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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충주의 고구려유적

작성자신영주|작성시간09.04.24|조회수48 목록 댓글 0

충주의 고구려유적

 

전통 역사지리학으로 살필 적에 한강은 삼각형의 꼭짓점을 돋보이게 한다. 북한강 쪽의 춘천과 남한강 쪽의 충주, 그리고 두 강물이 합수되는 서울이다. 한강 역사기행은 치밀하게 탐구해 보아야 하는 대장정 기획인데 AD 5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면 무엇이 보이는가. 춘천(우수주)은 영동·영서 산악지역의 전방지휘소를 이룬다.

 

한강 하류에서 개국한 백제를 견제하는 역할과 함께 고구려를 간접 방어케 하는 지정학이었다. 서기 475년 백제의 왕경 한성이 고구려 군에 함락되어 ‘한산주’가 된다. 이어서 충주와 원주에 고구려 군사도시 국원성, 북원성이 들어선다.

충주 가금면 봉황리 햇골산의 마애불상. 고구려 계통의 미륵 마애불로 추정하는데 높이는 2.6m이다. 각이 진 얼굴에 도톰한 볼, 감은 눈, 다문 입의 표정이 근엄하지만 ‘고구려 미인상’을 대면하는 듯하다.


고구려는 이로부터 서기 550년쯤까지 70여년 동안 ‘남방경략’을 이룩해낸다. 그리하여 남한강의 삼국사 지리지는 맥동을 친다. 새 주인 고구려와 본디 주인이던 백제 및 장래의 주인이 되고픈 신라 사이의 삼각 대각선이다.

‘고구려 문화’가 새롭게 각광을 받는 중이다. 서울 광진구와 경기 구리시가 아차산성을 사이에 두고 ‘개발경합’을 벌이는가 하면 단양군은 온달산성을 관광 명품으로 내세워 고구려 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충주시는 최근에 고구려 연구 학술대회를 정기적으로 주선해오고 있다. 하지만 소프트웨어보다는 하드웨어 구축이 먼저 아닌가.

한강 패권시대에 관한 역사 추적은 곧 ‘국토학’의 원류를 탐색하는 프로젝트가 된다. 근대도로와 산업국토 풍경을 걷어내 삼국지지(三國誌地)의 한강사를 복원해보아야 하지만 개인으로서는 벅차고 문화산업은 관심을 갖지 않는다. 부분적인 도상연습을 시도해볼 수는 있겠다.

#고구려 국원성은 살아 있다

고구려 문화유산들이 한강 하류에서부터 상류에 이르기까지 널리 분포되는데 ‘아틀라스 한국사’의 ‘명장면’들을 오늘에 되찾고 싶다. 정선에서 영월로 흐르는 동강 기슭의 고성산성과 완택산성, 단양 영춘의 온달산성 등은 절경 중의 절경이다.

 

자연환경을 역사환경에 적응시키는 정치군사 지리학의 지혜와 함께 두 환경 사이의 오묘한 조화에 경탄하게 된다. 호반 도시 충주의 역사지리는 특히 파란만장하다. 새 주인 고구려는 내륙지대의 젖가슴 남한강의 중요성을 새롭게 일깨운다. 압록강의 국내성에 못지않다고 살피어 국원성이란 이름부터 부여하여 강항(江港)의 군사기지를 건설한다.

남한강이 달천(달래강, 괴강)과 만나 에돌아 나가는 지리환경의 이북 방면 요처이다. 지금의 충주시가 그 이남 쪽에 다운타운을 형성하고 있는 것과 흥미롭게 비교된다. 고구려가 합수머리 하류의 가금면 일대에 고대도시를 구축한 것은 남한강 쪽으로 신라를 압박하고 달천 너머로 백제를 공략하려는 입지조건에 합당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자세’의 지정학을 오늘에도 음미해볼 수 있다.

국원성 유적의 전체 윤곽과 규모는 방대하면서도 조밀한데 오늘에 제대로 보존되어 있지는 못하다. 가금면 강변 일대는 ‘중앙탑 공원’이라 불러 신라의 ‘중원문화’를 상기하게 하는데 고구려의 ‘국원문화’를 복원시키려는 노력도 병행돼야 할 것이다.

