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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장고원길

장수 구간 탐사, 네 번째 - .글 먼저, 사진 나중... 우선 글 올립니다.

작성자최태영|작성시간19.12.05|조회수208 목록 댓글 0



무진장고원길 장수구간 탐사 네 번째


2019년 12월 3일, 화요일. 흐림.


오늘 탐사의 목적은 장안산 일대를 어떻게 걸을지 가늠해 보는 것과,

최근에 뜨거워지고 있는 <장수가야>의 ‘침곡리 가야산성(침령산성)’과 그 산성 안에서 발굴된 ‘집수정(集水井)’을 찾아가보는 것이다.


1. 장안동 ~ 장안산 임도 ~ 장안동


진안팀의 최태영·정병귀 두 사람과 장수의 장기윤 선생이 장안동 마을회관 앞에서 9시에 정확히 합류. 장 선생은 늘 진안팀보다 10분쯤 먼저 약속장소에 와서 기다린다.

‘도깨비동굴’을 들여다보는 일로 탐사활동을 시작한다. 도깨비동굴이라는 이름은 최근에 산촌종합개발사업으로 ‘만들어진’ 곳인데, 원래는 폐광한 갱도(坑道)였던 곳에 ‘도깨비’라는 이야깃거리를 덧씌운 것이다.


장안동은 원래 큰 마을이다. 장안산의 이름이 먼저일까? 아니면 장안동을 따서 장안산의 이름이 붙여진 걸까? 1872년 군현지도에 장안동은 올라 있으나 장안산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그보다 먼저 간행된 동여도에는 장안산이 표시되어 있다.


‘장안(長安)’은 당(唐) 시대부터 수도 또는 큰 성시(城市)를 의미했다. 장안동이 산골 치고는 큰 마을이어서 그 이름을 차용했을 법도 하지만 과장이 좀 심하다.


마을회관 앞 버스정류소 광장에서 장안산의 눈(상고대?) 덮인 꼭대기가 잘 보였다.


정작 진짜 도깨비동굴(폐갱)은 입구에 철문이 닫혀 있어 들어갈 수 없고, ‘도깨비 시설’은 종합개발사업으로 새로 지은 전시·체험관에 있는 듯하다.

더 이상 도깨비에 연연할 이유는 없었다. 마을 가운데의 하천을 건너는 장안교 끝에 차를 세워두고 셋이서 걷기 시작했다.


시멘트 포장 농로를 어느 정도 걸어 올라가자, 길은 더 보이지 않고 흙길로 들어서야 한다.

또 가시밭길을 헤치는 고난의 행군이 시작된다.


가파르다….

발목을 잡는 잡초 줄기는 말할 것도 없고, 얼굴을 할퀴고 점퍼를 찢는 가시나무…. 경사가 급해 엉겁결에 붙잡은 나무줄기에 가시가 가득했다. 깜짝 놀라 손을 떼지만 벌써 늦었다. 손바닥이 따끔거린다. 두릅의 늙은 줄기였다. 이 골짜기에 두릅나무가 많은 것이다. 누가 일부러 심었는지? 그러나 관리가 되지 않고 있어 키만 크면서 늙어가고 있다.

며칠 전에 올랐던 무주의 민재나 치마재의 경사에 못지않은 터프함이다.


오늘 이 고개를 오르려는 이유는, 장수군이 설계한 ‘장안산 마실길’이 덕산저수지 위에서 지실가지마을을 거쳐 고개(고개이름?)를 넘어 이곳 장안동 도깨비마을까지 오도록 되어 있는데, 반대쪽에서 올라가 봄으로써 과연 우리 무진장고원길의 트레일 경로로 적합한지 확인하려는 것이다.

중간에 두어 번 쉬면서 진행 방향 뒤쪽(북)을 바라보면 툭 틘 시야에 멀리 남덕유산의 능선이 깨끗이 조망된다.

숨이 턱에 차서 치고 오른 끝에 임도를 만난다.

살았다!


임도를 타고 왼쪽(장안동으로 돌아가는 내리막)으로 돌아 450미터 가량. 길 안내말뚝과 앉아 쉴 벤치 등을 만난다.

그곳은 바로, 앞에서 말한 고개 정상에서 내려오는 나무데크 계단과 만나는 지점이었다. 

