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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원길 여행

'길지기 연수 2020' - 후기.

작성자최태영|작성시간20.11.30|조회수752 목록 댓글 4

길지기 연수 2020 - 제주도 일원.

 

 

‘길지기 연수’라는 이름의 교육은 이번이 처음이다.

장소는 제주도.

참가자는 지금 길지기로 활동하고 있는 네 사람(김희경, 정모화, 조용희, 최태영)과, 앞으로 길지기로 활동할 것이 확실한 사람(이경아)과 그의 길동무 이찬주. 기획/안내자 정병귀 국장과 그의 딸 설아, 그렇게 모두 8명.

2박 3일간 진행된 연수실황을 여행잡기 또는 수필형식으로 기록했다.

 

 

11월 18일 - 첫 날.

 

군산공항 출발하는 제주행 진에어 탑승.

동향면에 사는 세 여성과 김희경·조용희 등 다섯 분의 여성은 장거리 운전을 기피하여,

두 명뿐인 남자들이 각각 자기 차를 운전하여 총 8명을 분승시키고 군산공항까지 이동했다.

두 남자 중 어떤 이는 난생 처음 경험하는 ‘여성들 동승 사건’에 미리부터 긴장하여

이틀 전인 16일에 벌써 세차까지 해놓는 등 부산을 떨었다나 어쨌다나.

그런데 세차를 한 바로 다음 날 비가 와서 그만 다 망했다나 어쨌다나.

 

진에어 승무원들은 유니폼으로 ‘청(靑)자켓’을 입고 있었다. 항공사 직원들의 시그니처로 여겨지던 깍듯한 용모와 제복이 ‘실용주의’의 이름 아래 그렇게 바뀐 첫 케이스여서 신선해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 항공사의 ‘불법적’ 대표였던 그리고 어금버금한 ‘모녀(母女)갑질’로 국민밉상이 되어버린 조현아,

그의 지시로 꽉 끼는 청바지를 입고 불편하게 일할 수밖에 없었던 시기가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 신선함의 빛이 바랜다.

나라를 들었다 놓은 갑질사건 이후 청바지 강요사건의 진실도 함께 드러나면서 청자켓으로 후퇴한 것이 그나마 다행이랄까.

그런데 역시 입는 사람이 그 옷을 어떻게 소화하느냐가 문제로 남는 듯하다.

지상 승무원인 한 남자는 불룩 나온 배를 어쩌지 못하는 체격인데 그 위에 청자켓이라…

 

비행시간은 한 시간 남짓.

착륙을 앞두고 잠깐 난기류를 통과하느라 기체가 다소 아래위로 흔들렸는데 그것이 그 다음 날부터 전국을 강타한 가을폭우의 전조일 줄은 몰랐다.

아침에 군산까지 달리는 내내 짙은 안개와 비 예보로 걱정이었는데 제주는 달랐다.

기온은 24도로 매우 높아 후덥지근했다.

 

렌트카 회사에 들러 예약한 차를 받았다. 큰 차를 빌리지 못하여 여덟 명이 꽉꽉 채워 앉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무슨 이유에선지 조수석에 앉으라 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편하게 타고 다녔다.

가끔 뒷자리 손님들에게 “바꿔 앉읍시다” 제안했지만 역시 무슨 이유에선지 그 때마다 ‘거절당했다’.

덕분에 편하게 다녔습니다, 고맙습니다.

 

동향면과 백운면이라는 산골동네를 막 빠져 나온 네 여성은 겹쳐 입은 겨울외피를 감당하기 어려워하는데, 나는 반바지에 얇은 후드 티로 가볍다.

 

이미 점심시간이 되어 있어 우선 식사부터.

첫 식사는 전에 한 번 가 본 <수까락>이라는 꽤 인기 있는 식당에서다.

아니나 다를까, 자리가 꽉 차서 기다려야 한단다. 주문을 넣어놓고 식당 밖에 서성거리며 기다리다가 겨우 들어갔다. 그 사이 날씨가 바뀌어 구름은 걷히고 해가 나기 시작. 덥다…

 

앞질러 말하지만, 코로나병(COVID)으로 1년 가까이 ‘집콕혼밥’을 하다가 이렇게 나와서 생소한 음식으로 몇 끼를 연달아 먹은 것 때문에 귀환 후에도 며칠 동안 속이 부글거렸다.

그 첫 식사가 옥돔튀김과 돼지불고기를 곁들인 ‘수까락정식’이었던 것.

 

 

첫날 오후의 첫 일정은 선흘리의 <동백동산> 탐방.

 

길지기 연수라는 이름에 맞게, 해설사의 안내를 받으며 ‘선진지의 안내는 어떻게 하는지 배우기’다.

그런데 이 역시 코로나 때문에 여행자와 해설사가 대면하는 시간을 최대한 짧게 하라는 지시가 있어 탐방로 전체를 함께 걷지는 않는단다.

('도토리'님. 제주 여장부 해설사. )

동백동산은 조천읍 함덕리(해수욕장으로 유명) 남동쪽의 선흘리에 있다.

동백나무가 많다 하여 그런 이름이 붙었겠으나 동백꽃은 2월에나 볼 수 있다. 그래도 건강하게 반짝이는 진록색 잎이 무성한 동백나무는 많았다.

뿐 아니라 수많은 종류의 섬지방 특유의 식생도 함께 볼 수 있다.

동백동산은 선흘1리 주민들이 직접 가꾸고 관리한단다. 면적이 99 헥타나 된다고 어느 블로그에서 보았는데 글쎄, 믿어지지 않는다. 그렇게 넓단 말인가? 

 

이 곶자왈은 원래 선흘리 주민들의 가축사육과 노루사냥 등 ‘먹이활동’의 터전이었다.

곳곳에 소나 말을 키우던 축사(?)의 흔적인 돌담, 숯가마터, 농업용수가 될 물을 모아 관리하던 크고 작은 습지(못) 등이 흩어져 있다. 숲속을 누비는 길도 돌로 경계석이 쳐져 있는데 폭이 1.5미터는 됨직한 것이 마소를 몰고 오가며 생업을 할 수 있도록 했던 흔적이라고 보았다.

 

“이 원시림구역이 보전되기만 한다면 투자액이 회수되지 않아도, 수익배분 한 푼 없어도 괜찮다”는 것에 동의하는 주민들로만 사회적협동조합을 결성하여 관리하고, 안내와 해설도 직접 한다며 자부심이 대단했다.

관광지로 개발하겠다는 도의 시책을 중지시킨 ‘강성’주민들답다.

안내를 맡은 ‘도토리’(이름은 알려 주지 않았다)님도 체구가 커다란, 강인한 제주여성다움을 온몸으로 보여주며 의기양양하다.

전체 탐방로 5.2킬로미터 중 동산 초입부터 6백여 미터 정도까지만 동행하며 해설하겠다고 한다.

