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직암회소식

탈출기에 나타난 시노드 영성 (직암선교후원회 제9차 시노드 영성 피정 한민택 신부님 말씀) 2

작성자김유근 이레네|작성시간26.06.12|조회수170 목록 댓글 4


한 번은 제가 코로나 전인데 학교 밑 슈퍼마켓에 뭘 사러 갔었는데 거기에 여중학생 둘이 마스크를 쓰고 온 거예요. 그러니까 그 슈퍼자매님이 얘들아, "너희들 왜 마스크를 쓰고 다녀" 그랬더니 "쌩얼이예요 "라고.. 슈퍼 자매님이 "너희때는 쌩얼이 더 예뻐" 라고 말씀하셨지만...

평소에는 약간 좀 가리고 치장하고
숨기는 그러한 것에 익숙해 있는데 실은 그런것이 여간 피곤한 일이 아니잖아요. 이렇게 피정의 시간
특히 하느님을 앞에 모시고 그분 앞에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그 시간은 하느님께는 가릴게 숨길게 없다고 생각됩니다

화장을 다 지우고 가식적인 것도
좀 내려놓고 온전히 자유로운 자녀로 부모님께 이제 신뢰하는 마음으로 정말 다 내려놓고 하느님께 자신의 마음속 이야기, 괴롭고 힘들었던 것까지도 드러내 보일 수 있는 그런 시간이 된다면 자신과도 화해하는 거죠. 그리고 그 모습 그대로가 하느님께 사랑스러운 것처럼 나도 나 스스로를 때로는 부족하고 때로는 상처를 입기도 하지만 또 그 모습 그대로를 내 스스로가 이렇게 안아줄 수 있는 그런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피정안에서 해 보시면 좋을듯 합니다.

탈출기 강의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빠져나와 가나안 땅으로 가는 실제 역사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어떻게 보면 각색을 한 거죠. 그렇게 쓴 책이긴 한데 이게 사실은 범위를 뛰어넘어서 다른 시대를 사는 완전히 다른 상황 속에 있는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굉장히 영성적이고 신학적인 내용을 담고 있고 우리는 거기서 시노달리타스의 어떤 교훈을 얻으려고 하는데 시노달리타스 말고도 훨씬 더 좋은 내용들이 안에 담겨있고 이미 여러분들은 탈출기를 읽으시면서 그런 영적이고 신학적인 의미를 잘 파악하시고 계시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시노달리타스가 함께 길을 걷는 것이라면 탈출기도 길을 걷는 여정 그 자체인거죠 너무나 당연한 것이지만 평소에는 이 두 가지를 잘 연결시키지 못했는데 생각해 보면 아브라함도 계속 길을 갔다고 보여집니다.

하느님을 만나게 되면 길을 갈 수 밖에 없어요. 시노드 여정을 걸을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성경 대부분에 나오는 인물들은
많은 길을 걸었고 예수님도 간간이 집에 가시긴 했지만 잠깐 들어가신 것이고 대부분 길위에 계셨던 것이죠. 그러니까 예수님도 계속 그 시노드 여정, 길위의 여정을 함께 걸었고 부활하신 다음에도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함께 길을 걸으셨던거죠. 그리고 제자들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예수님을 만나면서 어떻게 됩니까?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길을 걷게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든 여정은 다 길에서 이루어지고 있고 그 길은 사실 부르심과 응답의 길입니다. 그리고 길위에서는 어떤 시련이 늘 도사리고 있는데 우리안에 파라오, 어떤 악의 현존, 그리고 육의 끊임없는 유혹, 싸움과 그런 갈등 속에서 시련을 겪으며 걸어갈 수 밖에 없는 그러한 시노드 여정인 것입니다.

부정적인 것까지 다 포함되어 있죠. 하지만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런 섭리안에서도 끊임없이 우리와 함께 이루어 가시는 하느님의 현존이 분명히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런 것들을 우리가 늘 의식하면서 사는 것이 아마도 시노드 여정이 아닐까 합니다.

중요한 주제들을 떠올려 보면서 피정에도 도움이 되고 또 시노드 영성에도 도움이 되는 걸 찾을 수 있는데 먼저 하느님께서 이전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얼마나 고충을 겪으면서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았는지 노예 생활 , 그러니까 자유가 박탈된 상태에서 인간의 존엄성마저 훼손당하는 상태였던 거죠. 그러한 상황을 얘기하고 그 다음에 모세가 여인들의 지혜 안에서 목숨을 부지해 어떻게 살게되었는지 아름다운 이야기로 표현되어 있죠. 그 다음에 모세를 부르시는 하느님 "모세야, 모세야, 예, 여기 있습니다." 라고 했을 때 바로 이 부분은 하느님은 우리 인간을 부르시는 분이시다라는 것이 표현됩니다.

