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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장고원길

장수 구간 탐사, 다섯 번째.

작성자최태영|작성시간19.12.11|조회수227 목록 댓글 3


2019년 12월 10일, 화요일, 맑음. 안개와 미세먼지.

장수 구간 탐사 다섯 번째.


오늘 탐사할 구간은 비교적 가벼운 구간이다.

장계면 대곡리 논개 생가 마을 일대와, 거기서부터 북쪽으로 나가면서 장계면 명덕리를 거쳐 소비재를 넘어 계북면으로 달려 보기로 했다.

장기윤 선생과 진안팀(정병귀·최태영)이 장계 문화복지센터 앞에서 만나 합류.

짙은 안개와 미세먼지로 시야가 뿌옇고, 오슬오슬 춥다.


지난 번 마지막 답사 때 “장안터널 위로 가파르고 짧은 고개를 넘어 의암로를 만나면서 지승마을 앞에 내려섰다”고 했다. 바로 그 지승마을에서 오늘의 탐사를 시작한다.

이 골짜기는 북으로 길게 뻗어 내리는 개울물이 대곡 저수지에 담겼다가 계속 흘러 장계천을 이루어 오동리와 명덕리로 향하는 계곡이다.


1. 지승마을 - 장계면 대곡리.


그 골짜기 대곡리의 가장 깊숙한 곳, 지승마을.

마을의 이름 유래가 궁금하다.

매우 소략한 옛 지도 ‘지승(地乘)’의 이름을 따왔을 리는 없겠고, ‘종이로 꼰 끈’이라는 뜻의 ‘지승(紙繩)’일까 싶기도 하지만 이 역시 믿을 만한 추론은 아니다. 내 얕은 문화지리 실력으로는 가늠해볼 수 있는 범위를 넘어가는 것이다. 모든 공식 문서에 한자를 쓰지 않게 된 탓이 크다. 우리 문화에서 한자와 한자어를 빼버리면 논할 자료가 크게 줄어듦을 알아야 하는데, 아쉽다.


남북으로 달리는 의암로(743번 지방도)를 건너 지승마을 안길로 들어선다.

이 의암로와 장수터널이 생기기 전에는 그 높은 고개로 인해 남서쪽의 장안리와 이곳 대곡리 사이는 통행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고개 바로 아래에 위치한 지승마을은 그래서 대곡리 중에서도 가장 남쪽이자 높은 지대에 해당한다. 

따라서 외지사람의 발길이 뜸했을 숨어 있는 마을. 마을 안길마저도 높낮이의 차이가 심한 좁은 비탈길의 연속이다.

장안산에서 흘러내리는 골물이 폭포를 이루어 아주 그럴 듯한 경관을 연출하는 작은 개울도 있다. 개울 옆에 작은 정자를 지어 놓았지만 마을의 가장 뒤쪽 구석인 여기까지 와서 놀 사람이 있을까 싶게 외졌고, 마을 안은 사람을 구경하기 어렵다.


마을 뒤 흙길을 걸어 가장 높은 곳에 올라서서 보기로 하고, 정 국장은 차를 몰아 마을 안길을 되돌아 나가서 반대쪽에서 올라와 만나기로 한다.


장기윤 선생과 나는 걸어서 움직이는데, 한 빈터에서 부러진 감나무 가지를 발견한다. 그리 크지 않은 감이 조롱조롱 달린 채 땅에 떨어져 있어 하나를 따먹어 보았다. 홍시가 다 된 차가운 감. 먹을 만하다. 하나를 더 따서 장기윤 선생에게도 권한다. 맛있단다.

아이들이 있었다면 남아날 리 없는 감. 이제 산촌마을에는 감 따먹을 사람도 없다.


그런데, 정 국장과 약속한 ‘가장 높은 지점’ 가까이에 이르자 오른쪽(남동쪽)으로 그럴 듯한 오솔길 하나가 보인다. 흙길인데 폭도 1미터 쯤 되어 보이고 낙엽송 숲 아래로 구불구불 뻗어 있어 여행자를 유혹하고 있다. 장 선생이 앞장서서 그 길로 들어섰다. 관리가 잘 되어 있는 길은 아니어서 가끔 가시나무가 옷을 할퀴지만 솔잎이 쌓인 흙길은 로맨틱했다.

“야, 좋은데!” 환성이 절로 나오는 길이다.

오른쪽 발 아래로는 오미자 밭이, 왼쪽은 장안산의 기슭이 이어지는 길. 한 모퉁이에서 산기슭의 돌이 떨어져 내리고 있어 다소 위험해 보이는 구간이 있지만 거기만 빼면 썩 괜찮은 산책로다. 정국장과 약속한 곳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으나 그 길을 끝까지 가보기로 했다.

