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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사람

[스크랩] 영어 성경의 아버지, 윌리엄 틴데일(William Tyndale)

작성자섬김이|작성시간19.08.15|조회수274 목록 댓글 0

윌리엄 틴데일(1490년경-1536)은 영어성경의 아버지라 불린다. 그 이전에는 라틴어 벌게이트 성경에서 번역한 <위클리프 성경>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을 결코 출판되지 않았으며, 전체가 정확한 것도 아니었다. 틴데일은 정확한 영어성경을 출판하기로 결심하고 히브리어와 헬라어 원어성경에서 번역하여,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이 성경을 접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불행히도 교회의 권세자들은 그 계획을 반대하였다. 그러므로 틴데일은 최근의 한 전기 제목처럼 “하나님의 범법자가”가 되기 위해 지하로 내려갔다.

 

틴데일은 모든 신약성경과 구약의 일부를 번역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적들에 의해 체포되어, 자신의 성경번역 때문에 생명을 지불하여야만 하였다. 마지막에서 틴데일은 승리의 나팔을 울릴 수 있었으니, 그것은 그의 성경이 바로 최근에까지 거의 모든 영어성경의 번역의 기초가 된 것이다.

 

1490년대  출생

1512        옥스퍼드대학 졸업(B.A.)

1515        문학석사학위 취득

1521        소드베리 매노에 체류

1523        턴스톨감독과 면담

1524       독일로 출발

1525       콜롱에서 신약 첫판 출판

1526       보름스에서 신약 완간

1530       앤트베르프에서 오경 출판

1535       앤트베르프에서 구금체포

1536       사망: 꽁꽁 묶여 브루셀에서 화형 당함

 

윌리엄 틴데일과 영어성경(A.N.S.레인)

 

틴데일은 옥스퍼드에서 석사학위 취득후 잠시 동안 케임브리지 대학으로 적을 옮겼다. 케임브리지 대학은 1520년대 초에 루터란 사상으로 무르익었었다. 거기서 그는 자신의 개신교에 대한 확신을 얻었을 것은 가능하다. (후에 틴데일은 대학의 신학교육에 강한 불만감을 표시하였다: “대학들은 학생이 8, 9년 동안 세속학문에 심취되어, 성경이해를 영원히 봉쇠시키는 거짓원리로 단단히 무장시킨 후에야 성경을 보도록 규정하여 왔다”).

 

틴데일은 메노에서 그 지방의 목회자들이 성경에 대하여 무지하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고한 목회자에게 이렇게 선언하였다: “만일 하나님께서 앞으로 수년 동안 나의 생명을 보존하신다면 나는 당신이 성경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것보다도 쟁기를 가는 소년이 훨씬 더 성경을 알 수 있도록 만들겠다.” 여기서 틴데일은 헬라어 신약성경 서문에 있는 에라스무스의 소원을 반영하고 있다: “쟁기가는 사람이 쟁기 갈면서 성경 본문을 노래하고, 베짜는 직공이 베틀의 곡조에 맞추어 성경 본문을 노래하는 그때가 도래하기를 하나님께 기원한다”.

 

롤란드파의 위협 때문에, 1408년에 교회는 교회의 허락을 받지 않은 영어성경번역을 금지시켰다. 틴데일은 런던으로 가서 감독 쿠벌트 툰스톨과 면담하였다. 그는 영어 성경을 추진하기보다는 루터주의의 성장을 막는 데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틴데일은 곧 “런던의 왕궁의 주인은 신약을 번역할 수 있는 여지가 없음 뿐만 아니라 전 영국에서도 그 일을 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자신의 계획에 대하여 몇몇 런던의 상인들로부터 지원을 얻은 틴데일은 그 번역사업을 추진하기 위하여 영국을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1524년 독일로 떠났고 그후 그는 결코 다시 돌아오지 못하였다. 콜롱에서 신약을 번역하였으나 조력자 가운데 한 사람의 배신으로 미완성으로 끝났고 단 한권만 남아 있다. 틴데일은 개혁에 대해 좀더 고무적인 분위기를 갖고 있는 보름스로 옮겼다. 그는 그곳에서 다음 해 최초의 완성된 신약성경을 출판하였다. 출판된 6,000권의 성경 가운데 단지 두 권만이 남아 있다.

