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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장고원길

무주 구간 탐사, 여섯 번째.

작성자최태영|작성시간20.01.12|조회수384 목록 댓글 2





2020년 1월 10일, 금요일, 맑음. 

오늘은 남대천 따라 상류를 향하는 길을 비교적 세밀하게 걷는 탐사활동이다
.

첫 탐사 때 무주의 안상기·나승인·허동일 세 분과 진안의 박희우·최태영 그렇게 다섯 명이 자동차를 나눠 타고 둑길을 달리면서 대강 보았을 뿐이므로오늘은 오산리를 출발점으로 하여 남대천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탐사하기로 했다.

세밀하게라고는 하지만 노선 확정까지는 아직 여러 번 더 발품을 팔아야 한다오늘 탐사는 일단 초벌구이 정도의 수준이라 해두자.

 

향로산등산로 남쪽 출발점에 잠깐 들른다.

첫 탐사 때 함께 하지 못한 정병귀 국장이 나중에 혼자 앞섬~징검다리(금강)~북고사를 거쳐 이 지점까지의 구간은 걸어보았다(2019년 12월 4일)고 했다.


향로산 능선을 타고 오산삼거리의 동쪽 출발점(주차장)’까지 걸어가면 좋겠다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버스터미널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하므로 읍내를 통과해야 한다

향로산 능선길에서 남대천과 무주읍내가 잘 보이는 조망이 아깝기는 하지만 등산로 구간은 북고사에서 자르고 이곳 남쪽 포인트로 내려와야 할 것 같다

이런 지점이 길 설계자의 고민인 셈이다.

(‘향로봉·향로산’ 등으로 어지러이 쓰이는 이름은 향로산이 옳은 것으로 판단하여 그렇게 부르기로 합니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글의 진도가 잘 나가지 않는다.

탐사팀의 움직임을 그대로 서술할지남대천 따라 나타나는 마을·경관만을 순서대로 기술할지 스스로도 혼란스럽기 때문.
탐사팀은 같은 길을 여러 번 왕복하면서 이쪽으로도 들어가 보고 저쪽으로도 걸어본다때로는 반대쪽에서 역방향으로 걸어보기도 한다그 모든 동선을 묘사하면 글도 길어질 뿐 아니라 읽는 이도 혼란스러울 것이다.

그렇다고 진행방향 순서대로만 묘사하면 글은 단순해지겠지만 탐사활동의 실상이 가려지고 어떤 점을 고려 또는 고민했는지가 나타나지 않는다.

어떻게 하지?

 

오산마을.

 

차를 몰고 오산마을로 들어섰다고 쓰면 그뿐이다. 
하지만오산마을까지 오는 경로를 모두 밝혀 쓴다면 다음과 같아진다.

 

무주읍내를 통과하여 남대천의 남쪽 둑길(첫 탐사 때는 북쪽 둑길)을 타고 상류를 향해 차를 몰았다

도중에 유속마을을 경유해야 해서 길게(7백여 미터남쪽으로 들어갔다가 다리(유속교)를 건너 되돌아 나왔다상곡천과 합류하는 지점을 건너는 다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 지점은 합수하는 곳이어서 강폭이 넓고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기도 하여 도보로는 모래톱을 밟으며 건너는 것이 가능할 수도 있으나물이 불어 모래톱이 잠기면 유속교를 건너 우회해야 한다

이런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남쪽 둑길을 택하는 것은들판이 펼쳐져 있고 그늘이 없는 북쪽 둑길을 걷고 싶지 않아서다.


오산마을이 건너다보이는 둑길 옆에 차를 세우고 보()뚝을 내려다보니, 아뿔싸연 사흘을 내린 사상초유의 겨울장마에 물이 불어 봇물이 넘쳐흐르고 있다이 보 위를 걸어 건너갈 예정이던 것이

강수량이 훨씬 더 많은 여름철에는 이 보는 거의 항상 물에 잠겨 있을 것이므로 이 방법은 포기해야 한다. ‘오산농교를 제대로 건너 마을로 들어가는 방법밖에 없겠다.


내친 김에 남쪽 둑길을 북동쪽으로 820여 미터 더 달려 또 하나의 보가 있는 곳까지 왔다.

이 보를 건너가는 방법도 있을 것 같아서다그런데 이 보에도 물이 넘치고 있어 건너기에는 위험하다.


보 부근에는 낚시 하는 사람들의 방석이며 도구들이 다소 어지럽게 널려 있어 이곳이 낚시 포스트임을 알게 한다둑길은 여기에서 일단 끊기는데 절벽으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여기서 여행자는 더 전진하지 못한다.



만약 절벽과 물길을 따라 데크나 부교(浮橋)를 설치한다면더 돈을 많이 써서 절벽 위 숲 사이를 통과하는 벼룻길을 낸다면? 420미터 남짓곡선임을 감안해도 약 5백 미터의 로맨틱한 길이 만들어져 장백교 다리로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까지 보고, 8백 미터를 되돌아와 오산농교를 건너 마을로 들어갔다.

