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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장고원길

무주 구간 탐사, 아홉 번째. (설천~무풍) (1)

작성자최태영|작성시간20.02.14|조회수276 목록 댓글 0

무주 탐사 아홉 번째 - 설천~무풍 두 번째 (1)


"이 구간의 루트는 세 갈래로 볼 수 있는데,

첫 번째 루트는 가장 북쪽에 해당하는 석기봉 아래 미대천을 따라 대불리를 통과동쪽으로 올라가다가 삿갓봉 고개를 넘어 남하하여 무풍소재지에 도착하는 방법.

두 번째는 나제통문 뒤(신라)쪽을 취하여 남대천을 따라 장덕리 일성콘도 앞을 지나는 방법.

세 번째는 아예 천변을 버리고 남쪽 두길리로 해서 방재~벌한계곡~벌한마을을 지나 사선암을 넘어 철목리로 가는 방법.

 

세 번째 루트까지 생각하는 이유는 하천변을 너무 오래 따라왔으므로 이제는 적당한 자극과 도전도 필요한 지점(시점)이라 판단하기 때문이다.

한편첫 번째와 두 번째 루트는 포장된 도로(둑길을 택한다 해도)를 걸어야 하는 구간이어서 굳이 탐사를 할 필요가 없으므로 오늘은 세 번째 루트를 직접 걸어보기로 하였다."

(앞선 글 일부를 인용)



오늘은 지난 번 여덟 번째 탐사에 이어 설천~무풍 구간의 1번 루트를 둘러보기로 했다. 가장 선호되지 않는 경로이자 힘든 경로이자 가장 멀리 도는 경로여서 굳이 탐사하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그래도 경로에서 제외한다면 왜 제외하는지 이유라도 알아야(알려야)하겠기 때문이다. 

마침 비가 예보되어 있는 날이어서 걷지는 못할망정 최소한 차를 타고서라도 둘러보아야 성이 풀릴 것 같았다.


설천 삼도봉장터 앞길을 빠져나가 남대천을 소천교로 건너서 동쪽으로 미대천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기로 한다.




대불리~미천리~무풍면 소재지.


미대천변으로 들어서자마자 번화한 설천 소재지와는 딴 세상이다. 산골오지라는 느낌이 훅 끼쳐져오는 곳이 시작된다.

미대천은 남대천보다 훨씬 좁고 가는 계류. 가파른 산들에 둘러싸여 깊고 좁게 파인 골짜기를 흐르고, 물가의 농경지도 훨씬 좁다. 이런 곳에도 사람들은 산다.


하천을 따라가는 길은 크게 세 가닥(어떤 구간은 네 가닥)이나 있는데, 끊기지 않고 걸을 수 있는 길은 찻길인 삼도봉로가 유일하고 자동차를 피하여 걸을 수 있는 길은 미대천 양쪽 둑길과 농가들을 위한 산 아랫길. 둑길과 농로 역시 거의 시멘트 포장이 되어있고, 농로는 도처에서 끊어져 있는 것이 흠이다.


하천 남쪽 둑길을 달리며 보니 양쪽 둑쌓기 공사를 튼튼히 했으되 바닥의 암반은 잘 보존되어 있어 경치가 매우 좋다. 역시 한 시대 이전의 치수(治水)사업은 자연환경을 크게 해치거나 바꾸지 않는 선에서 도를 지켰던 것. 물의 양도 풍부하고 여울져 흐르는 물에는 산소가 얼마든지 섞여 들어가는 것 같아 보기에도 상쾌하다.



오른쪽으로는 가파른 산록이 이어지는데 산 둘레를 녹색 철제펜스가 둘러치고 있다. 사람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목적인지 산짐승이 내려오지 못하게 할 목적인지? 끝없이 쳐져 있는 펜스를 따라 농로도 함께 이어지고 있는데 이 농로가 가끔 끊기는 것이다.


