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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아래 선성 민병직님의 고원길 여행 후기입니다.

작성자정병귀|작성시간23.11.16|조회수240 목록 댓글 1

진안고원길에서의 단상

- 진안고원길을 완보하면서

: 선성 민병직

 

대장정의 서장

 

세계는 책이고 여행은 그것을 읽는 것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을 지낸 노벨평화상 수상자, 넬슨 만델라의 명언이다.

굳이 만델라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진안고원길은 나에게 다가온 하나의 큰 서책이었다. 이 책을 읽기 시작한 날은 617. 이날부터 아름다운 자연이 준 선물을 대하며 한발 한발 걷고 걸었다. 아내와 함께.

그렇게 걷다 보니 어느새 1112. 대장정의 서막이 내려졌다.

 

무엇을 버릴 것이 있으랴

잠시 눈을 감고 진안고원길 골골마다에 서린 그 동안의 여정을 되돌아본다. 힘은 들었지만 한편의 인생 드라마였다. 고원길을 걸으며 수없이 자신의 거짓된 군상들을 만나고 세상을 만났다. 이 만남을 통해 몸속에 틀어박힌 찌들은 잔해들을 버리고 또 버렸다.

아니, 세상에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릴 것이 있으랴. 세상의 실상이 본래 전라(全裸)인데…….

 

조고각하의 길

조고각하(照顧脚下). 이 말은 중국 송나라 때 선승이었던 오조 법연스님의 일화에서 비롯된 말이다. 오조 법연선사는 제자들과 어두운 밤길을 걷는다. 얼마 못 가 바람에 등불이 꺼져버린다. 제자에게 어떻게 할지를 물었다. 그러자 한 제자가 조고각하해야 한다고 말했다. 법연선사는 무릎을 쳤다. 제자의 진면목을 본 것이다.

조고각하란 걸을 때 발밑을 살펴야 한다는 뜻이다. 살얼음을 딛듯 자신을 추스르며 살라는 교훈이 담겨 있다.

나에게 있어 고원길은 조고각하의 길이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발밑을 살펴보며 210km의 긴 여정을 달려왔다.

이 조고각하의 길에서 만난 것들. 나무를 만나고, 이름 모를 들풀을 만나고, 더위에 몸부림치며 길을 건너는 지렁이를 만났다. 내가 무서워 풀숲으로 몸을 숨기는 뱀을 만나고 개구리를 만났다. 어디 이뿐인가. 시내버스 기사도 만나고, 경찰관도 만나고 전라의 모습으로 사는 순수한 고원길 사람들을 만났다.

 

 

생명의 무게

더운 여름, 길을 잘못 들어 길 가운데서 기진맥진해 있는 지렁이를 풀숲에 옮겨주면서 생명의 소중함을 생각하는 시간도 만났다. 지렁이도 하나의 존귀한 생명. 나의 생명과 저울에 단다면 누가 더 무거울까. 지렁이에게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생명은 누구의 생명이냐고 묻는다면 지렁이는 선뜻 내 생명!”이라고 답할 것이다.

생명의 무게를 저울에 단다면 지렁이의 생명과 나의 생명 무게는 똑같으리. 고원길에서 만난 수많은 식물과 동물들이 깨우쳐 준 가르침이다.

 

내가 만난 사람들

4구간 시점에서 성수면 파출소의 경찰관을 잊을 수 없다. 성수면행정복지센터에서 시내버스를 하차하고 출정 준비를 하는데 파출소에서 한 경찰관이 뛰어왔다. 그 경찰관은 일요일 근무 중인 것 같았다. 나에게 어디를 가느냐 묻더니 친절하게 길 안내를 해주며 잘 살펴 가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러면서 도착지인 오암은 교통이 불편하니 행복버스를 타고 다시 오는 것이 좋다고 일러주었다. 그때까지 행복버스가 뭔지 몰랐다. 알고보니 지역 주민들의 교통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승합차. 면내에서 운영되는 공용차이다. 전화하면 고맙게도 우리 같은 외지인도 실어나른다. 탑승 비용은 1천원. 단지 면단위를 넘어서지는 않는다. 전국에 벤치마킹할 만한 진안군 최고의 복지 정책 이다.

가는 길에 메시지가 도착했다. “고원길을 종주를 응원합니다. 안전하게 다녀오세요. 그리고 무슨 일이 있으면 즉시 전화 주세요라는 당부의 메시지. 이 메시지를 받는 순간 가슴이 뛰었다. 세상에 이렇게 친절한 경찰관이 있다니. 난 즉시 가던 길을 멈추고 경찰관의 친절에 감동해 감사하다는 답 메시지를 보냈다.

4구간 종착지인 오암에 도착하고 보니 정말 대중교통을 이용하기가 불가능했다. 경찰관이 일러준 대로 행복버스로 전화했더니 금방 달려와 행복버스에 행복하게 몸을 실을 수 있었다. 더욱 감동인 것은 행복버스를 타고 이동하는데 전화가 왔다. 잘 돌아오고 있느냐는 그 경찰관의 전화였다.

