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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장고원길

정기용의 흔적 따라, 진달래 산길 - 무주 다시 걷기.

작성자최태영|작성시간20.04.02|조회수368 목록 댓글 0


무주 다시 걷기


2020년 3월 31일, 화요일. 


무주읍. 


한풍루라는 누각이 있다. 원래 다른 데 있었는데 어떤 사유로 이곳에 옮겨지었다는 정자. 

등나무 운동장 등 무주군의 문화예술적·사회적 복지시설들이 모여 있는 곳의 한 가운데 있고 소나무와 잔디밭이 매우 그럴듯한 장소다.

바로 옆에 넓은 주차장도 있어 걷는 여행자들이 모여 들어 시작점과 종점으로 활용하기에도 좋다. 무주 터미널 대신 이곳을 시종점으로 하기로 했다.




무주군에는 정기용이라는 걸출한 건축가가 설계한 공공건축물들이 많다. 

그의 건축에 대해 감히 평가할 위치에 있지 않지만, 문외한의 눈으로 보아도 “이런 산골에…?”라는 경이로운 시선을 받기에 충분한 건물을 많이 지었다. 

관객석을 등나무 넝쿨로 휘감아 매우 특이하고 시원한 등나무 운동장도 그의 작품이다. 

영동군 출신인데 무주군수에게 피컵되어 자신의 예술혼을 무주군에서 꽃피울 수 있었다고 한다. 

천재 예술가가 일찍 사거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한 인간이 살아생전에 해낼 수 있는 일의 총량은 일정하다는 법칙이라도 있는 것일까?

그의 작업 중 한 군데, ‘무주 추모의집’을 들러보기로 하였다.


무주읍 당산리


무주읍내는 남대천을 따라 발달한 상업타운과 행정타운, 남쪽 비교적 느슨한 산록을 따라 형성된 업타운과 농업지구 그렇게 크게 나눌 수 있다.

오늘은 남대천변을 잠시 접어두고, 등나무운동장과 최북미술관 정도밖에 가보지 못한 남쪽 산록을 따라 동쪽으로 움직이면서 업타운 당산리를 구경하며 지나간다.


깔끔한 거리가 눈에 띄는 당산리의 주거지역은 오래된 소도시의 향기를 품고 있다.

읍내 다운타운 지역보다 다소 높은 고도에서 내려다보는 높이에 있으므로 전망도 좋다.


(위, 아래 : 무주군내에 유일하다는 육교.)


이렇게 답사해보는 것은 남대천의 둑길만을 걷게 하지 않으려는 노력의 일환이기도 하다. 이런 정성이 쌓여야 고품격의 명품 길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동쪽으로 더 가야 ‘추모의 집’에 이른다.

도중에 깊은 골짜기 한 군데가 나타나는데 내려가는 비탈길의 경사가 하도 심하여 차를 세워두고 걸어 내려가기로 하였다.


이 일대는 비록 북쪽을 향한 비탈이기는 하나 산의 경사가 느슨하여 남쪽 햇볕을 충분히 받고 있다. 전원주택을 지을 만도 한데 아직은 이곳에까지 착목한 사람은 없는 듯.


골짝의 반짝이는 실개천 물이 정답다. 

봄이 무르익어 가는 것이다. 벌써 3월의 마지막 날.

환란 속에 한 계절이 지나가고 다시 새 계절이 돌아와 있었다.


(수양버들처럼 가지가 척척 늘어지는 벚나무가 많은 것이 이 골짜기의 특징이다.)

(등성이 위에 자연 둠벙도 생겨 있고...)



골짜기를 지나 다시 언덕으로 올라서면서부터는 무주읍의 공동묘지 구역이 시작된다. 묘소가 많이 나타나고, 무연고자의 묘도 이곳에 관리하고 있는 모양으로 이름 없는 번호만의 묘표를 세운 묘소도 많다.


전망 좋은 언덕 능선에 있는 ‘추모의 집’은 그 공동묘역 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다. 

여늬 공원묘원은 매우 넓은 구역에 걸쳐져 있는 데 비해 이곳은 그리 넓은 땅을 차지하지 않았다.

일반적인 매장보다 수목장·잔디장 등을 권장하고 있는 듯, 잘 가꾸어진 넓지 않은 정원에 추모객들이 갖다 놓은 꽃들이 아름답다. 

