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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사람

[스크랩] 리빙스턴

작성자섬김이|작성시간19.09.16|조회수153 목록 댓글 0

 리빙스턴

 

 

 

 

 

● 데이비드 리빙스턴은 일반인들에게 19세기 아프리카를 세상에 소개한 위대한 지리학자요 탐험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어려서부터 선교에 헌신한 선교사였고, 선교사가 되기 위해 의학과 신학을 공부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그는 1813년, 스코틀랜드의 블랜타이어에서 영국 산업혁명 이후 불어닥친 가혹한 환경 속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노동자였으며 매우 가난했다. 면 공장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의 단칸방에서 여러 식구가 함께 살았다. 리빙스턴은 그 면 공장에서 10살부터 하루 14시간씩 일을 하였다. 그는 그 공장의 야간 학교에서 기본교육을 받았다. 물론 그 교육이란 면 기계를 다루는 책을 읽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근면, 경건한 기독교인이었던 양친의 영향으로, 리빙스턴의 일에 대한 열성과 지식에 대한 목마름은, 20세부터 강한 기독교 신앙에 의해서 다시 강화되는데, 디크의 '종교철학과 미래국가의 철학'이란 책을 통해서 개인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원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 방적공장에서 방적공이 되어 어느 정도 많은 급료를 받고 있었으나 리빙스턴은 중국 의료선교사에 대해 호소하는 독일 선교사 칼 구출라프가 쓴 글을 읽은 후, 선교사역을 위해 의사로 훈련받기로 결심하게 된다. 그는 자신이 할 일은 그러한 일이라고 아버지를 설득했다.

이런 목표를 마음에 품고서 그는 의학을 공부하기 위해 글라스고우에 있는 앤더슨 대학에 들어갔다. 의학공부를 시작하면서 한편으로 리빙스턴은 런던선교회에도 지원을 신청해 놓았다. 그는 수습생으로 받아들여져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 등을 배울 수 있었다.

대학에서 의학 및 신학 연구를 한 리빙스턴은 1938년에 런던선교회(LMS)의 제의를 받아들여 더 많은 훈련을 받기로 하였다. 1840년 리빙스턴은 의학공부를 마치고 핀스베리의 알빈 교회에서 안수를 받았다. 처음에 리빙스턴은 중국선교사를 계획하고 있었으나, 그 당시 이미 영국과 중국 사이에 아편전쟁이 발발해 있었고, 런던선교회는 전쟁이 끝나기까지는 더 이상 중국에 선교사를 보내지 않기로 결정한 상태였다.

그리고 이때 리빙스턴은 후에 자신의 장인이 된 아프리카의 저명한 선교사 로버트 마펫과 만나게 되었고, 그와의 만남으로 젊은 스코틀랜드 청년 리빙스턴은 남아프리카 사역을 자원하게 된다.

● 1841년 3월 스물여덟 살의 청년 리빙스턴은 남아프리카의 끝 케이프타운에 첫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7월 쿠루 만에 있는 마펫의 선교지역에서 자신의 선교사역을 시작하였다. 리빙스턴은 원주민 언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자신의 선교를 시작하기에 적합한 곳을 찾기 위해 곧 선교 영향이 닿지 않은 원주민들을 찾아 내륙으로 점점 나아갔다. 노예제도 폐지를 주장한 그는 아프리카 구석구석에 길을 개척하여 문명을 전하고 아프리카인과 합법적인 상업을 통해 노예로 팔리는 많은 사람들을 구할 수 있다고 믿었다.

리빙스턴은 인구가 많고 회심자가 많은 번영하는 마을을 발견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그는 완전히 실망하고 말았다. 그 땅은 거의 황무지였으며 종교적 상황도 완전히 엉망이었다. 아프리카의 원주민들에게 유럽에서 건너온 백인들은 이상한 존재로 보였다. 설교자들은 초자연적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고 있었고, 대부분의 원주민들은 백인들을 두려워했다.

사람들에게 그가 믿는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이라는 점을 이해시키기 위해 리빙스턴은 머리를 낮추고 기도했는데, 이것을 본 원주민들은 리빙스턴이 말하는 신이 땅속에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리빙스턴은 사자에게 물리는 사고를 당하면서도 발길을 멈추지 않고 칼라하리 사막을 넘어 아프리카 오지로 선교의 깃발을 들고 나아갔다.

그러나 1843년부터 12년 동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단 한 명의 회심자 밖에 얻지 못한 리빙스턴은 점점 더 지금까지 해온 일반적인 선교사역에 대해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아프리카 대륙의 문호가 더 넓게 열려서 유럽인들이 안심하고 아프리카 대륙을 여행할 수 있고, 또 쉽게 정착할 수 있어야, 아프리카를 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하여 리빙스턴은 ‘기독교, 무역, 개화’를 불가불리의 것으로 보게 되었고, 아프리카를 유럽에 알리기 위해, 가족들을 배에 태워 영국으로 보낸 후 자신은 더 깊은 오지로 발길을 옮기게 된다. 이때부터 리빙스턴의 삶은 아프리카를 기독교 선교에 개방시켜야 한다는 집념에 따라 움직이게 되었다. 그는 칼라하리지방을 중심으로 한 선교활동을 통해 원주민들의 언어, 풍습, 지리상의 발견에 강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이후 4년간 당시 어떤 백인의 발길도 닿지 않았던 아프리카 오지를 동서로 가로질러 무려 4,000마일(6,400km-남북한 총길이의 5배 이상)을 여행했다. 여행 도중 말라리아를 비롯 그는 거의 항상 질병에 시달렸다. 그러나 그의 의지력은 많은 그의 동료들을 앗아간 질병이나 불편함에 굴하지 않았다.