 


이렇게 길게 쓰면 읽는 이가 지루해 할까아니면 탐사과정과 설계착안점을 잘 알 수 있어 좋다고 할까

바로 그 고민이 글 쓰는 진도를 더디게 한 것이다.

어차피 필자의 자유일 것이므로이 후기는 탐사과정의 역사기록이기도 하다는 점을 감안하여 지금까지처럼 장황하고 꼼꼼하게’ 쓰는 방식을 택하기로 하였다

나 자신도 기억력이 빠르게 쇠퇴해 가므로 당시에 어떤 생각으로 그런 행위를 했는지 나중에 참고하기 위한 기억보조장치를 따로 둔다는 셈으로 말이다.

 



오산마을은 오산리의 이름을 있게 한 으뜸가는 큰 마을이다

吾山이라 쓴 것이 특이하다. ‘내 산이라니

혹시 오동나무 로 써야 할 곳에 잘못 쓴 것은 아닐까

한자가 어렵기는 하다하지만 지명 한자를 깊이 생각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써서는 안 되는 이유가여기에 있다.

 

북쪽 산에서 흘러내리는 작은 하천이 통과하여 남대천과 합류하고 있어 마을입구는 두 개의 다리로 나루터 마을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오산농교 끝 오른쪽에 보이는 집은 원래 가파른 절벽 아래 수면 가까이에 있었는데 다리를 놓으면서 다릿발 높이와 같게 해 주려고 축대를 쌓아 높이고 다시 지었다고 한다

어쩌면 이 집이 옛 도선장이거나 주막집이거나… 하지 않았을까.


천변을 따라 늙은 느티나무들이 줄지어 선 가운데특이한 구조의 마을회관이 바로 다리 왼쪽 끝에 있었다한옥이되 규모는 상당히 크고앞으로 빠져나온 포치(porch)부분은 일본식 가옥의 양식을 본뜬 듯포치에 오산청년회와 오산 할머니 경로당의 간판이 함께 붙어 있다.

회관 건물 옆으로는 긴 가스통을 나무에 매달아 놓았는데 긴급한 상황을 알릴 때 두드리는 종()으로 쓰는지?


다리 끝에 차를 세우고 옛 주막집(?)에 들러 보았다집 뒤에 우뚝 솟은 절벽에 가까운 산을 넘거나 능선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는지 물어보기 위해서다북쪽 둑길을 걸으려면 이 구간을 클리어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전에그러니까 이 집이 수면 가까이 낮은 곳에 있을 때는 물길 따라 길이 있었지만 보가 생기고 다리가 생기면서 물이 깊어진 후로는 그 길이 없어졌다고.

차라리 마을 가운데를 관통하는 찻길로 해서 용고개를 넘어가라고 권한다

그런데 그 길은 30번 국도로서 차량 통행이 많아 위험하다

또 하나의 고민거리가 생긴 셈이다.

그 '용고개'까지 가보니 과연 예전의 물가에서 연결되어 올라오던 길의 흔적이 조금 남아 있고, 30번 국도를 건너 왕정마을 방향으로 가던 길의 흔적도 남아 있다

왕정마을로 통하는 차도도 새로 생겼다

도로의 개설로 옛 고갯마루 사거리가 무의미해진 현장을 보고 있는 것.

 

이 루트는 고민을 더 해봐야 한다

사실 거리가 그리 길지는 않으므로(오산농교~용고개 사이 약 5백 미터잠깐만 국도변을 걷다가 용고개에서 국도를 피해 한 발 내려서서 걷든지 하면 얼마 걷지 않아 북쪽 둑길을 만나게 되기는 할 것이다.

아직 결정하기 어렵다사유지라면 허락을 받아야 하고길이 없다면 좁은 통로라도 만들어야 할 것이고

오산마을~하장백 사이는 우선 그렇게 보았다.

 

마을 안 구경을 잠깐 하기로 했다.

물을 앞에 두고 뒤는 산으로 막힌 입지이니 배산임수가 따로 없다다리 건너 퇴적면에는 넓은 농토도 있으니 마을은 번영했었을 것이 틀림없다

다만 30번 국도가 마을을 두 조각으로 나누어 놓은 것은 보기에 안 됐다.

 

오산농교.

농교는 농다리[다리]의 한자표기일 것이다

농다리의 어원에 대해서는 오랜 기간 궁리해 왔는데내 생각은 섶다리(떼다리)로 발전하기 이전의돌을 놓아 만든」 징검다리 즉 놓은다리가 어원이다유명한 충북 진천의 농다리도 큰 돌로 놓은 징검다리다.

