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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요한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

작성자섬김과 나눔|작성시간20.08.23|조회수236 목록 댓글 0

요한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

 

 

 John Chrysostom은 황금의 입이라 불린다. 그 이유는 설교의 대가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사에서 가장 위대한 설교자 John Chrysostom350년 경 안디옥에서 태어났다. 386년부터 397년까지 안디옥 교회의 강단을 맡았던 그는 초대교회가 낳은 가장 명설교가이자 성경 강해자였다. 그의 설교는 매우 직설적이고 강렬하며 단순한 것이 그 특징이며, 교리적이기 보다는 도덕적이고 영적이었다. 헬라어 성경의 의미에 대한 그의 통찰력과 그것을 청중에게 실제적으로 적용하는 기술은 당대에 가히 그를 따를 자가 없었다. 안디옥의 전통을 따라 우화적인 해석보다는 문법적이고 문자적인 해석을 추구하였다. 그는 단순한 복음만 전하는 설교자는 아니었다. 진정한 설교자의 모습이 무엇인가를 말과 행동으로 균형있게 보여주었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곧은 성품을 가진 Chrysostom의 설교는 당대의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비록 자신의 곧은 성품과 직설적인 외침 때문에 황실의 미움을 사 오늘날의 터어키의 북동쪽에서 고독한 유배생활을 하다 외로이 세상을 떠났지만 요한의 메시지는 그의 삶과 함께 역사 속에서 길이 기억되어 왔다.



아버지를 일찍 잃은 요한은 경건한 어머니 안두사(Anthusa)에 의하여 양육되었다. 20살에 과부가 된 요한의 모친은 영적 성장과 일반교육에 온 정성을 쏟았다. 모니카와 함께 당대에 가장 훌륭한 여인으로 알려진 Anthusa는 기독교 역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여성이었. Anthusa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요한의 스승이자 이교도 웅변가 리바니우스(Libanius)는 안두사의 삶과 성품에 감동받아 어이구, 그리스도인들은 참으로 훌륭한 여인들을 갖고 있구나라고 예찬하였다. 기도와 신앙과 정직으로 특징되는 Anthusa의 가정교육을 받으면서 Chrysostom은 성숙한 신앙인으로 성장한다. Anthusa는 그를 법률가로 만들려고 했지만 Chrysostom은 당대에 세계적인 수사학자 리바니우스(Libanius)의 영향을 받아 공중 연설가가 되었다. 천부적인 설교가 Chrysostom의 메시지는 훌륭한 가정교육, 안디옥의 학풍, 수사학적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몹수에티아의 감독이 된 데오도레(Theodore)와 함께 요한은 문법적 역사적 해석에 대한 깊은 연구를 했으며 자신의 사상과 생각을 언어로 표현하는 수사학적 훈련을 쌓았다



 모친이 세상을 떠난 후 370년대에 안디옥 교회의 산지에서 은자로 외로운 고행을 계속하던 Chrysostom은 안디옥으로 돌아와 멜레티우스에게서 381년 집사로 안수 받았다. 이때부터 그의 목회사역은 시작되었다. 멜레티우스 감독을 계승한 플라비안(381-404)Chrysostom을 사제로 삼았고 사제로 있는 동안 Chrysostom은 널리 알려진사제직이라는 저서를 기술하였다. 386년경에 저술한 사제직은 목회 사역에 대해 지극히 높은 표준을 제시한 책이다. 천부적인 말재주를 타고 난 요한은 36살부터 안디옥에서 제일가는 교회에서 설교를 시작하였다. 그때부터 그의 설교가 빛을 보기 시작하였다. 안디옥에서 12년 동안 성경을 강해하면서 그의 명성은 더해갔고 요한은 성경강해 설교를 계속할 수 있었다. 그 동안에 요한이 한 설교는 창세기에 관한 설교가 67, 마태복음은 90, 요한복음은 88, 로마서는 32, 고린도후서는 74번이었다. Chrysostom에 대한 안디옥인들의 지지는 가히 대단했다. 안디옥에서 성공적인 목회를 하던 Chrysostom은 황제의 요청에 의해 398년 제2Roma Constantinople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안디옥에서 안정된 사역을 하던 것과는 달리 Constantinople에서의 사역은 처음부터 순탄하지 않았다.