화장한 유골만 봉안한 추모관 건물은 안에 들어가 보지 않는다면 추모관인지 알 수조차 없도록 크게 눈에 띄지 않고, 언덕 능선과 같은 높이에서 자연과 한몸이 되어 있다. 

설계한 사람의 의도가 어떠했는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훌륭한 건축물이다.



이 묘역에 김환태의 묘도 있다. 

그는 무주읍에서 태어난 일제강점기 문학비평가인데 그 또한 서른다섯이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하였다. 정기용의 이른 죽음보다 더 이른 죽음. 역시 한 인간의 성취의 총량은 일정하다는 법칙이 이에서 또 증명되는 셈인가.

무주군은 최북미술관과 함께 김환태문학관을 등나무운동장 옆에 세워 그의 발자취를 남기고 있기도 하다.


'여'(나)는 예술지상주의자. 남도 그렇게 부르고 나도 자처한다. 눌인 김환태.




더 이상 연결되는 길이 없어 골짜기를 거쳐 차 세워둔 곳으로 되돌아 나왔다.

이제 이 산허리를 감는 임도를 타고 ‘유속마을’까지 가 볼 생각이다.



임도에도 이름을 붙여야 한다! 국도처럼 번호라도 붙이자. 

늘 느끼는 것이지만, 임도에는 왜 이름이 없을까? 

'어디서 어디까지 가는' 임도라거나 '무슨 산 임도'라거나 그렇게밖에 부를 수 없는 것이 번거롭기도 하고 재미도 없다.


이 시기에 임도에 들어서는 것은 매우 리스크가 높다. 산불방지 기간이어서 임도를 막아놓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한 쪽에서 열려 있어도 반대쪽에서 막혀 있으면 되돌아 나와야 한다.

그런 점에서 오늘 우리는 매우 운이 좋았다.


입구쪽은 열려 있어 들어갈 수 있었고, 동쪽 끝 출구쪽은… 차단기로 막혀 있었으나, 차단기 기둥 옆으로 차가 빠져 나갈 수 있을 만큼의 빈 터를 누군가가 닦아놓은 것. 되돌아가지 않아도 되는 이 행운이 얼마나 고마운지.


덕분에 4.1킬로미터의 ‘명품’ 임도를 달릴 수 있었다. 



임도는 대체로 흙길이었고, 진달래가 울긋불긋 한창이었다. 

다만 남쪽으로 깊숙한 골짜기를 들어갔다 나와야 하여 너무 먼 거리를 우회하는 셈이기는 했다. 남대천 둑길 따라 걷는 것을 피하려는 의도는 좋지만 굳이 이렇게까지 먼 길을 돌 필요는 없을 것 같고, 가끔 ‘시원한 숲길 걷기’를 기획하여 걷는 구간으로는 참 좋은 길이 될 수 있을 듯.



임도가 흐르는 도중 2.9킬로미터 지점에 한 갈래길이 나타나는데 잠시 차를 세우고 갈래길로 들어서 보았다. 훨씬 좁은 나무꾼길인데, ‘바깥유속마을’로 통하는 내리막 능선길이었다. 

발밑이 기분 좋은 솔밭 사잇길로, 그러나 3백여 미터밖에 걷지 못하고 어떤 이의 밭이 나타나면서 길은 막힌다.

아쉽지만 어차피 주 구간이 될 수는 없는 길이어서 포기하고 원래 가던 임도로 되돌아왔다.


(솔숲 사이로 언뜻언뜻 진달래.)



유속마을도 마을이름이 이상하게 바뀌어버린 경우다.

버드나무가 많았다 하여 ‘버드숲골’이었는데 ‘버드숙골’로 잘못 듣고 버들은 柳로 번역하였으나 숙(원래 ‘숲’)을 속(屬)으로 얼토당토않은 번역을 한 것이 원인이다. 

더 우스운 것은 그 마을에 “유(柳)씨 성 가진 이가 많아 유씨 문중에 속(屬)하게 되었다”나 어쨌다나 하는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와 비슷한 동네 이름이 또 있다. 율속(栗屬)마을이 그것이다. 영동군으로 넘어가는 앞재 아래 향로산 자연휴양림 입구에 있는 이 마을은 원래 밤숲골(밤숙골)이었다. 유속과 같은 말도 안 되는 경위로 율속이 되어 버렸다. 


