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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사항

[고원길홍보] 전라도닷컴 7월호. 고원길을 담다.

작성자정병귀|작성시간12.07.03|조회수94 목록 댓글 0

앞서 말씀드린데로 고원길의 언론매체 노출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번엔 전라도닷컴 7월호.

아직 홈페이지에는 올라오지 않고 오프라인 잡지만 나왔네요.

인증사진..

 

그리고 실린 글도 공유해봅니다.

 

 

 

 

 

 

첩첩산중(疊疊山中) 고원바람을 맞는 곳

하늘땅, 진안고원길을 걷다

 

      길은 복합적인 문화공간

 

어린 시절, 해질녘이면 마을어귀에 자리잡은 주막(점방)에 아버지를 모시러 갔던 기억은 누구나 있으리라. 어머니의 불같은 성화에 못이겨 나서는 길이지만 술에 불콰하게 취한 아버지를 모시고 올 일을 생각하면 발길이 쉬이 떨어지지 않아 마을길을 터벅터벅, 그리고 느릿느릿 걸었던 기억이다.

가끔은 옆마을에 소식을 전하기 위해 잿마당(뒷동산)을 넘고, 정인(情人)을 만나기 위해 마을뒤 고개로 향했으며, 대처로 가서 공부하기 위해 마을어귀 숲길을 지나치기도 했다. 무엇보다 논과 밭을 일구고 수확하는 경제활동을 위해서 수없이 오갔을 마을길은 우리네 삶의 가장 복합적인 문화공간이었다.

진안땅 어느 곳에나 위와 같은 장면이 연출되는 복합문화공간이 많이 남아 있으니 백운면 동창리 번덕마을을 한번 들여다보자. 화산/은안/번덕 세 마을로 들어오는 길에 자리한 주막은 이제 영업하지 않으나 아직 남아 있고, 마을로 들어오는 입구 소나무숲은 마을사람들이 외부와 소통하는 가장 중요한 공간이자 길이었다. 번덕고개로도 부르는 은안이고개는 건너편 마을에 소식을 전하러 가는 통로이자, 어두운 달빛 아래 정인들이 만나는 공간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길은 우리 삶의 대부분의 행위가 소통되는 이동공간이자 경제/사랑/놀이/교육/의식의 공간이다. 또 그런만큼 삶의 흔적이 켜켜이 쌓여있는 기억의 공간이기도 해서 한 줌의 기억을 끄집어 내는 순간 고구마줄기처럼 수많은 기억이 함께 올라오기도 한다. 그 기억들이 모이면 마을의 역사와 문화가 되고, 더 나아가 지역의 문화가 된다. 그래서 우리는 진안의 길에 서서 걸을 때에야 진안땅 지역문화에 온전하게 흠뻑 젖을 수 있을 것이다.

 

 

고개 너머 백운길. 1구간

 

숲에 있다. 소나무와 잣나무, 참나무, 느티나무, 그리고 숲의 전이단계에서 마지막에 자리하는 서어나무로 이루어진 수-우-웊에. 작가 김훈은‘숲’이라고 발음하면 입 안에서 맑고 서늘한 바람이 인다고 했다. 그의 말마따나 숲은 글자 모양도 숲처럼 생겨서 글자만 들여다 보아도 숲에 온 것 같은 느낌을 자아낸다. 맑고 서늘한 바람이 이는 숲. 백운면 노촌리 미재천변 숲에서 첩첩산중 진안고원길은 시작된다.

여름이면 울창하고 가을이면 붉은색으로 한껏 치장하는 미재천변 숲에는 기억도 가물가물한 오래된 것들이(?) 가득하다. 지석묘(고인돌)와 비석, 돌탑, 정자 등이다. 그 중에는 미계 신의련 선생을 기리기 위한 것이 많은데 선생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임진왜란 당시 아버지(신순)의 병이 깊었던 신의련은 피난을 하지 못한채 왜군을 맞이했다. 마을로 들이닥친 왜장(倭將)은 아버지를 죽이려했고 신의련이 아버지를 감싸안으며 저항하자 왜장이 그의 이름을 물었다. 신의련이 종이에 적은 이름을 건네자 왜장이 이를 불에 태우려고 했고, 그 순간 종이는 불에 타지 않은채 하늘로 멀리 날아갔다 한다. 결국 신의련의 효행에 감복한 왜장은‘이곳은 효자가 사는 곳이니 침범하지 말라’는 방을 붙이고 돌아갔다. 이후 노촌리 골짜기 안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들어와 난을 피하게 되었으며, 오만명이 들어왔다고 해서‘오만동(五萬洞)’이라는 지명까지 생겨났다.

