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명화작품세계로

[스크랩] 거리의 신비와 우울/ 조르조데키리코

작성자진원장|작성시간10.01.25|조회수2,032 목록 댓글 0

거리의 신비와 우울

“토리노에서 모든 것은 환영이며 정확하게 기하학적인 광장 너머로 우리는 무한한 것에 대한 향수를 읽을 수 있다” - 니체

 

 

공간, 사물, 그리고 시간의 낯선 느낌


그리스의 작은 마을 볼로스에서 태어나 아테네와 피렌체에서 자랐고 뮌헨, 밀라노, 파리 그리고 페라라로 이어지는 기나긴 인생의 여정을 걸었던 조르조 데 키리코(1888~1978)는 젊은 시절 니체와 쇼펜하우어에 심취했고 니체가 했던 것처럼 이탈리아 토리노를 여행한 바 있다. 하필이면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무한한 것에 대한 향수”를 읽을 필연성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실제로 데 키리코의 이 작품은 그가 머물렀던 뮌헨의 한 건물과 유사하다는 연구도 있다). [거리의 신비와 우울]은 정확히 어떤 곳을 그린 것인지 알 수 없다. 토리노가 아닌 어디에서라도 본 적이 있는 듯한 장면이면서, 동시에 한 번도 실재한 적이 없는 것 같은 낯선 공간이기도 하다. 끝없이 계속되는 새하얀 회랑과 검은 건물, 굴렁쇠 놀이를 하는 소녀와 긴 지팡이를 든 키 큰 남자의 그림자 또한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우리 앞에 그려져 있지만, 뭔가 낯설고 불편하며 심지어 위협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이 화면 속에는 ‘공간’과 ‘사물’의 익숙함과 낯선 느낌이 기묘하게 공존할 뿐만 아니라 ‘시간’ 또한 그러한 것처럼 보인다. 도대체 이 사건이 벌어지는 시간은 과거인가 미래인가? 오래된 향수인가, 미래의 예시인가? 어느 한쪽일 수도 있지만 둘 다인 것은 아닐까? 니체가 “무한한 것에 대한 향수”라고 표현했고, 데 키리코가 회화적으로 해석했던 것은 이렇게 공간과 사물, 그리고 시간이 모두 하나로 연결된 채 어떤 알 수 없는 순환의 한 지점을 언뜻 드러내는 상태를 말하는 것은 아닐까?

 

 

현실과 초현실의 모호한 경계


데 키리코의 [거리의 신비와 우울]은 소위 초현실주의라고 명명되는 1차대전 후 유럽미술 운동의 선구적인 작품으로 평가된다. 데 키리코에게서 회화는 그 자체가 해결할 수 없는 ‘불가사의’(Enigma)이며 이 ‘불가사의’만이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작가는 당연하게 주어진 조건이라고 믿어지는 것들에게서 안락한 친숙함을 빼앗고 어떤 ‘신비’를 발견할 때, 그래서 그것이 일종의 ‘계시’(Revelation)로 그의 감각에 포착될 때 예술적 창조가 시작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러한 초현실이 결코 현실의 바깥 혹은 저 너머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믿음이다. 실제로 초현실은 우리가 현실이라고 믿는 것에 딱 달라붙어 있어서(혹은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그 경계가 처음부터 모호한 것이었다. 우리가 경험하고 인지하는 세계가 대체 얼마나 ‘확실한가?’ 우리는 꿈의 세계가 환상이고, 깨어있는 세계가 실재라고 확실히 단언할 수 있는가? 무엇이 ‘진짜’ 현실일까?

 

 

 

시간과 공간 너머로 현실-초현실의 구조를 훔쳐보다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초현실주의]라는 글에서 “단지 신념의 무력한 타협들과 대비했을 때에만 초현실주의 아니 초현실주의적 전통이 지닌 어떤 핵심 부분을 이해할 수 있다”고 썼다. 벤야민이 이런 말을 할 때는 파시즘이 유럽을 뒤덮고 강력한 집단적 신념이 견고한 성벽을 쌓아 올릴 무렵이었다. 그래서 지식인들은 사유의 바닥 깊숙이까지 내려가 어떤 ‘근원적인 의심’에 집착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다수의 대중에게 익숙하게 되어버린 것을 의심하는 것 그 자체가 예술적 탐구의 대상이 된다. 그 의심이 해답을 찾을 수 없는 ‘불가해성’으로 결론이 나더라도 예술은 그 ‘불가해성’을 문득 비춰 보여주는 것만으로 할 일을 다하는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불가해성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진실만은 확실해 보인다. 그것은 우리의 감각과 무의식, 이성이 어떤 ‘당위성’을 가지고 현실-초현실의 구조를 ‘발견’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우주의 먼지로서 여기에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명징하며 그래서 시간과 공간 너머로 우주적 원리를 훔쳐볼 수도 있다는 믿음이 작동한다. 그러한 믿음이 데 키리코 그림 속의 거리, 낯설지만 또한 동시에 익숙하게 보이게 하는 이유일 것이다.

 

 

후기 - 기묘한 거리 속의 현실


천체 물리학자가 쓴 [골디락스 애니그마](Goldilocks Enigma)라는 책은 어떻게 우주가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딱 정확한 온도와 환경으로 인간 존재에 적합하게 창조되었는가를 추적하고 있다. 추적 끝에 이른 결론은 우주는 인간이라는 의식적 존재를 통해 자기인식을 이룬다는 것이다. 즉 인간에게 인식되는 물리체계 외에 다른 체계를 가진 또 다른 우주가 존재할 수 있으며 결국 무엇이 ‘현실’이고 ‘가상’인지(혹은 초현실인지)를 알아낼 수 있는 길은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주식, CMS통장, 연예인, 드라마에 대해 떠들썩해 보이는 현실이 우리가 지금 우주의 이곳에 살면서 인식하는 진실한 현실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갑작스럽게 떠올랐다. 그럴 리가 없다. 우주와의 첫 호흡으로 잉태되어 지금 여기에 존재하며, 생각하고 사랑하고 어떤 운명에 이끌리듯 살아가는 인간에게 말이다. 그런 거짓된 활력이 우리의 현실이라고 믿기보다는 차라리 내게는 데 키리코의 무한히 적막하고 기묘한 거리 풍경이 훨씬 더 생생하게 ‘현실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조르조 데 키리코 (1888 ~ 1978)

조르조 데 키리코는 그리스 태생의 이탈리아인 작가로 그리스 볼로스에서 태어나 아테네와 피렌체에서 자랐고 뮌헨에서 공부했다. 1911년 니체가 여행했던 토리노를 거쳐 파리로 간 후 시인 아폴리네르의 찬사를 받고 초현실주의 작가 막스 에른스트, 살바로드 달리 등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1909~1919년까지 형이상학적 회화를 주창하며 “애니그마(불가해성, 불가사의)가 아니라면, 내가 무엇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라는 말로 자신의 세계관을 드러내었다. 1919년 이후 ‘장인정신의 복귀’라는 글을 통해 고전의 재해석을 지속해나갔고 1978년 90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다음검색
스크랩 원문 : 비공개카페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