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믿음의 사람

[스크랩]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작성자섬김과 나눔|작성시간21.05.01|조회수64 목록 댓글 0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출생 - 사망 ; 1906년 ~ 1945년

직업 ; 신학자

국적 ; 독일

관련인물 ; 바르트

​

독일의 신학자, 바르트의 제자.

히틀러의 교회 공격에 대하여 투쟁, 이른바 '독일 교회 투쟁'에 참가했는데, 좌우로 동요하는 교회 투쟁에 실망, 1941년 히틀러 암살계획에 가담하여 1943년 체포되고 1945년 처형되었다.

그는 옥중에서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저항과 복종 Widerstand und Ergebung, 1951), 현대인은 '연구상의 가설로서의 신'이나 '기계장치의 신'을 전제로 하지 않을 만큼 성인이 되었고, 이런 '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 현대에서는 기독교의 내용을 '비종교화'할 필요가 있고, 또 속화로부터 신앙의 신비를 지키는 '극비 규율'이 요청된다는 것, 나아가 교회는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을 위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했다.

나치즘에 대한 저항운동에의 참가하고 다른 정치적 태도나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과의 협동 속에서 나타난 이러한 문제 제기는 현대의 기독교 이해에 큰 영향을 주었다.

​

출처 ; 철학사전

​


​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

요약 ; 독일 고백교회의 목사이자 신학자이다. 히틀러 정권 하에서 반나치스운동을 펼쳤으며 히틀러 암살계획이 실패하자 1943년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어 강제수용소에서 처형되었다.

​

원어명 ; Dietrich Bonhoeffer

출생-사망 ; 1906.2.4 ~ 1945.4.9

국적 ; 독일

활동분야 ; 종교

출생지 ; 폴라드 브레슬라우

​

본문

​

1906년 2월 4일 독일 프로이센 브레슬라우(현 폴란드 브로츠와프 Wroclaw)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신경정신과 의사였으며 어머니는 독실한 기독교도 였다. 그는 8명의 형제 중 6번째였다. 튀빙겐대학 ·베를린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이탈리아 로마에서도 수학하였다. 미국 유학 후 베를린으로 돌아와 목사가 되었다. 신은 전지전능하지 않고 나약하며 그 나약함으로 인간을 구제하기 위해 강림했다고 역설했다. 당시 그의 신학사상은 직선적이고 과격한 것으로 받아들여 지기도 하였다. 1931년 베를린 공과대학의 강사가 되어 히틀러의 나치스가 정권을 잡은 뒤에도 반(反)나치스의 자세를 고수하였으며, 1935년 비합법적인 포교활동을 하였다는 죄목으로 교수자격이 박탈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직전에 강연여행 중이던 미국에서 귀국하였고, 1940년에는 강연 ·집필 금지처분을 받았다.

​

1942년 국방군의 빌헬름 카나리스 제독, 오스터 장군, 몰트케 백작 등과 함께 반나치스 지하조직을 주도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이 발각되자 1943년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었으며 베를린의 터겔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는 수감된 동안 히틀러 암살계획을 세우고, 1944년 7월 20일 스타우펜베르크 대령 등 동지들과 함께 히틀러 암살을 시도하였다. 폭약이 터졌지만 히틀러는 살아남았고 그의 동지들은 모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본회퍼는 1945년 4월 미군의 진출 직전 플뢰센베르크의 수용소에서 처형되었다. 1951년 《옥중서간》이 출판되었다.

​

출처 ; 두산백과

​


​

독일의 목사, 신학자.

브레슬라우에서 태어나, 튀빙겐, 베를린 등의 각 대학 신학부에서 공부했다.

1927년에 학위청구논문으로서 쓴 『성도의 교류』라는 교회론에서 일찍이 천재적인 통찰력을 나타냈는데 30년부터 미국으로 건너가, R. 니버 밑에서 공부했다.

31년 바이마르 체제 말기의 독일로 돌아가 베를린 대학 사강상 취임.