고갯마루까지는 이 계단을 타고 올라야 하는데, 딱 보아도 엄청나게 가파르다! 이 계단을 걸어 내려오는 것도 만만치 않겠다. 

타고난 등산가 장기윤 선생도 “그 길을 걸어보았는데 내려가는 경사가 무시무시하더라”고 증언한다. 

그렇다면? 코스에서 제외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장안산 마실길’은 이 지점에서부터는 임도를 걸어 지소마을을 거쳐 장안동마을까지 편안하게(?) 내려가게 되어 있다. 마을입구에서 본 초대형 안내판의 경로 그림은 매우 소략하고 불친절했지만 그렇게 읽혔다.


잠시 쉰 후, 우리는 임도 대신 옛 산길을 걸어서, 올라온 골짜기의 반대쪽 날등을 타고 도로 내려가기로 했다.

처음 잠깐은 능선길로서 다소 넓고 걸을 만했으나 역시 가파른 비탈의 옆구리를 조심해서 걸어야 하는 등, 만만치 않았다. 올라올 때 가팔랐으니 내려갈 때도 가파를 것은 당연한 이치. 하지만 잡목이 섞인 솔숲길 구간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 고 보아야 한다.


어느 정도 내려오자 이번에도 길은 없어지고 물이 질퍽거리는 진창과 함께 어떤 이의 고사리밭이었던 곳을 헤쳐 지나야 했다. 고사리밭을 경유하지 않는 날등 길이 있는지 보려고 정병귀 국장은 또 따로 길을 헤쳐 나간다.


장기윤 선생, 늘 하는 말대로 “역시 장수는 물이 많아서 장수야.”

고사리밭을 지나고 작은 실개천 하나를 건너뛰자 거대한 암반 위에 올라서게 된다. 

이곳만 해도 경치가 좋다. 장안동마을 뒤쪽의 가장 높은 곳까지 내려온 셈.

그 실개천이 제법 큰 개울과 합해지는 곳은 계곡도 깊고 사방댐 시설을 해 놓았는데 개울 바닥의 암반이 아주 그럴 듯하다. 작은 폭포(?)가 보이기도.

이 개울은 북쪽으로 계속 흘러 벽남 저수지에 담겼다가 이후 유천(柳川)의 이름을 얻게 된다.


개울 위에 아치형 쇠다리가 걸려 있다.

다소 낡아 보이는 쇠다리에는 ‘위험하니 들어가지 말라’는 경고판이 걸려 있고 건너편에는 쇠사슬까지 채워져 있었으나, 탐사팀은 ‘당연히’ 경고를 무시하고 건너간다.


체인까지 타넘어 건너간 곳은 숯가마 찜질방이었다!

찜질방은 이미 망했다. 언뜻 보매에도 꽤 큰 투자를 한 듯싶으나, 이 오지까지 찜질을 즐기러 올 손님은 없었던 것이다.

찜질방 말고도, 큰 돌로 입구를 치장한 공간이 있는데 태극 문양을 디자인한 조형물 따위가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정신수련 단체(?)가 들어오려던 곳으로 짐작되기도 했다.

아무튼 비어가는 농산촌의 현주소다.


이곳에서 오른쪽(남쪽)으로 다시 산을 향해 들어가는 좁은 골짜기길이 지소(紙所)마을로 이어진다.


여기까지 왕복 3킬로미터. 고작 그 거리를 걷는 데 1시간이나 걸렸다. 임도를 만난 지점의 높이는 7백 미터에 가까웠고, 출발지점인 마을광장과의 고도차는 2백 미터 이상. ‘장안산 마실길’의 가장 높은 지점 고갯마루까지는 가보지도 못했다. 물론 장안산의 주봉은 높이가 1천2백 미터를 넘는다. 만만히 볼 코스가 아닌 것.


‘식전(食前) 일정’ 치고는 힘들었던 탐사를 이렇게 끝냈다.

지금 막 걸었던 코스는 이른바 계륵(鷄肋). 트레일 여행자들에게 골탕을 먹이려는 것이 아니므로 굳이 힘든 경로를 걷게 해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아직까지는 나 혼자만의 생각이지만.