말씀을 건네고 인간의 응답을 기다리시는 분이시라는 것. 인간과 관계를 맺고 대화를 나누면서 친교를 나누고 함께 길을 걷고자 하시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시다라는 것이고 우리들은 어떤 존재냐 하면 바로 부르심을 받고 응답하는 존재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어떻게 알아듣고 읽어낼 수 있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영적인 감수성이 요구되는 거죠.

저는 신학교에 사니까 잠깐 언급드리면 신학교에서는 기숙사 생활을 통해 거기서 사는 법을 배우고 또 학교에서는 강의 듣고 , 식사생활 그리고 영성지도 신부님과 함께 영성생활에 대해서 배우고 또 면담도 하고 또 여러 가지 규정 규칙 같은 걸 지키는 것 기도 생활등 다양한 것을 배우게 되는데 그 모든것, 학교의 학과목까지도 다 통틀어서 그 모든것이 존재하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뭐냐하면 내가 가고자 하는 사제직으로 사제로서의 길로 하느님께서 나를 불러주신다는 걸 내가 알아듣고 그리고 그 확신을 갖고 그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도록 자신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부르심이라는 건 그냥 말이 부르심이죠. 이게 무슨 귀에다 대고 불러주시는 그런것이 아니거든요. 어떤 체험인거죠.
하느님께서 나를 이 길로 불러주시는 강한 이끄심, 끌림 그런 체험이라고 볼 수가 있는 거죠. 그래서 그런걸 읽을 수 있는 영적인 감수성, 식별력을 키우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어떤 학생은 중간에 찾아와 신부님 저 면담좀 그래서 만나보면 저 지금 학교 나갈려고 짐 다 싸 놓고 왔습니다. 지금 나갈려고? 결정을 다 하고 온 거예요. 자기는 더 이상 신학교 생활못하겠다고 ..이런 저런 얘기를 들어보면 학생이 정말 하느님의 부르심이 없어서 이 생활을 접기보다는 친구가 괴롭히거나, 아니면 공부가 잘 안되거나, 동기가 잘 드러나지 않거나, 자신에 대해 실망을 느끼거나 이렇게 다양한 상처들이 있는데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어려움들을 참고 견뎌내고 이겨내면서 조금씩 편해지고 이 길로 부르시는 음성을 더 강하게 알아듣는 과정인데 ...나도 전에 그랬다 하면서 들어주고 내가 객관적으로 봤을 때 너의 상황이 이 길은 아니다 라는 확신이 아직은 안든다 하면서 다독거려주고 나가는 것도 쉬운건 아니다 라고 하면 학생이 수긍을 하고 다시 잘 살아보겠습니다 라며 되돌아가서 짐 풀고 몇 개월 잘 살다가 또 다시 첮아와 다시 짐 다 쌌습니다 라고 합니다. 그래 잘했다 하면서 얘기 들어주고 나면 또 마음이 풀려서 되돌아가 생활을 하는 과정이 몇 번 반복되곤 합니다.

누군가가 자기 고민과 어려움을 공감해주고 들어주는 사람이 필요한데 없으니까 답답해서 온 것입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 설명해주고 이해시켜주고 나도 너처럼 그랬었다라고 확신시켜 주면 다시 되돌아가서 열심히 살게 되는데 그때 그 학생은 신부가 되어 지금 잘 살고 있습니다.

식별하고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
단 한 번에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고 사제 성소뿐만 아니라 여기에 계신 모든 분들, 하느님께서 불러주시는 신앙의 길,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이 거룩한 삶을 살라고 이 길로 불러
주실 때 귓속에다 대고 누구야 하고 불러주시는게 아니라 우리가 살아온 인생 여정 안에 사건들, 만남들 , 굴곡진 여러가지 일들을 통해 인간의 역사와 삶을 통해 나의 마음에 다가
오셔서 나를 이끌어 주신다고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르심을
듣고 식별하고 응답하는 건 어떻게 보면 내가 나의 삶을 우리 각자가 살아온 삶을 순전히 인간적인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그분께서 내 인생에 개입하셔서 어떤 일을 통해서 나를 인도하시고 지금까지 이끌어오셨고. 앞으로 어떻게 이끌어가실 것인가를 바라보게 됩니다.