이 길은 웬 길일까.


3백여 미터를 걷고 시야가 훤히 뚫리는 곳에서 잘 가꾸어진 묘소를 만난다. 이 묘의 후손이 낸 길이었던 것이다. 마을을 관통하는 또 다른 개울의 사방공사를 하기 전에는 이 묘지까지 건너오기 힘들었을 시절, 마을 뒤편 산기슭을 따라 이곳까지 오려고 낸 길.


정국장이 난리 났다. 전화를 걸어와 “약속한 지점에 있지 않고 어디 가 있느냐”는 것이다.

일행 중 한 사람이 차를 전담하여 몰아야 할 때는 이런 일도 생긴다.

골짜기 개울을 건너 축사 옆을 통과하여 다시 묘소길을 걸어 되돌아 왔다.


정 국장에게 ‘보물 발견’의 소식을 전하고 직접 잠깐 걸어보라고 권하다.

이 젊은이는 본인이 걸어보고 그 가치를 인정하지 않으면 걷는 길 노선으로 채택하려 들지 않는 강한 자기주장이 있는데, 그런 정국장도 고개를 끄덕여 수긍하는 코스가 되었다. 다소 우회하는 셈이 되지만 그만큼 놓치기 아까운 좋은 길이었던 것.

다만 축사 옆을 통과해야 하는 것이 좀 어떨까 싶다. 가축의 전염병이라도 도는 계절에는 포기해야 할테지?


다시 마을 뒤 높은 곳에 올라서서 마을 전체를 내려다보았다. 

작고, 숨어있고, 북향한 마을답게 다소 음습하고, 좁은 골마다 사과밭을 가꾸는 등 옹색하나마 열심히 살려는 모습.

비탈진 좁은 곳에 민가가 모여 있고 개울가 낮은 곳은 논밭을 이루고 있다. 

높은 위치의 시멘트 포장 농로를 걸어 다음 마을로 향한다. 농로에서는 왼쪽(서쪽)으로 우리가 지난번에 넘었던 고갯길의 연장인 산(산 이름?)이 가파른 경사를 보이면서 위압적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골짜기.



2. 주촌 - 논개생가 마을.


의암(義巖) 논개의 성은 주(朱)씨였단다. 추측하던 대로 그의 성을 따른 마을이름.

왜란 때 왜장을 껴안은 채 진주 남강에 몸을 던져 저항한 의인 주논개가 이 마을에서 태어나 성장했단다.

물론 정확히 이 마을은 아니다. 원래는 지금의 대곡 저수지로 변한 마을에서 태어났으나 저수지를 만들면서 수몰되자 이곳으로 생가지를 옮겨왔다고 한다. 

장수군은 전 국민이 다 아는 논개의 의로운 행동을 관광 아이템으로 삼을 생각이 강하다. 

이곳을 성지처럼 개발하고 마을이름도 그렇게 짓고, 도로 이름도 의암로·논개로… 등으로 붙여 띄운다.

참고로, 논개의 호가 된 의암은 진주 촉석루 아래 남강 변에 있다.

또, 제도권 역사에서는 ‘의기(義妓) 논개’로 부르며 그를 기녀로 보고 있으나, 이곳에서는 ‘주논개 님’이라 부른다. 적어도 이웃 성곡마을의 전 이장 안옥순씨는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논개마을 아니 주촌은, 깜짝 놀랄 일로서, 돌담이 너무나 잘 쌓여 있는 점이 매우 이채롭다.

비탈에 북향한 마을인데, 지승마을에서 작은 언덕 하나를 넘어 이 마을로 들어서는 순간에 만나는 첫 집부터 그렇다. 마을 안길은 온통 자연석으로 튼튼히 잘 쌓인 축대 겸 담장이 매우 아름답다. 

마치 역사 드라마의 촬영현장에 온 것 같은 타임 슬립. 

푸른 이끼가 낀 돌들이 긴 역사를 자랑하고 그럼에도 조금도 무너지지 않고 잘 버티고 있는 담쌓기 기술이 놀랍다. 게다가, 물론 최근의 집중된 투자의 결과이겠지만, 돌너와와 나무 너와로 인 지붕들도 아름답고 신비롭다.


그런데… 주민을 만나는 일은 거의 없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다.

체험관 겸 마을회관에서 한 분을 만난 것과, 동네 뒤 가장 높은 능선 가까이의 한 집에서 젊은 주부 한 분을 만난 것 외에는. 

이미 오전 열 시 반을 넘긴 시각이니 주민들의 일상활동이 시작되었을 시간인데도 말이다.


관광지로 투자한 흔적은 여러 군데에서 눈에 띈다.

