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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리노에서 모든 것은 환영이며 정확하게 기하학적인 광장 너머로 우리는 무한한 것에 대한 향수를 읽을 수 있다” - 니체
공간, 사물, 그리고 시간의 낯선 느낌
 그리스의 작은 마을 볼로스에서 태어나 아테네와 피렌체에서 자랐고 뮌헨, 밀라노, 파리 그리고 페라라로 이어지는 기나긴 인생의 여정을 걸었던 조르조 데 키리코(1888~1978)는 젊은 시절 니체와 쇼펜하우어에 심취했고 니체가 했던 것처럼 이탈리아 토리노를 여행한 바 있다. 하필이면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무한한 것에 대한 향수”를 읽을 필연성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실제로 데 키리코의 이 작품은 그가 머물렀던 뮌헨의 한 건물과 유사하다는 연구도 있다). [거리의 신비와 우울]은 정확히 어떤 곳을 그린 것인지 알 수 없다. 토리노가 아닌 어디에서라도 본 적이 있는 듯한 장면이면서, 동시에 한 번도 실재한 적이 없는 것 같은 낯선 공간이기도 하다. 끝없이 계속되는 새하얀 회랑과 검은 건물, 굴렁쇠 놀이를 하는 소녀와 긴 지팡이를 든 키 큰 남자의 그림자 또한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우리 앞에 그려져 있지만, 뭔가 낯설고 불편하며 심지어 위협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이 화면 속에는 ‘공간’과 ‘사물’의 익숙함과 낯선 느낌이 기묘하게 공존할 뿐만 아니라 ‘시간’ 또한 그러한 것처럼 보인다. 도대체 이 사건이 벌어지는 시간은 과거인가 미래인가? 오래된 향수인가, 미래의 예시인가? 어느 한쪽일 수도 있지만 둘 다인 것은 아닐까? 니체가 “무한한 것에 대한 향수”라고 표현했고, 데 키리코가 회화적으로 해석했던 것은 이렇게 공간과 사물, 그리고 시간이 모두 하나로 연결된 채 어떤 알 수 없는 순환의 한 지점을 언뜻 드러내는 상태를 말하는 것은 아닐까?
현실과 초현실의 모호한 경계
 데 키리코의 [거리의 신비와 우울]은 소위 초현실주의라고 명명되는 1차대전 후 유럽미술 운동의 선구적인 작품으로 평가된다. 데 키리코에게서 회화는 그 자체가 해결할 수 없는 ‘불가사의’(Enigma)이며 이 ‘불가사의’만이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작가는 당연하게 주어진 조건이라고 믿어지는 것들에게서 안락한 친숙함을 빼앗고 어떤 ‘신비’를 발견할 때, 그래서 그것이 일종의 ‘계시’(Revelation)로 그의 감각에 포착될 때 예술적 창조가 시작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러한 초현실이 결코 현실의 바깥 혹은 저 너머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믿음이다. 실제로 초현실은 우리가 현실이라고 믿는 것에 딱 달라붙어 있어서(혹은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그 경계가 처음부터 모호한 것이었다. 우리가 경험하고 인지하는 세계가 대체 얼마나 ‘확실한가?’ 우리는 꿈의 세계가 환상이고, 깨어있는 세계가 실재라고 확실히 단언할 수 있는가? 무엇이 ‘진짜’ 현실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