이것을 읽어내는 힘이 필요한 것이죠. 어떤 분은 평생을 헛살았다 생각하실 수 있지만 하느님과 함께 하는 신앙에서는 어느 것도 헛살음이 없는 것이죠. 다 이렇게 되려고 그리된 것이다라고 성경에서도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살면서 겪었던 그 수많은 고통, 힘들었던 순간들, 상처들, 내가
스스로 지금까지 나의 삶으로 정말 수용하기 어려운 그래서 부정해버리고 싶은 지워버리고 싶은 그런 것들이 있지만 사실 크게 볼 때는 그 모든 것 안에서조차 하느님은 그것을 가지고 나를 이끌기 위한 어떤 도구로 쓰셨다는 걸 우리 스스로 읽어낼 수 있는 영성이 동반되어야 되는 거죠.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활동하시고 또 어떻게 이끌어주시고 또 어떤 길로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지 그런데 대부분 우리 삶에 부정적인 순간들은 다 우리가 지워버리고 또 빼버리고 싶은 그런 생각이 들지만 하느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시고 이끌어주시는 방식은 놀랍게도 우리의 가장 약한 부분을 통해서라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셨던 일중에 그분이 가장 먼저 하셨던 그리고 가장 많이 하셨던 일이 바로 비참한 삶을 사는 정말 지워버리고 싶은 어떤 어두웠던 삶에 들어가시는 거잖아요. 어떻게 보면 하느님께서는 바로 우리 각자의 그런 가장 연약하고 볼품없고 초라한 그런 우리의 모습, 우리의 그런 일들, 그런 상황, 그런것 안에서부터 개입하셔서 놀랍게도 우리를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을 시키신 것처럼 우리의 가장 어두운 곳에서부터 우리와 함께 그곳으로부터 우리를 불러주시고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를 이렇게 이끌어 주신다는 거죠. 그때 당시에는 잘 못 알아듣죠.
이것이 우리 인간의 한계인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의 이야기를
잘 보면요. 하느님 체험 혹은 부활하신 예수님 체험은 그 순간에는 사실 모를 수밖에 없어요. 나중에야 다시 걸어온 길을 뒤돌아 볼 때 하느님께로 가게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돌아보고 살펴볼 때 아 그때 거기서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면서 나를 이렇게 이끌어 주셨구나라고 나중에야 깨닫고 하느님 체험을 고백하게 되는 것이 우리들 인간의 한계인 거죠.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하느님 만날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고 체험할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어느 날 옛날을 돌아보면서 그때 영성교육원에서 시노도 영성 피정을 하면서 아 그때 느꼈던 나의 그 기쁨과 마음의 평화 그리고 그때 생겼던 마음 다시 또 열심히 살겠다는 살아야겠다는 마음의 다짐과 결심 그때 정말 하느님께서 한민택 바오로 신부님을 통해서 우리 안에서 활동하셨구나 라고 얘기하실 수도 있습니다.

나중에야 느끼죠.지금 느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렇죠? 그런면에서 이제 우리 영적 감수성 초라하지만 또 약함으로 점철 되어 있지만 바로 거기서부터 하느님께서 시작하셔서 우리를 불러주시고 이끌어주신다는 것을 읽어낼 수 있는그런 영적 감수성이 사실은 시노달리타스에서 제일 필요한 것이겠죠.

우리가 해야 될 일이 바로 식별인 거잖아요. 하느님께서 도대체 우리 안에서 어떤 일을 하시려고 하고 어디서부터 출발해서 우리를 어디로 데리고 가시려고 하시는지를 읽어낼 수 있는 식별력이 필요하고 그것을 읽을 수 있는 영성이 동반되어야 된다는 게 아마 모세 이야기에서부터 묵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말씀드린 것처럼 식별은 영적인 능력이고 각자의 삶의 역사안에서 일을 하면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끌어주고 계시다는 것을 읽어낼 수 있는 그게 바로 식별이고 이것은 개인적인 식별도 있고 공동체적인 식별도 있다라고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개인적인 식별에 많이 집중을 하고 살아왔는데. 사실 공동식별은 우리가 경험이 별로 없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우리가 어떤 공동체 안에서 함께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공동체안에서 계속 회의하고 토론하고 또 이런저런 일도 해보고 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하느님께서 우리 공동체를 어떤 식으로 이끌어 주시는지를 우리가 함께 읽어갈 수 있는 그런 또 체험을 할 수가 있거든요.

이런 걸 하나의 공동체적인 식별이라고 얘기할 수가 있는데 우리가 모두 다 공동체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 혼자 사는 게 아니라 지금처럼 공동체로 부름을 받았고 함께 여정으로 초대하시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공동체 안에서 함께 실현하는 것 직암선교후원회라고 한다면 이 공동체 안에서 하느님은 이 공동체를 그리고 공동체 안에 있는 우리 각자를 어떻게 어떤 길로 부르시려고 하는지를 식별해 나가는 거죠. 아까 비오 신부님하고 식사하면서 동아시아 복음화라든가 선교에 대해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는데 신부님께서 굉장히 생각도 많으시고 고민도 많으신데 바로 그런 고민은 혼자 하는게 아니라 여러분들과 함께 해야 하는 고민이고 바로 그런 고민들을 함께 하면서 이끄시는 길이 어떤 것인지를 식별해 나가야 된다고 하겠죠.

그래서 시노달리타스에서 정말 중요한 표현 하나를 또 든다면 서로 부르심을 식별하는 기능 하느님의 부르심과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를 읽어낼 수 있는 혼자 읽어내기는 쉽지는 않아요. 공동체가 함께 읽는 게 중요하죠. 사제성소 식별도 또한 그렇습니다.