평가하기는 조심스럽지만, 이런 산촌에서는 거대한 현대식 숙박시설이나 고대광실 새로 지은 한옥보다 오히려 깨끗이 정비된 민가를 민박집으로 운영하는 것이 더 실속 있을 뻔했다. 

이 아름다운 돌담집들을 두고 인위적인 시설이 웬말인가.

능선 넘어 이웃한 골짜기는 논개기념공원으로 새로 조성되었다. 흰 돌로 깎아 세운 논개의 입상 뒤로 그의 부친의 묘소가 커다랗게 자리 잡고 있다.



3. “밥 먹을 곳 있습니까?”


점심식사를 할 만한 곳이 있는 거의 유일한 골짜기가 이 대곡리다. 

논개생가 마을 덕분이기도 한데, 장수의 한우고기를 주 메뉴로 하는 식당이 있는가 하면(의외로 비싸지 않다!) 의암로 길 건너편에는 수제맥주와 이딸리아식 파스타류를 제공하는 ‘뜬금없는’ 레스토랑도 있다. 

육회 비빔밥은 이미 맛 본 적 있으니 오늘은 파스타와 핏자로 점심을 먹기로 하여 예약을 해 두었다.


걷는길을 획정하는 작업 중에서 또한 중요한 것이, 출발지점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대중교통편 외에 숙박과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을 찾아내는 일이다.

수도권이나 제주도에는 걷는 길 때문만이 아니라 경치 좋고 찾는 사람이 많은 곳에 으레 식당·카페·숙박업소들이 아쉽지 않게 영업 중이지만, 우리 무진장 오지지역은 그렇지 못하다. 

그렇다고 해서 민간의 투자를 유도하고 싶어도 여행자들이 얼마나 많을지 예측하기는 불가능하기에 섣불리 권장할 수도 없다. 그저 수요에 따라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나기만을 바라고 있을 뿐인 상황.

그래서 ‘진안고원길’은 연례행사인 전체 코스 이어걷기(‘바이고서’라는 이름으로 부른다)를 할 때에 마을회관에 부탁하여 찌개류 음식을 제공 받고 있다. 물론 수고비를 드리면서 말이다. 이런 일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이른바 경제활성화에도 도움이 될텐데 아직은 기여하는 바가 미미하다. 

‘무진장고원길’로 확장해서 판을 키워 시너지를 높여보려는 시도도 그 점에서 비롯되었다.

그런 산골 도보여행 코스에서 이런 식당의 존재는 매우 귀하고 반갑고 고마울 뿐이다.



4. 성곡 - 할머니들이 무진장 친절한 마을.


약속한 점심시간이 될 때까지 한 시간 쯤 저수지 위 마지막 마을인 성곡마을을 둘러보기로 하였다.

이 마을입구 개울을 건너 들어가는 자리에 말굽 모양의 아치문을 세웠으되 '방아실'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 다소 의아하다. 

보통 디딜방아의 다리처럼 물길이나 길이 ㅅ자로 나뉘는(합쳐지는) 곳에 있는 마을을 방아(다리)마을이라 부르는데… 

‘성곡’에도 한자를 쓰지 않아 무슨 뜻인지 알 길이 없다.

초입에 꽤 큰 교회가 자리 잡고 있는데 지역아동센터 역할도 겸하고 있는 듯. ‘아동’이 있기는 한지?


아무튼… 물가에 작은 광장(주차장?)이 있고 그 광장 옆으로 비탈을 오르는 시멘트계단이 이색적이다. 계단이 구불거리며 나선형으로 올라간 자리에 마을회관이 있었다. 알고 보니 이 회관 앞에 마을의 정식 입구라 할 광장(앞 마당?)이 있었다.


마침 만난 한 여성주민(‘할머니’라는 말은 ‘나이를 기준으로 하는 또 하나의 차별’에 속한단다)에게 말을 거는 정 국장.


“길을 보러 다닌다”고 하자 무슨 도로보수공사를 하는 사람들인 줄 아는 모양이다. 

“길 내야 할 곳 있어요?” 내가 농담처럼 말하자, 

“이런 시골에도 길을 해 줘야 할 곳은 해 줘야지.”


오늘도 이 ‘주민에게 말 걸기’에서 많은 정보를 얻게 된다.


이 분이 바로 논개를 ‘주논개 님’이라 부른 안옥순씨. 전 이장이었다고.

몇 마디 오가자 탐사팀 일행을 회관으로 들어와 커피 한 잔 드시라고 청한다. 

‘불감청(不敢請)이언정 고소원(固所願)’이라는 말은 바로 이럴 때 쓴다. 

등산화 끈 풀기를 귀찮아하지 않고 얼른 회관 방으로 들어섰다.