나치즘이 점차로 대두하는 정세 중에서 세계교회운동을 위해서 활약했는데, 33년 히틀러가 제국재상의 자리에 앉아서 절대적 권력을 장악하게 되자, 일찍이 그 악마적 성격을 간파하고, 결국 나치정권의 교회간섭과 그에 대항하는 교회의 저항운동의 진전 중에서, <독일교회투쟁>의 일원으로서 활약. 35년에는 <고백교회>가 창설한 핀켄바르데에서의 비합법목사연수소의 책임자로서 젊은 목사의 양성에 임하였는데, 그것도 결국 폐쇄되었다.

그후 한때 미국으로 건너갔는데, 제2차 세계대전 개시직전에 귀국. 점차로 직접적인 정치적 저항운동에 접근해서 43년에 게슈타포에 의해서 체포되었으며 2년간의 옥중생활 후 45년 4월, 나치스 붕괴 직전에 옥사.

그는 현대의 순교자로서의 생애를 보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제기한 신학적 문제는 전후 세계 교회에 대한 큰 자극과 문제가 되었다.

​

출처 ; 종교학 대사전

​


​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

독일 고백교회 목사(1906-1945년). 2차 세계대전 때 독일 나치에 대항해 교회의 대사회적 역할을 온몸으로 설득력 있게 호소한 프로테스탄트의 영향력 있는 신학자. 1906년 2월 4일 독일 브레슬라우에서 태어나 튀빙겐 대학과 베를린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다(1923-1927년). 이때 아돌프 하르낙, 라인홀드 제베르크, 칼 홀 등의 역사신학자와 칼 바르트의 영향을 받았다. 그 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독일어를 사용하는 회중교회 부목사(1928-1929년), 뉴욕 유니온 신학교 교환 학생(1930년), 베를린 대학 조직신학 강사(1931년)를 지냈다.

​

1933년 나치가 정권을 잡자 본회퍼는 정권 반대, 반유대주의 반대 운동에 적극 가담하면서 나치에 반대하는 고백교회의 중심 인물로 활동하였다. 또한 갈수록 민족주의로 변해가는 독일에 항거하는 독일교회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미국, 영국 등지에서 에큐메니칼 활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

1938년 독일의 히틀러 정권 전복 음모에 가담하였고, 미국 망명도 권유받았지만 독일에 남아 저항 운동을 계속하다 1943년 4월 5일 체포되어 베를린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1944년 7월 20일 히틀러 암살 음모에 가담한 문서들이 발견되어 1945년 4월 9일 플뢰센베르크(바이에른)에서 처형당했다.

​

저서로는 「Nachfolge Mich(나를 따르라)」(1937년), 「Ethik(윤리학)」(1949년), 「Widerstand und Ergebung(옥중서간)」(1951년) 등이 대표적이다.

​

출처 ; 교회용어사전

​


​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의 생애와 신학​

​

바르트와 틸리히보다 한 세대 뒤에 활동한 신학자이자 목회자이며, 또한 나치 독일에 의해 죽은 20세기의 순교자인 디트리히 본회퍼는 1906년 2월 4일 독일 브레슬라우에서 아버지 칼 본회퍼와 어머니 파울라 사이의 8남매 중 여섯째 쌍둥이(일곱째는 쌍둥이 누이동생인 싸비인)로 태어났다. 아버지 칼은 브레슬라우의 신경과 정신의학 교수였고 많은 신학자, 예술가, 법률가를 배출한 명문 출신이었다. 그의 어머니 역시 신앙심이 깊은 훌륭한 목회자 가계 출신이었으니, 그녀의 아버지는 황제를 모시는 궁정목사였으며, 조부는 19세기 최대의 교회사가로 알려진 아우구스트 폰 하제였다. 이처럼 신앙과 학문의 전통 속에 태어난 본회퍼는 어려서부터 뛰어난 학문적 능력을 보였으며, 또한 문학과 음악에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 디트리히 본회퍼

​

그러나 비록 본회퍼의 집안이 학자, 예술가, 종교인들을 많이 배출하긴 했지만 그의 가족들은 그다지 신실한 신앙인들은 아니었다. 어머니는 경건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으나 아버지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불가지론자이자 과학자로서, 철두철미 실증주의적 사고를 하는 사람이었다. 또한 가족 중 정기적으로 교회를 다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런 분위기였기에 본회퍼가 열네 살 때 목사가 되겠다고 밝혔을 때 가족들은 모두 놀랐고 반대했다. 가족들은 교회는 헌신하기에는 너무나 빈약하고 시시한 부르주아적 제도라고 하면서 그에게 학자나 음악가가 되라고 권유했다. 하지만 본회퍼는 "그렇다면 내가 그것을 개혁하겠다"면서 굳은 의지를 보였고, 그의 단호한 모습에 가족들은 곧 그 결정을 존중하였다. 그 후 그의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본회퍼는 열일곱 살 되던 때 튀빙겐 대학에 입학했고, 다음해에 베를린 대학 신학부에서 공부하였다.