차를 다시 타고 마을을 빠져나가기 직전에 동네 주민을 한 분 만나 물었다.

“여기서 지실가지로 가는 길은 없나요?”


없단다. 등산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우리가 가려던 고개를 넘으려면 매우 몹시 힘들어서 “반 죽는다”는 것이다. 과연 그 표현이 옳겠다. 그런 험한 산길에 ‘마실길’이라는 이름을 붙이다니.


할머니의 말 첫 마디가 “함부레(애당초) 그리로 갈 생각 말라”는 것으로 보아 함양(?) 쯤에서 시집온 사람인 듯. 장계에서 육십령을 넘으면 경상남도 함양 땅이니 그럴 법도 하겠다.


함양댁 할머니와 작별하고 차머리를 돌려 다시 장안산 방면을 향한 즉, 할머니가 깜짝 놀라 손사래를 치며 그리 가지 말라고 질색팔색한다. 우리가 기어코 지실가지로 넘어가려는 줄 안 모양이다. 사실은 세 번째 골짜기에 있는 괴목마을을 구경하러 가는 참이었는데.



2. 괴목마을 구경.


다소 긴 진입로(1.5킬로미터)를 달려 괴목마을로 들어선다. 

마을 이름부터가 느티나무 마을, 옛 지도에도 아예 ‘槐木’이라 실려 있는 마을이다. 마을입구 개천방죽에 심은 느티나무가 숲을 이루었다. 

마을회관도 요즘에 흔해진 신식 건물이 아니라 새마을사업 시대의 유물. 다소 칸을 더 달아내고 칠을 새로 하는 등 손을 대기는 했으나 여전히 골격은 수십 년 전의 '시멘트 슬라브' 스타일이다.


버스가 이곳까지 들어왔다 돌아나가는 종점인 모양이다.

이 마을 뒤에서 출발하여 장안산을 오르는 등산로도 있다. 이름하여 ‘물원재골’.


‘물원재, 물원공이재, 무릉재, 무령재, 무룡재…’ 

모두 다른 곳인 듯 들리지만 같은 곳을 의미한다. 필시 ‘무릉재(峙)’를 잘못 발음한 탓이다. 

이와 비슷한 경우는 진안~완주 사이 ‘보릉재’가 있다.

 ‘릉’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는 ‘발음치(發音痴)’가 있기 때문인데, 이를테면 울릉도를 ‘울령도’라 하는 사람이 많다. ‘보릉재’가 ‘보령재’로, 더 나아가 ‘보룡(공이)재’로 와전. 그와 비슷한 경우라고 추측한다.

‘~공이’는 왜 붙었을까?

옛 지도에 ‘고개’를 이두식 한자로 표기할 때 ‘公’ 또는 ‘古’로 쓰곤 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지명 뒤에 ‘~이’를 붙여 부르는 전라도의 특징적 언어습관 덕분에 ‘보룡공이’ 재, ‘무령(무런)공이’ 재… 그렇게 이름이 바뀌어 왔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다음에 또 더 깊이 해보자.


이런 깊은 골짜기까지 찾아들어와 마을을 이루고 살기 시작한 옛 사람들의 개척정신에 새삼 탄복하면서, 돌아 나왔다.



3. 예정에 없던 고개 하나 더 넘기.


장안동 네거리를 돌아 우회전(동쪽), 논개의 생가가 있는 마을을 향해 달린다. 이 길은 최근에 뚫린 장안터널로 이어지는 길.

꽤 경사가 있는 오르막길을 달리다가 한 굽이에서 차를 내렸다. 옛길의 흔적을 찾았기 때문이다.


탐사팀의 할 일이 이런 것이다. 매연 가득하고 위험한 차도를 걷게 하는 것은 ‘걷는 여행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므로 되도록 옛길·흙길·산길·풀길 등을 찾아내어 개척해야 한다.


차도를 내려 농로처럼 보이는 흙길로 내려섰다. 자세히 보니 군데군데 벗겨지긴 했으나 아스팔트가 깔려 있던 흔적이 있다. 즉, 터널을 뚫고 차도를 정비하기 전까지는 이 길이 차도였다는 것. 