따뜻한 방 안에는 ‘여성주민’들이 열 명쯤이나 모여 있었는데, 거기에 또 한 사람씩 둘씩 속속 회관으로 모여들고 있다. 

쉰 가구쯤 된다고 하니 꽤나 큰 마을이다. 곧 있을 점심시간, 함께 모여 식사를 할 것이란다. 우리더러도 기다렸다가 한 술 뜨고 가라고 하지만, 식당에 이미 예약을 해 둔 것이 실책이었다.


환상의 배합률을 세계만방에 고한 커피 믹스 한 잔씩을 앞에 놓고,

나는 얼른 전화기를 녹음기 모드로 돌려 주민들과 정 국장의 수작을 녹음하기에 나서는데…

잘 아시는 대로, 여성들의 주의를 한 주제로 집중시키는 일은 비상계엄을 선포해도 안 될 정도로 통제가 불가능하다. (이것도 여성 차별적 발언일까? 그럴 의도는 없음을 양해하십시오) 빙 둘러앉은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이 말 하고 저기서 저 말 하고 거의 동시에 발언들을 하니 누구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할지.

그런 시끌벅적한 중에도 여러 정보를 얻게 되었으니…


휠체어 없이는 꼼짝 못한다는 한 주민, 무주 구천동에서 시집왔단다.

“구천동, 어디? 혹시 배뱅이?”라고 훅 들이밀자, 신기하고 희한하게도, 바로 그 배뱅이가 친정동네였다네!

이 여성에게서도 치마재의 원래 이름이 ‘지매재(지매ㅅ재)’였음을 다시 확인.


대곡리 골짜기에 마을이 셋 있는데 가장 높은 데(지승)가 ‘번덕말’, 그 아래 주촌이 원래는 ‘고살(고사리)골’, 또 그 아래가 되는 이 성곡마을은 ‘골말’이라고 했었단다. 

‘고살골’을 이야기할 때 안옥순 전이장은 처음에 ‘골골’로 들리게 발음하다가 내가 재차 물으니 힘들게 ‘궐골’이라 고쳐 발음했다. 그 궐골이 ‘고사리골’이라는 뜻이란다.

“아, 고사리 궐(蕨)!” 그렇게 해석될 때까지 몇 초가 걸렸다.

그렇게 치면 ‘골말’이던 이 동네가 ‘성곡’으로 바뀐 것은 점점 연유를 알기 어렵다.


대곡 저수지로 원래의 주촌마을이 수몰되자 고살골로 이주하여 고살골이 주촌으로 이름이 바뀌었단다. 주촌에 집들이 많은 데다 비교적 깔끔한 것은 그래서인 게다.


논개를 ‘주논개 님’으로 부르는 이유에 대해 안 전이장은 “그런 훌륭한 의거를 해내신 분이니 당연하다”는 것. 

이 분은 그 일(왜란)이 4백 년 전에 있었던 사건이라는 것도 알 뿐 아니라, 장계면의 옛(1914년 이전) 이름이 ‘계내면’이었다는 것도 안다.

그 외에도 여러 말투에서 ‘배운 티’가 많이 났다. 그러니 이장을 “두 번씩이나 연임하고, 잠깐 쉰 후에 또 하고” 그랬지. 그것도, 대충 “십 년도 더 전에”가 아니라 “2004년도부터 4년 동안”이라 딱 부러진다.


무주 검령(劍嶺)을 현지에서는 ‘껌녕(끔녕?)재’라 불렀다고 알려준 것은 휠체어 ‘배뱅이댁’.

구천동 배뱅이에서 안성면으로 넘어오는 고갯길이 있느냐는 물음에 답하면서 “거그는 껌녕재라 그라지”라는 것이었다.


심봤다! 드디어 찾았구나.

걸어 다닐 만했느냐는 물음에는 “길이 아주 넓고 좋았지.”

그런데, “시방은 그 리조트 때문에 없어졌는가도 모르지.”

참으로 엉뚱한 곳에서 무주의 고갯길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 기막힌 행운.


껌녕재를 넘자마자 처음 만나는 안성면의 마을은 어디가 되느냐는 물음에 ‘수랙인가 뭔가 하는 마을’이라고 답한다. 수락마을이다.


며칠 전 우리가 지맷재 넘은 이야기를 하자 “그 배뱅이 지맷재가 몇 고부(고비)인가 하면 열두 고부여.” 그러면서 가사를 붙여 노래 비슷한 것을 부른다.

“지맷재 진 고부(긴 고비), 열두 고부…”

끝까지 불러보라니까 다 잊었다며 손사래다.