이와 관련되어 1907년에 세운 유적비 <미계신선생의련유적비명>, 순조때 세운 신의련효자각, 1869년에 지은 영모정(永慕亭)이 주위에 자리하고 있다.

진안고원길 출발점인 영모정은 미재천 바로 물가에 자리한다. 앞서서처럼 신의련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고, 1984년 전라북도 문화재자료(제15호)로 지정되었다. 숲에 싸인 경관이 뛰어나고, 사계절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는 영모정은 특히나 지붕의 재료로 지역에서 흔한 너새(돌너와)를 이용한 점이 눈에 띈다.

숲 터널을 따라 100여미터 걸으면 미재천 건너편 미룡정(美龍亭)이 시야에 들어온다. 1990년 거창신씨 종중에서 지은 목조 건물로 미재천과 천변숲의 정취를 한가히 음미하기에 적당한 공간이다. 미룡정을 들고나는 사람이라면 다리_미룡교에 음각된‘美龍橋’를 찾아볼 일이다.

출발점 영모정과 미룡정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는 1구간은 고개 너머 마을과 마을을 잇는 고원길의 대표 구간이다. 또한 섬진강 최상류도 만나게 되어 보통 고원길을 견학오거나 걸으러 오는 이들에게 추천하곤 한다.

첫 번째 고개 닥실고개에 오르면 탁 트인 시야 속에 그야말로 첩첩이 겹친 산들의 연속이다. 1구간은 그 산능선을 가로지르는 고개를 넘어가는 길이다. 그렇게 고개와 마을을 연달아 넘어내면 섬진강이 불현듯 나타난다. 고개를 넘어설 때면 매번 다른 풍광과 다른 이야기를 가진 마을이 자리한다. 그래서 설레일 수 밖에 없는 고원길이다.

산촌의 느낌이 강한 첫 번째 마을 가루손이(신전). 소가 가로 누워있는 형국이라 가루손이다. 당산제를 지내는 나무 아래 서면 불어오는 바람에 시원하고, 걸어야 할 길이 보여 재촉하게 된다.

배고개를 넘으면 상백암, 다시 닥실고개(은안)를 넘으면 은안, 흙두고개를 넘으면 원반송이다. 상백암은 백운동천에 자리한 상운암에서 쉼과 물놀이를 하기에 제격이다. 은안은 이름처럼 은은하고 편안한 공간임을 느끼게 된다.

멋진 소나무에서 유래한 원반송은 섬진강변에 자리한 마을이다. 그 멋진 소나무는 1967년에 고사했지만 섬진강변 느티나무숲은 시원한 풍광을 연출해내고 있다. 원반송은 정몽주와 함께 조선개국에 반대한 최양이 거주하던 마을이기도 하다. 시골에서 보기 드문 마을가게가 얼마전 사라져 아쉬움을 더한다.

원반송부터는 논길과 섬진강변길이 번갈아 이어진다. 진안에 몇 안되는 들이 눈 앞에 펼쳐지고, 곧이어 마이산도 시야에 들어온다. 그렇게 원덕현마을에 이르게 되는 1구간이다.

 

 

내동산 도는 길. 2구간

 

과거 진안백운 사람들은 임실장과 관촌역에 가기 위해 몇 개의 고개를 넘어야 했다. 첫 번째 넘었던 구신치. 이른 아침이면 임실과 관촌을 향하는 많은 이들이 구신치 날망을 넘어섰다. 또 임실이나 순창 등에서 백운에 시집온 새댁들은 구신치에서 낯선 땅을 처음 접했다. 내동산 아래 마을에는 이제 팔순이 된 새댁들이 즐비하다.

구신치를 넘어선 고원길은 임실과 근접한 성수땅의 마을과 들을 지난다. 이성계가 신하를 구했다는 구신리는 이야기가 가득하다. 농업용 물 사정이 좋아‘원구신 사람은 송장도 무겁다’던 원구신마을에는 장수가 소를 타고 나왔다는 노적바위가 모정 옆에 있다. 구신리 길은 과거 고창에서 장수까지 등짐장수들의 소금 행상길이었다.