농사를 위해 건너다니는 다리라고 풀이하는 사람도 있지만 농사가 목적이 아니고 다만 건너다니기만 하는 다리가 따로 있을 리 없으므로 이 해석에는 그다지 동의하기 어렵다

놓은·을 이두식 한자로 쓴 것이 이었던 것

籠橋를 한자의 뜻으로만 해석하면 바구니 다리가 되는데 이는 통하지 않는 해석이다

우리말의 관행에 다리를 설치하는 행위를 다리를 놓는다고 하는 것도 여기에 유래한다

우리말과 매우 비슷한 일본어조차 다리를 건다[かける]’고 논리적으로 표현하는 것과는 대단히 비교되는고집 센 고유어인 셈이다.

 

날씨는 오랜만에 맑아 하늘이 새파랗다.

하지만 쨍한 공기에 손이 얼어붙듯이 시리고 곱다아무리 이상난동이 계속되는 요즘이라지만 그래도 무진장의 겨울을 너무 가볍게 보았는가오늘은 옷을 가볍게 입고 모자도 쓰지 않은 것이 다소 후회된다.

 

오산마을~하장백마을.

 

다시 차를 타고이번에는 정말로 30번 국도를 타고 용고개를 넘어 하장백으로 이동한다.

이 국도가 진안에서는 진무로이던 것이 여기서는 무설로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 재미있다.

이번에도 마을로 바로 들어가는 대신 장백교를 건너 다시 남쪽 둑길로 넘어왔다.

아까 보았던 오산마을 앞 두 번째 보에서 절벽 사이’ 루트의 끝자락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고요한 물에 절벽이 비쳐 그림 같이 아름답다.



정말 이 루트는 버리기 아까워서 수면 가까운 높이에 데크를 놓든지 벼룻길을 만들든지 해서 걷는 길로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점점 강해진다

걷는길 사업에 있어 하드웨어 예산은 바로 이런 데에 쓰는 것일 것이다

다만다시 강조하거니와 과하지 않게’.

 

옛 장백교.

차도가 통과하는 장백교 옆에 예전 다리 장백교가 아직 남아 있다그것도 매우 관리가 잘 된 상태로.

1935년작일본강점기의 것이라고 준공연도를 일본의 연호 대신 단기 4268으로 고쳐 새긴 것이 확연한데머릿돌이 매우 크고 온전한 것이 반갑다

작년(2019) 여름전북 평야지역을 순회할 때 수많은 일본강점기의 다리가 썩어가거나 머릿돌이 파손되거나 없어져 버린 것을 목도해 온 필자의 눈에 대단히 신선해 보인다

다리의 폭도 넓고나지막한 시멘트 난간도 거의 말짱하며 튼튼한 교각도 아직 건재하다

다만 다리 위에 정체불명의 비닐막을 친 철재구조물이 방치되어 있는 것은 다소 볼썽사납다.

 


그 외에도 국도 다리가 또 있었던 듯머릿돌만 남은 다리의 흔적이 보였다.

이 다리 언저리 물가는 꽤 넓은 자갈밭이 펼쳐져 있어 많은 사람들이 여름철 물놀이와 천렵 따위를 즐기는 곳인 줄 알겠고, ‘비지정관광지라는 표지도 서 있다.

이곳뿐이랴바닷물 빛깔에 가까운 물이 처연하리만큼 맑은 남대천의 어느 곳인들 관광지가 아니겠는가.



 

하장백마을.

 

마을은 개울을 따라 길게 발달한햇살을 담뿍 받는 시가지다

폭넓은 남대천을 앞에 두고 뒤로는 역시 긴 능선을 가진 산이 막아주고 있는 배산임수.

세대수도 많아서 예전에는 분교가 있었다

마침 만난 동네 주민 두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젊은 쪽 주민은 4학년까지 이곳 분교에 다녔다고 한다지금은 정문 기둥 한 쪽과 두 칸짜리 교사와 관리인 숙소로 쓰던 건물로만 남았다

넓은 운동장 터가 한 시절 학동이 많았음을 알게 한다동네 체육대회도 이 마당에서 했다고 하니

왕정리나 여의리로 통하는 옛 산길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제대로 답하지 않고 큰 길(차도)로 다닐 것을 추천하는데뒤를 막은 산이 가팔라서 그런가보다 생각한다.

한가하게 걸어 마을을 이곳저곳 구경하고.

 


옛이름은 장박(長泊). 옛지도에 장박주막촌이 올라 있는데 그곳이 이 하장박인지 더 상류의 상장박인지는 확실치 않다하지만하장박 아래(남쪽퇴적평야를 원이들이라 부르는 것을 보면 원()이 있던 마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므로아마도 이곳 하장박이 주막촌이 아니었을까?

 

하장백~여우재길 입구벼룻길 발견.

 

마침 또 다른 주민 한 사람을 만난 것이 행운이었다.

하장백에서 여의치[狐峙여우재가는 옛길이 있느냐고 물은 즉, “있다고 확고하게 대답한다또 다른 다리즉 하장백마을의 북쪽 입구가 되는 다리를 지나 시멘트 포장한 길로 쭉 가면 물가를 따라 옛길이 있단다. “예전 어른들 말씀에영동 학산 우시장에 소 팔러 다녔다더라는 것. ‘본인은 70세를 갓 넘긴 세대로 그런 경험을 직접 하지는 않았으나라는 단서를 달았다.