용도폐기되어 호젓해진 옛 차도를 어느 만큼 걸어 올라가니 드디어 길이 끝나고 새로 정비한 차도와 합해져 버리는 등 흐지부지 사라진다. 아쉽게도 너무 짧다. 남의 묘 앞을 지나 산비탈 잡풀 더미를 헤쳐 나오니, 얼마 전에 폐쇄했다는 ‘장수 마실길’ 구간의 쉼터였던 원두막이 나타난다.


왼쪽 산이 꽤 가파른 높이를 보이는데 잘록한 고개 정상이 보일 뿐 아니라, 산 속으로 끌어들이는 시멘트 농로가 하얗게 유혹한다. 


여기서 일행이 의논. 점심 먹기 전에 고개 하나는 더 넘어보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다. ‘점심 좀 늦게 먹을 요량 하고, 지금 약간의 간식을’ 제안하는 장기윤 선생.

커피 한 모금 마시며 에너지를 보충한다.


장수군의 산들은 모두 이렇게 가파른가?

두 사람을 따라 걷기가 벅차다. 사진을 찍어가며 걸으니 더욱 속도가 더디다.

얼마 걷지 않아 ‘장수 마실길’ 구간이었던 당시 설치한 통나무 계단과 난간기둥과 로프 등 구조물이 하얗게 눈에 들어온다. 

오, 아직 살아있네. 반가웠다. 굳이 길을 개척하지 않아도 되니까.


폐쇄된 후 방치된 흔적이 곳곳에 드러난다. 통나무 계단 사이는 흙이 무너져 계단이 있는둥 마는둥 하고, 난간기둥마저 흔들거리는 등. 

오르막도 가파르고 내리막도 가파르다. 낙엽이 두텁게 쌓여 있어 내리막에서는 특히 미끄럽다. 등성이에 도달하자 왼쪽(서쪽) 발아래로 장수 골프장이 보였다. 

고도 7백 미터. 웬만한 등성이는 예사롭게 7백 미터를 넘는 장수군의 산. 

옛 지도에 장수군의 지형을 한 마디로 ‘고산준령’이라 표현한 것이 조금도 과장이 아니다.

이런 가파른 산이 막고 있으니 고개 양쪽 지역이 왕래할 기회가 적어 서로 고립된 채 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터널이 좋기는 하구나… 처음으로 ‘토목사업’의 효용을 다소는 인정하는 마음이 일었다.


고개를 내려오니 그곳은 설국… 아니, 장계면이었다. 대곡리 지승마을 앞.

논개 생가가 있는 저수지 인근마을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길이 바로 지금 우리가 고개를 넘어 내려서 있는 길, 의암로(지방도 49호선)이다. 계속 달리면 또 다른 장안산 등산로와 연결되는 ‘무릉고개’를 만나게 된다.


걸어서 아스팔트길을 잠시 걷고 동쪽(장계면)에서 서쪽(계남면)으로 뚫는 장안터널을 걸어서 빠져 나갔다. 바로 이 터널 위의 고개를 넘은 것이다.


차를 세워둔 옛 ‘장수 마실길’ 쉼터에 다시 도착하면서 예정에 없던 ‘고갯길 깜짝 넘기’는 끝. 

짤막한 2.5킬로미터, 소요시간 50분.


이 경로는… 이 짧은 거리를 굳이 험한 고개를 넘으면서까지 체력을 소모하게 할 필요가 있을까? 아직 남아있는 옛 ‘장수 마실길’ 루트가 아깝기는 하지만, 효율은 너무나 떨어진다. 

터널 속을 걸어서 통과하면 잠깐이면 되고 차량통행이 적어 위험성도 별로 없는데.


이제는 무릎이 흔들리고 배도 고파서 점심을 먹으러 서둘러 장계장으로 달려갈 일이 바쁘다. 시간도 벌써 1시가 넘었다.

점심은 ‘삼 세 번’을 고집하는 장기윤 선생이 이번에도 맛있는 순대국밥을 사 주었다.



4. 가야산성의 위엄.


이른바 ‘장수가야’의 실체를 증거하는 발굴작업이 최근에 속도를 내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 취임 첫 약속에도 ‘장수가야의 역사’ 확립 사업을 최대한 지원한다는 것이 포함되었을 정도다.