걷는 여행자라고 상정하면서 도중에 차를 내려 밭둑 사이를 걸어 빠져나가기도 하고 농업용수로 위를 밟아 건너기도 하면서 상류로 올라간다.




처음 만나는 동네는 나림마을. 몇 되지 않는 세대가 하천 건너편 북쪽 기슭에 있다.

어떤 축산농가가 농로를 막아놓아 더 가지 못 하는 곳에서 미대천을 건너 북쪽 둑길로 바꿔 탔다. 조금 더 올라가면 대불저수지의 댐 아래가 된다.


댐을 쌓기 위해 인공으로 폭파한 곳이겠지만 험하게 드러난 산의 속살 바위 절벽이 보기에는 아주 그럴듯하다. 

그 아래를 통과하여 댐 위쪽 산기슭을 걷는 방법을 궁리하며 이리저리 노선을 생각해보지만…



너무 가팔라서 위험하고, 이어지는 길이 있을 리 없고, 좁은 산길이라도 낼라치면 작업규모가 어마어마하게 커질 것이고, 저수지 관리 주체가 허가할 것 같지도 않고…

굳이 무리를 한다 하여 실익도 없다고 판단한다.

둑 아래를 빙 돌아 찻길(삼도봉로) 위로 올라섰다.

댐 위에서 다시 바라보아도 여전히 고개를 가로 저을 수밖에 없었다.



계속 저수지 상류를 향해 조금 더 달려 저수지 위를 건너는 고가교를 통과.



대불저수지의 최상류, 미대천 물이 갇히기 시작하는 곳 어귀의 삼거리에 도착했다.


‘신불사’ 안내 표지탑이 서 있고 버스정류소도 있는 이 언저리에 넓은 주차장과 함께 4층짜리 건물이 서 있는데 ‘미래북동 삼도봉권역 활성화센터’라는 간판이 붙어있다. 1층은 식당 겸 휴게 공간, 2층은 회의실 같은 공간. 3층과 4층은 숙박객을 재우는 공간인 듯.



그러나 이 훌륭한 시설은 무방비상태로 열려 있었고 아무도 관리하지 않고 있었다. 온갖 집기며 비품이 아직도 비교적 새것들인데…

길게 말하고 싶지도 않은, 수많은 예산낭비의 현장 중 하나일 뿐.

농사만 짓던 이들에게 느닷없이 “마을공동체가 함께 경영하는 관광·음식·숙박업을 해서 소득을 올리라”는 정부의 시책은 과연 옳은 방향인가? 공무원들은 배정된 예산을 하드웨어 짓는 데에 소진만 하면 할 일을 다 한 것이 되는가? 운영하지도 못할 사업을 하겠다고 받은 주민들은?

모두가 공범이다.

얼른 보아도 수십억 원은 들어갔을 쓸데없는 시설. 차라리 이런 돈을 집집이 나눠주는 것이 훨씬 나을 거라는 짐작은 삼척동자라도 할 수 있겠다. 이래서 국민기본연금의 당위성이 강하게 제기되는 것이리라. 재원이 없다느니 하는 말이 모두 거짓말인 것이다.

한숨이 절로 나지만 흥분해도 소용없다.

‘걷는이들이 잠시 쉬다 갈 수 있는 장소’라고 좋게 해석하기로 하고 통과.



그런데, 이 권역센터의 안내판에 ‘미래북동’이라 쓴 것은 센스가 돋보인다.

‘미래’는 ‘미내’, 북동은 내북(안북동)마을과 외북(바깥북동)마을을 합하여 이르는 말. 내북과 외북은 북동이라 하여 한 마을로 보아왔던 듯하다.

‘미내’는 미대천의 옛 이름으로, ‘세(3) 물길이 합해진다’ 하여 ‘미내’라 불렸다. ‘미’는 우리말 고대어로 ‘셋[三]’이라는 말이다. 이 땅에서는 죽은 말[死語]이 되어버리고 오히려 일본어 속에 남아있는 이 단어가 이 물길의 이름으로 살아있다니!