 

동백이 꽃을 피우는 계절에는 아직 벌나비가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동백꽃의 가루받이를 담당하는 것은 벌나비가 아니라 새다. 그 새의 이름이 ‘동박새’라는 사실, 아는 사람 별로 없다.

동박새 이름이 나왔으니 말인데, 그러고 보면 동백(冬柏)나무라고 쓰는 것은 어쩌면 틀렸을지도 모르겠다. 

어릴 때 할머니가 '동박지름'이라 부르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동박꽃과 동박새가 어울리지, '겨울(冬)-잣(柏)'으로 쓰는 것은 근거도 의심스럽고 느닷없다. 

 

 

 

이곳이 자랑하는 것은 육지에서 볼 수 없는 희귀종의 동식물이 많다는 것과,
또 한 가지는, 화산폭발에 따른 용암의 흐름이 먼저 있고 그 후에 용암터널 천장의 함몰과 흙(화산먼지)덮임 등이 뒤따른 특이한 지형 때문에 여러 군데에 습지가 자연히 형성되어 있는 점이다.

그래서 안내소의 공식 명칭은 ‘동백동산습지센터’.

 

나는 진작 반소매 티셔츠로 갈아입었다, 보리빵 파는 ‘덕인당’ 가게 앞에서.

여기 오는 사람들은 그 집 보리빵과 쑥단팥빵을 꼭 사는 모양이다.

우리 일행도 작년 제주 탐방 때 한 사람이 보리빵을 사자고 제안한 이래 두 번째로 또 사게 되었다.

마침 가는 길에 있기도 하고, 여성 일행들은 모두 ‘자연식단파(派)’여서 좋아할 것 같기도 하였다.

다소 많이 산 것이 유일한 흠이어서 마지막 날 아침까지 남아 어떤 한 사람이 다 먹어치우느라 애를 먹었지만.

 

숲속으로 들어가면 해는 들어오지 않아도 습도가 높을 것이어서 반팔로 갈아입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탐방로가 통과하는 주요지점 14군데를 번호로 표시해 둔 것이 친절했다.

지점번호는 다소 불규칙하게 53번까지로 되어 있는데 들쭉날쭉한 번호체계를 한 것은 이유를 잘 모르겠다.

 

첫 번째 지점까지 함께 가면서 도토리님이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 준다.

우선 다양한 식물에 관한 이야기다.

열매가 새끼손톱만큼 작은 도토리과 나무도 여러 종류가 있었고(지금은 다 기억하지 못하지만),

말로만 들은 황칠(黃漆)나무의 실물도 만났다. 황칠나무는 잎사귀도 노란 것이 신기하다.

그 노란 잎사귀를 적당히 접고 잎줄기 두 개를 어떻게 꽂으면 가늘게 찢어진 눈을 한 여우 얼굴이 되는 재미있는 장난(?)도 해보았다.

황칠나무 잎사귀로 만든 여우 얼굴.

 

또, 아버지가 죽으면 상주가 짚는 지팡이는 대나무로 만들고, 어머니를 잃은 상주는 오동나무 지팡이를 짚는 연유를 이야기해 주기도 했다.

(관심 있으시면 전해 드리지요.)

 

오동나무 속은 까맣단다. 그래서 늘 자식들 걱정에 까맣게 타는 어머니의 가슴을 상징하는 오동 지팡이.

대나무는 속이 비었으나 마디가 있다. 아버지의 자세는 대범하여 늘 마음을 비우고 자식을 대하지만

그래도 일생의 중요한 마디마디에는 결정적인 한 마디 충고를 베푸는 것이 아버지란다.

(세상에, 이렇게 깊은 뜻이!)

 

그런데 말이다. 제주도에서 오동나무로도 부르는 나무가 있으되 진짜이름은 ‘머귀(머구)나무’라 한단다.

엷은 갈색의 수피에 가로로 길쭉길쭉한, 원래 가시가 있던 자리라는 열상(裂傷)흔적을 가진 나무다.

육지에서 부르는 오동과는 꽤 다른데 굳이 비슷한 점을 찾는다면 육지의 오동나무에도 열상자국이 있다는 정도랄까?(그런데 육지의 오동나무는 수피의 색깔이 다르고 열상자국도 세로로 길다)

(위 : 머구나무.) (=오동나무?)

 

 

다른 것은 다 잊었는데 이 나무가 유독 기억에 남는 것은 그 이름 때문이다.

‘머구 또는 머귀’.

어딘가 ‘머우 또는 머위’와 닮지 않았는가?

그렇다, 찌거나 무쳐 먹는 잎나물, 바로 그 머우 말이다.

 

진안읍에 오천리라는 리가 있다. 내오천마을·외오천마을 모두 그 오천[머우내]을 중심으로 생겼다.

그런데 ‘머우(머위)내’인데 왜 오동나무 오(梧)를 썼을까? 그것이 지난 십여 년 동안 내가 궁금해 하던 것이다. “‘냇가에 머우가 많다 하여…’ 마을이름도 안머우내·바깥머우내라 한다”는 매우 상식적이고 겉핥기 수준에 불과한 <지명총람(한글학회)>의 해설이 도무지 성에 차지 않았던 것.

냇가에는 보통 느티나무·오동나무 등 큰키나무를 심어 둑을 보호한다. 이른바 방제림.

머우내의 둑방에도 오동나무를 심었을 것이다. 그래서 원래는 ‘머구(귀)내’라 불렀던 것은 아닐까?

그러던 것이 흔히 보는 머우나물의 머우와 혼동되면서 언제부턴가 머우내로 바뀐 것은 아닐까?

머우는 냇가에 나는 풀이 아니기 때문에 나의 추론은 더욱 근거가 강해진다.

(어떻습니까? 찬성하시는 분, 손!)

섬의 생태계를 들여다보고, 그것을 해설하는 방법을 보면서 배우고 오랬는데 엉뚱한 생각만 하고 다닌 셈이 되었다. 실례.

 

 

탐방로는 잘 정비되어 있었고 오르내림이 심하지도 않으며 매트가 깔려있기까지 하여 슬렁슬렁 산책 삼아 걷기에 좋았다. 하늘은 짙은 원시림에 가려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 바깥세상은 햇살이 찬연했는데.

 

자주 나타나는 습지 자리 주위에 물기를 빨아들이려는 나무뿌리들의 몸부림이 생생하게 진화한 모습으로 드러난 장면도 이국적이었다. 지금은 가물 때여서 물이 고여 있는 습지는 별로 보이지 않았지만.

나무뿌리가 열대림의 파충류처럼.

 

 

‘고사리삼’.

 

도토리님이 한 습지 자리 옆에 일부러 발을 멈추고 설명하는 식물이 있다. 지구를 통틀어 이곳에밖에 살지 않는 식물. 말하지 않았으면 보지도 못하고 지나쳤을 멸종위기(2급) 식물, ‘고사리삼’.