 

가보자.

북쪽 다리 아래도 놀이터다비교적 넓은 물가 공터에 늙은 몇 그루 소나무가 자태를 뽐내고 있고 그 옆으로 물을 따라 시멘트 길이 이어진다.



이쯤 되면 길이 있을 거라는 믿음이 확실해진다.

넓은 길은 이윽고 좁은 산길로 바뀌고그래도 이어지기는 한다.

매우 좁다이 길로 소를 몰고 다녔다고황소가 다니기에는 너무 좁아 보이지만 그건 인간의 생각이고 짐승들은 또 알아서 다니는 재주가 있겠지한다뒷다리가 제대로 제자리에 놓이는지 일일이 뒤돌아보지 않고도 잘 걷지 않는가.



어쨌든 길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좁았다가 다시 넓어졌다가 해가면서오른쪽으로는 낭떠러지시퍼런 남대천의 맑은 물이 콸콸거리며 여울져 세차게 흘러간다.

이 길이야말로 대박’.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면 이런 길 있는 줄을 어떻게 알았으랴.

오래 쓰이지 않아 얼굴을 할퀴는 가시나무도 발목을 붙잡는 칡덩굴도 모두 성가셨지만 한 껀 했다는 기쁨에 따가운 줄도 모르고 걷는다양지바른 비탈이어서 며칠 내린 비도 다 마르고 걷기에 아주 좋다가랑잎이 푹푹 쌓여 있어 그 아래 숨은 돌멩이들이 다소 신경 쓰이는 것 뿐.

약 1킬로미터 정도의 벼룻길이 끝나는 지점에 지구별여행 펜션이 기다리고 있었다.

여우재 고갯길 입구에 다다른 것이다.

과연소 팔러 학산장에 가려면 지금 지나온 길을 따라 이곳에 와서 북쪽으로 여우재를 넘어 갔겠다그리고 그 장꾼들이 고개를 넘기 전에 또는 소 팔고 넘어와서장박주막촌에서 한 잔씩 걸치곤 했겠다.


 

⑤ 점심.

 

정병귀 국장은 왔던 길을 되짚어 차를 가지러 돌아가고나는 혼자 여우재길을 걸어 오를 생각으로 걷기 시작.

어느 정도까지는 아스팔트로 포장이 되어 있는데 이는 아마도 이 부근에 몇 채 있는 펜션 사업자들을 위한 행정서비스인 듯.

그런데 몇 걸음 걷지 않아 이제 그만 올라가고 상장백마을로 돌아 나오라는 연락이 들어온다정 국장이다점심시간이니 고난의 행군을 잠시 멈추고 먹고 살기에 집중하자는 것이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나아침 아홉시부터 탐사를 시작해서 진도를 얼마 뽑지도 못했는데. ‘식사시간 지각금지라는 인생원칙에 따라 열심히 빠른 속도로 걸어 약속의 장소로 향한다도중에 여의리 마을 입구를 지나면서 사진 한 컷 남기고.

 


상장백마을 입구 버스 정류소.

대스리(다슬기)를 마스코트로 삼은 마을 표지석이 인상적이다이 마을은 하장백만큼 크지만 북향한 입지여서 다소 을씨년하다사진을 찍으면 역광이어서 희부연하고 어둡게 찍힐 뿐.

정국장의 차를 만나 함께 타고 식사장소로 향한다.




 

점심은 오산마을 남쪽 끝 <오무 기사식당>에서 먹으려다가 차가 많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더 달려 <도성 한식레스토랑>으로 갔다.

식당 건너편에는 크고 넓은 낡은 시설이 보이는데 옛 농협 창고이던 곳을 아이들의 전쟁놀이 등 레저로 쓰고 있는 듯.

농가점심이라는 메뉴를 시켰더니 돼지목살 불고기와 된장찌개농가에서나 볼 수 있는 나물 반찬으로 눈이 즐겁다멋모르고 푹한 숟가락 떠먹고는 매워서 심하게 기침을 했지만.

 

오전에 한 껀’ 한 즐거움이 밥맛도 좋게 한다.

식탁에 앉은 채 <장수투데이신문사에 연락무진장고원길 포럼을 3차까지 마친 상황을 시민들에게 보고할 겸 내용을 정리한 기고문을 아침에 보내놓았으니 꼭 좀 실어달라는 취지다.

<무주신문>에도 아침에 보내놓았는데 실어줄지?

 

식당 한 옆에 화강-편마암을 갈아 만든 수석(壽石장식품이 서 있었다이른바 표범무늬 돌이 돌이 왕정마을 뒷산에 매장되어 있단다지질공원해설사이기도 한 정국장의 귀띔이다.

 

점심 끝내고 다시 탐사에 돌입.

 

왕정마을 천연기념물 공원과 마을숲.

 

오산마을로 되돌아와 왕정마을로 향하는 갈림길로 들어섰다.