그 물증 중 가장 중요한 성곽과 무덤 등의 발굴이 많이 진척되고 있고 발굴유물 전시관도 얼마 전에 장수 <한누리전당> 한쪽에 새로 지어 문을 열었다.


<침령산성> 진입로라 할 북실[사곡梭谷]마을은, 점심 먹은 장계 장터에서 장계천과 유천이 합해지는 지점을 건너는 다리 하나를 격해 있는 매우 가까운 곳이다.


이 마을도 크다. 이 마을뿐이 아니라 이 침곡리 전체가 장계천을 따라 형성된 꽤 넓은 퇴적평야를 농경지로 누리고 있다.

마을입구에 서있는 표지석이 새하얗고 깨끗한 것으로 보아 이 역시 침령산성의 존재를 알리기 위한 최근 여러 활동의 일부일 것이 분명하다. 돌 옆에 선 '침령산성 둘레길' 안내판도 새로 만들었다.


마을 서쪽의 침령(砧嶺, 방아재)을 향해 길고 느슨하게 난 마을 안길로 들어간다. 

오래된 마을이라는 것은 여러 정황으로 알 수 있었다. 잘 쌓은 돌담, 늙은 나무들, 마을 숲…

차가 겨우 빠져나갈 정도로 마을 안길이 좁고 꼬불거리는 것도 그렇다.


그러나 방아재에 가까이 갈수록 산길은 갑자기 경사를 더하여 급해진다. 

그도 그럴 것이, 남북으로 길게 이어져 서쪽의 천천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650미터 급의 산줄기를 가로로 자르며 옆구리를 치고 올라가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정국장의 차가 사륜구동 모드로 바꾸고도 헐떡거리며 겨우 올라간다. 질퍽거리는 구간도 많아서 미끄러져가면서 위험하게 한참을 올라가서, 

산판작업(?) 하는 다소 널따란 공간과 사람을 만난다. 


꽤 넓은 면적의 잡목을 베어 내고 편백의 묘목을 심었으며 그런 면적을 자꾸 넓혀 나가는 중이라 한다. 이것도 침령산성 복원사업의 일환이라며.


더 이상 차를 몰고 올라가다가는 차마저도 위험해질 것 같아서 탐사팀은 걸어서 오르기로 했다.


아, 가파르다.... 이미 길(?) 옆에는 성을 쌓을 때 썼거나 무너져 내렸을 돌덩이들이 즐비하다. 마지막 가파른 고비를 헐떡이며 치고 올라선 자리에, 있었다, 성벽의 하얀 속살이.

발굴팀이 그곳을 잘라 단면을 새 돌로 쌓은 복원지였다.


안내판에 따르면 이 산성은 삼국시대(사국시대?)에 처음 쌓았고 후백제와 고려로 이어지면서 여러 차례 중수되어 시대에 따른 축성기법의 차이가 확연히 보이는 성이라 한다.


높이와 경사도로 보아 관측과 수비용 성곽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정상에서는 좌측(서쪽)으로 천천면이, 우측(동쪽)으로 장계면이 손바닥 안처럼 환히 내려다 보였다. 긴 등성이의 남쪽 끝에는 봉화산이 있어 그 시대에는 봉수를 올렸을 것이다.


장대(將臺), 군인막사 따위 건물이었을 터[址]도 여러 군데 발굴 중이었다. 

한 쪽에는 기왓장들이 수습되어 쌓여 있고, 그리고…


<집수정>이 있었다!


계단처럼 여러 층으로 가운데를 향해 점점 좁아지면서 내려가도록 돌로 쌓은 역(逆)원추형(圓錐形) 우물. 

형태로는 로마 콜로세움의 관객석을 연상하면 되겠다. '작지만 거대하다'. 깊이가 10미터는 되겠다.

이 산 꼭대기에? 라고 의아해 할 만큼, 그 당시에는 물이 풍부하게 솟았던 모양이다. 남는 물이 넘쳐흘러 나갈 수 있도록 낮은 쪽 전[邊]에는 출수구도 마련되어 있다.


고대 로마나 산꼭대기 마추픽추의 돌구조물에서나 감동을 받아왔던 우리 세대, 여기 우리 땅의 선조들의 기술도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아직 발굴복원작업이 완성된 것이 아니어서 위태로운 적석층은 나뭇가지로 괴어 놓는 등 취약했다. 가까이 가지 않으면서도 사진 몇 장을 찍는 데에는 성공.