하도 작아 눈에 띄라고, 또는 손대지 말라고, 고사리삼 군락 주위를 나무젓가락을 주욱 돌려 꽂아 표시해놓고 있었다.

어디를 봐도 고사리 같지도, 삼(인삼)같지도 않은데 왜 그런 이름이 붙었을까?

사실은 일본의 식물학자가 처음 발견했고, 그가 이름을 그렇게 붙인 이래 바꾸지 못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위: 초록색의 다섯 잎이 한꺼번에 나 있는 식물이 도라지삼. 빨간 칠을 한 나무젓가락을 둘러 꽂아 군락의 경계를 표시했다.)

 

 

용암굴 입구 - '도틀굴'.

 

해방직후 발발한 ‘제주4·3’ 때 주민들이 이 굴에 숨어 화를 피했다는 이야기에는 그들의 한이 짙게 서려 있다. 이름은 ‘도틀굴’. 입구는 그리 크지 않은데 많은 사람들이 숨었다는 사실로 보아 안은 의외로 넓다는 것이겠다. 들어가지는 못하게 철창으로 막혀있다.

도틀굴 입구.

 

 

 

조금 더 걸어 또 하나의 작은 굴 입구(샘?) 같은 것이 있는 곳에서 도토리님은 자기가 안내하는 지점은 여기까지라며 우리 일행더러 알아서 한 바퀴 돌고 나오라고 하직한다.

 

 

‘상돌언덕’.

 

정말 희한하게 생긴 현무암 덩어리를 일부러 쌓은 듯한 언덕이다. 그 유현함과 신비로움이 신성성(神聖性)마저 느끼게 하는, 이 곶자왈에서 가장 높은 곳.

하늘로 솟구쳤다가 떨어진 용암의 덩어리들이 저절로 쌓여 이룬 언덕이라는데 이끼·고사리 따위 양치류 식물이 파랗게 바위를 뒤덮고 있고, 커다란 나무들이 신기하게도 바위 틈에서 높이 자라고 있다.

이 마을에서 가장 신령스러운 곳으로 추앙받은 곳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제단(?) 입구에는 인공으로 쌓은 계단이 있는 것으로 보아 더욱 그렇다.

(위 : 상돌언덕의 한 구석에 있는 우물터(?). )

상돌언덕의 꼭대기. 

 

 

‘숯막’ - 가마터.

 

들어가 보았으나 옛 흔적은 거의 보이지 않고 그냥 돌로 주위를 둘러친 담만 남아 있었다. 숯을 굽는 것 또한 옛사람들의 의식주 생활 중에 중요한 한 부분이었을 것이다.

숯 굽던 가마터.

 

 

‘먼물깍’.

 

그리 넓지는 않았으나 도토리님이 설명하던 바로 그 ‘용암의 큰 솥 위에 펄이 쌓여’ 물이 빠지지 않는 소(沼)를 이룬 곳이다. 이곳의 물로 선흘리 사람들이 농사도 짓고 생활용수로도 썼다고. 

먼물깍.

 

 

선흘리는 한자로 善屹이라 쓴다.

선흘리로 달려오면서 차 안에서 본 몇 개의 지명 시리즈가 또한 눈에 박혀 생각해보았다.

대흘(大屹)·와흘(臥屹)·선흘… 모두 ‘흘’자 돌림의.

내 생각으로는 원래 '큰 흘, 누운[臥] 흘, 선[立] 흘…'이었을 것이라고 말한 즉

이경아님이 즉시 동의하면서 “‘흘’도 사실은 산(산 뾰족할 흘)을 가리켰다기보다 ‘흙’이거나 다른 어떤 것이었을 거”라고 덧붙인다.

‘도토리’님은 “작은 동산도 산이라 불렀다”며 이곳은 특별히 ‘착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 선흘이라 한다고 다소 믿어지지 않는 설명을 했었다.

 

 

 

탐방을 마치고 돌아나와 ‘습지센터(안내소)’에 들러 동백기름을 한 병 샀다.

‘사회적협동조합 <선흘곶>’의 수익에 조금이라도 도움 되라는 의미를 섞어, 내 취미활동인 목공에 쓸 기름을 산 것이다.

또, 늘 진안고원길을 위해 갖은 복무를 다 해주는 정인호군에게 선물할 뱃지도 하나 샀다. 도롱뇽을 형상화한 것인데, 예쁘지만, 아쉬운 것은 선흘리 동백동산에서 만든 것이라는 표기가 전혀 없다.

 

'일껏 산 동백기름을 잊어먹고 안 가져오는 실수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는 강박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덕분에 휴대전화기를 습지센터 카운터에 놓고 그냥 나오는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5.2킬로미터를 걷는 데 오후를 다 보냈다. 나오니 이미 어둑어둑해져 있다.

 

숙소 체크인.

저녁 식사는 함덕해수욕장 인근의 비교적 서민급 해물식당. 해수욕장에 면한 바닷가 길 옆으로는 호화로운 식당과 카페들이 줄지어 있어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으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이 바람이 육지에서는 특히 부산에서는 태풍급 거센 바람의 한 자락이었을 줄 그 때는 몰랐다.

내일은 아홉 시부터 제주올레 20코스를 걷기로 안내인과 예약이 되어 있다.

 

 

 

11월 19일 - 둘쨋 날.

 

제주섬의 북동쪽 해안을 따라 구좌읍 김녕리에서 세화리까지 가는 길이 제주올레 20코스.

우리는 그 코스 전체를 걷는 것이 아니라 절반 정도인 8.5킬로를 걷기로 예정하고 있다.

숙소를 나설 때부터 비가 부슬거리고 있어 오늘 걷기에 다소 애로가 있을 것이 예상되는 날씨다.

하지만 기온은 높을 거라 예보되어 있다. 23~24도.

 

걷기 출발지점으로 향하는 도중 하늘에 무지개 선 것을 발견.

 

출발지점 김녕서포구에 강올레씨의 검은 색 택시는 이미 와서 기다리고 있다.

이 분은 나이가 73세나 된, 제주올레의 전설과 같은 분이다.

초창기부터 올레길 조성과 안내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직접 일을 했으며 ‘제주올레 아카데미’, ‘함께걷기’ 안내인 그룹의 회장 등을 여전히 맡아 정력적으로 일하는 현역이시다.

몇 년 전 ‘제주올레 아카데미 동문회’ 그룹이 진안고원길을 걸으러 온 적이 있었는데 그 때도 참여하여 마침 나와 정 국장이 안내했던 11-1(감동벼룻길) 구간을 함께 걸은 인연이 있다.

그도 그 일을 기억하고 있어서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자기소개를 먼저 하는 강올레씨. 트레일과 관련된 분야에서는 이젠 그냥 ‘강올레’를 본명처럼 쓰고 있고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알고 있노라 한다.