다른 고갯길도 좀 물어볼 요량으로 "또 먼 데서 시집오신 분 있느냐"고 물은 즉,

한 사람이 나는 계북 연동에서 왔다고 나선다. 

계북에서 시집올 때는 소비재를 넘어왔느냐는 물음에 “집재로…”라 대답. 

쇠붓재(소비재)를 넘어오면 거리로는 가까울텐데 가마꾼들이 손쉽게 장계면을 경유하는 집재를 선택했던 듯하다. 

“명덕리는 질(길) 난 지 얼마 안 됐어” 라는 연동댁. 

소비재는 ‘쇠비재, 쇠빗재’로 불렀단다. 


‘설 쇠면 90세가 되는’ 머리 하얀 노인은 장계 서변마을에서 시집온 ‘서변댁’. 

전에는 그 마을을 ‘세편(쇠편? 서편?)’이라 했었단다. 

귀도 잘 들리고 말도 또렷하다. 

오래 사시다가 우리가 다시 찾아오거든 밥 한 끼 차려달라고 부탁했다.


워낙 깊은 골짜기여서인지 딴 데서 시집온 사람보다 이 골짜기에서 나고 자라다가 그냥 결혼한 ‘본동댁’도 많다. 그들의 말이 가장 생생하고 정확한 향토사일 것이다.

“대곡 저수지 어귀에 있는 그럴 듯한 솔숲은 ‘꽃산’이라고 불렀다”와 같은 이야기가 그렇다.그런데 주촌에 정작 주씨는 없다고 한다.

안옥순씨가, 계남에 사는 고두영씨라는 이름을 알려 주면서 "그 양반이 글도 많이 쓰고 책도 많이 내고 많은 역사를 알고 있다"고 소개한다. 

계남면소재지인 화음리 한거마을에 산단다. 나중에 만나 뵙고 여러 이야기를 들어야지.



5. 점심 식사 - 산골에서 마시는 도시적인 수제 맥주.


‘브루어리 583’은 분교 아니면 농협 창고 건물이던 곳을 고쳐 지은 듯.

입지는 다소 어울리지 않지만 제공되는 식사는 아주 그럴 듯한 본고장 음식이었다. 

특히 일곱 가지의 맥주는 히트작으로 보인다. 

하지만 과연 장사는 잘 될까?

만약 이 구간을 무진장고원길의 구간으로 정한다면 성곡마을 회관에서 점심을 먹고, 이 식당에서 디저트로 맥주를 마시고… 그러면 좋겠다. 

그 때까지 이 식당, 문 닫지 않기를.

성곡마을은 인구도 많고 할머니들의 심성이 착하고 친절하니 우리가 밥을 해달라면 틀림없이 즐거이 해 줄 것 같다.


세 가지 음식을 시켜 셋이서 적당히 나누어 먹고 점심은 끝. 오랜만에 한 모금 맛 본 벨기에 풍 맥주의 진한 향기에 취했다.



6. 성곡마을 다시 둘러보기.


마을회관 밖에는 본 것이 없어서 다시 마을 안으로 들어가 성곡 뒷길을 답사하기로 했다.

장안산 기슭의 꽤 높은 뒷산길은 올라서서 보니 마을 전체가 내려다보이고, 조망이 아주 좋다. 마치 우리 진안고원길(제2구간)의 마령면 방화마을 뒷산 중턱을 걷는 듯한 느낌. 

낙엽송 숲길에도 감탄, 길옆으로 불쑥불쑥 튀어나온 바윗덩이들에도 감탄, 길가에 어떤 이가 지은 목공예 전시관인 <작은 박물관 가야>에도 감탄…


이 높은 산길에서는 대곡 저수지의 수면이 벌써 가까이에 보이기 시작한다.

툭 튀어나온 산자락들 때문에 길이 가끔 끊기는데 이것은 우리가 연결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대곡리 마을들도 일단 합격. 찻길로 걸어가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얼마나 고마운가.



7. 대곡 저수지 둘레.


장안터널로 가려면 의암로를 자동차로 통과하는데 찻길에서 저수지 건너편 산쪽으로 수상레저 단지가 보인다. 우리는 지금 ‘건너편 산쪽’의 호젓한 길로 다니고 있다.


저수지 둘레에 공원처럼 조성한 놀이기구도 삭아가고, 어차피 제 철이 아니어서 문을 닫은 수상레저 업체의 영업장이며가 다소 을씨년스럽다. 

물가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펜스를 쳐놓아 걷는 구간으로 채택하기도 채택하지 않기도 어정쩡한 곳.

통과.



8. 이제 장계면으로 향한다.


장수읍만큼 번화한 곳, 물동량이 많고 육십령을 넘어 다녔을 ‘제철왕국 가야’의 아이언 로드(Iron Road)의 요충. 침령산성과 봉화산으로 지켜야 했던 소중한 땅. 장계다.


