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봉 목사는 길선주 목사, 김익두 목사, 이용도 목사로 이어지는 부흥운동의 맥을 잇는 영적 거장이다. 이 중에서도 이성봉 목사는 특히 신유의 이적으로 널리 알려졌던 김익두 목사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 그의 어머니는 김익두 목사가 선천에 세운 소학교 선생으로 봉직할 때부터 김익두 목사를 가까이에서 접할 수 있었다. 이성봉 목사는 어려서부터 김익두 목사의 설교를 듣고 자랐으며, 때로는 김익두 목사의 흉내를 내면서 놀기도 했다. 김익두 목사는 이성봉 목사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었다. 이러한 관계는 이성봉 목사가 성결교회의 전국부흥사(1938년)로 임명을 받기 전에 경험했던 한 사건에서도 알 수 있다.
꿈속에서 불세례를 체험
이성봉 목사는 총회 도중에 너무 피곤하고 지쳐서 신학교 4층에 있는 조그마한 방에서 잠깐 쉬고 있었다. 그런데 비몽사몽간에 김익두 목사가 찾아와 오른편 옆구리에 손을 대고 안수기도를 해주었는데, 그 손이 닿자마자 불의 폭발이 일어났다. 이성봉 목사는 너무 뜨겁고 놀라서 후닥닥 일어났는데 깨어보니 꿈이었다. 심령은 매우 상쾌했다. 불세례를 체험한 것이다. 이 신비한 체험이 있은 후 이성봉 목사는 전국부흥사의 사명을 받았으며, 수많은 이적과 표적을 동반하는 부흥운동의 중심에 서게 되고,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부흥사로 자리잡게 되었다. 여기서는 이성봉 목사의 생애와 사역에 나타났던 대표적인 신유의 이적들을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이성봉 목사의 신유체험
위에서 살펴 본 불세례 사건은 김익두 목사의 영적 권위가 이성봉 목사에게로 이어졌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다. 곧 엘리야의 영적 권위가 엘리사에게 이어졌듯이, 김익두 목사의 신유 이적의 전통이 이성봉 목사에게 이어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영적 계승과 더불어 이성봉 목사가 직접 체험한 여러 번의 신유는 그의 부흥사역에 수반된 신비한 이적들을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열쇠가 된다.
이성봉 목사는 기도로 질병의 고통 중에서 낫는 체험을 여러 차례 했다. 그가 어렸을 적에는 '깔다귀'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몸이 매우 말랐고 허약했다. 하지만 하나님이 베푸신 신유의 은혜를 여러 번 경험하면서 그는 자신을 '뚱뚱보'라고 부를 정도로 건강해졌다.
이성봉 목사는 한때 탕자 생활에 빠졌던 적이 있다.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믿음의 훈련을 받으며 자랐지만,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중학교 진학이 좌절되자 세상의 유혹에 빠졌던 것이다. 한번 벗어난 믿음의 걸음은 걷잡을 수 없게 되어 하나님을 부인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하나님은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으셨으며, 그를 돌려놓기 위해 징계의 채찍을 드셨다.
어느날 갑자기 찾아온 골막염이 그것이었다. 그의 골막염은 다리를 잘라야 할 정도로 심한 상태였다. 당시 21세였던 이성봉 목사에게 그것은 사형선고와 다름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다리 자르는 것을 거부했으며, 그 결과 죽음의 위협 앞에 노출되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이성봉 목사는 과거의 불의한 죄들을 회개하게 되었으며, 성령의 도와주심으로 주초와 같은 죄의 습관에서도 자유하게 되었다. 그리고 회개라는 내부의 은혜는 질병의 치료라는 외부의 은혜로 나타났으며, 이후 그는 경성성서학원에 입학하여 남은 인생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치는 사역자의 길을 가게 되었다.