어떤 학생이 신부가 되고 싶다고 해요? 그런데 누가 봐도 아니에요 본인만 되고 싶어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여러 사람한테 물어봐야 되죠. 누구한테 물어보겠습니까? 본당 신자분들 또 파견지에서 활동했던 함께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 또 다양한 어떤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 가 증언이라고 하죠.

증언을 들어보고 증언들을 종합하면서 이 학생의 사제 성소에 대한 확신이 정말로 공동체 안에서도 확인될 수 있는 것이면 우리가 확신을 갖고 사제직에 올리겠지만. 나머지가 다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본인만 이렇게 한다면 바로 그만두라고 얘기는 안 하죠. 이렇게 사람들이 너의 사제 성소에 대해서 좀 부정적으로 생각하니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 혹시 너의 삶에서 어떤 변화가 필요한 것인지 생각해보면 좋겠다고 말해줍니다. 아니면 너에게 다른 길이 더 좋은 것인지? 왜냐면
너는 네가 스스로 이 길을 걸어가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하느님의 뜻은 그것이 아닐 수도 있는데 너는 너의 어떤 그런 주장을 갖고 이길을 계속 갈 수는 있겠지만 아마도 그 길이 너에게는 행복하지 않은 길일 수도 있고 하느님께서도 바라지 않은 길일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공동체의 어떤 식별을 네가 참고하면서 다시 한번 깊이 고민했으면 좋겠다라고 하면 그 학생이 스스로 정말로 자신의 길을 찾게 되는데 최근에 다른 길을 선택하기 위해 휴학을 2년동안 했어요. 그런데 저는 그
2년여의 시간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리고 이제 그 학생이 길을 바꾸기로 결심했고 그래서 이제 철도 승무원 이런 길로 가고 싶다고 얘기를 하면서 자신이 지금 갖고 있는 계획에 대해서 얘기하는데 그동안 제가 신학교에서 봐왔던 모습과 달리 지금 다른 길로 걸어가는 그 모습이 너무 다르고 적극적이고 행복해 보이고 희망에 차서 눈빛이 반짝이는걸 보면서 제 기분도 참 좋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것 본인에게 어울리는 길을 찾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죠. 그런 면에서 우리가 아는 개인적인 식별도 중요하지만 늘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참조해 보는 것도 굉장히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중요한 것은 식별하는 신앙이고 특별히 일상화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탈출기에서 그 중요한 주제 중에 하나는 모세가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서 서 있었을 때 하느님께서 하셨던 말씀이죠.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 라는 표현입니다. 신을 벗어라는 것 거룩한 곳이니까 신을 벗어야 된다. 이런 얘기는 많이 들었지만..
제가 아마 전에도 직암회 피정 때 말씀을 드린 적이 있는데 아시아 주교 회의에서 나왔던 문헌 중에 아시아적으로 이 시노달리타스를 어떻게 표현할까? 한마디로 신을 벗다. 발에서 신을 벗는 것이다. 놀랍게도 아시아 지역의 어떤
종교적인 특징 중에 하나가 절이나 교회 들어갈 때 늘 신발을 벗는 것이 종교적인 관습이고 집에 들어갈 때도 신발을 벗죠? 도둑은 신발을 벗나요? 도둑은 신발을 안 벗죠? 신발을 벗는다는 것은 그냥 우리가 기계적으로 일상적으로 하는 행동이지만 거기에는 또 숨겨진 뜻이 있다는 거죠.

그래서 이런 표현을 합니다. 아시아인들의 집이나 성전에 들어갈 때 신을 벗는 것은 바로 존중의 표시이고 그리고 발을 들이는 상대방의 삶을 의식한다는 표시이고 동시에 거룩함에 대한 깊은 인식의 표현이다. 그러니까 여러 가지 의미가 아시아적으로 담겨 있는 거죠.

그 문헌에서는 바로 이 시노달리타스가 이러한 정신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얘기를 합니다. 신발을 벗는다는 어떤 의식을 갖고 우리가 우리 삶을 대할 수도 있고 상대방을 대할 수도 있고 그리고 우리가 걸어갈 길을 함께 생각해 볼 때 어떻게 보면 신발은 신분의 상징이고 신을 벗음으로써 우리는 서로 평등하고 그리고 우리 교회 안에 높낮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 똑같이 평등한 그런 존재로서 함께 그 자리에 있다는 그런 의식의 표현일 수 있고 어떤 선입견과 편견을 내려놓고 환대하고 다양성 안에서 경청하고 대화하고 서로를 존중하는 영성도 그 안에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저의 표현 한 가지를 덧붙인다면 우리가 신발을 벗고 밖에 나가면 굉장히 위험하다는 것이죠. 상처를 입을 수 있잖아요. 어떻게 보면
우리의 욕심때문에 늘 그렇게 상처를 입을 수 있는 약한 존재라는 것을 우리가 신발 벗기를 통해서 의식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대화를 하면서도 신을 벗는 마음으로 하지 않으면 우리의 말이 거칠 수 있고 상대방에게 어떤 상처가 될 수 있는 무기로 사용될 수 있는 것인데 신을 벗고 그래서 우리가 얼마나 약한 육신을 지니고 있고 또 우리의 마음도 상처입을 수 있는 약함을 안다면 우리가 신을 벗고 조심스럽게 걸어다니는 것처럼 우리는 상대방과 대화할 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서 조심해야 한다고 봅니다.