이 마을은 여의산에서 흘러내리는 개울을 따라 형성된 마을인데개울이 마을을 동서로 나누면서 길게 흘러 오산마을 앞에서 남대천에 합류한다.

이곳은 무진장고원길의 루트에 넣기에는 다소 벗어나 있는데 굳이 들르는 이유는 <무주진안 국가지질공원>이 지정되게 한 이유의 하나인 천연기념물 지질명소가 있기 때문이다화강암과 편마암이 섞여 한 덩어리로 굳은 변성암 지층이 발견되는 곳이다.

하천을 따라 한참 올라가서 오른 쪽으로 가지를 친 길로 바꿔 타고 조금 더 올라가니 안내표지판이 서 있다. (참고로, ‘한참과 조금 더는 알아서’ 해석하면 된다.)

실개천을 건너 가파른 경사의 계단을 한참’ 올라가야 하는 것이 보였다.

어두운 북동향의 경사계단은 상고대로 미끄럽고 이끼류가 잔뜩 끼어 있어 발밑을 조심해야 했다.

이윽고 나타난 현장다소 실망스러울 정도로 작은 규모의 현장이었다하지만 드러난 부분만이 그렇다는 것이고 땅을 파보면 그런 암석이 지천으로 드러난다는 뜻일 게다둥글둥글 타조알 같은 타원형의 까만 편마암이 회백색 화강암 속에 파묻혀 강한 압력으로 한 몸이 되었다이것을 잘라 표면을 갈아내면 매끈거리는 표범무늬 돌로 거듭 태어나는가.

철책이 둘러진 공원 내부를 잠시 직접 들어가 살펴본다.

지구의 생명활동그 불가해한 힘이 빚어낸 걸작이곳 뿐이겠는가마는.

 


왔던 길을 되짚어 내려가면서 왕정마을을 벗어나는데마을 한 가운데 쯤에서 거대한 숲을 만났다서어나무의 숲인데 규모도 대단하거니와 나무들의 나이도 한~참 들었다숲이 개울을 둘러싼 형태도 그렇고 규모도 그렇고 진안 주천면의 안정동 마을숲을 방불케 한다당산목에 해당하는 360살 거대한 느티나무를 돌탑(?)으로 둘러쌌는데 흔히 그 위에 있는 선돌이나 거북 따위의 모뉴멘트는 서 있지 않았다.

이 대단한 자원을 지금까지 잘 보존해 온 마을사람들에게 감사와 존경을.

 


여의치 갔다 오기.

 

무설로(국도 30)를 타고 용고개를 넘어 상장백마을을 지나 여의교를 건너 여의리 마을까지 한 달음에 달려왔다오늘 하루에 용고개를 몇 번 넘는지.

 

여의리는 멋진 이름만큼 마을이 크지는 않았다어차피 여우재마을에서 미화한 이름이겠지만.

 

여의리를 얼른 벗어나 지구별여행 펜션’ 앞을 지나 북쪽으로 쭉 뻗은 여우재(여의치)길을 올랐다아까 점심 전에 혼자 걸어 오르려던 길이다.

아스팔트 포장 구간은 잠깐 뿐이고 금방 흙길이 나타난다며칠간의 비에 쓸려서 흙이 패인 곳이 꽤 있었고의외로 차량 통행이 많은지 바퀴 자국이 울퉁불퉁 깊게 나 있었다.

 

예상하건대고갯마루에서 반대쪽으로 내려가는 길이 더 길고 하강고도(下降高度)도 더 높을 것이다이곳은 무진장고원이니까!

예상대로 얼마 오르지 않아 고개 정상을 만난다키 큰 나무가 몇 그루 보일 뿐 서낭이라든지 이렇다 할 잿마루의 상징은 없었다.

약간 실망. “(어느 왕?)이 지났던 길이라 왕도라고도 불렀다는 길이



(여우재 정상에서 뒤돌아보고 찍은 민주지산)


학산 쪽으로 내려가는 길을 타고 덜컹거리면서 얼마간 달려 여의산 저수지에 다다른다둑에 올라서서 북쪽을 바라보니 역시 한참 낮고 한참 먼 곳에 학산면 소재지가 내려다보였다.

저수지는 물은 다 빼버리고 없었다.

 

(여의산저수지 둑 바로 아래 있는 마을.)


(방금 넘어온 여우재 고개-가운데 옴폭 파인 곳. 여의산저수지 둑에서 뒤돌아보고 찍음.)


충청도로 넘어갈 일은 없기에 차를 돌려 다시 전라도 땅 무주로 돌아온다.

이번에는 길산리를 향하고 더욱 상류 기곡마을을 향해 달린다.

 

⑧ 걷는길어때야 하나.

 

금강과 남대천 같은 하천의 심한 감입곡류 현상은 만학천봉’ 때문이다낮은 곳을 찾아 흐르는 물의 특성상 산이 막고 있으면 그를 피하여 돌아서 흐르므로 천회하는 것은 당연하다옛지도에 무주부의 자연을 일러 한 마디로 만학천봉 산옹천회(萬壑千峰 山擁川廻수많은 골짜기와 봉우리산은 둘러싸고 물은 감돌아 흐른다)라 표현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그런 만큼 풍치는 뛰어나다.