 

고구려 병선들이 어떻게 정박하고 있었으며 군사시설들의 배치와 요새 구축이 또한 어떠하였는가. 이러한 기본 설계의 ‘역사지도’를 장만해볼 수 있다면, 그 명칭도 가령 ‘국원나루’ 또는 ‘국원진(國原津)’이라 부르게 할 수도 있다.

 

충주시는 충주댐 이북의 ‘충주호’와 구분시켜 조정지댐 호수라 부르던 이곳을 지난해부터 ‘탄금대 호수’라 개명하였는데 여기에다가 ‘고구려 국풍대회’를 기획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5부 귀족 출신 장군들이 부임하고, 장수왕의 아들 조다(助多)로 추측되는 ‘태자’가 방문하기도 했던 도성 ‘국원성’은 고구려 산성으로 개축된 장미산성과 보련산성을 배후로 거느린 요지에 있었을 것이다.

 

중앙탑 공원의 강변을 진두지휘하는 위치인 데다가 장미산성을 뒤통수 쪽에 건사하는 탑평리 입석마을에서 ‘고구려비’가 1979년 2월 발견되었는데 이 도성의 위치와 관련지어 살필 수 있다. 국보 205호로 지정받은 남한강의 ‘고구려비’는 장수왕대의 유적으로 압록강의 ‘광개토왕비’와 대비되기도 하는 중요한 고구려 문화유산이다.

충주 국원성 유적지의 고구려비(국보 205호). 남한강의 고구려비는 압록강의 ‘광개토대왕비’와 비교 연구되기도 한다. 장수왕 시대의 유물로 ‘한강 고대사’의 비밀열쇠 코드이다.

국원성은 고구려 남방경략의 대본영(大本營)이었다. 국원성주는 ‘총독’처럼 군림하여 신라를 통제하려 했던 것처럼 보인다. 비문 속에는 신라 매금(왕)을 비난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직접 국원성으로 찾아와 예의 갖추어 인사를 바쳐야 한다는 것이다.

 

소극적으로 순종해오던 신라가 차츰 대항의 자세를 갖춰가고 있다는 사실을 읽을 수 있다. 예속민의 상태에 놓여 있던 이 지역 일대의 신라 백성들을 풀어주려 한다는 내용도 보인다. 울진 봉평 신라비에 나오는 고구려 계통 생민들의 처지와 대조되는데 비교 연구해봄직하다.

고구려중원비 비문


중원고구려비는 충청북도 중원군 가금리(可金面) 용전리(龍田里) 입석(立石)마을에 있으며, 국보 제205호로 지정되었다.


1979년 4월에 충주의 문화재 애호가(예성동호회)들이 입석(立石)에 글자가 새겨져 있다고 제보하여 세상에 알려졌다.

현재 전면과 좌·우측면에 글자를 새겼음을 확인할 수 있고, 뒷면에서는 판독되는 글자를 발견할 수 없다.

뒷면에도 글자를 새겼는지에 대하여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갈려 있다.

 

건립 연대를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 마멸되어서 정확한 시기를 알 수 없다. 현재 5세기 전반 광개토왕대부터 6세기 중·후반 평원왕대(559~590)까지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었다.

 

최근에 앞면 첫째 줄의 몇 글자(高麗太王祖王令)를 새롭게 판독하여 495년(문자명왕 4)으로 보는 견해와 비문에 보이는 ‘십이월삼일갑인(十二月三日甲寅)’이란 간지와 날짜를 고려하여 449년(장수왕 37)으로 보는 견해가 폭넓게 지지를 받고 있다.

글자의 마멸이 심하여 비의 성격에 대해서도 의견이 엇갈린다.

 

고구려의 중원진출을 기념하기 위하여 비를 건립하였다고 보는 견해, 문자명왕의 중원지역 순행을 기념하기 위하여 비를 건립하였다고 보는 견해, 고구려 태자 공(共)이 신라와 싸워 다시 우벌성(于伐城:충주지방)을 되찾은 사실을 기념하기 위하여 비를 세운 것으로 보는 견해, 고구려와 신라 사이에서 어떤 문제를 둘러싸고 회맹(會盟)한 사실을 기념하여 비를 세웠다고 보는 견해 등이 있다.

 

중원고구려비는 한반도에 남아있는 유일한 고구려의 비이며, 고구려의 중원진출을 입증하는 구체적인 자료이다.