​

당시 교수들은 한결같이 이 젊은 신학도의 학문적 재능을 높이 평가했으며, 특히 노 신학자 하르낙은 그를 "천재적 신학 청년"이라며 절찬했다고 한다. 본회퍼는 스물한 살 되던 1927년, 베를린 대학 신학부 박사학위 논문으로 「성도의 교제 sanctorumcommunio」를 제출하였는데, 이것은 대단히 우수한 논문이어서 칼 바르트는 이를 "하나의 신학적 기적"이라고까지 칭찬하였다. 그는 삼 년 뒤인 1930년에 교수 자격 논문으로 「행동과 존재 Akt und Sein」를 썼고 이 책과 함께 학자와 목회자로서의 삶의 준비를 마치게 되었다.

​

그 후 본회퍼는 잠시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후 약 일 년 동안 베를린 대학에서 강의를 하였다. 그 뒤 영국 런던의 독일인 피난민들로 구성된 교회에서 약 이 년간 목회를 했다. 그는 1936년에 독일로 돌아와 고백 교회가 운영하는 핑켈발데 신학교 운영의 책임을 맡게 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목회자 후보생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을 훈련시켰고, 또한 1936년 히틀러에 의해 금지될 때까지 베를린 대학에서 강의를 하였다.

​

본회퍼의 생애 역시 (바르트와 틸리히처럼) 히틀러와 독일 제3제국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앞에서 말하였듯이 히틀러는 제1차세계대전에 패한 독일의 무너진 경제와 구겨진 자존심을 회복시켰고, 새로운 희망을 불러일으켰다. 이 당시 히틀러의 인기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대단하였으니, 소위 '독일 그리스도인의 신앙 운동'은 히틀러를 무너진 독일을 세우고 온 세계에 번영을 가져다주기 위해 하나님이 보내신 이 시대의 구세주라고 선전했으며, 나치스는 행동하는 적극적인 기독교라고 하였다. 하지만 본회퍼는 히틀러의 운동에 들어 있는 우상 숭배적이며, 반기독교적인 정신을 예리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히틀러가 총통이 된 다음 날 아침 베를린 방송을 통해 '젊은 세대에 있어서 지도자 개념의 변화'라는 강의를 했다.

​

여기에서 그는 "하나님은 직책을 세우셨고, 이 직책에 적절한 사람을 뽑아서 일하신다. 그런데 직책에 관계없이 어떤 사람에게 전권을 주게 될 때, 그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이요 결국 우상 숭배에 빠지게 된다"고 했다. 그러나 방송은 도중에 중단되었고, 이 때부터 본회퍼는 게슈타포(Gestapo)의 감시를 받는 요주의 인물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여기에 굴하지 않고 「교회와 유대인 문제」라는 논문에서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당시 유대인들을 쫒아내던 독일 교회를 비판했다. 그는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 따라서 어떤 특정 인종이나 사람이 교회에 올 수 없을 때, 그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거부하는 것이요 기독교의 존립 정신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다. 따라서 유대인을 쫓아내는 그리스도인들은 감히 그레고리안 찬송가를 부를 수 없다"라고 외쳤다.

​

이런 활동을 통하여 본회퍼는 자연스럽게 히틀러를 반대하고 기독교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독일 고백 교회 운동의 지도자로 부각되었으며, 곧 고백 교회의 신학교의 하나인 핑켈발데 신학교의 책임자가 되었다. 이곳에서 그의 목표는 이미 기초적인 신학 공부를 마친 학생들을 깊은 성경 연구와 기도 훈련을 체험한 사람들로 길러내는 것이었다. 그는 이 당시에 쓴 편지에서 "오늘날의 젊은 신학도(목사 후보생)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설교를 어떻게 할 것인가? 또, 성경 공부나 교회 행정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성경을 읽고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 하는 점이라고 했다. 이를 위해 그는 성경 묵상과 기도를 중심으로 한 하루 일과를 구상했다.