 

그런데 걷는길을 설계하는 입장에서는 무작정 천변만을 따라 걷게 할 수 없다때로는 절벽으로 길이 막힌 구간도 있고걸을 수 있다 하더라도 그늘이 없는 뙤약볕 둑길을 마냥 걷게 할 수도 없다.

따라서따분해지기 십상인 코스가 바로 들판길이나 하천변길일 수 있다짤막짤막한 구간이나마 변화를 주려고 벼룻길고갯길마을길산길을 찾아내려 애쓰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 노력을 하지 않고 단순하게일률적으로포장된 시멘트 둑길을 걷는길로 지정하는 것은 무성의한 설계로서 결국에는 아무도 찾지 않는 길로 전락하고 만다.

 

기곡마을.

 

기곡마을 조금 못미처에 나타나는북쪽에서 툭 튀어나와 반도(半島)’를 이루는 350미터급 산


그 산의 목 부분을 질러 넘어가려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마침 지도에 바로 그 목 부분의 고갯길로 연결되는 곳에 보가 있어 그 보를 건너 고갯길(논골재)로 이어질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현장에 가서 본 즉국도 30번에서 보()로 내려서는 방법이 보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물이 보를 넘쳐흐르고 있었다!

실망.

 

정국장과 내가 또 한 번 온갖 상상력을 동원하여 그 보를 건너는 아이디어를 짜내 보지만 뾰족한 수가 나오지 않는다많은 걷기 여행자들이 줄줄이 국도의 가드레일을 타넘어 불법적으로’ 보를 건너는 모습을 상상해 보면 설계자로서 당당히 할 일은 못되는 것이다.

(보의 이름은 어디를 보아야 나오는지모든 보의 현장에 고유명사를 붙이지 않아 이럴 때 참 표현하기 어렵다.)

 

일단 기곡농교를 건너 마을 건너 편 북쪽 둑길로 넘어가서 그 낮은 고개(논골재)를 넘어 보의 반대쪽 끝에 가보았다.

역시 건너올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가드레일은 어찌어찌 타넘고 내려온다 하더라도물이 보를 넘쳐흐를 정도로 많으면 미끄러워서 위험하다.

수위를 높이는 토사와 퇴적물을 손으로 건져 하류 쪽으로 던져 버리면 어느 정도는 낮아지려나?

아니면… 보 위에 2층으로 또 하나의 길을 만들어 덮어씌우는 것?

그것도 안 되면 솔로 물때를 닦아내고 신발 벗고 잘박잘박 건너기?

별별 생각을 다 해낸다.

결론은 유보하고다음 행정(行程)으로 넘어간다.




(아래 : 논골재)

 (이 봇둑을 건너기는 쉽지 않겠다.)



⑩ 수로와 관리도로 발견.

 

공격사면이 있으면 퇴적사면이 있는 것이 감입곡류하는 사행천 유역의 특징이다논골재를 다시 넘어오면 당연히 논골이 나타나는데 꽤 넓은 퇴적평야가 펼쳐져 있다농경지가 시작되는 지점에서 길이 두 갈래로 나뉘는데 한 갈래는 북쪽 산 아래를또 한 가닥은 남쪽 천변을 각각 휘돌게 되어 있다.

차를 남쪽 길목에 세워두고 위쪽 길을 걷는다.




얼마 걷지 않아 경치가 빼어난 암벽 아래 효열비각이 있는 곳에 다다른다.

밀양 박씨 가문의 효자·열녀 다섯 명의 정려를 한꺼번에 모신 곳이다마을 안도 아니고 보는 이도 없는 산 아래 밭 어귀에 이런 것을 세운 의도가 무엇일까.

정려각은 최근에 칠을 다시 하는 등 보수를 했는데고종(高宗)대 조정에서 내려 보낸 정려의 글씨가 훌륭하여 사진을 모두 찍었다앞으로는 이런 수준 높은 글씨를 보기 힘들 것이어서다.

 

이번에는 방죽재라는 더 얕은 재를 넘어 방죽(수로?)이 끝나는 지점에 다다른다물가를 따라 상류에서 내려온 농업용수로가 여기서 끝나고 있는 것.




폭 50센티미터 가량의 수로다.

그런데 수로 옆으로 길도 나 있다!

길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이것도 심봤다!”에 해당한다.

아까 오전에 발견한 하장백~여우재입구 사이 좁은 벼룻길을 1의 심이라 한다면 이번 것은 두 번째 산삼인 셈이다하루에 심을 두 개나 찾아내다니.

처음에는 수로 위를 보폭에 맞춘 뚜껑을 쭉 덮어서 그 위를 걷게 할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그럴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게다가 이번 길은 폭도 훨씬 넓고 높낮이도 거의 없어 걷기에 아주 편하다물론 잡초 제거는 해야겠지만.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그런데 이 길은 왜 있는 것일까최근까지도 사람이 다닌 흔적이 있다고사리 따위 산나물을 얻으려고 다녔을까?