내동산 아래 골짜기로 들어선 고원길은 상염북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2구간이 상염북까지의 고개+들길과 상염북 이후의 내동산 임도로 구성되며, 임도는 장장 8km에 이른다. 상염북에는 임진왜란시 선주가 의주로 피난하자 북쪽을 향해 세 번 절하였다는 충목(忠木)이 있다. 또한 한일합방이 되던 1910년에는 벼락을 맞아 가지가 부러졌다는 충목 옆에는 충목정이 있어 쉼을 갖기에 적당하다.

중평까지 이어지는 내동산 임도는 경사가 제법 있는 반면, 정상을 제외하고 숲그늘 속을 걷게 된다. 정상 부근에 있는 전망대에서는 성수땅과 함께, 임실, 멀리는 백련산도 눈에 들어온다.

시원한 숲길을 나오면 중평굿으로 유명한 중평마을에 이르게 된다. 2구간의 도착지이며, 500m 가량 떨어진 음수동산촌마을에서 숙박과 식사 등을 해결할 수 있다.

 

 

섬진강 물길. 3구간

 

굽이치는 섬진강과 가장 많이 만나게 되는 구간이다. 일부는 섬진강변을 따라 걷기도 한다.

중평을 출발해 점촌과 원외궁에 이르는 길은 약간은 거친 편이다. 저수지뚝방과 묵힌 밭, 작은 봉우리 등은 여행자를 지치게 하지만, 봉우리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들판은 제주올레 1구간 알오름에서 보는 것처럼 형형색색이다.

성수면소재지를 지나 반용재에 올라서면 그야말로 시원한 풍광이다. 섬진강과 그 옆에 자리한 마을이 한 눈에 들어온다. 섬진강을 다시 만나게 되는 반용마을의 그네와 뗏목은 지친 여행자를 충분히 어루만져준다. 섬진강 수면과 비슷한 구 반용교는 아찔함께 함께 색다른 조망을 선사한다.

반용에서 포동에 이르는 길은 섬진강 물길과 병풍바위가 함께 한다. 뽕나무가 곳곳에 자리해 달짝지근한 오디를 맛볼 수 있는 길이다. 시원한 느티나무숲이 길게 늘어선 포동마을은 최근 마을식당을 시작해 식사를 하기에 좋다. 겨울이면 마을앞 논을 얼려 얼음썰매장을 운영하기도 한다.

포동에서 양화에 이르는 길은 지루하지 않다. 언덕과 골짜기 저 위에도 자리한 밭이 이어지고, 이내 섬진강과 다시 만난다. 차량이동이 많지 않은 아스팔트는 도로변 숲이 시원하다. 곧이어 야구장과 축구장 등이 자리한 체련공원이다. 섬진강변에 자리해 주변 풍광이 좋고, 전주가 가까워 이용율이 높은 편이다. 또 시원한 바람과 물이 나오는 풍혈냉천이 바로 옆에 있어서 여름철이면 많은 이들이 찾고 있다. 체련공원에서 풍혈냉천에 이르는 섬진강은 다슬기 잡는 이들이 행복한 공간이다.

느티나무와 모정이 좋은 양화마을. 마을 앞 달길천에는 소가 풀을 뜯는 모습을 쉽게 보게 된다. 달길천을 따리 이어지는 고원길은 오암에 이르러서야 3구간을 마무리한다.

 

 

신광재 가는 길. 1-1구간

 

고원길 시작점인 영모정에서 미룡정으로 들어서기 전 직진하면 1-1구간 신광재 가는 길이다. 노촌리 계곡을 북쪽으로 가로질러 올라 740m 신광재에서 점을 찍고, 남쪽으로 내려오게 된다. 성수사부터 신광재 지나 신전에 이르는 길은 임도로 걷기 좋은 반면, 먹거리 등을 미리 준비해야 한다.

고원길은 잠시 노촌호가 들어서기 전 하미치마을과 밤나무정이마을을 잇는 길에 머물러 있다. 여느 마을의 여느 고원길이 그러지 않았으랴만은 두 마을을 잇는 고원길 역시 수 많은 처녀총각의 혼담이 오갔으리라. 해질녘이면 술 한잔 거나하게 걸친 두 아비의 밀담이 더해 갈수록 혼기 가득한 이들의 한평생 반려자는 덜컥 정해지곤 했던 것이다. 하미치마을 김평연-전갑순 부부도 그렇게 맺어진 후 50년이 넘게 살아오고 있다.

1957년, 군생활을 막 마친 김평연(당시 26세)의 시야에 하미치를 오가는 어느 처자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처자는 같은해 부모님을 따라 하원산에서 밤나무정이로 이사한 전갑순(당시 18세)이었다.