메고 있는 배낭에는 여러 군데의 트레일을 다녀 온 흔적인 뱃지와 노선안내 리본 따위가 주렁주렁 붙어있고, 안내인의 필수품인 스피커와 마이크는 자기 몸의 일부처럼 매우 유효한 위치에 장착.

거무튀튀한 얼굴빛과 땅딸막한 체구에서 연륜과 카리스마가 저절로 느껴지는 제주인이다.

(20코스 출발지점.)

(간세 조형물의 머리를 만지고 있는 이가 강올레씨.)

 

 

정 국장은 설아를 데리고 도착지점에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기로 하여 나머지 일행 여섯 명이 함께 길걷기에 나섰다.

김녕서포구 출발지점에는, 여기에도 역시 간세(조랑말을 형상화한 제주올레의 상징물. ‘간세’는 제주어로 ‘게으름뱅이’라는 뜻. 느릿느릿 걷는 올레길의 특징을 잘 드러낸다) 조형물이 서있고 기념 스탬프와 코스 안내판 등이 있다.

인증사진을 찍고 나니 가는 비가 다시 부슬거리기 시작.

일행이 모두 비옷을 챙겨 입는데, 나는 우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버스럭거리는 소리 때문에 안내의 말이 들리지 않고 땀이 빠져 나가지 않아 오히려 더 척척해지는 것이 싫은 것이다.

 

(위 : 제20코스 김녕리의 마을을 들어서면서)

 

 

김녕리의 마을은 오래 되었고 매우 크다.

마을 안길의 민가 담벼락들은 금속공예가들의 작업인 공예벽화로 장식되어 있어 이색적이고 아름다웠다.

특히 제주에는 예술가들이 많이 와 있으므로 이런 작업을 하기에는 안성맞춤이겠다.

(위 : 어느 집 처마 아래서 잠깐 비를 피하고. 금속공예의 벽화장식이 매우 현대적이다. )

 

 

그 중 한 집, 노란칠을 한 잠녀(潛女-‘해녀’는 일본말)의 집 앞이 특히 눈길을 끈다.

코너 벽화의 구석에 쓰인 문구. 

 

‘바당서랑 욕심내지 말곡 숨 을 만큼만 라’

‘저승돈 벌라 감쪄’

 

바다에서는 욕심내지 말고 숨이 허락하는 시간만큼만 해물을 따라. (숨 참을만큼만 하라)

돈 벌러 나가는 길이지만 그 돈이 바로 저승 갈 여비지 뭐겠나?

 

(위 글에서 '네모'로만 나온 글자는 '아래 아'를 섞어 쓴 글자인데, <다음 카페>에서는 이 글자를 취급하지 않아 나오지 않았네요.)

 

늙은 잠녀의 오랜 경험에서 나온 잠언(箴言)이 가슴을 파고든다.

이런 지혜로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은 쉬운 말로 하는 잠녀.

믿음 하나로 바닷물을 좌우로 가르며 뚜벅뚜벅 걸어 들어간 옛 성자의 모습에 다름 아니다.

 

욕심내지 말아야 할 곳이 왜 ‘바당서랑’만일까.

뭍에서도, 어느 세상 어느 사회에서도, 욕심내다가 숨이 멎는 이치는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렇게 욕심내어 번 돈, 결국 자기자신은 저승 갈 여비밖에 쓰지 못한다.

 

 

비가 조금 강해질 때는 처마 밑에 잠깐씩 섰다가 그치면 다시 걷다가 하면서, 김녕리의 마을길을 지났다.

해변길로 빠져나오기 직전, 바다 위 잿빛 하늘에 또 무지개가 선명히 선 것을 발견하고 환호를 지른다.

 

강올레씨는 마을의 유래나 역사, 최근에 유행하는 마을재생활동 등에 대하여는 크게 관심이 없는 듯

말없이 지나치다가, 해변길로 나오자 이제 바닷가 특유의 식생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독이 있는 풀이라든가, 향기를 맡으면 머릿속이 시원하게 뚫리는 열매(무슨 ‘비기(베개)’라고 했는데 그새 잊어버렸다. 베갯속으로 넣으면 좋다고 그런 이름이 붙었으리라) 따위를 열심히 설명하신다.

숲해설가이기도 한 여성 네 분은 열심히 듣고 사진도 찍고 그러지만 나는 아무래도 인문학 쪽에 더 관심이 있나보다.

육지에는 없다는 노랑 무궁화, 황근(黃槿) 한 가지만 기억에 남았다.

 

강올레씨에게 내가 하는 질문은 거의 안내인 그룹의 조직과 역할 같은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강올레회장, 자기 전문분야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다시 신이 나서 열강에 들어간다.

거의 대부분은 몇 년 전에 ‘제주올레 아카데미 총동문회’ 부회장 이성근씨에게서 들은 이야기지만

그 사이에 업데이트된 내용도 있고 최근의 양상이 어떻게 변했는지 등을 들을 수 있었다.

 

열정과 사랑으로 일으킨 ‘걷는길 활동(사업?)’이었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초기의 취지보다 돈을 좇는 세태로 바뀌어가는 것이 안타까운 모양이다. 평소의 봉사활동에는 나타나지도 않다가 활동비를 조금이라도 주는 사업이 생기면 갑자기 ‘나도 안내인입네’ 하고 우르르 덤벼드는 ‘날라리 안내인’들을 보는 시선이 곱지 않다.

며칠 전에 끝난 ‘2020 제주올레 걷기축제’에서도 기존의 제주출신 안내인들보다 육지에서 이주해온 ‘열정 가득 초짜 안내인’들의 참여가 더 많았다고 한다.

 

올레지기들의 역할은 담당 구간을 일상적으로 모니터하며 걷기 불편해진 곳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거나 안내리본을 바꾸어 달거나 하는 활동이다. 그런 일로써 사무국 직원들의 일손을 덜고 인건비를 절약한다. 또한 자기 구간을 걷는 여행자들과 함께걷기(‘길동무’)에 나서기도 한다.

 

이런 일들은 우리 진안고원길에서도 정기총회 때마다 ‘우리도 그런 활동을 해보자’고 내가 여러 번 제안했던 일이다.

그럼에도 아직은 그럴 분위기가 성숙해 있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일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 답을 강올레씨의 말과 우리의 현실에서 찾았다.

 

제주올레의 길지기와 안내인은 무려 2천명에 달한다. 그들이 각자 지인들에게 올레길 걷기를 권하고 홍보한 것이 수백만 명의 올레꾼들이 생겨나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트레일이 된 주요한 이유이기도 하다는 것.

그렇지 못하고 사무국의 활동만으로 유지하려했다면 그냥 이름 없는 ‘동네길’이 되어버리고, 걷기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도 ‘늘 만나는 그 사람이 그 사람들’인 상태로 주저앉고 말았을 것이라는 것.