​

핑켈발데 신학교의 하루는 예배로 시작하고 예배로 끝났으니 예배는 시편 낭송, 찬송, 구약성경 읽기, 찬송, 신약성경 한 부분 읽기, 잠시 동안의 기도와 주 기도로 이루어졌고, 예배 이후에는 당시로서는 아주 생소한 30분 동안의 명상 시간이 있었다. 설교는 토요일 예배 때만 있었다. 예배 이후 오전 시간과 점심 식사 이후의 오후 시간은 주로 성서 주석과 종교 개혁자들의 신앙 고백서 연구에 사용되었고, 또한 설교학, 상담학, 예배학, 교회론, 목회학 등을 공부하였다. 저녁에는 토의 시간이 있어서 주로 독일의 현 상황에 대한 자유 토론을 하였다. 그 이후 저녁 예배와 그에 이은 또 한 번의 30분간의 명상이 있었다.

​

핑켈발데 신학교 시절의 본회퍼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직(discipleship)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정말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공동체 생활이 있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학생들과 함께 공동체 생활을 시도하면서 그것을 "형제의 집"이라고 불렀다. 여기에서 그는 함께 살고, 함께 기도하며, 함께 성경 말씀을 묵상하고, 서로 죄를 고백하며, 또한 함께 노동하고, 함께 음악을 듣는 삶을 시도했다. 이런 삶의 경험을 통해 그는 현대 영성 신학의 고전이 된 『성도의 공동생활』과 『나를 따르라』를 썼다. 이 책들은 일종의 성경 묵상집으로서 예수를 믿는 사람이 이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평이하게 기록한 것들이다. 여기에서 그는 앞에서 말한 바르멘 선언의 정신을 반영해, "주님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절대를 요구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불러 죽으라고 하신다"면서 철저히 예수의 제자로 살아가는 삶을 강조하고 있다.

​

하지만 핑켈발데 신학교와 형제의 집 시절은 오래가지 못했다. 1937년 나치 독일은 이 학교를 폐쇄하였고, 교장이던 본회퍼를 추방하였다. 이 때부터 본회퍼는 죽을 때까지 일정한 주소를 갖지 못하고 여기저기 떠돌아다녀야 했다. 나치 독일이 이미 그를 요주의 인물로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가능한 모든 방법들을 동원하여 영국과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교회 지도자들에게 히틀러의 진상을 알리고, 또 독일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런 활동 중에 그는 미국 뉴욕의 유니언 신학교의 초청을 받아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에 있던 그의 친구 폴 레만은 본회퍼의 미국에서의 일정을 다 잡아 놓고, 전쟁이 끝나고 나치 독일이 패망할 때까지 미국에 머물러서 강의와 연구를 할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본회퍼는 미국에 도착한 직후 자기가 잘못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당시의 정황을 그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

나는 유니언 신학교의 학장인 코핀 박사의 집 정원에 앉아서 나의 상황과 민족의 상황을 생각하고 기도할 기회를 가졌다. 그리고 그때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분명해졌다. 미국에 온 것은 잘못된 결정이었다. 우리 민족이 수난당하고 있는 이때 나는 독일의 그리스도인들과 운명을 함께해야 한다. 만일 이 때에 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지 않는다면 전쟁이 끝난 후 나는 독일의 재건에 참여할 권리를 가질 수 없을 것이다.

​

폴 레만은 이번에 돌아가면 본회퍼가 무사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어떻게든 그의 결심을 돌이키고자 했다. 하지만 본회퍼는 사자 굴에 던져질 것을 알면서도 믿음을 지켰던 다니엘의 심정으로 독일로 떠나는 마지막 배를 탔다. 그리고 배 안에서 이렇게 썼다. "미래에 대한 나의 내적 번민은 없어졌다. 나는 마음의 자유와 평화를 되찾았다." 뒷날 그는 「자유를 찾는 길」이란 시를 썼는데 이 시는 이 당시의 그의 심경을 잘 보여주고 있다.

​

하고 싶은 일을 하려고 하지 말고 옳은 일을 하려고 하라.

가능한 것 속에 떠 있지 말고 용감하게 현실적인 것을 붙잡으라.