시노달리타스는 약하고 상처 입기 쉬운 인간 존재에 대한 인식의 기반을 둘 필요가 있다라고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모세에게 신을 벗으라고 하셨던 그 말씀처럼 아시아 교회에는 이런 의식을 갖고 있는데요. 거기에 담겨있는 영성은 겸손과 평등 또 경청을 위한 마음의 자세 존중의 자세 그리고 또 약함에 대한 의식을 갖고 있다는 것이 이야기될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아시아 주교회의 최종문헌에서 나왔던 것인데 우리가 상처 입을 수 있고 이미 상처를 입고 살아가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바로 그렇게 가난하고 약한 사람을 돌보고 치유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성령 안에 대화도 그렇고 또 시노드 모임을 해도 그렇고 우리가 늘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예 생활로 무너지고 찢긴 마음을 울부짖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마음이 가 계시다는 것이었고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바로 우리 안에 또 우리 주위에 있는 그런 상처 입은 사람들을 돌보시는 것임을 늘 의식하고 시노드 성령안의 대화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탈출기에서 특히 우리가 주목해야 될 부분은요 바로 하느님께서 움직이실때 그냥 움직이시는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고난,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고통을 아셨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하느님께서는 무감각하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저 먼 하늘 위에서 이렇게 무관심하게 혹은 벌 주기 위해서 내려다보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우리가 어떤 삶을 살고 있고 또 어떤 고통을 겪으며 살고 있는지를 늘 관심을 두고 귀 기울여 듣고 계시는 그런 하느님이시고 그래서 모세에게 오신 이유는 사실은 고민을 털어놓기 위한 것이죠 내가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 때문에 마음이 아프다. 나는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이 민족을 내가 구해야 되겠다.

누구를 통해서 너를 통해서 모세가 어떻게 합니까? 저는 못합니다 하고 다섯 번이나 이 핑계 저핑계 대지 않습니까? 여러분들 요나 기억하시죠 요나가 계속 도망다니잖아요 그러다가 큰 물고기 뱃속에서 3박 4일 동안 있게되고 결국 어떻게 됩니까?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요나가 왜 도망을 갔을까요?
니느베가 이민족인데 하느님이 보살피는 것에 대해 시기심이 복받친거죠.그만큼 이스라엘 백성은 처음에는 굉장히 국수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그런 신앙안에 머물러 있었죠. 그런데 시간이 지나갈수록 이사야서에도 나오지만 그들이 믿는 하느님은 자기 민족만의 하느님이 아니라 모든 민족의 하느님 모든 민족을 보살피시는 하느님이라는 인식을 점점 더 갖게 된 거죠.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도 시간이 가고 또 유배를 당하고 여러 전쟁을 겪고 수난을 겪으면서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조금씩 깨달아 갔던 그런 여정을 성경이 보여주고 있는 것인데 요나는 그렇게 해서 도망다녔지만 결국에는 하느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었고 그 덕에 니네베, 젖먹이만도 못한 엄청난 그 민족을 내가 어떻게 멸망시킬 수가 있겠느냐라는 하느님의 마음이 요나에게 통할 수 있었던 것처럼 모세도 그렇게 했었죠. 그만큼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고통을 아시고 그리고 그 고통을 못 견디시는 그래서 몸소 우리 안에 현존하시면서 활동하시는 분입니다.

이런 걸 통해서 봤을 때 우리가 시노달리타스에서 함께 또 고민해 봐야 될 부분은 바로 이런 부분이죠. 이스라엘 백성이 겪었던 것처럼 우리도 지금도 마찬가지죠? 인간의 고귀함을 무시하는 불의, 폭력.억압
분열 지금 또 전 세계적으로 전쟁이 일어나고 AI 때문에 정말로 많은 변화가 있고 그 사이에 아마도 많은 젊은이들이 미래를 잃고 이제 직장을 잃고 굉장히 큰 어려움에 처할 가능성이 굉장히 많은 상황이죠. 그런 상황에 우리가 귀 기울이고 깨어 있어야 된다는 것이죠. 구원받지 못한 현실에 관심을 갖고 우리 주위에 어떤 사람들이 어떤 고통을 당하면서 살고 있는지에 대해서 늘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시노달리타스의 그런 과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모세의 다섯 차례 거부는 우리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주지만 우리도 모세처럼 하느님이 원하시는 걸 우리가 원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만을 하느님께
청할 수 있죠. 정말 우리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 하느님께서 마음을 두시고 또 하시고자 하시는 것이 어떤 것인지 우리는 그걸 관심갖고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살고
있는지 한번 물어보게 됩니다. 하느님 마음은 가난하고 억압당하고 고통당하는 이들에게 있는데 내 마음도 과연 그러한지 자신에게 물어봐야겠습니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신약 성경의 예수님 말씀으로 이어지지요.
그래서 예수님의 비유 중에 제일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 중에 하나가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라는 생각이 듭니다. 부자와 라자로에 나오는 부자는 부자였기 때문에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쓰고, 먹고 또 잘 입고 그리고 향연을 벌이며 살았던 거잖아요.