 

제주올레와 역사를 거의 같이 하는 우리 진안고원길이 아직도 동네길 신세를 벗지 못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은 아닐까?

 

도중 바닷가 정자에서 잠깐 쉬는 동안에 강올레씨는 내게만 했던 이 이야기를 다시 반복했다.

우리 일행이 길지기이거나 앞으로 길지기를 할 사람들이라는 걸 알고는 '꼭 이 말은 해야겠다'면서.

 

 

그런데 이 휴식시간에 커다란 수수께끼 하나가 풀렸다.

 

강올레씨의 본명이 강희춘이라는 것.

“그게 무슨 수수께끼냐?”고 하겠지만, 우리 사무국에 몇 년 동안이나 후원금을 내던 ‘강희춘’이라는 분이 누군지 도무지 알 길이 없던 것이 풀렸으니 이 얼마나 큰 발견인가.

 

택시업은 팽개쳐두고 본업보다 더 열심히 뛰어다닌 올레 일 때문에 한동안 집에서 ‘파문’ 당했다가

요즘에 와서야 겨우 이해 받기 시작했다는 강희춘씨.

그런 중에도 육지의 여러 트레일들을 모두 걸어 보고 우리 고원길의 훌륭한 노선구성과 안내표지 시스템에 감동받아서 후원하기 시작했다는 강올레씨.

그러면서도 그게 자기라고 이제야 실토하는 숨은 후원자.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박수를 치지 않을 수 없었다.

요즘은 그의 후원을 받지 못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무슨 일이 있어 계좌를 모두 바꿔야 했을 때 ‘자동이체 신청’이 삭제되어 버렸기 때문이란다. 이제 다시 후원을 계속하겠노라고 약속하기까지 해주셨다.

 

 

무지개는 계속 떴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공기 중에 물방울 입자가 많고 햇빛이 있으니 그렇다.

우리 산골에서는 보기 어려운, 뿌리까지 온전한 반원이 다 보이는 선명한 홍예(虹霓)다.

바다 수면 바로 위에서 중천까지 곱게 섰다.

아마도 평생 볼 무지개를 하루 반나절 안에 다 본 셈이 아닐까.

 

 

 

 

김녕해수욕장은 드물게 보는 흰 모래가 고운 해수욕장이다. 그런데 모래가 바람에 날아가는 것을 막으려는지 방수포로 덮여있어 아쉽다.

해풍을 이용한 풍력발전시설이 바다 속에 많이 떠 있었다. 제주섬의 연안 해저는 용암으로 이미 기초가 완성되어 있으므로 바람개비를 세우는 데 돈이 덜 든단다.

그런데 무상(無償)의 공공재(公共財)인 바람조차도 대기업의 전유물이 되어버리는 시대,

모든 바람개비가 재벌기업들이 설치한 것이어서 전력판매 수익도 ‘당연히’ 그들의 것이라 한다.

 

 

월정리에 도착.

이곳에 정 국장과 그 따님이 미리 와서 놀고 있을 터였다.

 

마을 안길을 따라 올레길 노선은 이어진다. 이 마을도 여행객이 많아 그들을 맞는 카페와 식당들이 많은 곳이다. 다만 코로나 바이러스병의 영향은 피해갈 수 없는 듯 문 닫은 곳도 심심찮다.

 

따끈한 햇살 때문에 온도가 많이 올랐다. 나는 진작부터 비옷 대신으로 걸치고 있던 얇은 나일론 점퍼를 벗어버리고 소매 없는 티셔츠 바람으로 여기까지 걸어왔다. 다른 일행들처럼 거추장스러운 우의를 입었다 벗었다 하지 않아도 되었고, 오히려 시원한 바람을 피부 깊숙이 받을 수 있어 좋았다.

 

아직 걸어야 할 구간이 조금 더 남았지만 시간도 거의 점심때가 되었고 느릿느릿 걸은 덕분에 적당히 피로가 쌓였다. 나머지 구간을 굳이 걸어야 할 이유도 없어서 여기서 정지하기로 했다.

오히려 강올레씨가 아쉬워했지만 나이든 분을 끝끝내 ‘혹사’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어서

함께 점심 먹는 것으로 오늘 일정을 마치자고 달랬다.

 

 

강올레씨가 동료들에게 물어 소개 받은 비교적 저렴한 식당에 들어갔다.

식당 앞에 웬 여성 두 분이 나란히 서있으면서 우리 일행에게 일일이 ‘어서 오세요’ 인사를 한다.

식당 주인인가 했더니 ‘올레지기’ 들이란다.

마침 다른 여행객들과 함께 같은 식당에 오게 되었는데 올레지기 회장님 일행과 만나게 된 것이다. 강올레 회장님 앞에서 모두 깍듯하다.

식사 중에 한 노인(?)이 우리 식탁에 다가와 인사를 하는데 그분 역시 올레지기의 한 사람이라고 강올레씨가 소개한다. 나이는 무려 76세, 최연장자란다.

 

 

오늘 안내를 해준 수고비는 ‘퐁낭(팽나무의 제주어)협동조합’ 계좌로 보내라 한다.

이렇게 모았다가 일부는 제주올레의 활동에 쓰고 일부는 안내인들의 인건비로 쓰는 아름다운 시스템이다.

‘퐁낭’에서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다문화 이주여성들을 모아 자투리 헝겊으로 ‘간세인형’을 만들어 팔았었다. 이 조랑말 봉제인형은 귀여운 디자인과 다양한 색상으로 인기를 모았었다. 지금은?

 

 

고등어구이와 제육볶음이 함께 나오는 점심을 먹고,

 

강올레 회장을 먼저 출발지점으로 태워 보내기로 하였다. 정 국장이 차를 몰고 갔다 오는 그 시간에 나머지 일행은 월정리의 카페 한 군데를 경험하기로.

 

문 열고 있는 카페는 어디나 손님이 가득 차서 자리가 없다.

이경아님이 목을 매던 ‘목공소’ 카페도 마찬가지다.

해변으로 점점 쫓겨나서 <파라다이스 길리>라는 인도네시아의 섬이름을 딴 카페에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

<너는 파라다이스 길리>라는 긴 이름의 카페. 나중에 정국장이 합석한 후에 찍은 사진. 

 

 

아메리카노 한 잔에 5천원! 유명여행지의 커피값이니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나온 것을 보니 다른 메뉴와 달리 커다란 주전자에 하나 가득 커피가 담겨 있었다.

가장 비싼 것이 가장 싼 것이었던 셈.

 

오래되고 비어있던 민가를 개조한 카페. 그것도 이웃집을 터서 마당을 넓게 쓰는 카페다.

실내보다 잔디마당이 더 좋아서 커피 주전자를 들고 마당으로 나와 앉았다.

마당 가득한 햇살, 지중해만큼 따사롭다.