이래도 지명을 원래대로 되돌려 놓아야 할 이유가 없다고 하겠는가?



적상면


안버드숲골로는 들어가지 않고, 적상산을 오른쪽에 두고 천변을 따라 남쪽을 향하여 달린다. 도중에 만나는 초리마을은 겨울놀이로 유명한 곳인데 지난 겨울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로 겨울 장사는 ‘망했다’.


조금 더 남쪽으로 달려 적상산 아래 무주호의 둑을 지척에 둔 지점에서 좌회전, 다시 산길로 접어든다.

이 임도는 북쪽으로 구불구불 길게 흘러 기곡리 문바우(문암)마을까지 통하는 길인데, 예상대로 입구가 막혀 있다. 

아깝지만 돌아나갈 수밖에. 그나마 입구를 열어놓고 출구쪽에서 막지 않은 것이 다행이랄까.

이 임도도 언젠가 눈이 내려 쌓였을 계절에 <눈길 걷기>를 한 번 할 만하겠다. 좋은 계절에 걷는 것은 물론 더 좋을 것이고.


차단기 앞에 차를 세우고 잠시 간식을 취하다. 적상산 꼭대기의 전망대가 가파르게 올려다보였다.


(주황 : 상부 저수지, 연두 : 전망대.)



무주호는 옛지도에 ‘수성(水城)’이라 표시되어 있던 저수지다. 자세한 설명은 없으나, 적상산에 사고(史庫)를 짓고 나서 이곳을 왕궁과 같은 개념으로 보아 궁을 지키기 위해 해자(垓字, 못)를 파고 이를 성으로 간주하였던 듯하다. 그때의 해자가 이렇게 커지고, 산꼭대기에 또 하나의 못을 파서 오늘 수력발전에 이용될 줄이야 꿈에도 상상이나 했으랴. 


반햇소 식당.


점심 식사는 적상면 소재지의 ‘반햇소’ 식당에서.

소고기만두, 소고기 소시지, 고기를 그냥 구워먹는 바비큐 등으로 정육점을 겸한 곳인데 맛이 썩 훌륭하다. 전국적으로 이름난 맛집이 될 만도 한데…






적상-안성 넘어가기, 안성 다시 걷기


오후 일정은 오늘의 백미, ‘오두재 넘어 안성면으로 넘어가기’다.


적상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달려 용담거리를 지나 삼가리 교차점에서 삼가리로 접어든다.


이 동네에 웬 '용담거리'? 

적상초·중학교가 있는 모퉁이가 용담이라는 동네다. 

옛 용담현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하여 용담거리라 불렀을 것으로 추측했으나 

어엿한 마을회관도 있는 용담마을이다. 

최근 4차선 도로가 생기기 전까지는 바로 이 2차선 용담거리를 통과하여 다녔다. 

전국에 용담이라는 이름을 가진 못이나 소(沼)가 하나 둘이 아니니, 작은 두 하천이 합류하는 이 언저리에 용담이 없으라는 법도 없겠다. 

더구나 마을에서 큰 길 건너에 있는 작은 산이 가파른 절벽을 내밀고 있으니 그 아래를 흐르는 시퍼런 물을 ‘용담’이라 불렀을 수도 있겠고.


이곳에서 삼가천 물을 합하고 계속 북쪽으로 흐르는 적상천을 따라 상류로 올라(남쪽으로 내려?) 간다. 

적상천변을 따라 남북으로 길게 발달한 농경지를 터전으로 삼가리는 있다. 


삼가리는 북쪽에서부터 하가·중가·상가마을이 연이어져 있어 그 세(3) ‘가’를 합하여 삼가리라 불렀다. 그러나 최근에 느닷없이 (삼가리를 ‘상가리’로 잘못 알았는지?) 하가를 하상가, 중가를 중상가, 상가를 상상가 등으로 또 한 번 이상하게 변형시킨 마을이름 표지판이 붙어 있다.


적상천 상류를 향해 남쪽(산쪽)을 바라보고 달리다가 하가마을(이상한 이름 ‘하상가’마을)이 건너다 보이는 들판 가운데 쯤 백두대간 마실길 안내말뚝이 서있는 갈림길에서 왼쪽 옛길로 접어들면, 


(주황 : 하가마을, 연두 : 이 길이 아니고요...)