그런데 그가 뭘 잘못했을까요?
그는 이제 죽어서 지옥불 단련을 받고 있는중 너무 목이 말라 라자로를 통해 물 한 방울 얻기를 간청했던 비유 말씀입니다. 그 부자의 잘못이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너하고 똑같은 하느님께 생을 받아 태어나서 살고 있는 너의 형제인 라자로의 이름을 부자가 알고 있잖아요. 라자로의 이름을 알 정도로 그 존재와 또 그가 그의 집 문간 앞에서 개들이 와 종기를 핥을 정도로 비참하고 배고픈 처지에 있었던 걸 알면서도 그 이웃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돌보지 않고 돕지 않았다는 것 이것은 마테오 복음 25장의 최후의 심판 때 "네가 가장 보잘것없는 이들 하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곧 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다" 라는 말씀과 연결된다고 봅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갖고 있는 윤리적인 생각을 훨씬 뛰어넘는 그런 부분인 것 같아요. 계명을 잘 지키고 나쁜 짓을 하지 않고 요 정도에 머무는 우리들의 생활에서 더 나아가서 우리 주위에 정말로 이러한 비참한 또 소외되고 버림받은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지 나는 과연 그들에게 관심을 갖고 그들의 고통을 나의 것처럼 느낄 수 있는 그런 양심의 민감성 민감함 그런 걸 갖고 있는지에 대한 그런 질문이기 때문에 굉장히 중요하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 시노달리타스에서 우리가 생각해봐야 될 것은 하느님 마음이 그들에게 가 있는데 나는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또 교회도 하느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나와 교회가 정말로 하느님의 마음이 가 있는 그들에게 가 있는가? 하는 이런 질문은 정말 중요하지 않을까? 하는 말씀을 드리게 됩니다.

그다음에 광야의 의미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광야에서는 우리가 끊임없이 도전을 받게 되어 있죠. "고기와 빵을 배불리 먹던 우리를 당신은 왜 광야로 끌고 왔오? "

이 피정이 어떻게 보면 광야일 수 있죠. 아늑하고 익숙하고 편안한 언제든지 먹고 싶은 것 뭐든지 먹을 수 있고 또 나가서 또 좋은 것을 먹을 수 있는 그런 곳에서 벗어나 지금 이 딱딱한 의자에 앉아 있습니다..
간식 마음에 드시나요?

일상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불편함과 그리고 또 여러 가지 도전 거리가 있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또 마음속으로 겪게 되는 불평과 반역 이것은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면서 늘 겪게 되는 우리의 약함에 속하는 것들이고 어떤 약속된 땅을 향해서 걸어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지금 이대로 우리가 그 약속된 땅에 들어가기에는 우리는 아직 걸어야 하고 변화해야 하는 그런 측면이 분명히 있다는 것 그래서 시노달리타스는 바로 이 길을 걷는 것인데 회개와 정화를 거치는 변화 여정 그래서 이따가 나눔하실 때요 이 부분에 초점을 맞추셨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나눔해야 하는 주제 세 가지 뭐예요?

친교 ,참여 ,사명 그리고 그다음 변화해야 되는 것 중에서 관계,절차, 유대의 회심입니다

회심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결국에는 우리가 거쳐야 되는 것이 회개와 정화인데 그런 면에서 우리가 아직까지 맺어온 관계들 또 우리가 해온 어떤 절차들 그리고 또 우리가 맺어왔던 유대들 그런 것들에 대해서 한번쯤 어떤 변화가 필요한지도 생각해 보고 말씀 드린 친교 참여 사명도 우리가 얼마나 그런 것들을 실천하면서 살아왔는지 한 번 나눠보시면 좋지 않을까? 결국에는 광야는 우리에게 어떤 기회가 될 수 있는 거죠.

지금 우리들의 상태로 곧바로 약속의 땅으로 가기에는 우리는 아직 변화가 필요하죠? 제가 가끔 이런 말씀을 농담 삼아 하는데 여러분들중에 천국에 가고 싶으신 분들 있으시면 손 한 번 들어 보세요 하면 다 들잖아요. 그러면 지금 천국 가고 싶은 분들 그러면 안 들죠 ?