 

특히 ‘신라토내당주(新羅土內幢主)’란 표현은 중원고구려비 건립 단계에 고구려 군대가 신라 영토 내에 주둔하고 있는 실정을 알려주어 당시 양국간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자료로서 주목을 받았다.

 

이밖에 여기에 나오는 고구려의 인명과 관등은 고구려 정치제도사 연구의 사료로, 신라를 동이(東夷)라고 부른 표현은 당시 고구려의 천하관을 엿볼 수 있는 자료로 활용되었다.


<前面>

五月中高麗太王祖王令▨新羅寐錦世世爲願如兄如弟」

上下相和守天東來之寐錦[忌]太子共前部大使者多亏桓

奴主簿貴道[德][ ][類][王][安][ ]▨[去]▨▨到至跪營天(大?, 夭?)太子共[ ]

尙望上共看節賜太霍鄒敎(授?)食[在]東夷寐錦之衣服建立處

用者賜之隨▨節▨▨奴客人▨敎諸位賜上下[衣]服敎東

[夷]寐錦遝還來節敎賜寐錦土內諸衆人▨▨▨▨[王]國土

大位諸位上下衣服[束(來)]受敎跪營之十二月卄三[日]甲寅東

夷寐錦上下至于伐城敎來前部太使者多亏桓奴主簿貴

▨▨▨[境]▨募人三百新羅土內幢主下部[拔]位使者補奴

▨疏奴[ ]▨[凶]鬼盖盧共[ ]募人新羅土內衆人跓[動]▨▨


<左側面>

▨▨▨[忠]▨▨[于]伐城不▨[ ]▨村舍▨▨▨[ ][胜]▨[沙]▨▨

▨▨▨▨▨▨▨▨刺功▨▨射▨▨▨▨▨節人刺▨▨」

▨▨▨▨▨▨[辛][酉]▨▨▨▨▨▨▨▨▨▨太王國土▨」

▨▨▨▨▨▨▨▨▨▨▨▨▨黃▨▨▨▨▨▨▨[安]▨▨」

▨▨▨▨▨▨▨▨▨▨上[右]▨▨辛酉▨▨▨▨東夷寐錦土

▨▨▨▨▨▨方(万?, 右?)袒[故]▨桓)▨沙▨斯色▨太古鄒加共軍至于」

▨▨[去]于▨古牟婁城守事下部大兄耶


<右側面>

▨▨▨▨▨▨▨▨▨前部[大]兄▨▨▨▨▨▨▨▨▨▨

▨▨▨▨▨▨▨▨▨▨[ ]▨▨部[小▨+▨▨泊▨▨▨▨▨

▨▨▨▨▨▨▨▨▨▨容▨▨▨▨▨▨▨▨▨▨▨ ▨▨▨▨▨▨▨▨▨

▨▨▨▨▨▨▨▨▨▨▨▨▨▨▨▨▨▨▨▨▨▨

▨守[自]▨▨▨▨▨▨▨▨▨▨▨▨▨▨▨」

[출전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Ⅰ(1992) 수정]



(전면)

5월 중 고려대왕(高麗大王)의 조왕(祖王)께서 영(令) ... 신라 매금(寐錦)은 세세(世世)토록 형제같이 지내기를 원하여 서로 수천(守天)하려고 동으로 (왔다). 매금(寐錦) 기(忌) 태자(太子) 공(共)전부(前部) 대사자(大使者) 다우환노(多亏桓奴)주부(主簿) 귀도(貴道) 등이 ... 로 가서 궤영(跪營)에 이르렀다. 태자(太子) 공(共) ... 尙 ... 上共看 명령하여 태적추(太翟鄒)를 내리고 ... 매금(寐錦)의 의복(衣服)을 내리고 建立處 用者賜之 隨者 ... . 奴客人 ... 제위(諸位)에게 교(敎)를 내리고 여러 사람에게 의복을 주는 교(敎)를 내렸다.

 

동이(東夷) 매금(寐錦)이 늦게 돌아와 매금(寐錦) 토내(土內)의 제중인(諸衆人)에게 절교사(節敎賜)를 내렸다. (태자 공이) 고구려 국토 내의 대위(大位) 제위(諸位) 상하에게 의복과 수교(受敎)를 궤영에게 내렸다. 12월 23일 갑인동이(東夷) 매금(寐錦)의 상하가 우벌성(于伐城)에 와서 교(敎)를 내렸다. 전부 대사자 다우환노와 주부 귀도(貴道)가 국경 근처에서 300명을 모았다.신라토내당주 하부(下部) 발위사자(拔位使者) 보노(補奴) ... 와 개로(盖盧)가 공히 신라 영토 내의 주민을 모아서 ... 로 움직였다.