최초에는 농수로를 관리하는 용도로 만들었을 것 같으나이제 수로에 물은 흐르지 않고 말라 있으니 길도 따라서 용도폐기 된 셈이다수로에는 며칠 연이어 내린 빗물이 조금 고인 정도의 물만 있을 뿐상류에서 물을 제대로 보내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9백 미터 가량의 벼룻길(이랄까물갓길)이 끝나고 다시 보를 만난다.

이 봇둑도 처음에 지었을 때보다 넓혀 다시 지은 흔적이 있다하지만 이제 농사짓는 인구가 줄고보와 수로에 의존하던 농사기술도 자가(自家)양수기와 물탱크 따위로 진화한 만큼 관개수로의 용도는 급격히 퇴화한 것이다.



 

보를 깡충깡충 뛰어 건너 다시 남쪽 둑길로 올라섰다.

여기서 정국장과 내가 다시 헤어진다지금 지나온 길을 되짚어 돌아가서 차를 가지고 오려는 것이다나더러는 신길마을에 가서 기다리라고 한다.


나는 계속 상류를 향해 걸어가면서 수로의 시작이 어디인지 캐낼 생각을 하고 있다.

이 언저리는 남대천의 최상류에 해당하여 물속의 돌들도 그대로 있고 흰 거품을 일으키며 여울져 흐르는 물소리가 상쾌하고 주변의 기암괴석도 빼어난 풍광을 자랑한다.

경치에 눈 뺏길세라수로가 어디까지 이어지는지 놓칠세라… 혼자서 마음이 바쁘다.

 

(위 : 이어지고 있는 수로.)


(위 : 깨진 수로....)


(위 : 수로의 시발점?)



한동안 북쪽 둑길 옆으로 계속 이어지던 수로가 어느 지점에 이르자 움푹 패여있는 것이 보였다.

저 지점에서 물이 끊기겠구나발원지에서 물을 보낸다 하더라도 저기 꺾여버린 곳으로 죄다 새어 나갈테니.

일부러 파괴했는지 자연재해로 깨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되보수하지 않은 채 지금까지 방치하고 있는 것을 보더라도 이미 필요 없게 되었다는 얘기다.

아무튼 이제 확실해졌다수로도 그 옆을 따라 나란히 있는 편안한 흙길도 모두 무용지물우리 <무진장고원길>이 고맙게 활용하면 되는 것.

 

약속의 신길마을에 가까워지자 또 하나의 보가 나타나는데 아마도 이 보가 그 수로의 발원지일 것 같다건너가서 직접 보기로 했다.

또 깡충깡충 뛰어 건너갔더니예상대로 건너편에 수로의 시작점이 있었다물론 더 이상 운용되지 않고 있는.



건너온 김에 아까 본 수로가 부서진 부위의 상황을 직접 보고 싶어서 다시 하류 쪽으로 내려간다나무들이 수해로 쓸려 내려와 둑길에 여기저기 걸쳐져 있어 가뜩이나 좁은 수로 옆길을 아슬아슬 곡예하듯 걸으려니 아찔하기는 했다.

역시 그 자리는 파괴되어 있었는데 주변 산에서 큰 돌이 굴러 떨어진 것이 범인이었던 듯.

그것 하나 확인하자고 위험을 무릅쓰는 내 호기심도 참 어지간하다.


(징검다리 같지는 않고...)


(돌로만 쌓은 옛날 보?)


(주황색 : 무너진 부위. 연두색 : 이 바위가 범인이었을까?)

(이 돌, 무늬 좀 보세요.)

 

다시 보를 건너 뛰어 남쪽 둑길로 되돌아 왔다.

엉뚱한 짓 하느라 보낸 시간을 벌충해야 하므로 열심히 걷는 데 매진해야 한다.

 

⑪ 신길마을.

 

신길마을은 남쪽 둑길의 또 남쪽에 있다약간의 밭을 가로질러 느슨한 언덕을 올라타면서 형성되어 있는 마을인데물가 쪽으로 그럴 듯한 정자가 있어 길 찾는 데 유용한 표지가 되고 있었다.

 


이 마을도 오래되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담배 건조실 건물들이다높이가 높고 주로 흙벽돌을 쌓아 짓는 것이 잎담배 건조실몇 채나 있는 것으로 보아 한동안 마을이 담배농사를 꽤 크게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큰길가에 나서니 동북동쪽으로 민주지산의 눈 덮인 능선이 멀리 바라다보였다사진 한 컷 찍고 돌아서니 정국장의 차가 벌써 왔다고 알린다.

 


이제 지전마을을 마지막으로 가보고 오늘 일정을 끝내기로 하였다.

 

⑫ 충청도 경계를 넘나들어 지전마을로.

