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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는 “마티스의 뱃속에는 태양이 들어있다.”라는
표현으로 마티스의 뛰어난 색채 감각을 인정했다.
색채의 마술사로 불리는 앙리 마티스, 그가 만들어온 색의 세계로 들어가보자.
앙리 마티스는 1869년 12월 31일 프랑스의 외가에서 곡물상을 하는 아버지와 아마추어 화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마티스는 20세가 되기까지 예술에 거의 흥미를 보이지 않았는데 파리에서 1년 동안
법률을 공부한 뒤 법률 사무소의 서기로 일했다.
“자네는 회화를 단순화 할거야”
 그러던 중 스물 한살이 되던 해에 급성 맹장염에 걸려 몇 개월 침대 신세를 져야 했다.
이때 아들의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어머니가 물감과 함께 그림 그리는 법을 설명한 책을 선물해 주었는데,
이 일이 잠들어 있던 그의 영혼과 창작력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마티스는 변호사가 되기를 포기하고, 화가가 되기 위해 1895년(26세) 에콜 데 보자르(프랑스 국립미술학교)의 교수였던 구스타프 모로의 아틀리에로 들어갔다.
너그러운 스승인 모로는 자신의 화풍을 제자들에게 강요하기는 커녕, 오히려 개성을 개발하도록 격려했는데
마티스에 대해서는 “자네는 회화를 단순화 할거야”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1896년 27세의 마티스는 보수적 취향의 국립미술협회가 주최한 살롱에 그림 4점을 출품하여 성공을 거둔다.
정부는 그의 작품 [책을 읽는 여인, 1894]를 사들였고, 이때부터 그는 예술가로서뿐 아니라 인간으로서도 점점 더 자신만만하고 대담하졌다.
마티스는 1905년 여름을 지중해 연안의 콜리우르에서 앙드레 드랭과 함께 지냈다. 콜리우드에서의 체류는 마티스 창작 인생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는데, 사실주의적인 색채에서 빨강과 초록, 주황과 파랑, 노랑과 보라의 강렬한 보색대비로 바뀌었다. 이 시기에 콜리우르에서 함께 지낸 [드랭의 초상, 1905]을 그렸는데 이 초상에서 그는 그늘 부분에 어두운 색을 넣는 대신 대립되는 색을 칠해 사물의 명암이 아닌, 색과 색의 관계를 형성하는 색채적 구성으로서의 색면으로 표현했다. 배경의 색도 이등분되어, 그것은 주황, 노랑, 빨강의 주제가 가지고 있는 색과의 대비적 효과로서의 보색 관계를 형성하려 했다.
거침없는 색채구사로 인해 야수파라는 별명이 붙었다
 1905년에 마티스는 드랭, 블랑맹크, 마르케와 함께 파리의 가을 살롱전에서 합동 전시회를 열었는데 그들의 전시를 본 평론가 루이 복셀은 거침없는 색채 구사를 두고 그들에게 ‘야수들’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그리하여 20세기 미술에서 최초의 중요한 ‘이즘’인 포비즘, 즉 야수파가 탄생했다. 평론의 주요 표적은 마티스의 [모자를 쓴 여인, 1905] 이었다.
관례적인 방식으로 그려지던 형태는 진하게 칠한 물감자국으로 바뀌었다.
얼굴은 물감을 칠하는 행위의 영향을 가장 적게 받은 부분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모자와 의상의 폭발적인 색채 사이에
꼼짝 못하고 붙들려 있다. 이 문제작 덕분에 마티스는 야수파의 지도자로 인정받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