안디옥과 비교할 때 이 수도는 매우 다른 세계였다. Chrysostom은 성직자와 수도승, 수녀, 유력한 평신도들 사이에서 공히 개혁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요한이 왕실 감독의 생활 스타일을 거부하고 교회의 개혁을 추진하면서 Constantinople에서의 요한의 사역은 처음부터 순탄하지 않았다. 기독교의 일반 민중으로부터 인기를 얻었으나 그의 열을 올렸던 고위층의 사치 및 악덕에 대한 탄핵 때문에 유독시아(Eudoxia) 황후를 포함하여 수많은 적을 만들고 말았다. Chrysostom의 목회사역에 또 하나의 장벽은 아리우스주의였다. 성 내에 고트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면서, Chrysostom은 그들의 아리우스주의를 용납하지 않고 선봉에 서서 그들을 향해 강력한 선교정책을 펴 나갔다. 에베소에 새 감독이 401년 초에 부임하자 그 교회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요한은 그곳에 가 있었다. 그 동안에 아리우스주의자들은 세력을 확보하였다. 여기에 지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들은 가발라의 세베리안(Severian of Gabala), 프톨레마이스 안티오쿠스(Antiochus of Ptolemais), 베레 아의 아카키우스(Acacius of Berea)였다. 이들의 부상은 앞으로 요한의 사역이 험난할 것이라는 것을 예고했다. 게다가 요한과 오랜 라이벌관계에 있던 알렉산드리아의 데오필루스 감독(385-412)이 아리우스주의의 세력에 합세하였다. 398년 요한이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에 취임하자 그는 어느 정도 당혹감을 느꼈다. 둘 사이의 관계가 점점 더 멀어져 갔다. 403년 데오필루스와 그를 지지하는 애굽의 감독들은 보스포루스 건너 편 Chalcedon 근처의 오우크(Oak)에서 자기들끼리 종교회의를 열어 Chrysostom을 해임하고 민중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요한을 보스포루스의 건너 편 프래내툼으로 추방하였다.



그러나 얼마 못되어 상황이 완전히 반전되었다. 민중 폭동에 대한 두려움과 지진에 의해 야기된 놀람 때문에 유독시아까지도 Chrysostom의 재소환을 청원하였다. Chrysostom은 개선가를 부르며 돌아왔고 데오필루스는 겁에 질려 달아났으며 오우크의 회의는 무효화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Chrysostom에 대한 반발이 다시 재개되었다. Chrysostom이 유독시아 자신을, 세례요한의 머리를 요구했던 헤로디아에 비유했다는 소문이 들리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유독시아는 Chrysostom에게 감독직 퇴임을 명령했다. 그러나 Chrysostom은 굴하지 않고 황제의 퇴임명령에 불복하였다. 그럴수록 황제는 분개했다. 404년 부활절의 세례의식 중에 황제의 군대들이 들이닥쳐 닥치는대로 무참하게 살해했다. John Chrysostom을 따르는 파는 엄청한 희생을 당했고 Chrysostom도 아르메니아 타우르스 산에 있는 쿠크수스라는 정착촌으로 유배를 당했다. 유배지의 Chrysostom을 방문하기 위해 사람들이 발길이 끊이지 않으면서 그의 유형지가 진정한 순례지로 바뀌었다. 특별히 Chrysostom에 대한 안디옥교회 교인들의 존경은 대단했다. 이것은 황실의 미움을 사기에 충분했다. 황제가 요한을 교인들과 분리시키기 위해 흑해 먼 북동쪽 연안에 있는 피티우스로 유배지를 변경하자 새로운 유배지로 가던 요한은 407914일 폰투스의 코마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역사는 침묵하지 않았다. Chrysostom의 사후 오래지 않아 그에 대한 재평가가 시작되었고 로마의 이노센트 1(402-417)가 요한을 강력하게 지지하고 나섰다.


  드디어 “438년 그의 유해가 코마나로부터 운송되어 콘스탄티노플의 사도교회(Church of the Apostles)에 재 매장되었다. 아르카디우스와 유독시아 사이에서 태 어난 아들 데오도시우스 2세는 죽은 요한에게 존경의 예를 갖추면서 범죄 한 자기 부모를 위해 자비를 간구하였다. 요한의 신학적 공헌은 그의 설교와 사역에 비해 그리 대단하지 않았다. 그의 신학은 전형적인 안디옥의 전통을 반영하고 있다. 아리우스에 맞서 싸웠던 요한은 니케아 전통에 확고히 서 있었고 성육신에 있어서도 완벽한 신성과 인성이 성육신 그리스도 안에 존재한다는 안디옥의 전통을 그대로 따르고 있었다. 또한 마리아를 데오토코스(Theotokos/하나님을 낳은 자)라 부르는 것에도 동의하지 않았다. 후에 토마스 아퀴나스는 마리아에 대한 Chrysostom의 견해가 무례하다고 여겼다. 요한의 원죄 개념 역시 안디옥의 전통을 반영한다. 요한의 명성은 설교에 있었고 그 설교의 근간은 성경에 기초하였다. 요한의 설교는 끊임없이 매력을 주고 있으며 현재 남아 있는 600편 이상의 설교와 강론은 어느 헬라 교부의 것보다 더 많다. 그러한 설교들의 다수가 오늘날도 여전히 설교로 읽힐 만하다. 인간의 평등, 빈부 격차, 사회적 모순에 결코 둔감하지 않은 그 시대의 양심 요한은 여전히 현대 설교가들의 모델이다. “온갖 찬사와 인기에도 불구하고 Chrysostom은 자신의 설교사역에 대해 자만하지 않았다. ‘나의 사역은, 흙탕물이 끊임없이 흐르고 있는 땅의 한 구획을 깨끗이 청소하려고 하는 사람의 일과 같다했을 뿐이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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