(좌측면)

... 中 ... 城不 ... 村舍 ... 沙 ... 班功 ... 節人 ... 신유년(辛酉年) ... 十 ... 太王國土 ... 上有 ... 酉 ... 東夷 寐錦의 영토 ... 方 ... 桓▨沙▨斯色 ... 고추가(古鄒加) 홍(共)의 군대가 우벌성에 이르렀다. ... 고모루성수사(古牟婁城守事) 하부(下部) 대형(大兄) 야▨((耶▨)


[출전 : 『譯註 韓國古代金石文

 

봉황리 마애불상군의 고구려 미인 찬송

중앙탑-고구려비와 함께 누암리의 ‘누암 고분군’도 주목된다. 원래는 현지 고구려인들의 묘역으로 조성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봉황리의 ‘마애불상군’이 참으로 특이하다. ‘고구려 반가사유상’을 남한강 유역에서 만나다니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가.

남한강은 중앙탑-고구려비를 지나 목계나루에서 방향을 틀어 서북 방향으로 휘돌아나간다. 그 만곡(彎曲)의 지경에 봉황리 햇골산이 놓여 있다. 깎아지른 바위벼랑에 어떻게 ‘큰 바위 얼굴’을 조각할 수 있었던 것일까. ‘보물 1401호’로 지정받을 가치가 충분하다.

마애불상들은 두 군데로 나누어져 있다. 하부 쪽의 8구는 훼손이 심하지만 삼존상 좌상과 함께 ‘반가상’이 그려져 있다. 상부 쪽에는 여인 모습의 불상과 이를 떠받드는 5구의 화불(化佛·아기부처)이 새겨진 마애불상군이 있다. 그런데 이 마애불에 대한 해설이 난해하기만 하다.

 

여기에서는 자의적으로 ‘다섯 아기부처에 둘러싸인 고구려 미인 불상’이라고 표현코자 한다. 다섯 아기부처는 수호천사들처럼 ‘미인 불상’을 공중에서 반원형으로 둘러싸고 있다.

마애불상은 2.6m 높이로 양각되어 있다. 나발 머리에 각이 진 살찐 얼굴이다. 도톰한 볼, 두터운 눈꺼풀과 감고 있는 눈, 기다란 코에 다물고 있는 입술, 묵직한 아래턱으로 형상화된 모습은 ‘종교미술’의 경건함과 함께 ‘고구려 귀부인 인물상’의 풍모를 연상해보게 하기도 한다.

 

 목에는 3도가 없고 넓은 어깨에는 통견의를 두른 것 같지도 않은데 두 발을 맞댄 무릎이 아주 넓고 크게 표현돼 결가부좌의 자세와는 다르다. 기품 있는 고구려인들의 삶, ‘미인 불상’을 찾을 적마다 ‘고전적인 단순성의 아름다움’을 새삼 우러르게 된다.

고구려의 ‘국원 문화’는 장기간 지속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를 접수시킨 신라의 ‘중원 문화’는 충주지역 지리학을 더욱 업그레이드시킨 것이었다. 소백산 너머 ‘계립령’ 바깥 자락에 놓인 남한강 유역을 신라가 ‘중원경’으로 삼는 일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다는 것인가.

 

신라 왕실은 ‘안방’을 벗어나지 않으려 했지만, 서라벌이 국토 중심부에서 비켜나 있음을 성찰한 것이다. 국토인식체계의 대단한 전환인데, 분단시대인들에게 일깨움을 준다.

오늘의 충주는 ‘국원’ 그리고 ‘중원’이란 국토인식을 유지할 수 없게 되어 있다. 남한강 수운교통이 막힌 데다 근대도로의 메커니즘이 국토환경을 인위적으로 제조해내기 때문이다.

 

이 도시는 그럴수록 남한강 문화유산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현실적으로 ‘중원’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중원문화’는 이 도시에 살아 흐르고 있지 아니한가.
-박태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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