더 놀라운 것은, 그보다도 더 큰 집수정을 더 아래쪽에서 발굴하는 중이었다. 먼발치에서 보아도 지금 보고 있는 이 집수정보다 훨씬 컸다. 

저것이 복원되면 정말 큰 센세이션을 일으키게 될 것 같다. 

그러잖아도 불과 며칠 전에 창녕에서 가야시대 권력자의 무덤이 생생히 발굴된 뉴스에 깜짝 놀라고 그 화려함과 구조의 치밀함에 감동했는데, ‘장수가야’ 쪽에서도 못지않은 기술력을 증명할 수 있다면 고대역사가 전면 새로 쓰이게 될 쾌거라 할 수 있다.


감동할 일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어서 더 지체하지 않았다.

힘들여 올라온 김에 정상의 능선을 걸어 남쪽으로 조금 더 가보기로 했다.


이미 <침령산성 둘레길>을 서둘러 조성한 듯, 야자수 껍질로 짠 매트가 깔려 있어 걷기에는 편했다. 계속하여 남쪽으로 3킬로미터 여를 더 가면 봉화산이란다. 

하지만 날이 점점 흐려오고 추워져서 더 걷는 것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 하산.


1872년 군현지도 장수군 편에 “관방(關防, 방어진지)과 봉대(봉화대)는 없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통일된 국가를 이루고 있던 고려조 이후로는 용도가 폐기되었다고 볼 것이다. 학계에서도 바로 이 내륙 봉수대의 흔적을 찾아 가야국의 자취를 증명한다고 한다.



5. 또 사족 - ‘침령’의 지명에 대하여.


1872년 지방지도에 산성이 있는 이곳은 방어령(防禦嶺)이라 올라 있다. 또, 그 아랫동네는 사곡(梭谷)이라 정확히 나와 있다. 즉, ‘산성(山城)으로 방어하는 재’라는 뜻이다. 꼭 들어맞지 아니한가! 

그런데 왜 ‘침령’이라 부르게 되었는지 숙고한 결과, 대략 다음과 같은 가설을 이끌어 냈다.


첫째, ‘방어령’의 소리가 ‘방아’와 닮았으므로, 한자어 ‘防禦’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서민들이 대충 ‘방아재’라고 부른 것이 계기가 되어 ‘방아 砧’으로 쓰게 되었다.

둘째, 그 반대로, 민간에서 원래 ‘방아재’로 부르던 것을, 지도를 제작하는 관원(官員)이 ‘방어용 성이 있었다’는 자신의 지식을 기초로 다소 ‘오버’하면서 ‘방어령’으로 표기하였다.


어느 쪽이 더 역사적 변천과정에 부합할지 나도 아직 잘 모르겠다.


그런데, 북실(사곡)마을 깊숙한 곳을 ‘성재골’이라 하는데 이 고을이름이 어쩌면 결정적 힌트가 되지 않을까? ‘성(城)이 있는 재, 그 아랫골’. (한편, 성 자체가 재이기도 하다. 城의 훈(뜻)이 바로 ‘재’이므로.)

진안에도 '성이 있던 산'이라는 뜻으로 ‘성뫼산’(진안읍내)이 있고, '성이 있는 잿마루'라는 뜻의 ‘성재산 또는 성치산’(주천면. 금산군 경계)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이 산성이 고대국가 시절에 축조된 것이 틀림없다면, 방아재(침령)보다는 방어령 즉 ‘성재’가 원래의 이름유래에 더 가까울 것으로 조심스럽게 추론하면서,


고고학계가 임시로 붙인 이름인 ‘침령산성’을 더 굳어지기 전에 ‘성재산성’으로 바꿔 부르는 것이 어떨까 한다. 

사곡 옆 마을인 침령마을의 이름도 방아재로 잘못 불리면서 그렇게 붙게 된 것으로 추측하지만, 이미 굳어진 마을이름까지 되돌리는 것은 혼란을 가중시킬 뿐 실리가 없어 굳이 강권하고 싶지는 않다.


거칠고 얕은 연구에 불과하니 반론이 있는 분은 서슴없이 제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최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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