미천(美川) 또는 미대천(美大川)이라 쓰는 것은 소리에 맞추어 좋은 뜻의 한자를 붙인 결과다. 또, ‘미래’는 두 번째 음절의 첫 소리 ‘ㄴ’을 부정(不正)하게 ‘ㄹ’로 발음하는 습관에서 온 소리다. 안내를 안래(알래)로, 산내면을 산래면(살래면)으로 잘못 말하는 버릇이 있듯이.

어쨌든 <미래(未來)의 북동>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 문구를 쓴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이 삼거리 일대는 ‘숲거리’라 하여 숲이 우거져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숲을 볼 수 없다. 

이 시설을 짓느라 베어버린 걸까? 아니면 훨씬 전에 길을 닦거나 댐을 쌓을 때 그랬을까?



삼도봉로(찻길)을 버리고 내북길로 접어든다.

내북천이라는 더 가는[細] 내를 따라 꼬불꼬불 올라가면 안북동(내북)마을.


로맨틱하다고 해야 할까, 안쓰럽다고 해야 할까? 몇 안 되는 가구가 비탈에 옹기종기 모여 산다. 동구를 지키는 소나무는 엄청나게 크고 높이 서 있어 오래된 마을인 줄은 알겠다.



동구나무 아래 차를 세워두고 오른쪽 급한 비탈을 내려가 좁고 깊은 내북천을 건너간다. 아주 작은 다리가 걸려 있는 아래로 급경사의 계류수가 폭포처럼 떨어져 내리는데, 다소 무시무시한 이 목을 건너가야 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 다리를 짓기 전에는 어떻게 이 계곡을 건넜을까? 두루두루 궁금하고 신기하다.


좁고 작은 다리에는 ‘내북교’라 새겨져 있다. 

준공한 것은 1971년 5월 13일. 새마을사업이 시작되던 초기, “정부가 시멘트만 좀 주면 주민들이 알아서 하겠다”며 여러 일을 하던 무렵이다.




재미있게도, 이 다리를 건너면 외북마을로 이어지는 ‘땅고개(딴 고개?)’라는 초미니 고갯길이 나타난다. 건너가야 할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고개 넘어 남쪽의 바깥북동(외북)으로 왕래할 일이 있는데 물이 막고 있으니 ‘숲거리’까지 내려가 빙 돌아서 다시 올라가야 할 일이 귀찮았던 것.

사과밭 사이 둑을 지나 올라서면 바로 눈앞이 ‘땅고개’다. 동화 속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와도 같은 호기심을 자극한다.

나는 고갯길을 계속 걷고 정국장은 차를 몰고 되돌아나가 외북마을 정면입구로 가기 위하여 헤어졌다.


(뒤돌아 보며 찍은 안북동. )



2백 여 미터밖에 안 되는 짧고 좁은 내리막 고갯길을 걸어내려 가는 걸음이 이웃동네로 마실가는 듯 재미있고 사뿐하다. 돌떡이나 제삿밥을 나누어주려고 함지를 이고 넘어가던 옛 시절에도 이렇게 가벼운 걸음이었겠지.

고갯길 옆에 장작을 가지런히 쌓아놓은 한 집은 “참 재미있게도 산다”싶게 집을 예쁘게 가꾸어 놓았다.



곧 나타나는 바깥북동 마을.

아, 생각했던 것보다 큰 마을이었다. 교회도 있고, 마을회관도 잘 지었고, 예전에 쓰던 마을회관 건물은 잠겨 있고, 커다란 농협창고 건물도 있고(지금도 사용하고 있단다), 깔끔하게 잘 지은 집도 여러 채.


(힘자랑 하는 '들독'인 줄 알았더니...)



놀랍게도 마을의 가장 높은 곳에 학교가 있었다는 것. 

