진료 날짜가 되어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약간 포기한 듯한 말로

 “이 병은 완전히 낫지 않습니다.”

 나는 순간적으로 해석했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 그러니 너무 서둘지 마라.-

 아마 기간제 생명은 정확하게 기간을 채우고 죽는 것이 아니라 기간 중에 어느 날 간이역 울타리에 핀 야생화처럼 시들고 마는가 보다. 선고(先考)께서도 진료 예정 날짜를 많이 남겨 놓고, 처방 받은 약도 많이 남았는데 세상을 떠나지 않았던가.

진통제를 입에 틀어넣는다. 물을 많이 마신다. 많은 물은 약의 강도를 약하게 하여 위에 부담을 줄여 줄 것 같았다. 정해진 이 기간, 나는 이 기간이 불행한 시간이 되지 않도록 내가 아는 의학 상식을 총동원한다. 생에 대한 애착은 어쩔 수 없는가 보다. 삶이 그렇게 소중한가. 생에 대한 비굴한 생각이 내 체통을 구겨놓는다. 지하철 화제 사고가 연상되면서 신뢰감이 떨어진 기간제를 다시 되씹어 본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

 별로 품위도 없는 이 말에 깊은 철학적 의미를 찾아본다. 산다는 것보다 더 위대한 철학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다시 기원한다. 이번 기간을 무사히 다 채우고 다시 생존의 기간을 지정 받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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