자유는 사고의 도피 속에 있지 않으니 그것은 행동 속에만 있다.

소심한 망설임에서 삶의 풍파 속으로 나오라.

하나님의 계명과 신앙만을 의지하라.

그리하면 자유는 기쁨으로 네 영혼을 맞이하리라.​

​

만약 본회퍼가 미국에 그냥 남았다면 그는 소원대로 몇 권의 좋은 책을 썼을 것이며, 20세기 중반 이후의 가장 탁월한 신학자 중 한 명으로 이름을 떨쳤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수난당하는 조국과 교회와 함께하기 위해 돌아왔고 이로 인해 마침내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그는 이 결심이 양심에 비추어 올바른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고, 이 귀환으로 인해 우리는 학자 본회퍼는 얻지 못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종 본회퍼를 가지게 되었다.

​

독일로 다시 돌아온 본회퍼는 히틀러 정권을 전복하는 지하 운동에 깊이 가담하게 된다. 매부이자 독일의 대법관이었던 도나니를 통해 독일 군대 내의 히틀러 전복 운동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히틀러 제거 운동에 참여할 때까지 본회퍼는 많은 신학적 숙고의 시간을 가져야만 했다. 그는 그의 조국인 독일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히틀러가 총통으로 있는 한 독일의 패망을 하루라도 빨리 가져오는 길만이 진정 조국을 사랑하는 길이라고 믿었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의 산상수훈에 나타난 사랑의 힘을 믿는 목사요 신학자였다. 그런데 이런 그가 왜 폭력으로 히틀러를 살해하는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을까? 여기에 대해서 본회퍼는 이런 말을 남기고 있다.

​

"만일 미친 사람이 대로로 자동차를 몰고 간다면 목사로서의 나는 그 차에 희생된 사람들의 장례식을 치러주고 그 가족을 위로하는 것으로 책임을 다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만일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자동차에 뛰어올라 그 미친 사람의 손에서 핸들을 빼앗아버려야 하지 않겠는가?" 아마도 이 말이 본회퍼의 입장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그는 억울한 사람들이 무수히 희생되는 것을 방조하는 죄보다는 히틀러를 죽이는 죄를 범하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이것 역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위반하는 것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인간은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는 언제나 최선 아닌 차선을 선택할 수밖에 없음을 말한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매순간 가장 적절한 윤리적 결단을 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하나님의 용서를 구해야 한다."

​

하지만 1942년 가을 본회퍼가 관여하고 있던 나치 전복 음모는 중간에 발각되었고, 본회퍼는 매부인 도나니와 함께 게슈타포에 의해 체포되어 1943년 4월 5일부터 1944년 10월 8일까지 18개월 동안 테겔이라는 곳의 군대 감옥에 갇혔다. 하지만 아직 혐의가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았기 때문에 이 기간 중 그는 부모, 친구 그리고 그의 약혼녀인 마리아 폰 베테마이어에게 편지를 쓸 수 있었다. 그와 서신 교환을 가장 많이 한 사람은 그의 학생이자 친구이며 친척인 베트게였는데, 본회퍼가 죽은 후 이 편지들은 베트게에 의해 『옥중 서간』이란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

이 편지들을 통해서 본회퍼는 성경 묵상, 이 시대의 교회가 가야 할 길,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의 의미 등을 단편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1944년 9월 22일 본회퍼가 포함된 히틀러 전복 음모에 가담한 사람들의 명단이 발견되고, 본회퍼가 적극적으로 가담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나타나면서, 그는 베를린의 게슈타포 감옥으로 옮겨졌고 바깥세상과 완전히 차단되었다. 1945년 1월 7일, 그는 다시 부켄발트 수용소로 옮겨졌고, 이 때부터 제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치 독일이 패망할 때까지 본회퍼의 생사는 알려지지 않았다.

​

죽음을 눈앞에 둔 마지막 몇 달 동안의 본회퍼의 삶은 전쟁이 끝난 후 그와 함께 있었던 죄수들의 증언을 통해서 알려졌다. 그가 수용되어 있던 부켄발트 수용소에는 당시 히틀러에 저항하던 정치범들과 여러 나라의 전쟁 포로들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본회퍼는 이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격려하고 위로하는 목사로 섬겼다. 이 당시 본회퍼를 본 페인 베스트라는 사람은 이렇게 쓰고 있다. "본회퍼는 매우 겸손하고 부드러웠다. 그는 항상 지극히 작은 일 하나에도 기쁘고 행복해 했다. 살아 있다는 단순한 사실 하나만도 그에게 깊은 감사의 분위기를 가지게 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와 같이 진실한 사람은 별로 만나보지 못했다."