느슨한 산길이 시작된다. 

이 산 허리를 따라 대전-통영 고속도로가 달리고 있는데, 우리가 타고 있는 옛길은 고속도로 아래를 가로질렀다가 다시 고속도로 위로 가로질렀다가 하면서 점점 높은 곳을 향하게 된다.


(연두 : 고속도로. 우리는 고속도로 위 오버 브리지 위에 있다.)



이미 삼가리는 빠져나왔고, 이제 오두재 고갯길에 접어든 셈이다.


이 길은 매우 느슨한 경사로서 걷기에 아주 좋다. 

흙길이며 숲길이고, 찻길이며 사람이 다니던 길이다. 

최근에도 차가 다닌 바퀴자국은 선명하지만 걸어서 넘어 다니는 사람은 흔치 않게 되었을 옛길.

제철 진달래가 아주 밭을 이루고 피어 있었다! 오랜만의 걷는 여행자를 반갑게 맞아 주고 있는 듯하다.


차를 탄 채 움직이는 것이 아까워 차에서 내려 걷기 시작한다.



정상에 최근에 지은 정자가 하나 서 있는데 오도정(吾道亭)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고 정 국장이 나중에 전했다. 나는 깜박 보지 못했다). 

오두재, 오도재, 오둣재… 

오래된 지명은 여러 사람들이 여러 이름으로 불러 원래 이름과 원래의 뜻이 세월이 갈수록 모호해지는 속성을 지녔다. 

오두재라는 재만 해도 무주군 안에 두 군데나 있다. 무풍면 덕지리에서 설천면 삼거리로 넘어가는 가파른 고개도 또 다른 오두재.


오두재 정상을 분기점으로 안성면이 시작된다. 

시원한 바람을 안고 고갯마루에서 내려다보는 안성의 평야는 역시 넓었다. 바로 발아래 보이는 동네가 사전마을일 것이다.


역시 느슨한 내리막길을 달려 내려간다. 

지금 지나온 길은 거의 정북쪽에서 정남쪽을 향해 직선에 가깝게 달린다.


고개를 오를 때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으나 내려가면서 보니, 길 좌우의 잡목을 좀 정리했고 그 대신 어린 나무(산수유인지?)의 묘목을 죽 심어놓았다. 

무주군에서 이 길을 자전거길로 조성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바로 그 사업의 일환인 듯. 

경사가 그리 없으므로 나같은 아마추어도 즐길 수 있겠다. 




사전마을 가까이에 도달. 

마을 맨 뒤쪽 가장 높은 곳을 지나칠 때 나무 울타리로 둘러친 가드레일(?)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 울타리는 도로를 위한 가드레일은 아니고 아마도 염소를 방목하는 농가가 짐승을 지키려고 친 것인 듯. 

그런데 나름대로 보기 좋다. 지난 번 사전마을 중심부에서 올려다보았을 때 지금 지나는 이 길과 함께 묘하게 어울려 보이던, 특징적인 울타리다.




조금 더 마을로 가까이 내려가면 커다란 바위에 ‘유당(裕堂)선생 소요대(逍遙臺)’라 잘 쓴 글씨를 새긴 각자가 있다. 어느 시대의 사람인지 모르겠으나 이곳에서 한가한 시간을 보냈다는 뜻일테지. 하지만 바위가 있는 곳은 이제 축사와 가축의 우리가 함부로 쌓인 축산농가로 바뀌어 있어 옛 선비의 정취를 형편없이 추락시켜 버리고 있다.








적상면 '삼가'리  '하가'마을에서 이곳 안성면 사전리 사전마을까지의 약 5.5킬로미터, 매우 아름답고 훌륭한 도보길이었다. 진달래길(Azalea Trail)이라 별명을 붙이면 어떨까?




안성면 장터, 면사무소와 청소년쉼터


사전교(오래된)를 건너 안성면 소재지로 달리다.


장터(장기리)를 지나면서 안성면 사무소를 다시 한 번 쳐다보다.

이 건물도 정기용의 설계로 지어진 특이한 디자인의 건물이다. 

마당에 서 있는 일곱 개의 기둥은 안성면의 명소 ‘칠연폭포’를 상징하는 조형물이란다. 

비스듬히 유리창을 낸 타워 같은 것이 면사무소 건물 천장을 뚫고 서 있는데 이것은 빛을 받아들여 실내를 간접조명하는 시설이라고. 