4년간의 아프리카 횡단을 마친 리빙스턴은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아프리카에 대한 탐험의 공로로 왕립지리학협회로부터 금메달을 받는 등, 영웅대접을 받게 된다. 그가 받은 수많은 영예 가운데에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받은 법학 박사학위도 들어있다. 그는 그간의 여행기록을 겸손한 필치로 엮어 「선교여행과 남아프리카 탐험」(1857)이란 책을 썼는데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 1858년, 이번엔 아내와 함께 탐험대를 이끌고 다시 아프리카 동부로 떠났다. 그러나 그 탐험은 일종의 재난이었다. 철저한 준비에도 불구하고 리빙스턴 탐험대는 정글에서 여러 번 길을 잃고 헤매었으며, 이 때문에 동료들간의 불화가 끊이지 않았다. 1863년 영국 정부는 그 탐험을 취소시켰다. 거기다 그의 아내마저 병에 걸려 목숨을 잃고 말았다. 영국정부는 즉각 귀환토록 명령했으나 리빙스턴은 대원들만 보내고 홀로 밀림 속으로 들어갔다.

1864 그가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리빙스턴에 대한 영접은 첫 방문보다는 눈에 띄게 차가웠다. 영국 정부는, 이전에 갖고 있던 리빙스턴의 계획들에 대한 열정을 상실했다. 리빙스턴은 마지막으로 1866년에 단지 명목상의 권위를 지닌 무보수 영사의 자격으로 아프리카로 돌아갔다. 리빙스턴은 나일강의 근원을 찾아 북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리빙스턴은 말라위 호수와 탕간이카 호수 사이에 있는 지도에 없는 영토를 탐험하면서 말년의 생을 보냈다.

오랜 탐험생활로 그의 건강은 몹시 악화되었다. 그런데 이번엔 원주민들의 공격을 받아 식량과 물품, 의약품 모두를 잃고 그를 따르던 사람들마저 리빙스턴을 남겨두고 도망쳐버렸다. 도망친 사람들은 리빙스턴이 죽었다고 거짓 보고했다. 그 당시 수 년 동안 그의 소재지와 심지어 그의 생존조차 세계에 알려져 있지 않았다. 곧 리빙스턴을 찾으려는 탐험이 서둘러 진행되었다.

그로부터 5년 후, 1871년 뉴욕 헤럴드지의 특파원 스탠리는 아프리카 우지지의 우거진 밀림 속을 헤매고 있었다. 밀림 숲 어딘가에 사람의 신음소리가 들려 가보니 열병에 걸린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만큼 비쩍 마른 노인이 쓰러져 있었다. 순간 스탠리는 수년 전 밀림에서 죽었다는 리빙스턴이 생각이 나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 리빙스턴 박사가 아니십니까?" 그러자 노인이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스탠리의 극진한 간호로 몸을 회복한 리빙스턴은 함께 고국으로 돌아가자는 스탠리의 청을 거절하고 다시 여행길에 올랐다. 2년 후, 리빙스턴은 잠비아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무엇을 애절하게 기도하는 듯한 자세로 무릎을 꿇은 채였다.

● 데이비드 리빙스턴은 여러 얼굴은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사람의 일을 하나님께서 관장하신다는 칼빈주의적인 신념을 잃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음을 확신했고 한마음으로 그것을 추구해 나갔다. 그렇게 함으로 그는 극심한 고통과 불편을 이겨낼 수 있었다.

그는 언젠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하나님께서 내 봉사를 받으셨다면 내 인생은 나의 사역이 끝나는 날까지 하나님의 놀라우신 인도 하에 있게 될 것이다.”

리빙스턴은 자신의 노력의 결과를 항상 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또한 그는 하나님의 계획은 한 사람의 인생보다 크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또한 자신의 본래 소명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길을 닦는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영국이 아프리카에 대해 “신성한 소명”이 있다는 그의 말은, 그가 원했던 대로 선교사들과 제국주의 양자에게 도전을 주었다.

아프리카에서 그의 선교적 자세는 적극적이고 개척자적이었다. 남아프리카에서 처음 사역을 시작할 때부터 그는 "아직 선교사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수천의 마을들"에 대한 부담을 가진 개척 선교사였다.

이에 대한 유명한 예화로 어느 날 영국에 있는 몇몇 친구들이 리빙스턴의 고생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겠다는 생각으로 다음과 같은 편지를 그에게 보냈다.

"리빙스턴, 낯선 땅에서 사랑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자네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내네. 먼 나라에서 고생하고 있는 자네를 생각하면 여기서 편안하게 지내고 있다는 것이 부끄러울 뿐이네. 그래서 자네의 고생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기 위해 우리가 자네를 도와줄 사람을 몇 명 그곳으로 보내려 하네. 그러니 그곳까지 가는 길을 상세히 적어 다음 편지에 보내 주면 좋겠네."

하지만 편지를 받은 리빙스턴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답장을 보내 정중하게 그 제의를 거절했다. "마음은 고마우나 이곳까지 오는 길이 있어야만 오겠다는 사람들이라면 나는 사양하겠네. 이곳에서 진정 필요한 사람은 길이 없어도 스스로 찾아오겠다는 사람이거든."

선교사로서 그가 주로 한 일은 아프리카의 길을 연 것이다. 그가 만든 지도를 따라 많은 선교사들이 아프리카 내륙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1873년 5월 1일,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그의 개척자적인 삶은 지금의 아프리카에 위대한 복음의 업적을 이루게 되는 결과를 낳게 한 위대한 인물로서 평가되고 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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