​

하지만 본회퍼 역시 인간이었다. 그는 감옥 창살 너머로 자유를 그리워했고,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을 보고 싶어 했으며, 언젠가는 풀려나 약혼녀인 마리아와 함께 기쁘게 아이들을 키우는 꿈에 잠기곤 하였다. 하지만 그가 처한 환경은 수시로 그를 우울과 절망에 빠뜨리곤 하였으니 이 시기에 쓴 「나는 누구인가?」라는 시가 그의 마음을 잘 대변해 준다.

​

나는 누구인가?

사람들은 내가 감옥에 있지만

마치 영주가 자기의 성에서 나오듯

태연하고 명랑하고 확고하게 걸어 나온다고 한다.

​

나는 누구인가?

사람들은 내가 간수들과 대화할 때

자유롭고 다정하고 맑게

마치 명령하는 사람은 그들 아닌 나인 것처럼 행동한다고 말한다.

​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사람들은 내가 침착하게 미소 지으며 자랑스럽게

마치 승리에 익숙한 사람처럼

불행한 나날들을 지내고 있다고 말을 한다.

​

나는 정말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 같은 자일까?

그렇지 않으면 다만 나 자신만 알고 있는 자에 지나지 않는가?

새장 속의 새처럼 불안하게, 그리워하다 병이 들고

목을 졸린 사람처럼 숨 쉬려고 몸부림 치고

색깔과 꽃과 새들의 노랫소리와

친절한 말과 이웃들을 그리워하며

폭행과 사소한 모독으로 인해 분노로 떨며

큰 사건에 대한 기대에 사로잡히고

멀리 떨어져 있는 친구를 그리워하다 낙심하고

기도하고 생각하고 창작하는 데 지쳐서 허탈에 빠지고

의기소침하여 모든 것에 이별을 고하려고 한다.

​

나는 도대체 누구일까? 전자일까 후자일까?

오늘은 이런 인간이고 내일은 다른 인간일까?

……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이 고독한 물음들이 나를 비웃는다.

내가 누구이건

오, 하나님 당신은 아십니다.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

한 인간으로서 본회퍼는 모든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외로움과 고통 그리고 깊은 절망을 경험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기 인생의 뿌리를 하나님 안에 깊이 박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엄습하는 모든 어둠의 시간을 극복해 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그렇듯이 길고 긴 싸움을 통해서였다.

​

마침내 본회퍼에게 죽음의 순간이 찾아왔다. 1945년 4월 8일 아침 그는 함께 있는 죄수들과 짧은 예배를 드렸다. 그는 「이사야」 53장 5절의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는 본문을 읽고 간단한 기도를 했다. 그리고 곧 사형장으로 끌려가 교수형을 받았다. 이때 있었던 일을 페인 베스트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

본회퍼 목사는 짧은 예배를 인도하고 우리에게 말씀을 전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켰다.……그의 마지막 기도가 끝나기도 전에 문이 열리고 사복을 입은 두 사람의 간수가 들어와 이렇게 말했다. "죄수 본회퍼, 우리와 같이 간다." '우리와 같이 간다'는 말은 죄수들에게는 한 가지, 곧 교수대를 의미할 뿐이다. 그때 본회퍼는 우리를 한 명씩 천천히 둘러보면서 이렇게 인사했다. "이것으로 끝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새로운 삶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

1945년 4월 9일 새벽에 본회퍼는 교수형을 받았다. 우리는 그때의 교도소 의사로부터 최후의 광경을 전해 들을 수 있다. "아마 아침 5시에서 6시 사이였던 것 같다. 죄수들을 감방에서 불러내다가 선고문을 읽었다. 그 가운데는 카나리스 제독, 오스터 장군, 자크 판사 등이 있었다. 감옥 건물 안 한 방의 반쯤 열린 문을 통해 나는 본회퍼 목사를 보았다. 그는 죄수옷을 입은 채 꿇어앉아서 열심히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의 기도의 열심과 확신은 나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