그 시대의 공공건축에 이런 의미와 상징을 가미한 센스는 찾기 힘들었을 것이다. 


신촌마을 큰길 가에 있는 안성 청소년문화의집 건물도 그의 작품이다. 

나지막하여 주변 경관과 잘 조화되는 외부 디자인을 하고 있다. 

아쉽게도 코로나 비상사태로 시설은 문을 닫아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이 기둥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칠연폭포 기둥은 건물 오른쪽 주황색 화살표 뒤쪽에 있어서 안 보입니다. 채광창도 이 자리에선 안 보입니다.)




단지봉 산 밑 동네, '묏마티'



‘단지봉길’을 따라 들어간 곳은 중산마을이다. 

이곳은 ‘묏마티’라는 특이한 이름이 원래 마을이름이다. 

이름의 유래에 대해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여 나름대로 낸 결론이 있지만 정작 마을 주민에게 확인하지 못하고 있던 차에, 오늘 이 마을에 오게 된 것이 반갑다.


마을은 여러 번의 사업을 시행한 흔적이 역력하다. 

꽤 큰 마을이기도 하다. 마을 중심에 크지 않으나 늙은 소나무 한 그루가 있고 시커먼 돌 몇 개가 함께 있어 당산제를 지내던 곳인 줄 알겠다. 

잠시 쉬고 있는데 한 남자가 다가와 인사를 건넨다. 이장이다.


시커먼 돌 네 개 중 두 개는 옛날부터 있던 ‘할아버지’ ‘할머니’ 돌이고, 두 개는 딴 데서 구해다 놓은 돌이라 한다.


(분홍 : 할아버지 돌, 연두 : 할머니 돌.)



마을이름 ‘묏마티’의 유래를 물었으나 이 이장도 확실하게 대답하지 못한다. 

다만, “장기리의 중심이며 덕유산에서 내려다보아도 우리 마을이 안성 들판의 한 가운데 있어서 중산이라 한다”는 애매모호한 대답을 할 뿐.


이웃한 봉산과 골고리(골곡마을) 등 마을에 대해서도 한 마디씩 소개하는데, 지난 번에 찾으려다 실패한 고갯길에 대해서도 알려 주었고 ‘책바우’의 존재에 대해서도 자랑삼았다. 

책바우 밑에는 무슨 비결서 같은 것이 숨겨져 있다는 전설이 있고, 어릴 때 그 책바우에서 아이들끼리 숨바꼭질도 하며 놀곤 했다는 것이다.


골고리에서 봉산으로 넘어가는 길이 있다는 것을 알고서야 그냥 갈 수 없었다. 골고리로 돌아갔다.


골고리, 골곡마을. 

그 이장의 말로는 자기네 중산마을에 속하는 마을이라 하지만 원래는 딴 마을이었던 것이 확인된다. 마을회관이 따로 있는 것이다.



작다. 하지만 가운데로 논밭을 길게 두고 원형으로 둘러싸면서 몇 안 되는 집들이 동네를 이루고 있는 평화롭고 한적한 마을이었다. 

워낙 작아서 이름도 없이 그냥 ‘골짝’이라는 뜻의 골을 두 번 겹쳐 불렀을 것이라고 짐작했던 바로 그 마을. 

얼핏 진안 성수면 내좌마을을 연상시키는 분위기다. 마을 뒤 살짝 높은 곳에 당산나무가 보인다. 올라가보니 당산나무 아래 정자가 앉아 있는데 올라서자마자 시원한 바람이 맞는다. 이곳 역시 내좌마을 뒤쪽 산수동을 꼭 닮았다.



묏마티 이장이 일러준 대로 얕은 언덕 쪽으로 올라가보지만 여전히 고갯길은 확실히 보이지 않았다.



묏마티의 이름에 관한 연구(!)


묏마티는 ‘뫼(산)가 있는 곳’이라는 뜻이다.