대곡제 둑방 아래를 지나 오동리로 향하는데 대전-통영 고속도로의 육십령터널 입구 옆을 잠깐 지난다.

터널 입구 앞에 ‘경상남도 함양군’이라 쓴 간판에서 과연 무진장지역의 가장 갓쪽 둘레를 걷고 있다는 실감이 더해진다. 이 언저리가 장수군과 전라북도의 동남쪽 끝 경계인 셈이다.


오동리는 이미 협곡을 지난 장계천과 명덕천 등 잔 물길들로 들판이 넓어지고 그 들을 터전 삼아 모여 사는 가구가 많다. 매우 큰 원오동마을.

큰 찻길을 버리고 옛 동네길을 통과하면서, 그러나 산골을 지나온 여행자의 눈에 넓은 들판 마을은 다소 정이 가지 않는다(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감상이오니 오해는 없으시기를).


더 북상(北上), 명덕리에 가까이 오자 여기는 이미 대도시다. 

유명한 명덕리 숲을 바라보며 걷는데 길을 넓히는(곧게 펴는?) 공사가 진행 중이다. 최소한 숲의 나무 몇 그루는 이 공사 때문에 희생되었겠다. 

<명덕수퍼> 앞길로 육십령 고개를 넘어가게 되어 있는데 이 목이 깊게 휘어져 운전자들의 원성을 샀을 것이어서 벌이는 공사이리라.


이 일대는 길 공사가 끝난 다음 그 모양을 다시 보고 노선을 결정하기로 한다.


등산가 장기윤 선생은 눈앞 정면 오른 쪽 어머어마 높은 산줄기를 가리키며 “저것이 할미봉, 저것이 남덕유산, 저것이 서봉…” 일일이 가르쳐 준다. 정 국장 또한 질세라 이야기에 합세한다.


두 사람을 모시고 다닐 수 있는 것은 ‘길치’·‘산치’·‘방향치’인 내게는 정말 행운이다. 

백면서생이자 문인인 나는 산을 보면 그냥 산이고 강을 보면 그냥 강인가보다 했었다. 

무슨 산이며 무슨 강인지 알 길이 있었을까? 

배움에 끝이 없고 죽기 전까지 배워야 한다는 말은 정말 진실이다. 

그리고, “길 위에 스승이 있다.”



9. 명덕리에서 대적골 유적지까지 - 숨가쁜 오르막.


오른쪽(동쪽, 경상도쪽) 육십령길을 버리고 북쪽으로 직진, 명덕리 안길로 접어든다.

여기도 길고 느슨한 물가를 따라 오래된 마을들이 늘어서 있다.


이 길로 들어서는 이유는 또 있는데, 소비재(所非峙) 넘는 길을 보는 것 외에 최근에 발굴된 가야시대의 제철 유적지를 구경하려는 것이다. 이름하여 ‘대적골 제철 유적’.


이번에도 우리 고집 센 정국장은 당연히 찻길(743번 지방도, 소비재로)을 버리고 옛 길을 따라 달린다.


왼쪽으로 긴 명덕천을 끼고 많은 마을들을 지난다.

평지·양지·양삼·동명·지보… 그만큼 많은 마을이 있다는 것은 이 골짜기가 남덕유산 자락의 양지바른 곳이라는 뜻이며 명덕천 물가로 농사지을 땅이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양삼마을을 지나면서부터 길은 갑자기 가팔라진다. 이제 더 이상 명덕리 평야가 아니라 남덕유의 산골로 접어드는 것.


동명마을인지 지보마을인지 분간이 잘 안 되는 한 마을 어귀 버스정류소에서 동네 주민 여성을 만났다. 

잠시 쉴 겸 차를 내렸다. 

장에 다녀오는지 손에 검은 비닐봉지를 들었는데, 일행을 보자마자 이야기 봇물이 터졌다.

또 한 번 옛 정보의 보고를 만난 것이다.


“저기 서봉 꼭대기 보이지? 바로 그 옆에 또 작은 봉우리 꼭대기 보이고… 그 사이에 평평한 곳이 있는데 거기 손바닥 두 개 합한 것보다 좀 작은 샘이 있어.”

그걸 참샘이라 한단다. 그 물이 약수란다. 자기는 그 물 마시러 여러 번 그 꼭대기에 갔다왔단다.

1천5백미터가 넘는 남덕유, 저 가파른 산꼭대기에를?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다.

하지만, “일 년에도 두어서너 번씩 갔다 온다”는 할머니의 위세에 눌려, 또 물을 떠서 마시는 상황을 묘사하는 그 일관성과 사실성 때문에 감히 의심을 제기할 수 없다.