운동장이 매우 넓다. 학교 입구에 폐교기념비(?)가 세워져 있는 것은 처음 보았다. 1958년에 개교하여 1992년에 폐교할 때까지 1천명이 채 안 되는 졸업생을 배출했다고 씌어 있다.


(속을 쪼아낸 확이었다...)



지금 걸은 미니 고갯길은 거꾸로 외북에서 내북을 향하여 걷는다면 신비로움과 호기심을 극대화 할 수 있겠다. ‘바깥’에서 ‘안’의 사정이 더 궁금한 법이니까.


이곳 북동까지는 대불리에 속한다.

비가 오락가락 하는 날씨. 마을구경을 오래 하지 못하고 다시 차를 탄다.


이제부터 미천리로 들어가게 된다.

처음 만나는 곳이 하미마을.


새 길이 생기면 옛길은 급속도로 사라진다. 마을을 통과하여 다른 마을로 이어지던 옛 마을안길은 주민들의 농토로 바뀌기도 하고 개인이 물건을 두거나 집을 짓거나 하므로.


아랫미래(하미)마을도 마찬가지였다. 찻길을 다니지 않으려고 마을 안길로 내려섰지만 이미 끊어지거나 막혀버린 구간이 있어 다소 고생하면서 찻길로 도로 올라왔다. 세 가닥 물이 합쳐져 미내(래)라 불린 연유가 된 바로 그 합류점이 이 마을 가장 아래쪽에 있다. 두 가닥 물은 보이는데 나머지 한 가닥은 잘 보이지 않는다.


(사라진 길을 찾느라 헤매는...)


(포기하고 찻길로 올라옴.)




이제 삼도봉로를 따라 남쪽(현내리)으로 내려가면 되는데, 그러기 전에 잠깐 중미마을을 들러보기로 했다.



이 마을은 이른바 ‘독가촌’이 형성되었던 곳인 듯 똑 같은 모양의 ‘근대화’주택들이 여러 채 늘어서 있다. 1970년대 초 남파 게릴라에 의한 소란이 있은 다음 오지에 외따로 사는 집[獨家]들을 기존의 마을로 이동시켜 살게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에 모였던 사람들인 듯.


집 처마마다에 주택번호와 세대주 이름이 붙어있어 마치 탄광촌 노동자 숙소 같기도 하고, 난민수용소 같기도 하다. 이미 살지 않게 된 빈집도 많다.


주민의 안전을 위한 것이었다지만 사실은 지켜줄 능력이 모자라는 정부의 편의에 따라 주거지 선택의 자유를 박탈당하고 강제이주를 당했던 애꿎은 주민들.


중미는 원래 ‘웃미래’라 불렸고 더 위쪽에 상미(안골)가 있는데, 아마도 중미에 독가촌을 만들면서 안골은 사는 사람이 거의 없게 된 것으로 보인다.

안골보다 훨씬 위쪽에서 흘러내려오는 미대천(미내)의 원줄기까지 따라가 보는 것은 오지탐험에 속하는 일이어서 다른 기회로 미루고…



방향을 남쪽으로 꺾어 무풍소재지로 향하는 삼도봉로 찻길은 다소 급한 경사의 내리막이다. 재미도 없다. 길 왼쪽으로 장자동 마을을 바라보며 더 남하, 왼쪽의 두 마을 두평과 지동은 포기하고 오른쪽 옛길로 접어들어 물가를 따라 들른 마을은 문평마을이다.



문평, 넓다. 산비탈이 많이 느슨해져 있는 마을.

거문들, 거문평(巨文坪), 흑석(黑石), 문평(文坪) 등 여러 이름이 거쳐 갔던 동네다. 흑석은 마을 뒤에 검은 돌이 있어 붙었다는 이름인데, 글쎄, 믿거나말거나.


마을의 중심구역을 벗어난 개울 건너편에 마을회관이 있어, 철판으로 놓은 폭 넓은 다리를 건너가야 한다. 이곳도 물가에 큰 동구나무 그늘이 대단하다.