이성봉 목사는 29세에 또 다른 매우 특별한 신유의 은혜를 체험했다. 당시 그는 교회를 개척하고 불철주야로 쉬지 않고 사역에 매진하고 있었는데, 몸이 날로 쇠해지고 오후마다 열이 오르내리는 고통에 시달렸다. 하지만 그는 신유를 믿고 의약을 쓰지 않고 견디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주일날 예배를 마친 후, 그는 고열로 끙끙 앓다가 혼몽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이성봉 목사에 의하면 그때 공중에서 "이성봉 전도사는 이제 살기 어렵다. 아마 세상을 떠날 것이다"라는 뜻밖의 소리가 들려왔다고 한다. 이것을 신호로 그는 혼몽상태에서 한참 동안 사단과 치열한 영적 전쟁을 치렀다. 그에 대한 사단의 공격은 끈질기게 여러 모양으로 나타나 달려들면서 그를 시험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주여, 나를 버리지 마옵소서. 나를 위하여 죽으신 그 십자가를 저에게 보여주소서"라고 간절하게 기도했다. 그때 십자가가 나타났는데, 예수 없는 빈 십자가인 검정 십자가였다.
그는 "사단아 물러가라. 이것은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달리신 참 십자가가 아니다"라고 외치고, "주여, 저에게 당신이 달리신 참 십자가를 보여 주소서. 당신의 형상을 보게 하여 주소서"하고 결사적으로 기도했다. 그때 하늘로부터 다시 십자가가 나타났는데, 예수께서 달리신 진짜 십자가였다. 이 체험 후에 그는 고통에서 벗어나는 신유의 은혜와 동시에 천국의 모습을 보는 천상의 은혜를 경험했다. 이 신비한 체험으로 이성봉 목사는 "항상 소망 중에 살고 현세보다 영원한 내세를 더욱 그리워하며 살게 되었다"고 고백하였다.
이외에도 이성봉 목사는 기도로 복막염이 낫기도 했으며, "말로 못하면 죽음으로"라는 유명한 말을 만들어 낼 정도로 고열로 인해 생사를 넘나드는 극한 고통 속에서도 강행했던 황해도 송화읍 무초교회 부흥회에서도 신비한 신유의 은혜를 체험했다. 그리고 해남 집회에서는 급성맹장염이 발병해 24시간 안에 수술하지 않으면 죽거나 병신이 된다는 의사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부흥회를 지속하다가 초자연적인 치료의 은혜를 경험하기도 했다. 이처럼 그의 생애에는 신유의 샘이 항상 열려 있었다.
이적과 표적의 사례들
첫째는 어둠의 세력과의 영적 전투에서 승리한 결과로 나타난 신유의 역사이다. 이는 축귀 사역 또는 축사 사역과 관련된 것으로 한국의 문화적 전통 속에 깊이 뿌리박고 있던 어둠의 세력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굴복하면서 나타난 현상으로 능력대결이라고도 한다.
이성봉 목사가 수원교회에서 목회할 때이다. 관운장 사당을 차려놓고 점치는 무당이 있었다. 그런데 이 무당이 전신불수로 7개월 동안 앓고 있었다. 이 무당은 이성봉 목사의 불신자 집회에서 말씀을 듣고 눈물로 회개 우상 사당의 모든 물건들을 불태워버리고 예수님을 영접하였다. 그후 이성봉 목사가 이 무당을 위해 손을 얹고 기도했는데 전신불수에서 깨끗이 고침 받아 주님을 섬기는 아름다운 역사가 일어났다. 이 일로 인하여 많은 불신자들이 하나님께 나오게 되었으며, 교회에는 큰 부흥의 불길이 퍼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능력대결은 평양의 명촌장로교회에서 집회할 때도 일어났다. 집회가 한창 무르익어 가는 중에 갑자기 대감귀신 들렸다는 여자가 나타나 야단법석을 피우며 집회를 훼방하였다. 부흥회를 방해하려는 마귀의 계략처럼 보였다. 이 여인은 그 마을의 오랜 골칫거리였지만 아무런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훼방이 흑암의 세력들과의 영적 전쟁이라는 것을 간파한 이성봉 목사는 교우들과 함께 기도하여 귀신을 쫓아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영적 전쟁에 의한 이러한 축귀 사역은 초기 한국교회의 중요한 활동이었다. 이는 기독교가 한국사회에 침투해 들어와 한국의 문화적 전통과 날카롭게 부딪치며 나타난 현상이었다. 이로 인해 한국교인들은 성서의 세계를 좀더 빨리 이해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일반 대중들에게 좀더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기독교적인 축귀 사역에 의해 악령에 시달리던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되면, 대중들은 새로운 종교인 기독교를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고, 새로운 종교의 능력에 큰 감화를 받게 되는 것이다.