 

또 한 사람. 12구간 고개 넘어 동향길에서 만난 농부. 재를 넘기 전 길가에 가을 냉이가 몇 포기 나 있었다. 냉잇국이라도 한 끼 끓여 먹을 냥으로 스틱으로 후벼파고 있을 때 좁은 길로 소형트럭이 올라왔다. 아주 천천히 서행하면서 지나갔고 5분여 뒤에 차를 되돌려 내려왔다. 창문을 열면서 조금 더 위에 가면 밭이 있는데 냉이가 많으니 그걸 캐가라고 했다. 그러면서 하우스 속에 괭이도 있고 삽도 있다고 일러주었다. 자기 밭이니 마음 놓고 캐어가라는 뜻이다.

조금 올라갔더니 정말 쪽파 사이사이로 크게 자란 냉이가 지천을 했다. 나는 삽을 이용해 심겨 있는 파들이 다치지 않게 냉이를 캤다. 혹여 주인에게 누가 되지 않게 파냈던 곳에 보토해 주고 다듬었던 자리를 말끔히 정리해 주고 길을 떠났다.

 

고원길 길목에서 만난 진안 사람들 모두가 이렇게 친절했다. 모든 사람이 이렇게 친절하고 정이 많다면 세상에 무슨 법이 필요할 손가. 친절은 교육의 시작이라 할 만큼 인간 사회에서 기본적인 인륜의 불문 규범이다. 이 불문 규범이 고원길에서, 진안뻘에서 펼쳐지고 있다. 오늘도 내일도.

 

이야기들이 별처럼 총총한 곳

떠올려 보면 진안고원길은 한 권의 책에 담아도 부족할 만큼 많은 이야기들이 별처럼 총총한 곳이다. 이 총총한 길에 어떤 해는 연 7만여 명이 함께 한 적도 있다니 고원길의 위상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발걸음을 멈추고 본 고원의 풍경들

구간 구간 지나면서 가슴이 벅차게 솟구쳤다. 앞에 펼쳐지는 산, 상쾌한 고원길의 공기, 졸졸 흘러내리는 강물과 계곡물, 여름날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 해맑은 진안 사람들의 눈빛, 장날 시내버스를 타며 정감 넘치게 이야기하는 어른들……. 이 모든 것이 보석처럼 내 가슴 속에 자리한 진안의 풍경들이다. 어디 이뿐이랴. 물속에서 한가로이 유영하는 귀여운 물고기들은 어떠하리. 나는 종종 발걸음으로 멈추고 고원길책 속으로 시선을 던졌다.

 

이 외진 길을

아내는 어떤 때는 힘에 붙이는지 주저앉았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걸었다. 혹여 무슨 일이라도 있을까 염려되어 아내를 앞세우고 나는 뒤를 따랐다. 걸으면서 침묵의 시간도 많았지만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연에 대한 이야기, 고원길에 대한 이야기, 사는 이야기, 세상사 이야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느새 하나가 되어 있었다. 부부는 일심동체라는 말이 그래서 나온 말 같았다.

아내는 참으로 감성적인 사람. 길을 떠나 길 위에 서면 생각의 그물이 수평선 너머의 길로 내닫는다. 고원길의 푹 빠져 있는 소녀가 되었다. 이순을 훨씬 지난 나이인데도…….

내가 고원길을 완보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아내의 덕. 아내가 아니었다면 혼자서 이 외진 길을 어찌 걸었으랴.

 

고원길이 일러준 값진 선물

하늘 아래, 하늘 위 모두가 감사함이다. 고원길을 만들어 준 사람들이 감사하고, 이 길을 잘 걷게 매뉴얼을 만들어 준 사람들이 감사하고, 시그널을 붙여 길을 잃지 않도록 만들어 준 사람들이 감사하고, 시작점까지 데려다준 버스와 버스 기사가 감사하고, 끝까지 곁에서 힘들다는 표현하지 않고 함께 걸은 아내가 감사하고…….

그러나 고원길에서 느낀 또하나의 사실이 있다. 바로 자신이다. 고원길을 안내해 준 눈이 감사하고, 힘겨움을 잘 참아낸 두 다리가 감사하고, 배낭을 멜 수 있게 허락해 준 어깨가 감사하고, 떨어진 밤송이를 주워 맛보게 했던 손이 감사하고…….

생각해 보니 감사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 나는 모든 존재에 대해 감사함으로 채우며 살 수 있는 지혜를 얻었다. 고원길이 나에게 사자후한 가장 값진 선물이다.

 

2023. 11. 15. 조국의 하늘 아래서

 

 

ps : 이 길을 걸을 수 있도록 해준 진안고원길 관계자 여러분께 머리 숙여 감사함을 전합니다. 오랜 기간 도란도란 함께 걸어준 아내에게, 그리로 용기를 북돋아 준 자녀들에게 두 손 모아 감사함을 전합니다. 또한 고원길을 개척해 만인들에게 행복을 안겨주신 진안고원길사무국장 정병귀님께 존경과 경의를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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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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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이영일 | 작성시간 23.11.16 함께 하나 되신 민병직ㆍ김선혜님 내외께 박수 "짝 짝"
    후기에 담아내신 따사한 감응에 공감하며 걷기중에 한번쯤 생각케 될 ~님 내외 사랑해요
    자신의 몸도 맘도 스스로 위로와 칭찬을 이순의 나이에도 아끼지 않을 수 있는 ... 흐르는 물, 길가의 풀도 자연스레 하나됨을
    감사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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