이윽고 아침이 왔고 죄수들은 옷을 벗으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그들은 나무들 아래 있는 작은 계단을 내려가서 준비된 사형 집행장에 왔다. 사형을 받을 사람들에게 잠시 동안의 시간 여유가 허락되었다. 본회퍼는 부드러운 봄의 숲 속의 교수대 아래서 벌거벗겨진 채 꿇어앉아 마지막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5분 뒤에 그의 삶은 끝났다. 그의 나이 39세였다. 본회퍼가 죽은 지 3주 후에 히틀러는 자살했고, 한 달 뒤에 독일 제3제국은 무너졌으며 히틀러의 희생자들은 자유를 얻었다.

​

본회퍼에 대한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조금씩 전해졌고, 마침내 이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제자의 삶의 중요한 한 모형이 되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다. 하지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

​

본회퍼의 의미​

​

본회퍼의 삶과 사상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의미 혹은 도전은 무엇일까?

​

나는 여기에서 세 가지 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

첫째로 진실한 신앙인의 삶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그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예수의 제자로 살고 있는가 아니면 단지 하나의 종교인으로 살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 본회퍼의 신학은 복종의 신학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몸 전체로 고백하고 입증하는 신학이었다. 그의 생애 전체는 예수에게 온전히 복종하는 삶이었으니, 그의 생애가 그의 신학의 가장 훌륭한 주석이라고 할 수 있다. 본회퍼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그저 믿음의 대상 정도가 아니라 사나 죽으나 들어야 할 생명의 말씀이요 온몸과 마음을 바쳐 따라가야 할 주님이었다. 이 점에서 그는 그저 교회 출석하는 정도로 만족하는 오늘날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경종을 울린다.

​

본회퍼가 보여주듯이 예수를 따르는 길은 단순한 종교인의 삶이 아니라 예수만 바라보며 살고, 예수 때문에 기꺼이 고난도 당하며, 오직 예수만이 절대적 주님이심을 고백하며 살아가는 삶이다. 본회퍼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불러 죽으라고 하신다"라고 말한다. 과연 오늘 우리는 예수의 제자로 살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의 종교인으로 살고 있는가? 본회퍼의 도전은 너무나 엄중하고도 무겁다.

​

본회퍼가 던지는 두 번째 도전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은 기본적으로 '이웃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점이다. 본회퍼는 『옥중 서간』에서 놀라운 통찰력으로 시대의 변화를 읽는 가운데, "종교의 시대는 사라졌고 세계는 성년이 되었기 때문에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특정한 종교적인 영역이 아니라 철저히 세상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야 한다"고 말하며 이런 제자의 삶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위하여 자신을 드렸듯이 이웃을 위한 삶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그리스도인들은 철저히 이웃을 위한 존재(the being for others)이다.

​

그런데 오늘날 너무나 많은 교회들이 교회 내부에만 관심을 쏟고 있다. 교회 예산과 프로그램의 많은 부분들은 교회 내부만을 지향하는 가운데 사람들이 실제로 살고 있는 '세상'이 하나님의 땅이요 구체적인 선교와 봉사가 이루어지는 곳임을 망각하고 있다. 이런 흐름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종 본회퍼는 오늘도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 안에서의 삶이요 이웃을 위한 삶임을 온몸으로 힘 있게 일깨우고 있다.

​

본회퍼의 삶이 우리에게 던지는 세 번째 메시지는 우리의 궁극적인 소망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이다. 교수대를 향해 걸어가면서 그는 그의 동료 죄수이자 교인들에게 "이것으로 끝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또한 새로운 시작입니다"는 마지막 인사말을 남겼다. 그는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 아님을 믿었다. 죽음 이후에도 그의 삶을 판단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고 심판과 보상이 있음을 믿었다. 이 믿음이 있었기에 그는 옥중에서도 목사로 살아갈 수 있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은 삶의 소망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은 돈과 명예, 사람들의 인정 같은 것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고 있다. 배금주의(拜金主義)가 정점에 달하여 돈이 신의 자리를 차지한 이 시대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며 사는 삶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 것인가?

​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다음검색
스크랩 원문 : 창골산 봉서방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