둘째는 기도에 의한 신유의 역사이다. 군산의 구임교회에서는 3년 동안 앉은뱅이로 지내던 부인이 집회에 참석했다가 나음을 입고, 교회의 충성된 일군이 되었으며, 평택에서 교회재건부흥회를 할 때는 풍이 들어 3년 동안 앉은뱅이 생활을 하던 한 청년이 이성봉 목사의 집회에 가면 병이 나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그곳에 참석하였다가 회개안수기도를 받고 치유되는 기적이 일어났다. 또한 속초에서 열린 집회에서는 척수골막염으로 3년 동안 앉지도 서지도 못하던 사람이 완쾌되었으며, 각종 각색의 질병에서 고침 받은 신유의 간증은 이성봉 목사의 집회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또한 이성봉 목사의 집회에서는 꿈, 환상에 의한 치유가 나타나기도 했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이성봉 목사는 꿈속에서 성령의 불세례를 체험했으며, 비몽사몽간에 신유를 경험하기도 했다. 재령의 율포교회에는 여러 해 동안 연주창이라는 악성부스럼으로 고생하던 한 여인이 있었다. 이 여인은 집회에 참석하여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질병의 치유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다. 그때 비몽사몽간에 천사가 나타나 자신을 어루만져주는 환상을 보았으며, 자신의 질병에서 즉시 깨끗함을 입었다.
더 나아가 이성봉 목사의 집회에서는 잉태하지 못하던 불임여성들이 기도를 받은 후 아이를 출산하는 경우도 많았다. 평양의 유정감리교회에서 집회할 때, 금식기도하며 집회에 참석하는 한 여집사가 있었다. 이 집사는 결혼한 지 몇 년이 지나고 나이 30세가 되도록 잉태하지 못해 믿지 않는 남편과 시댁으로부터 갖은 구박을 받고 있었다. 남편은 그녀에게 아이를 낳아주던지, 아니면 이혼을 해주던지, 그것도 아니면 술장사라도 해서 돈이라도 벌어 오라고 요구하였다. 이성봉 목사는 이 여인의 딱한 사정을 듣고 간절히 안수해 주었으며, 1년후 이 여인은 옥동자를 품에 안게 되었다. 한나의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께서 여인의 태를 열어 주셨던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성봉 목사의 생애와 사역에는 인간의 논리로는 온전히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현상들이 뒤따랐다. 그렇기 때문에 극단적 신비주의와 영적 교만으로 흐를 수 있는 위험이 상존했다. 이러한 사실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성봉 목사는 열광주의와 극단주의를 항상 경계했다. 신유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신유는 의약을 거부한다는 극단적인 주장을 배격했으며, 믿음과 기도를 뒷전으로 하고 약에만 의존하는 것도 경계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약을 통해서도 신유의 은사를 베푸시지만 그것에만 집착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의약에 의한 치료와 신유에 의한 치유를 설명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비유를 자주 들었다. 즉 쇳덩이를 물에 넣으면 가라앉는 것은 자연의 법이지만 군함을 만들어 물에 뜨게 하는 다른 법도 있다는 것이다. 의약을 쓰는 것이 자연의 요법이라면 신유는 초자연의 요법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의약을 거부하지 않는 신유, 그러면서도 의약에 얽매이지 않는 신유에 대한 균형잡힌 감각이 오늘 우리의 신앙여정과 사역에도 요청된다고 하겠다.
박명수 목사 | 서울신학대학교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