왜 그래요? 천국은 죽어야 가는데 지금 죽기 싫어서이지요. 저는 한편으로는 또 이런 생각이 들어요. 지금 만약 천국에 가면 그리고 그 천국에 내가 제일 싫어하는 원수들이 있다면 내가 가고 싶은 그곳이 천국일까요? 그게 지옥이겠죠?
그러니까 지금 천국에 가기보다 원수까지도 내가 사랑할 수 있기 위해서 필요한 변화, 정화가 필요한 것이죠. 그런 면에서는 지금 천국에 안갈려고 하는것이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

우리 자신의 모습 이대로가 아니라 변화되어야 되는 어떤 그런 것이 필요하다는 걸 이 시노달리타스는 말해 주고 있습니다. 결국에는 우리가 어떻게 변화의 여정을 걸어갈 것인가 어떻게 회개할 것인가에 대한 그런 중요한 얘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계약과 십계명
탈출기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이 바로 시나이 산에서 맺었던 계약입니다.

계약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맺는 약속인데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요. 우리가 하느님과 약속을 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 약속을
지킬 때 우리에게 주어질 축복과 영화, 하지만 그러지 못했을 때 우리에게 주어질 저주와 벌 이런 것인데 결국에 우리는 하느님과 약속을 한 존재라는 것 그리고 이 약속을 주로 어기는 존재는 우리라는것 우리는 불평하고 그 약속을 파괴하려는 어떤 그런 관성이 있지만 다행스럽게도 하느님께서는 그 약속을 끝까지 지켜주시는 분 이 이야기가 사실은 탈출기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고 우리하고도 연결이 되는거죠.

우리에게 하느님은 약속하시는 분 충실하신 하느님이고 계약을 지키지 못한 인간을 끝까지 기다리시면서 매번 새롭게 계약을 하고 그래서 여러분들이 고해성사 보면 새롭게 계약을 시작하는 거잖아요 그렇죠? 내가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으니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용서가 되면 다시 우리는 리셋을 하는 거잖아요 얼마나 다행입니까? 그런 하느님을 우리가 두고 있는 것이죠.


십계명을 우리가 달리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인데 바로 이 십계명은 탈출기의 구원이 있은 다음에 있죠? 탈출이 있은 다음에 계약과 계명이 주어지잖아요 . 구원 사건 ,탈출이
다 있은 다음에 계명이 있다는 의미는 바로 이 계명은 구원받은 은총에 대한 응답하는 삶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응답으로서의 삶이 계명의 삶이고 그리고 또 하나 붙인다면 바로 그 계명을 지키는 삶은 구원받은 사람들의 맞갖은 거룩한 삶이라는 것이죠. 구원받은 사람이 갖추어야 할 삶의 방식은 계명을 지키는 삶이다. 그러니까 이 계명을 그냥
순전히 의무로 부과되어서 어쩔 수 없이 지키는 어떤 그런 속박이 아니라 받은 은혜에 대한 보답, 부모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모든 것에 대해서 우리는 보답하면서 살잖아요. 그것처럼 하느님께 우리 보답은 세례를 통해서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또 영원한 생명의 길을 열어 주신 하느님께 대한 우리들의 응답하는 삶이 십계명을 지키는 그런 삶이고 이런 거룩한 삶을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된 그런 고귀한 품위를 거룩하게 지켜내는 그런 삶이 바로 계명을 지키는 삶이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주목하지 못했던 부분 중에 하나가 바로 악과의 대결인데 우리의 신앙은 영적인 싸움이라는 것. 여러분들 WYD 내년 대회 주제가 뭔지 아시죠?
"내가 세상을 이겼다."
요한복음 16장 33절의 말씀에서 예수님은 수난이 시작되기도 전에 벌써 승리를 선언하십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앞으로 겪어야 할 고난의
길이 앞에 있지만 이미 승리는 이루어졌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의 삶은 승리하는 삶이고 이미 예수님께서 승리하셨어요. 우리가 할 일은 고난이 있더라도 믿음 안에서 끝까지 계속해서 믿음을 지켜나갈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예수님의 승리에 동참하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죠. 그러나 우리는 마치 승리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처럼 먼 훗날에만 주어지는 것처럼 생각하면서 지금 고통 중에 괴로워하고 절망하는데 사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늘 승리하는 삶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의 말씀은 바로 이 탈출기에서 하느님께서 끊임없이 우리 삶을 승리로 이끌어주시는 여정을 함께 걸어주신다는 것을 계승한 그런 내용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시노달리타스에서도 우리가 주목해 봐야 될 것은 지금 마주하는 악은 어떤 것인가? 악의 활동은 어떤 것인가? 그리고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신앙의 힘은 어떤 것인가?
이것을 식별하는 것이 바로 시노달리타스안에서 바로 이 악과의 영적인 싸움이라는 걸 염두에 두고 우리가 어떤 식으로 삶을 살아갈 때 그걸 넘어서는 그런 길들을 찾아가는 것이죠.

