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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일영/우체부 아저씨

작성자이덕대|작성시간26.06.09|조회수28 목록 댓글 0

우체부 아저씨/견일영

 

 옛날 시골에서 우체부가 오면 제일 반가웠다. 기쁜 소식도 있고 슬픈 소식도 있지만 어쨌든 기다리던 소식이고, 그가 아니면 먼 데 있는 소식을 전해 줄 사람이 없다. 우체부 아저씨가 산골 외딴집으로 가는 편지 한 통 때문에 10, 20리 산골길을 자전거로 종일 왕복하는 모습을 봤다. 내가 자전거 길밖에 없는 산골에서 근무해 봤기 때문에 그것을 본 기억이 생생하다.

 

 1958년대, 전화기를 가진 집은 극소수였다. 어지간한 공무원 집에도 전화기가 없었다. 모든 통신 수단이 편지로 집중되고, 새로운 소식도 편지에서 알게 되었다.

 

 우체부 아저씨는 새로운 소식을 전하는 데는 천사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러한 시절, 나는 대학교 4학년이었다. 이발을 하면서 신문을 보는데 우체부 아저씨에 대한 노래 가사 현상 모집이 눈에 띄었다. 그때만 해도 이발하는 시간이 많이 걸렸다. 가위질도 오래 했고, 면도도 알뜰히 했다. 머리를 감고, 말린 머리를 다듬어 세우고, 안마까지 하다 보면 1시간을 넘겼다.

 

 그동안 내 머리 속에 우체부 아저씨의 일상과 그로 인한 기쁜 소식의 전달 모습이 머리에 떠올랐다. 집에 와서 그 영상을 바로 글로 썼다.

 

 이집저집 다니면서 편지요, 전보요/ 먼 데 소식 전해주는 고마운 아저씨/ 가방 메고 이곳저곳 수고하며 다니네/ 집집마다 문패 달고 기쁜 소식 기다리자

 

 2절도 1절의 가사와 대구(對句)가 되는 말을 골라 그의 활동상을 더 절실하게 묘사했다.

 

 얼마 후, 신문 광고란에 노래 가사 입선작 발표가 났다. 내 글이 당선작이 되고 가사도 다 실어 놓았다. 가작으로 입선된 두 사람의 명단도 실렸다. 미농지에 타자로 친 공문이 정중하게 배달되어 왔다. 단기 4291516일 날짜로 ‘<우체부 아저씨> 노래를 엄정 심사한 결과 귀하의 작품이 당선작으로 입선되었습니다. 상금 3만 환을 우편환으로 송금하오니 앞으로도 체신사업에 더욱 협조하여 주심을 바라나이다.’ 끝에 체신부 우정국장의 직인이 커다랗게 찍혀 있었다.

 

 나는 그 상금으로 제일 먼저 어머니께 3면 거울이 달린 큰 경대를 사드렸다. 그때는 어머니가 40대여서 참 좋아하셨다. 그리고 나머지 돈도 다 드렸다. 대학까지 마치는 해에 처음으로 효도다운 효도를 한 것 같아 무척 기뻤다.

 

 이 노래는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보급에 힘썼다. 공문을 전국의 초등학교에 보내어 학생들이 즐겨 부르도록 했다. 그해 여름방학 때 방학 과제장 뒤표지에 이 노래를 실어 더욱 애창하도록 했다. 거기에는 집집마다 문패 달고 기쁜 소식 기다리자는 선전 문구가 크게 힘을 실은 것 같다.

 

 당시에는 아파트라는 게 없었고, 다닥다닥 붙은 판잣집에는 번지도 문패도 없었다. 우체부가 편지를 배달하는 데 애를 먹었다. 배달 방법은 대부분 수취인의 이름으로 집을 기억하고, 모르면 부근에 사는 사람들에게 물어 배달하곤 했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이제 연하장이나 부고 같은 것을 보낼 때도 핸드폰 문자나, 이메일로 보낸다. 편지를 세월없이 쓰고 있는 사람은 이제 찾아보기 힘들다.

 

 오래전에 우체부 노래도 바뀌었다. 내가 지은 노래가 고색이 창연한 유물이 된 것이다. 우체부와 얼굴을 맞대는 일도 드물어졌다. 아파트 편지함이나 단독 주택에도 대문 안에 설치된 편지함에 편지만 넣고 훌쩍 떠난다. 반가움도 고마움도 사라졌다. 급한 편지는 없어지고, 전보도 꽃무늬가 새겨진 축전이나 검은 글씨의 조전만 남았다.

 

 바쁘고 급할 때는 핸드폰이 훨씬 빠르다. 언제 어디서나 바로 전달이 가능해졌으니 얼마나 편리해졌는가. 아직도 우체부 노래를 부르며 원시적인 배달을 유지하는 것은 납입 고지서나 모임 통지서, 월간 잡지뿐이다.

 

 세월은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정치가는 개혁과 변화를 입에 달고 다닌다. 옛날, 아주 옛날 내가 어렸을 때는 우표 한 장도 큰돈이었다. 가난한 학생은 우표를 사지 못하여 그냥 고향 부모에게 부치면 수취인이 약간의 벌금을 내고 편지를 받았다. 꾀가 많은 학생은 편지 봉투에 표나 X 표를 기재하여 안부를 전했다. 우표가 없는 편지를 받은 부모는 봉투에 표가 있으면 아들이 무사하다는 것을 알고 수취 거부로 우체부를 그냥 돌려보내고, X표가 있으면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알고 벌금을 내고 편지를 받았다. 그때는 정말 가난했었다. 병원에 한 번 가보지도 못하고 죽은 어린아이가 많았다. 돈이 없어 물을 떠 놓고 빌기만 했다.

 

 체신의 날이 되면 우체부 노래가 방송으로 연달아 나왔다. 우체부를 칭찬하고 격려하는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근래는 체신의 날이 되어도 TV에서 한마디의 언급도 없고, 새로 바뀐 우체부 아저씨 노래도 들어보지 못했다.

 

 스마트폰에서 편지뿐 아니라 사진까지 그것도 실시간으로 동영상을 보는 세상이 되었으니 편지를 칭송하다가는 웃기는 사람으로 취급받는다. 어머니에게 드린 3면경 경대는 지금 어디 있는가. 어머니도 세상을 떠난 지 20여 년이 되었다. 그러나 우체부 아저씨는 지금도 등기나 소포를 들고 현관문 벨을 누른다. 반갑다. 그리고 나는 아주 다정스레 인사를 한다. 그러나 그는 내가 우체부 노래 작사자였다는 것을 모른다.

 그는 약간 의아하게 생각하며 아파트 계단을 내려간다. 그리고 중얼거린다.

 “나이도 꽤 많아 보이는데 젊은 나에게 왜 그렇게 공손히 인사를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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