물위에 뜬 먼지나 벌레 같은 것을 손으로 “이렇게 이렇게” 걷어내고 좀 기다렸다가 물이 고이면 떠 마셔야 한다는 것.

그 물이 있기는 있나보다. 지도에도 ‘참샘’과 ‘참샘골’이라는 지명이 실린 걸 보면.

신기하네…


“그런데 우리는 참샘이라고 안 하고 ‘산샘’이라 불러. 산잉께.”

이 동네는 ‘지부천(지보마을을 이렇게 발음했다)’, 소비치는 ‘쇠붓재’…


이곳은 명덕리 숲을 기점으로 3.6킬로미터 떨어진 곳인데 고도차는 무려 1백 미터나 된다.

동명마을과 지보(지부천)마을이 한데 섞여 제법 큰 마을을 이루고 사는데, ‘덕유산관광농원’이라 이름 붙은 옛 학교터처럼 보이는 넓은 공간이 있을 정도다. 

이런 높은 곳에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한 사람들의 탐험 정신에 새삼 경의를.


할머니는 또 느닷없이, 행복하라고 축원하면서 자기는 돈 받지 않고 혼자 ‘수련방’을 지키고 있는 사람이라며, “좋은 말로 사람을 살리고, 사랑의 손길로 만져(touch)주면 병 있는 사람들이 낫기도 하더라”는 이야기를 덧붙인다. 

내게도 어깨 부위를 쓰다듬으며 모든 병이 나을 거라는 덕담을 건넸다. 

힐러인 셈이다.

원래 이 동네 출신인데 열아홉 살에 딴 곳으로 시집갔다가 스물다섯 때 친정동네로 돌아와 산단다. 그래서 이곳의 옛 지명에 해박하다.

역시 높은 산 아래에는 신비한 에너지를 구하는 사람이 모여 드는 것일까.


소비재는 옛 지도들에도 어김없이 소비치로 실려 있는데 나는 이 이름을 의미 없는 한자 즉 이두식 표기라고 믿는다. 현지 사람들이 쇠붓재로 불렀다면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지금부터 또 그 유래를 찾을 일이 숙제다.


할머니와 작별하고, 본격적으로 대적골 유적을 찾아 올라간다. 소비재 오르는 길은 접어 두고.


길은 점점 가팔라지고, 그 경사가 무섭기까지 하다.

새로 넓힌 흙길로 들어선다. 아마도 이 유적을 발굴하면서 최근에 정비한 길일 듯.


지보마을 버스정류장에서 2.3킬로미터 올라간 곳에 넓게 주차장을 조성해 놓은 곳이 나타난다. 주차장 입구에는 가야제철 유적지 안내판과 남덕유 등산로 안내판이 함께 세워져 있는데 모두 새것이다.

아까의 그 마을보다 무려 2백 미터나 고도가 높아져 있었다.

바로 이곳에서 남덕유 서봉으로 오르는 등산로도 시작되고 제철유적지로 가는 길도 이어지고 그러는 모양. 


장기윤 선생은 유적지보다 서봉 오르는 길이 여기에서도 있음을 알게 된 것이 무엇보다 반가운 듯, 다음에는 여기서 올라가 볼 거라고 좋아한다.


안내판에 따르면 발굴된 유적지는 다섯 군데인데 (가)에서 (마)까지의 구역이 각기 용도가 달랐던 모양이다. 가장 높은 곳 (가)구역은 캐낸 철광석을 제련하는 작업장, (나)구역은 작업자들의 주거공간(?), (다)는 가공작업장… 그런 식으로 말이다.


오른쪽으로는 남덕유산의 무시무시한 경사가 위엄을 보이며 우뚝 서 있다.

여기서부터는 차를 두고 걸어서 오른다.

낮이 되면서 기온이 올랐다. 게다가 점심에 한 모금 마신 맥주가 아직도 남아있어 나른한데 이 급경사를 올라야 하다니.


넓힌 산길과 새로 내는 ‘탐방로’에는 길 양옆으로 새로운 묘목을 심는 등 조경공사도 하고 있는데, 묘목은 자작나무였다. 

오른쪽 산의 급경사면 넓은 구역에도 묘목을 묶은 지지대들이 바늘처럼 빽빽이 돋아 있다. 

모두 자작나무일까? 성목이 되면 하얀 자작나무 숲이 멋지겠다.


한참을 숨가쁘게 오른 끝에 주거구역에 도착.