당시 상미치와 비사랑, 밤나무정이 일대에 산판작업과 숯 만드는 일이 활발했는데, 전갑순 부모님이 함바집 운영을 했다. 3일에 돼지 한 마리를 잡을만큼 사람도 일도 많아서 전갑순은 하미치를 지나 백운면소재지로 마실다니면서 부지런히 심부름을 했었으니, 혼기 가득한 하미치 총각들이 흘깃흘깃 바라보는 것은 당연지사 아니겠는가. 김평연도 전갑순의 이름 정도는 알고 있었다고 고백한다.

일이 되려고 했는지 이들의 두 부모는 내심 사위와 며느리감으로 두 사람을 점지해 두었다고 한다. 장인이 될 양반은 하미치를 오가며 김평연을 유심히 보아두었고, 또한 시어머니 될 양반은 재봉틀을 쓰기 위해 집에 가끔 들르는 전갑순 손매에 시선이 갔다. 특히 전갑순의 바느질 솜씨는 미래의 시어머니를 흡족하게 할 만큼 매우 야무진 수준이었다. 이렇게 사위는 장인에게, 며느리는 시어머니에게 탐나는 대상이었으니 일은 이미 따논 당상이었던 것이다. 불만 지피면 되는 상황에서 드디어 중매쟁이가 나서게 되었다.

다음해 음력 2월 19일, 각각 스물일곱-열아홉이 된 두 사람은 하원산에서 혼례를 올리고, 전갑순은 하미치로 오는 길에 가마를 탔다. 벌써 오십여년 전의 일로 부부는 그 사이 다섯명의 자식을 알뜰히 키워냈다. 그리고 두 사람의 혼담이 오갔던 하미치에서 밤나무정이 고원길에는 노촌호가 들어서서 먼 옛날의 기억인냥 물결만 출렁거린다.

두 사람의 혼담 이야기뿐이겠는가. 고원길은 이 곳을 잠시라도 거쳐간 사람들의 오래된 기억 속에 그때 그 모습으로 가득할 것이다. 이제 고원길은 노촌호를 지나 사람도 일도 많은 함바집이 들어서 있던 밤나무정이에 닿는다. 김평연씨 장모되는 양반이 국밥 한 그릇 건넬 것 같은 아련한 공간이다.

임도로 들어선 길은 이 맘때면 산딸기가 지천이다. 오죽하면 산딸기축제를 생각했을까. 임도의 정점인 신광재는 탁 트인 전망과 함께 고랭지 농작물로 마음까지 풍족하다. 금남호남정맥이 지나며 건너편은 장수군에 해당한다. 정맥종주자와 고원길 여행자가 많아지면 신광재에 주막 하나 여는 상상을 하곤 한다.

신광재에서 신전에 이르는 임도는 마이산과 노촌리 등의 조망이 매우 좋다. 건너편 성수산도 한 눈에 들어오며, 사람의 왕래가 극히 적어 멧돼지라도 만날 것 같은 공간이다.

 

 

하늘땅을 소통하다

 

하늘땅 소통매개체. 진안고원길은 외진 진안땅 구석구석을 이어놓았다. 군경계가 멀지 않은 공간들은 읍내중심의 소통에서 고개 너머 공간과의 소통을 다시 시작했다. 그렇게 열다섯 고원길이 존재한다.

누가 걸을까? 아니 누가 걸으면 좋을까? 고원길은 진안 이외 지역에서 오는 이들이 여행자가 될 것이다. 허나 진안사람들이 많이 걸었으면 한다. 그래서 고원길은 아직 친절하지 않다. 진안고원길에 대한 풍성한 기억을 가진 진안사람들이 고원길을 걸으며 그 이야기보따리를 하나하나 풀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더 큰 바람이 있다. 진안고원에 해당하는, 즉 하늘땅에 해당하는 무진장(무주/진안/장수)를 아우르는 고원길로 나아가는 것이다. 섬진강과 금강이 시작되는 첩첩산중 고원땅을 소통시키는 고원길이고자 한다.

정병귀 (진안고원길 길지기)

 

진안고원길 정보

진안고원길은 장기걷기 프로젝트를 몇 차례 진행하며 전 구간을 걸어보고 이와 관련한 내용을 안내책자와 웹사이트에 실어놓았다. 다만 개별적으로 걷는 이들을 위한 이정표는 네 개 구간(1,2,3,1-1구간)에만 설치되어 있다. 자세한 정보는 홈페이지 www.jinangowongil.kr 를 활용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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