 

발랄한 아가씨 여행객 둘이 카페 마당을 왔다갔다 하면서 사진을 찍는데, 손에 든 카메라가 한동안 잘 팔리던 1회용 필카다. 필름과 카메라가 일체형인, 스물네 방 다 찍으면 현상소에서 분해해서 현상하고 더 이상 쓸 수 없는 그런 카메라였다.

신기해서 “요즘도 그런 걸 파느냐”고 말을 걸었더니 “한 번 만져 보실래요?” 하고 내게 건네주기까지 한다.

여행지에서는 누구나 아무에게나 말을 걸고 마음을 열고 스스럼없는 사이가 되는 모양이다.

 

 

정 국장이 돌아왔다.

월정리 해수욕장 앞으로 나섰다.

하얀 모래밭이 이곳은 덮여 있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맨발로 들어가 놀고 있다.

우리도 분위기를 타고,

“여기서 좀 놀다 갑시다!”

 

 

 

제주섬에 도합 열 번 정도는 왔지만 이렇게 느긋하게 해변의 의자에 앉아 햇볕을 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런 모습이 ‘로망’이기도 했다.

비는 더 오지 않았고 햇살이 가득한 날씨로 바뀌어 있다.

그래도 수평선 위에 아무 방해도 받지 않는 완전체의 무지개는 떴다가 지다가를 반복한다.

상상만으로도 파라다이스가 아닌가.

 

 

 

 

오후, 용눈이오름.

 

오후 일정은 정해진 것이 없었으나 정국장의 제안으로 용눈이오름에 가보기로 했다.

자동차가 내륙으로 접어들자 다시 하늘이 어두워진다. 바람도 강해졌다.

민소매 티셔츠 한 장 차림으로는 어림없다.

 

용눈이오름은 한자로 龍臥라 썼다. 용이 누운 형상을 한 오름이라는 뜻이겠다.

그런데 버스정류소에 적힌 중국어 안내문에는 ‘龙眼岳(龍眼岳)’이라 씌었다. 즉, ‘용의 눈’이라는 뜻이 되어 버린 것. 또 다른 안내판에는 '용이 노는(游)' 모습을 했대서 '용논이'.

이런 것, 정말 주의해야 한다.

특히 지명에 얽힌 유래나 한자로 된 지명의 뜻풀이 같은 분야에서 한자에 익숙하지 않은 세대가 함부로 손을 대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한자 좀 안다고 위세를 떨 생각이 있어서가 아니고, ‘꼰대질’을 하자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을 지적하는 것일 뿐이다.

 

(하나의 자연물을 두고 이름이 세 가지다. 세 가지 안내판에 이름이 모두 제각각인 것. '용논이, 용눈이, 용눈알'. )

(맨 아래 사진의 돌에 새긴 안내판이 가장 오래되어 보인다. 이 안내석의 이름이 가장 옳을 것으로 내나름으로 판단했다.)

 

 

몇 년 전에 와본 곳이지만 그 사이에 시설이 조금 더 확충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너무나 많은 관광객들로 하여 훼손이 심했었나 보다. 탐방로에 매트가 깔려 있는 등, 보호를 위한 조처가 베풀어져 있다.

다시 나일론 점퍼로 무장하고 오름에 오르는 길에 나섰다.

맨흙땅을 밟고 오르던 길에 비하여 걷기에도 편하고 훼손을 막을 수 있어 더 좋아졌다고 생각한다.

탐방로의 목책을 따라 지척에 방목하는 말들이 느긋한 자세로 풀을 뜯고, 많은 여행객들이 사진을 찍으며 좋아한다.

 

오름의 정상에 다다르니 바람이 거세어 몸을 가누기가 힘들다.

정상에서 반대편으로 돌아내려오는 능선에서는 바람이 더욱 거세어 능선 아래로 밀려 떨어질 것만 같다.

변해버린 날씨 탓에 정상에 올라섰어도 주변의 경치가 썩 잘 보이지는 않았다.

안내판의 풍경사진과 비교해가며 가까운 몇 개의 산과 오름 정도만 확인할 수 있었을 뿐.

변화무쌍한 제주도의 날씨. 다시 한 번 확실하게 알게 된다.

(용누운오름 정상에서. 거센 폭풍으로 모자 차양이 뒤집어지고, 머리가 흩날리고, 난리났다.)

 

‘용이 누운 오름’에서 내려오니 어둑어둑하다. 오늘의 일정을 마감.

 

내일은 마지막 일정으로 거문오름에 오르기로 되어 있고, 그 준비작업으로 재미있고 우스운 일을 한 꼭지 연출했다. 글로 써놓으면 재미있지도 우습지도 않을 일이라서 생략하지만, 당시의 우리에게는 배꼽이 튀어나갈 만큼 한 순간 한 순간 한 마디 한 마디가 우스워 떼굴떼굴 굴렀다.

 

이런 에피소드 한 가지 정도는 일행끼리만의 일화로 숨겨 가지고 있어도 좋지 않겠습니까?

자칫 딱딱해질 수도 있었던 연수여행의 분위기를 일순간에 부드럽게 풀어준 모두에게 감사드립니다.

 

 

숙소에 돌아와 잠깐 쉬고, 비와 햇볕과 모래와 바람에 종일 시달린 몸을 씻고,

함덕해변의 식당으로 나가 해물갈비찜으로 저녁을 먹다.

이미 어두워져서 아름다운 만(灣)처럼 생긴 해수욕장이나 바다가 보이지도 않을 뿐 아니라, 바람이 너무 강하여 해안에 서있기조차 힘들어서 얼른 차를 집어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이로써 이틀 째 일정은 모두 끝.

 

 

 

11월 20일 - 사흘 째, 마지막 날.

 

 

오전은 거문오름에 오르기로 되어 있고 오후 비행기로 귀환해야 하는 날.

 

거문오름은 “검게 보인다” 하여 검은(거문)오름. 검게 보인 이유는 여늬 오름들과 달리 분화구 안에 온갖 식물이 원시림의 상태로 짙게 자라고 있어 어둡다는 것. (이상, 해설사 서은실님의 설명)

 

우리나라의 지명·동네이름·들이름 등에 ‘금평, 거문평 또는 검은들’이라는 이름이 많은 것은, 그곳을 처음 만나게 된 사람의 눈에 그런 첫 인상이 들었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검은들’로 불리다가 지명을 한자화 하면서 가장 비슷한 뜻이나 소리를 가진 글자가 대신하게 되었을 때 주로 금평(琴坪) 또는 금평(金坪)으로 바뀌었다. 이를 글자[漢字]만으로 해석하고 거기다가 풍수사상까지 얹어 ‘선녀가 가야금을 뜯는 형국’이라느니 ‘황금이 묻혀있어서’ 붙은 이름이라느니 하는 엉터리 해몽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거문오름은 예약을 해야 들어갈 수 있고 하루에 450명까지만 입산할 수 있다. 오늘 9시 타임에는 28명 정도가 예약한 듯하다. 해설(인솔)자를 따라 한 바퀴 도는 데 2시간 반이 걸리며 30분 간격으로 다음 예약팀이 들어온단다.