 

신길마을을 관통하여 남대천의 북쪽 둑길로 나섰다이곳은 충북 영동군 용화면 용강리에 해당한다.

북쪽 둑길로 온 이유는지전마을 북쪽의 하천변 공원(?)을 보고 싶었던 것과 함께하천을 건너는 징검다리가 아름다운 곡선으로 되어 있는 것을 지도에서 보았기 때문이다그 징검다리를 건너는 재미가 또한 일품일 것이라 그 현장을 보려 했다.


 

그런데!

징검다리는 건널 수 없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둑방에서 내려가는 길도 없고징검다리가 얕아서 물이 그 위로 철철 넘쳐흐르고 있는 것이다!

또 한 번 아뿔싸!

 

강 둔치의 공원은 훌륭했다특히 방제림이었던 천변 나무숲은 대단한 관록을 자랑하는 모습이었다완주 봉동읍 상장기마을의 만경강 방제림에 비교할 정도다시멘트 포장을 한 것이 조금 아쉽지만그래도 주차장으로 쓰고 있지 않은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이 마을은 돌담으로 특화된 사업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지방문화재로 지정까지 받았다.

동글동글한 냇돌로 쌓았는데 어찌 이렇게 수직을 잘 유지하면서 튼튼하게 쌓을 수 있는지 놀라운 기술이다.


 

안상기 선생의 말로는 최근 귀농(귀촌)한 예술가들이 이 마을에 많이 들어오기 시작했다는 것인데과연 한 집을 보니 쇠를 다루는 모루가 문간채 안에 있고 마당에 철 조각작품이 전시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또 한 집은 진안에서(!) 이사온 사람이 집을 대대적으로 수리하고 있는 현장도 있었다.

 

(연두색 : 모루, 주황색 : 철조각작품.)


이 마을은 또감나무를 심어 이웃집과의 경계로 삼았는지 마을 전체가 늙은 감나무로 온통 뒤덮였다감꽃이 필 무렵이나 익어가는 가을에는 이 또한 별천지처럼 볼만한 구경거리가 되겠다.

한 가지 더우물을 담 바깥에 두어 온 마을 사람들이 누구나 공동으로 이용할 수 있게 한 것이 눈에 띈다.


(이 문 안에 우물.)



(키는 작으나 늙은 태가 물씬 나는 주목 한 그루.)



그런데… 주민은별로 만나기가 어려웠다.

이곳도 역시 쇠락해가는 농산촌의 전형에서 벗어나기 힘든 걸까.

 


⑬ 마을이름 땅이름 이야기.


지전은 이름이 하도 수상하여 혼자 깊이 궁리한 것이 지점(紙店종이가게)의 와전이 아닐까?”였다.

마을의 비교적 젊은 이장에게 물으니 종이를 뜨지는 않았고[]나무 껍질을 쪄서 벗긴 것(한지 원료)을 파는 집들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내 추측이 크게 빗나가지는 않은 셈이다.

저점(楮店)’이 제점이·지짐이지점마을지전마을로 변천한 것이다.

진안 정천면의 조포마을이 종이포(종이가게)’에서 받침이 탈락하면서 ~조포로 와전된 것과 비슷한 경로를 밟은 것.

지금은 지초[][]이라는 뜻의 얼토당토않은 한자를 쓰고 있다 한다.

 

더 이상한 것은 공식적으로는 상길마을이라 한다는 것이다길산리의 윗마을이라는 뜻이다아까 지나온 신길은 길산리의 새터마을이어서 새터 또는 신길산신길에는 또 길본지라는 도로명이 붙어 있는데 원래 땅이 질어서 질본지라 했었다고.

그래그렇다면 길산리의 길산도 원래는 질뫼·질산이 아니었을까?

참 어지럽고에로틱하기도 하고정신이 없다.

마을이름 땅이름정말 모르고 함부로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더구나 행정구역 이름을 따라 자연마을 이름을 이리저리 바꾸는 것은 더욱 하지 말아야 할 일이다그렇게 어거지로 한자 이름을 붙여놓고는 합리화하려고 풍수상 어떤 형국이어서 그렇게 불렸다’ 운운 하는 것은 최악의 수치(羞恥)이다.

 


⑭ 마무리.

 

결국 종일 걸린 셈인데 그럼에도 오산~지전 간 10킬로미터 정도에 불과하고그나마 어정쩡하게 결정을 유보한 구간도 많다.

하지만 오늘은 숨어있는 보물 같은 길을 두 군데나 찾아낸 성과가 있으니 그걸로 스스로를 칭찬하고 만족하면서,

급하게 서둘 일도 아니니 천천히 한 걸음씩 가자.

 

(최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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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시나브로 | 작성시간 20.01.13 수고로움없이 꽁짜로 탐사 잘 했소이다.
    올려주신 글 찬찬히 읽노라면, 눈앞에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집니다.
    길 걷는 소비자로서 고마운 말씀 전합니다. ^~^
  • 작성자최태영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0.01.13 긴 글 읽으시느라 시간 많이 뺏기셨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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