꽤 넓은 면적의 평지에 건물들이 서있었을 터를 발굴하는 중이었다. 캐낸 기와조각과 ‘가야토기’의 파편들이 한 옆에 쌓여 있어 주거구역이었음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참 희한하게도, 이 골짜기에 지부천(지보천?)이라는 개울이 흐르고 있어 공업용수로만이 아니라 작업자들의 식수 등 생활용수로 쓰이기에도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물은 암반수, 수량은 풍부.

이 겨울에도 이렇게나 풍부한 물이 쏟아져 내리고 있다니.

설마 이 계류수가 참샘에서 발원한 물일까?


그리고, 이 높고 깊고 험한 산에서 철광석이 난다는 것을 옛사람들은 어찌 알았을까?


조금 더 올라가니 제련작업 공간이다. 

개울을 건너 들어가게 되어 있는데 징검다리에서부터 이미 쇠를 녹여낸 후의 찌꺼기(슬러지)가 땅바닥에 쌓여 있다.

중공업과 관련된 일을 했던 장기윤 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오늘날의 제철작업 현장에도 꼭 이와 같은 검붉은 찌꺼기를 걷어낸 산더미가 있다고 한다.

그런 제철기술을 2천 년 전의 가야인들은 이미 알고 구사했던 것이다.


잠시 말을 잊고 타임 슬립에 빠져 든다.


당시로서는 가장 앞선 하이테크 산업이었을 제철산업. 

세상에서 처음 보는 단단하고 무거운 신소재 가공물을 의기양양하게 쇠달구지에 싣고 육십령 고개를 넘어 함양으로, 경상도 가야 땅으로, 왜(倭)로... 교역에 나섰을 사람들. 

철가공물 값으로 받은 후한 대가를 쇠달구지에 묵직하게 싣고 다시 육십령을 넘어 돌아왔을 것이다. 

이른바 ‘철(鐵)의 길, 아이언 로드’다.

장수가야는 철광산과 제철기술 덕분에 얼마나 풍요로운 삶을 누렸던 것일까.


더 이상 다른 발굴현장은 가보지 않기로 하고 오늘의 탐사를 마무리하기로 했다.



9. 마무리.


참샘길(서봉 오르는 길)에서 소비재길(743번 지방도)로 붙는 임도를 최근에 더 연장하여 개설했다.

새로 포장된 하얀 시멘트길이 햇살을 눈부시게 반사하고 있다. 그 길로 차를 달려서…

계북면으로 넘어 왔다.

재를 넘어서자마자 만나는 연동마을과 농소마을은 연이어져 있고 가호 수가 많다.


지금 지나온 길은 조금 더 기다리면 제철유적 때문에라도 길이 더 만들어질 것이다. 

뿐 아니라 ‘탐방로’라는 이름으로 기존의 등산로와는 분위기가 다른 길을 조성하고 있기도 하다.

그 때 가서 어느 경로를 택할지 결정하면 되겠다.

제철유적을 들르도록 구성하기에는 너무 높은 곳이어서 트레일이라고 부르기에 지나친 측면은 있다.


어쨌든 탐사팀으로서는 초벌 탐사과정에서 할 만한 일은 거의 한 셈이며, 또 이로써 장수 구간의 탐사작업도 어느 정도 마무리되어 가는 셈이기도 하다.

물론 산서·번암 등 남부지역을 아우르는 코스로 넓힐지 여부와 함께, 더욱 세밀한 조정작업이 앞으로도 남아 있지만.


(최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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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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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사니조아 | 작성시간 19.12.11 지난달 윤정이와 주논개 생가와 마을을 한바퀴 돌아본 기억이 떠오릅니다.^^* 댓글 첨부 이미지 이미지 확대
  • 작성자명헌 | 작성시간 20.02.10 장수구간 답사하실 때 동행하고 싶습니다.
    장수에 귀촌해서 옛길 복원에 관심이 많습니다.
    현재 전북대에서 고고학 공부하고 있습니다.
  • 작성자명헌 | 작성시간 20.02.10 참샘은 진주 남강의 발원지입니다.
    명덕리 대적골, 이름이 비슷한 곳들이 진안에도 있더라고요, 진안은 청자도요지로 최근 발굴되서 청자의 또가른 본거지로 추정되는데 오랜시간 전부터 장수와 진안 토기제작이 많았던 곳 같습니다.
    왜 그러냐면 고대 제철기술과 토기제작 가마기법이 비슷합니다.
    진안에서 장수 천천으로 넘어오는 방곡재를 넘기전 동구점이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이 마을도 옛날에는 토기를 구웠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옆 뜰 이름이 대접골이더군요, 대접..
    명덕리 대적골은 제가 외지인들을 종종 가이드 했었습니다. 대적골에서 올라가는 남더유산 서봉길이 1시간만에 오를 수 있는 거칠고 제일 빠른 등산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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