 

“우산·양산을 받는 것은 안 된다, 우의를 미리 준비하라”,

“담배나 라이터는 가지고만 있어도 들키면 벌금 낸다”,

“맹물을 빼고는 일체의 식음료를 가지고 들어갈 수 없다” 등등, 제약이 엄청나다.

안내소 로비에 있는 개인물품 라커에 넣고 들어가야 했다.

 

세계자연유산답게 엄격한 입산절차를 지키게 하는 것이 이해는 충분히 되나, 거의 국가비밀을 취급하는 기관에라도 출입하듯 하는 ‘무시무시한(?)’ 안내가 관람객을 얼어붙게 만든다.

굳이 짐검사를 하지는 않았지만 일단 입산한 뒤에 수시로 돌아다니는 ‘보안관’에게 들키면 큰일난다는 말에 저절로 자진하여 거의 모든 물건을 라커에 보관하게 된다.

 

등산화로 입산을 할 수 있느니 못 하느니 하던 어젯저녁의 논란은 순식간에 평정되고 말았다.

당연히 입산 가능하고 신발에는 아무 제약이 없었다. 탐방로 전체에 매트나 나무데크가 깔려있었고 탐방로를 벗어나서 걷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일행이 속한 9시팀의 해설사는 60세가 좀 넘어 보이는 자그마한 체구의 여성, 이름을 서은실이라 했다.

체구답지 않게 목소리가 크고 일행을 장악하는 솜씨가 베테랑임을 알게 한다.

이곳의 해설사들은 세계자연유산·지질유산·생물권보전지역 등 여러 부문에서 인정받고 있는 자기들의 생활터전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원래는 해설을 하며 안내하는데 요즘은 코로나바이러스 병 때문에 말을 삼가도록 하고 있어 인솔만 한단다. ‘길지기 연수’로 온 것인데 해설을 못 듣는다면 속없는 찐빵이 되는 셈이어서 다소 실망.

 

날씨는 또 강한 바람과 함께 오락가락하는 가는 비.

비옷을 사 입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게 하는 지점이다.

나는 습관대로 ‘비가 오면 그냥 맞으면서 견딘다’는 자세를 견지한다.

 

 

드디어 입산했다.

“나를 앞지르지도 말고 너무 뒤처지지도 말라”는 서은실님의 강력한 인솔이 관람객들을 긴장시킨다.

초입은 매트 깔린 흙길이되 조금 지나자 다소 가파른 나무계단길이 이어진다.

하도 엄격한 인솔인지라 뒤처지지 않으려고 죽을둥 살둥 뒤따르는 탐방객들.

나무계단을 오를 때부터는 속도가 제각각이 되면서 흐트러진다.

겨울옷을 두껍게 입고 나온 사람들은 드디어 옷이 거추장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계단을 끝까지 오르면 그곳은 분화구를 둘러싸는 정상 능선에 서게 된다. 이곳을 제1룡(龍)이라 부른단다.

화산폭발로 생긴 봉우리 아홉 개를 모두 용에 비유했고, 그 중 첫번째 용이라는 뜻. 

 

 

이제부터 다소 걷기 편한 느슨한 경사의 능선길이다.

 

그런데 해설은 하지 않는다던 해설사, 스피커도 쓰지 않은 채 선두에서 뭐라고 뭐라고 자꾸 이야기를 하는 듯하다. 뒤따라가는 사람들은 궁금하다, 그게 무슨 얘긴지.

나무데크 밟는 소리 때문에 들리지도 않는데 일행 모두를 모아 놓고 한꺼번에 설명하는 것도 아니고 자기 주위의 앞 사람들 몇 명밖에 듣지 못하는 이야기라면 불공평하지 않은가?

모두들 그런 생각이 드는지 서로 앞으로 나가려고 걸음이 빨라진다. 앞지르기 경쟁이 일어난 것.

 

 

능선에 올라서서 보니 과연 숲이 울창하다. 어제 오른 ‘용누운 오름’의 정상에서는 풀밭만 펼쳐지던 광경에 비하면 ‘시커먼 숲’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 구간은 삼나무 인공조림구역. 

선두에서는 나무이름과 식생, 숲의 구성 등을 해설하며 걷고 있는 모양이지만 어차피 들리지 않아 그냥 포기하고 묵묵히 뒤따른다.

가끔 들린 이야기 중에 기억나는 것은 이 숲에 노루(고라니가 아닌)가 산다는 것 정도다.

이 오름에서 화산 분화로 솟구친 용암 터널이 동북쪽으로 흘러 만장굴을 이루었으므로 거문오름을 ‘만장굴의 형님’이라 부른단다.

 

'굼부리' - 분화구.

 

이윽고 분화구 안으로 내려가는 길목을 만난다. 역시 해설사를 따라 나무계단이나 매트로 깔린 탐방로를 따라 한 줄로 내려가면 그곳은 분화구의 안이다.

한 넓직한 데크를 만나 모두들 한꺼번에 올라섰다. 

‘용의 알’에 해당하는 이곳 명당자리에서 좋은 기운 많이 받으라고 잠시 쉬겠다 한다.

 

어차피 상상 속의 짐승인 용이 알을 낳는 존재였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소중하고 보배로운 곳이기만 하면 용·봉(鳳) 등 상서로운 짐승에 비유해오던 관습이, 지구의 에너지가 모여 폭발해 나온 바로 그곳에 적용되지 않을 리 없었겠다.

데크('알오름')에 서서 둘러보면 360도 뱅뱅 분화구의 주위 능선으로 둘러싸여 있다. 분화구 한 가운데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하지만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여느 분화구와 달리 넓은 풀밭도 물 고인 저수지(?)도 아닌, ‘저지대를 가득 메운 숲’이라는 것은 앞에서도 말했다.

 

정신 차리고 보니 분화구로 내려선 순간부터 그 강한 바람이 사라져 있었다.

 

분화구를 제주어로 ‘굼부리’라고 한다는 것.

한 가운데에 제주 특징이 잘 남아있는 오두막집이 있어 유명한 ‘산굼부리’가 바로 그것이었구나.

굼부리는 ‘속엣것(용암)이 굼부러져(뒤집어져) 나온 곳’이라는 뜻일까?

 

 

용암함몰구와 풍혈과...

 

굼부리 안의 어느 지점에 이르자 ‘풍혈’이 나타난다. 지질성분 구성과 밀도에 따라 지하의 공기가 차가와지거나 더워지는 데 시간이 걸리는 만큼, 찬 바람과 더운 바람이 계절을 바꿔 뿜어져 나오는 곳이겠다. 우리에게는 성수면의 풍혈로 이미 익숙하다.