<뫼+앝>의 합성어인데, 여기에 전라도 특유의 말버릇 두 가지가 겹쳐 묏마티가 된 것. 말버릇 두 가지란 ‘사이 시옷’을 무차별적으로 끼워 넣는 것과 동네이름 끝에 ‘이’를 붙이는 것을 말한다. ‘뫼ㅅ앝’이라 부르려니까 뭔가 발음에 불편하여 ‘묏맡’이 되었고 거기에 다시 ‘이’가 붙어 ‘묏마티’. 여기까지 추리해내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여기에서 ‘뫼’는 어느 산을 말함일까? 바로 단지봉이다. 밋밋하고 넓은 안성평야에서 5백 미터급 산만 있어도 주위에서 다 보이는 꽤 그럴듯한, 유일한 산 대접을 받는다. 바로 그 단지봉 아래를 둘러싼 마을이 상산·중산·하산 그 세 마을인 것. 그 중 단지봉에 가장 가깝고 가운데 있는 중산을 특히 ‘묏맡’이라 불렀는데 정작 묏마티 이장은 그 유래를 설명하지 못했다.


이 추리를 가능하게 한 결정적 계기는 젊은 시절에 읽은 소설의 기억이다. 제목도 작자 이름도 잊었지만, 내용은 전라도 말로 가득한 전라도 시골의 한 가정의 이야기였고 주인공 노부부의 대화가 깊은 기억 속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추운 겨울 밤, 노부부가 자려고 누웠다. 그런데 너무 추워서 그러는지 마당의 나무 밑에 매어둔 강아지가 낑낑대는 소리가 불쌍하게 들린다. 강아지를 토방으로 데리고 들어와야 할지 헌 옷가지로 싸주기라도 해야 할지 마음이 쓰인다. 하지만 이미 옷을 벗고 누운 부부는 다시 일어나기가 귀찮아 서로에게 강아지 좀 내다보라고 미루면서 하는 대화다.


“임자, 남ㄱ앝에 잔 나가 보소.”

“이녁이 나가 보씨요. 나는 추워.” 

“놈은 안 추운가.”


바로 이 대화 속의 남ㄱ앝이 힌트였다. ‘나무가 있는 곳’, 남ㄱ앝.


‘-앝’을 쓰는 일은 우리말 속에 꽤 많이 남아있다. 머리맡, 베갯맡, 침대맡 등.

특히, 받침으로 끝나고 한 음절로만 된 단어는 그렇게만 말해서는 의미 전달이 불명확하므로모음으로 시작하는 글자나 조사 하나를 더 붙여 말하곤 한다. 

‘밖’, ‘앞’, ‘욱[上]’ 등이 그런 경우로서 ‘밖앝(바깥)’, ‘밖의’, ‘앞에(의)’, ‘욱에’ 등으로 발음편의를 추구했던 것.

그런 우리말의 맛깔난 흔적이 마을이름에 남아 있는데 ‘중산·하산…’은 너무 드라이하지 않은가?

무주군에 ‘-앝’이 붙은 마을이름은 또 있다. ‘늘갓(널갓)’이 긘데 이 이야기는 또 다른 기회에 하자.



봉산마을로 넘어가는 고갯길은 여전히 특정하지 못했으나 어차피 얕은 언덕에 불과하므로 굳이 넘어가려면 못 갈 것도 아니어서 다음을 기약하고 되돌아 나왔다. 

그 자신만만한 이장이 고갯길을 터달라고 군청에 민원을 넣었다고 하니 조금 더 기다려 볼 수도 있겠고. 


나오는 길에 책바우를 찾아보려 했다. 

하지만 역시 특정하기 어려웠다. 언덕 전체가 바위 투성이여서 어디를 가리키며 “저것이 책바우”라고 해도 다 곧이들을 만큼 바위는 흔했다.


(설마 이 둥글둥글한 바위가 책바우? 언덕 능선을 넘으면 봉산마을...)



묏마티 일대에는 농협이 운영하는 커다란 농산물 가공시설이 두 군데나 있다. 

역시 안성평야는 소출이 많으므로 이런 시설이 과거부터 필요했겠다.


또 중산(묏마티)마을에는 <묏마티 마을 맛집>이라는 식당을 운영한다. 오리백숙 요리를 전문으로 한다는데, 마을 사람들을 위한 실비 정식도 한다고. 

우리가 이 길을 지나게 된다면 점심을 여기서 먹을 수도 있겠다. 





용추-칠연계곡-명천-하늘샘


골고리를 나와 언덕너머의 봉산마을을 우회.

지난번 답사 때 만났던 사람들의 기억이 다시 나면서 굳이 차를 내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고 통과. 