아까 제가 세 가지 관계 ,절차, 유대 말씀드렸는데 여기에 탈출기를
적용해봤을 때 관계 안에서 특히 우리가 그동안 가난한 자,억눌린 자 이런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면 우리의 관심을 더 깊이 기울여야 될 필요가 있다는 것. 그리고 특히 이제 우리 안에 있는 차이를 긍정적으로 수용할 필요가 있다는 것. 절차안에서 모세를 보면 영도자이고 지도자이면서도 계속 백성들이 하는 얘기를 가지고 하느님한테 가서 따지잖아요. 현실은 늘 부대끼고 어렵다는 걸 의식하는 지도자였던 거죠. 그러니까 늘 사람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그것을 해결해 주는 하느님과 함께 대화를 통해서 해결하려고 했던 이것이 절차에서 중요한 부분이 아닐까 생각힙니다.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역할을 했던것 그다음에 유대, 이런 세 가지들을 좀 우리가 다시 한번 탈출기를 통해서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정의합니다. 우리가 길 위에 있음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고 또 우리 모두가 완벽한 사람들이 아니라 약하고 부족한 사람들의 모임이 바로 우리들의 교회고 그럼에도 우리와 늘 함께 시노달리타스로서 함께 걷고 계시는 주님이 계시고 엠마오 제자들에게 오신 것처럼 다가오셔서 말씀을 나누고 믿음을 북돋아 주시고 격려와 응원을 아끼지 않으시는 분이 주님이심을 알게되면 좋겠습니다.

한마디로 시노달리타스는 신앙의 본질을 회복시키는 것에 있다.
저는 그것의 두 가지로 열린 교회,
늘 밖을 향해 있는 교회 그리고 정감적인 신앙 형식적이고 행사에 치우친 어떤 그런 무미건조하고 의무감에 하는 그런 신앙이 아니라
마음이 오고 가는 서로의 고충을 공감하고 환대받고 환대하고 또 한 백성으로서의 소속감을 느끼는 공동체 분위기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황일광 복자께서 말씀하셨죠. "나에게 천국이 두 개가 있다. 지금 나의 천한 신분에도 날 이렇게 인간으로서 대접하고 사람다운 배려를 해주는 이 공동체야말로 나는 여기서 천국을 맛보고 있다" 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 공동체가 과연 천국과 같은 소속감과 또 친밀함을 느끼는 그런 정감적인 신앙이 오고 가는 공동체이기를 한번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모든 것을 함께 모아 주시는 것은
바로 예수 성심이죠. 이스라엘 백성의 울부짖음을 듣고 응답하는 마음이 바로 하느님의 가엾은 마음이라는 것이고 우리가 바로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고 있다는 것 그래서 결국에 시노달리타스 여정, 그 영성은 예수님 마음에 우리의 마음을 일치시키는 것에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6월 예수 성심 성월을 통해서 우리가 지향해야 될 시노드적인 영성의 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한국천주교회 창립기념 직암회성지순례🍃🌿

▶️일시:6월24일(수)
▶️장소:천진암성지
▶️일정:
9시50분:묘역집합
10시 묘역참배
11시 미사
13시 점심(성지내식당)

▶️참가비: 1만원(식사비)
신협: 131-022-461892 (사무처)

▶️ 신청마감: 예약관계로 6월18일(목)까지 입금후 문자 부탁드립니다.

▶️문자: 010-8376-7031
(이름,세례명,본당)

.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정옥금 글라라 | 작성시간 26.06.13 배우고, 실천해야 할 말씀이 많았던 강의라는 생각이듭니다.
    많은 양의 정리..고생하셨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김유근 이레네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6.15
    댓글 이모티콘
  • 작성자노성호안토니오 | 작성시간 26.06.15 "나에게는 천국이 두개 있습니다"
    백정 출신의 황일광 복자에게 한 형제로 받아주고 존중해 줄 때 천국이었다.
    라고 존경하는 신부님 말씀 잘 들었습니다.

    복자께서 그 공동체를 사랑하였기 때문에 순교 하실 수 있으셨고
    시노달리타스 실천의 완성 이라고 믿습니다.

    관계의 회심 (약자와, 각 차이의 긍정)
    절차의 회심(전달의 중요성.식별)
    유대의 회심(일치를 위한)을 통하여
    교회.사회.가정.친구등 공동체에 고슴도치 같은 저를 비추어 봅니다.

    길고 긴 내용 다시 보게되어 감사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김유근 이레네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6.15 여러번 보았는데 좋은 강의 였다고 생각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유산으로 저희에게 남겨주신 '시노달리타스' 함께 하는 여정으로 초대되어 동행할 수 있음에 감사드리며 궁극적으로 실현시키는 일에 직암선교후원회가 시노드영성 피정, 아시아 선교지와 자매 결연, 여러 일들을 통해 어려운 이웃과 함께 할 수 있음은 또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장 서 일하시는 비오 신부님과 도와주시는 봉사자분들의 크나큰 노고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늘 마음에 새길 수 있는 좋은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