 

이 풍혈이 있는 언저리는 용암터널의 천장이 붕괴하여 생긴 도랑[溝渠]이 길게 형성된 곳이다.

분화구의 어느 한 쪽은 낮게 터져 있어(말발굽형) 터진 곳을 향하여 용암은 흘러내린다.

용암의 터널이 낮게 열린 동북쪽으로 흘러 만장굴까지 이르렀음은 앞에서도 말했거니와, 터널 천장이 얇은 부위에서는 풍화와 침식에 의해 언젠가 천장이 무너지게 되어있다. 바로 그렇게 무너진 자리가 도랑이 되는 것.

 

용암터널 함몰지점.
풍혈 인근의 나무. 뿌리가 바위를 감싸 안았다. 

도랑 인근은 습도가 높고 식생이 풍부하여 노루가 서식한단다. 겨울철에 털갈이를 하므로 연한 갈색이던 피부가 흰 털로 바뀌어 있단다.

내 눈에는 보이지 않았는데 정모화님은 사진까지 찍었다!

관람객이 많이 다니니까 야생의 노루새끼도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또, 그런 용암터널이 많은 지형을 이용하여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대가 숨어 주둔했다는 굴들이 여러 군데 있었다. 전쟁 말기에 이르자 일본은 자기네 본토를 최후의 전장(戰場)으로 삼지 않으려고 일부러 제주도에 본진을 주둔시켰던 것인데, 미군이 허를 찔러 오키나와로 상륙하는 통에 그들의 잔꾀는 물거품이 되었다.

 

굼부리를 벗어나 다시 능선에 오르면 그곳은 동북쪽 끝, 용암이 흘러나간 출구에 해당하는, 이른바 '말발굽'의 열린 곳이 된다.

여기서는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여덟 마리 용의 등뼈를 타고 오른쪽으로 크게 한 바퀴 돌아내려가는 코스요, 또 하나는 처음에 거쳐 왔던 탐방안내소로 바로 돌아가는 비교적 짧은 왼쪽 코스.

 

‘용코스’는 한 눈에 보아도 오르내림도 심하고 꽤 길다.

해설사 자신이 동행하지는 않을 것이라며 희망자만 자신의 책임으로 걸으라고.

이 바람 속에? 무리다. 우리 일행은 되돌아 내려가는 쉬운 코스를 선택.

 

 

코스가 나뉘기 직전에 만나는 ‘수직동굴’은 30미터쯤 수직으로 내려가는 용암굴이라 한다.

2층으로 형성되었던 터널의 가운데를 막고 있던 천장(바닥?)이 무너지면서 아래위가 하나로 툭 터져 생긴 것이라고.

전문가가 아니면 그 굴에 들어가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으며 어차피 내부는 깜깜하여 아무 것도 보이지 않으므로 가볼 생각은 버리라고, 거의 강요하다시피 한다.

왼쪽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면 지금 서있는 곳 아래로 수직굴 입구가 있단다. 

 

하산하는 길은 평이하고 억새밭길은 평화로웠다. 바람도 멎고 햇살이 다시 찾아왔다.

두 시간 반 예정이라던 탐방시간이, 한 시간 반 정도로 눈깜짝 사이에 탐방 완료.

“코로나 때문에, 세계유산이기 때문에” 라는 지나치게 엄격한 프레임에 갇혀 허둥지둥 걷는 데에만 열중하며, 무엇을 보았는지 기억도 잘 안 날 정도로 얼렁뚱땅 흘러가버린 시간이었다.

 

경로우대로 공짜구경한 사람이 할 말은 아니겠으나, 이건 좀 ‘아니다’.

그런 허술한 안내(해설?)와 거칠게 몰아붙이는 인솔로 어렵사리 찾아온 탐방객들이 무엇을 얻고 갈 수 있을까 하는 아쉬움이 짙게 남는다.

 

점심, '보말국수'.

 

그 와중에도 해설사는 제주의 맛있는 음식을 소개하는 데 열심이었다.

‘보말’이라는 제주산 고둥을 넣은 국수가 맛있단다.

그래서 점심은 보말국수로 결정.

 

다슬기탕처럼 녹색이 나는 국물에 잘게 썰어 넣은 고둥의 살이 풍부하게 들어있다.

국수는 그냥 국수였으나 짙은 녹색의 걸쭉한 국물맛은 아주 그럴듯했다.

강한 바람에 얼얼해진 겉과 속을 모두 편안히 풀어주는 음식이었으나 양이 많아 나는 다 먹지 못했다.

 

 

오후.

비행기 시간까지 다소 여유가 있었으므로 제주시내 동문시장을 들러 보기로 했다.

제주도에 갈 때마다 옥돔을 사곤 했는데 이젠 옥돔 맛에도 적당히 익숙해졌고 어차피 근해에서 잡히는 돔이 아니라 중국 배가 잡은 것이라 하여 사고 싶은 마음이 엷어져 있던 참이다.

그냥 구경만 좀 할 요량으로 차에서 내렸지만 여전히 크게 내키지 않는다.

커피 한 잔 생각이 간절하여 다른 일행과 헤어져 편의점에 들어섰다.

 

 

마무리 평가 :

 

길지기(해설사)의 활동상황을 보고 배우는 것이 이 연수의 목적이었음에 비추면 세계유산 현장에서의 성과는 다소 미흡했다고 평가한다. 대면 해설이 어려운 시기임을 이해하더라도 말이다.

차라리, ‘하루 450명 한정’을 지키면서 자유롭게 들어가 실컷 보고 놀고 사진 찍게 하고, 원하는 사람들만 해설사를 동행하게 하며, 각종 위반사항들은 CCTV나 드론 또는 보안관의 순찰활동으로 감시하는 등의 유연한 운영은 어떨까 싶다. 국립공원 관리시스템처럼.

둘쨋 날 오전 강올레씨의 ‘길지기 양성시스템’에 대한 설명이 오히려 더 실용적이고 도움 되는 것이었다. (끝)

 

(최태영)

(사진을 제공해주신 모든 이에게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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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주바등 작성시간 20.12.01 좋은 글 감사히 읽었습니다. 멋지시고 존경합니다.
    - 멀리 떨어진 전라북도 수도 전주의 주바등이
  • 답댓글 작성자최태영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0.12.01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작성자강올레 작성시간 20.12.01 장편의 소설같은 후기입니다.
    강올레를 많이소개해주셨읍니다.
    코로나가 조용해지면 고원길 완주에
    도전해보렵니다.
    그때 고원길 봉사자들과 정보를 교환하는 자리를 가지고 싶습니다.
    만난날을 고대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최태영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0.12.02 꼭 그런 날이 올 겁니다. 기대하고 있을게요.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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