오늘은 명천마을과 하늘샘마을, 용추마을 등을 제대로 봐야 하기 때문이다.


들판을 달려서... 

이 들길을 걸을 때는 파라솔이라도 써야할 듯. 벌써 18도가 넘는 기온인데다 따가운 햇살과 시멘트 농로가 걷는이를 괴롭힐 것이 분명하다. 


공정리 담안(장내)·용추마을을 통과, 칠연계곡으로 들어선다.


계곡입구의 용추폭포는 숨이 멎을 만큼 아름다운데 왠지 관리의 손길은 한 발짝 아쉬운 느낌. 차가 건너다니는 다리 외에 수면에 가까운 높이로 보행자 다리를 하나 더 걸치면 한결 '국민관광지'에 가까운 서비스가 될 터인데. 

그 아름다운 소(沼) 언저리에는 먹고 버린 일회용 그릇들이 무더기로 쌓여 있기도 하다.


폭포 바로 위에 새로 지은 정자가 있는데 ‘사용료 얼마’라고 안내되어 있다. 이젠 시골 동네에도 공짜는 없는 듯. 

계곡 옆길을 따라 농업용수로가 나 있는 것도 인상적이다. 


몇 년 전에 지나간 일이 벌써 옛일이 되어 가는지 주변의 시설들에도 약간의 변화가 보인다. 카페를 지으려다가 중단한 곳도 있고, 홀리데이 파크라는 개인 휴양시설이 가장 경치 좋은 곳을 차지하고 있기도 하다. 


이곳보다 더 상류로 올라가면 덕유산 국립공원 구역이 되므로 물놀이를 잠깐이라도 할 수 있는 곳은 어차피 이 근처뿐이겠다.




차를 다시 타고 명천마을로 향한다. 지난 번에 찾아왔을 때 길이름을 비판했던 그 ‘원통사로’를 달려서.

명천마을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큰 동네였다.

우는 내[鳴川]를 끼고 남북으로 음지뜸·양지뜸이 나뉘는데 두 뜸이 모두 크다.

명천의 이름은 바닥에 깔린 돌이 흐르는 물에 ‘운다’는 뜻으로 그렇게 불렸는데, 

후대에 물이 맑다는 뜻으로 밝을 명(明)으로 바뀌었단다. 

과연 그 때문만이었을까. '대명국(大明國)'에 아첨하고 싶은 계층의 소행은 아니었을까.



북쪽 양지뜸에는 솔밭권역 체험관의 울긋불긋한 건물이 또 있다. 큰 마을인 데 비하여 인구는 얼마 남아있지 않고 빈집도 늘어간다. 체험관이 잘 운영되고 있으면 좋으련만.

마을 안 구경을 잠깐 하고, 남서쪽으로 달려 하늘샘마을로 향한다.



(아래: 명천마을을 빠져 나가면서 마을 어귀에 있는 꽤 그럴듯한 반송 세 그루를 찍은 사진인데, 차를 타고 달리면서 찍은 것이어서 거의 봐 줄 수 없는 정도입니다. 실물을 직접 보러 가시게요~.)



하늘샘마을은 무수동(무순 골? '신무마을')에 속하지만 기존 마을과는 달리 외부에서 문화예술인들이 들어와 마을을 이루고 산다. 


이곳도 정기용의 설계로 조성된 마을이란다. 

지난 번 답사 때는 신무마을 쪽(북쪽)에서 들어와 솔밭 사이를 조금 걷다가 포기하고 돌아갔는데 오늘은 남쪽에서 가장 빠른 접근로로 들어온 셈이 되었다. 

이 농로 상에도 개인의 밭이 있어 잡인을 차단하는 체인이 있기는 하다.


예쁘고 특색 있는 집들도 많고 고급 차가 서 있는 집도 많고…

이 골짜기까지 올라와 천마씨를 넣는 농사일로 이른 봄을 벌써 시작하고 있는 농가들과, 예술인들이 조화롭게 사이좋게 어울리면 좋겠다.



오늘의 답사는 여기까지.


귀로에 적상면으로 되짚어 오면서 여올마을에 들러볼 생각이었으나 고속도로를 타는 바람에 그만 깜박 잊고 말았다. 

그 대신, 장수 삼봉리를 통과하면서 가야고분의 실체를 똑똑히 목도하게 된 것은 또 다른 행운이다.


(최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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