 

감독들은 출판된 성경들을 영국으로 반입하여, 할 수 있는 한 모든 성경을 폐기 처분하였다. 1526년 쿠벌트 툰스톨 감독은 성 바울 성당에서 성대하게 소각시켰다. 1530년 틴데일의 오경번역이 자신이 정착하고 있는 앤트베르프에서 출판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상당수의 신약성경을 재판하였다. 틴데일은 계속하여 다른 사람들의 조언들과 자신의 사상의 진전에 비추어 번역을 수정하였다. 틴데일은 성경본문을 교황반대에 응용하려는 유혹을 거부할 수 없었다.

 

틴데일은 이따금씩 라틴어 번역과 독일어 번역을 참고하기는 했지만 주로 헬라어 성경과 히브리어 성경에서 직접 번역하였다. 그의 문체는 평이하였다. 성경이 널리 알려지기를 원했던 자신의 원래 목적을 지켜나가면서 보통사람을 독자로 겨냥하였다.

 

틴데일은 구약성경의 번역을 완성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1535년에 그의 동료 영국인 헨리 필립스가 틴데일을 배반하였다. 필립스는 틴데일을 앤트베르프 거리로 데리고 나갔다. 그후 틴데일은 좁은 거리를 걸어 내려가는 동안에 잠복하고 있던 병사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브루셀 근교 빌보르드 성 안에 있는 정부 감옥소에 수감되었다. 거의 1년 반 동안 감금당한 후 1536년 10월 6일에 브루셀에서 줄로 꽁꽁 묶여 장작더미 위에서 화형당했다. 그의 마지막 유언은 다음과 같이 보고되었다: “오 주님, 영국 왕의 눈을 열어 주소서!”

 

틴데일의 번역은 영국에서 금지당했다. 발견되는 경우에는 폐기처분 되었다. 그러나, 계속 개신교를 반대하였던 헨리 8세의 통치하에서도 틴데일의 영향은 대단하였다. 1536년 마일스 커버데일이 최초의 신구약 영어성경을 완간하였다. 이 정역은 틴데일 역에 상당히 의존하였다. 켄터베리 대주교(토마스 클랜머)와 대주교 대리(토마스 크롬웰) 두 사람이 헨리 8세를 설득하여 커버데일 역의 출간을 공인하도록 하였다. 모든 번역본은 본질적으로 틴데일 역에 기초하고 있다. 틴데일은 인간적으로는 복고 되었고, 번역본에 담겨진 그의 확신은 계속하여 메아리치며 영향력을 떨쳐왔다.

 

틴데일은 당연히 “영어성경의 아버지”라 불릴 수 있을 것이다. 최근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영어 신약성경은 단지 틴데일역의 수정판에 불과하다. 이것은 결코 지나친 과장이 아닐 것이다. 약 그의 용어의 90%가 <흠정역>에 사용되었고, 약 75%가 <RSV성경>에 사용되었다. 그는 또한 여러 권의 책을 저술하였으며,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그의 <사악한 부의 신 비유>와 <기독교인의 순종>이다.

 

- 존 우드브리지 엮음, <인물로 본 기독교회사>, pp 37-43

 

요약자 주; 로이드 존스의 틴데일에 대한 평가를 일부 옮긴다.

 

“청교도주의는 1524년 윌리엄 틴데일에게서 최초로 모습을 내러냈다고 주장한다. 내픈의 <튜더왕조 시대의 청교도주의>에 동조한 것이다. 청교도주의는 일종의 사고의 형태이다. 청교도주의는 태도요 정신이다. 틴데일은 감독들의 승인이나 재가를 받지 않고 성경을 번역하여 출판했다. 이것은 당시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것은 청교도주의가 쏜 첫 사격이었다. 그는 또 왕의 승낙 없이 영국을 떠났다. 이것 역시 비상한 행동이었고 당국자들의 눈에는 지극히 비난 받을 만한 일이었다. 성경을 번역하여 출판하고 싶은 열망에서 한 일이었다. 그는 독일로 가 루터 등의 도움을 얻어 위대한 일을 마무리했다.

이 두 행동들은 당국의 태도에 대한 청교도의 전형적인 자세로 계속 이어졌다. 이것은 전통이나 권위의 문제보다 진리를 앞세우는 것을 의미했다. 자기가 진리라고 믿는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길 자유를 고집하는 것이었다. 틴데일 시대로부터 이 정신, 이 자세, 이 사조가 계속 드러났다.

- 로이드 존스, <청교도신앙 그 기원과 계승자들>, ‘1971년 청교도주의와 그 기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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