남쪽으로 훤히 트인 시야.

남대천 건너편의 철목마을 중허리쯤에 서 있는 ‘샹그릴라 농가 레스토랑’의 특징적인 건물 윤곽이 벌써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이미 현내리다.






차를 내려 더 아래쪽 원촌까지 걸어서 내려간다.

원촌은 번화한 동네다.


예전에 원이 있었음직한 곳과 그 부근의 정자나무 일대가 오히려 장터거리보다 더 깔끔해 보이기까지 한다. 시장거리는 다소거의 풀죽어 있는 모습이다.





‘XX집'이라는 다소 촌티나는 식당이름들이 늘어서 있는데 영업을 하지 않는 곳이 더 많아 보이고… 

‘다방’이 많은 것이 유독 눈에 띈다. 옛 정서를 소환하는 다방.


입구를 알록달록 예쁘게 꾸민 ‘새참’ 집에 들어가 점심으로 팥칼국수를 먹었다.


도시에서 이사온 지 1년 남짓하다는 젊은 여주인은 “여름에만 조금 손님이 있을 뿐 겨울을 힘겹게 지냈다”면서 곧 무주읍내로 옮기고 메뉴도 바꿔서 영업을 해볼 생각으로 있다고 한다.


젊은이들이 시골로 많이 와야 ‘지방소멸’을 겪지 않을 수 있는데, 그들의 먹고 살 일자리(일거리)는 너무나 제한적이니 아무리 말로 오라고 해봤자 공염불일 뿐.

한숨이 또 나온다.

쓸데없는 하드웨어 투자만 덜 해도 참으로 여러 가지 일을 농촌사회를 위해 벌일 수 있고 그런 자리에 젊은이들을 불러들일 수 있으련마는.

‘지역균형발전’이라는 말을 듣기 시작한 것도 20년이 넘는 것 같고 대통령 직속으로 위원회까지 있건마는.








점심 후에 가랑비를 맞으며 현내리 중심구역을 둘러보았다.

오래되고 유서 깊은 동리인 것만은 확실하다.

북리, 상리, 상하리, 고도(古島) 등 마을 이름도 그렇고, 

마을 가장 뒤쪽의 백산(栢山)서원도 그렇고, 

놀라운 것은 ‘명례궁(明禮宮)’이라는 황실의 이궁(離宮)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아흔아홉 칸이던 한옥 건물을 헐어 지서(支署) 등의 건물을 짓는 데 썼다고 한다. 그 명례궁자리는 넓은 공원으로 바뀌어 있었다.



(백산서원 보수비.)





큰 길 가에는 크지 않은 일본식 건물 두 채가 남아있었다. 

사진을 찍고 있으려니 마침 출타했던 집 주인이 돌아와 나름대로 친절히 안내의 말을 해준다. 일본강점기에 전매국 관리가 살던 집과 사무실과 잎담배 저장창고였다는 것. 

겉은 일본식 주거의 특징인 판자집 형태를 그대로 두고 내부만 고쳐가며 쓰고 있다고.












철목마을.

지난 번 답사 때 '샹그릴라 레스토랑'에서 내려다보면서 훌륭한 당산이 궁금했었다. 

잠깐 다시 들러 거대하고도 거대한 당산나무 숲을 보고 사진 찍는다. 이 지점은 비록 동선이 겹치는 한이 있더라도 꼭 경유하도록 설계해야겠다. 



(당산나무 아래의 돌판에 장기판을 새겼다.)



오후에는 지성리, 증산리를 돌아 경상남도 경계를 스치고 덕지리 덕동까지 움직였다. 

산비탈을 깎아 엄청난 사과밭을 조성한 관계로 밭까지 가는 길은 있어도 그 다음으로 연결되는 길을 찾기는 어려운,  험난한 구간이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2)에서 계속. 



(최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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