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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앙리 마티스와 야수파

작성자진원장|작성시간09.12.14|조회수1,282 목록 댓글 0

      

                 앙리 마티스와 야수파

 

 

 피카소는 “마티스의 뱃속에는 태양이 들어있다.”라는

                                    표현으로 마티스의 뛰어난 색채 감각을 인정했다.

 색채의 마술사로 불리는 앙리 마티스, 그가 만들어온 색의 세계로 들어가보자.

앙리 마티스는 1869년 12월 31일 프랑스의 외가에서 곡물상을 하는 아버지와 아마추어 화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마티스는 20세가 되기까지 예술에 거의 흥미를 보이지 않았는데 파리에서 1년 동안

                 법률을 공부한 뒤 법률 사무소의 서기로 일했다.

 

 

 

“자네는 회화를 단순화 할거야”


그러던 중 스물 한살이 되던 해에 급성 맹장염에 걸려 몇 개월 침대 신세를 져야 했다.

이때 아들의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어머니가 물감과 함께 그림 그리는 법을 설명한 책을 선물해 주었는데,

이 일이 잠들어 있던 그의 영혼과 창작력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마티스는 변호사가 되기를 포기하고, 화가가 되기 위해 1895년(26세) 에콜 데 보자르(프랑스 국립미술학교)의 교수였던 구스타프 모로의 아틀리에로 들어갔다.

너그러운 스승인 모로는 자신의 화풍을 제자들에게 강요하기는 커녕, 오히려 개성을 개발하도록 격려했는데

    마티스에 대해서는 “자네는 회화를 단순화 할거야”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1896년 27세의 마티스는 보수적 취향의 국립미술협회가 주최한 살롱에 그림 4점을 출품하여 성공을 거둔다.

 정부는 그의 작품 [책을 읽는 여인, 1894]를 사들였고, 이때부터 그는 예술가로서뿐 아니라 인간으로서도 점점 더 자신만만하고 대담하졌다.

 마티스는 1905년 여름을 지중해 연안의 콜리우르에서 앙드레 드랭과 함께 지냈다. 콜리우드에서의 체류는 마티스 창작 인생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는데, 사실주의적인 색채에서 빨강과 초록, 주황과 파랑, 노랑과 보라의 강렬한 보색대비로 바뀌었다. 이 시기에 콜리우르에서 함께 지낸 [드랭의 초상, 1905]을 그렸는데 이 초상에서 그는 그늘 부분에 어두운 색을 넣는 대신 대립되는 색을 칠해 사물의 명암이 아닌, 색과 색의 관계를 형성하는 색채적 구성으로서의 색면으로 표현했다. 배경의 색도 이등분되어, 그것은 주황, 노랑, 빨강의 주제가 가지고 있는 색과의 대비적 효과로서의 보색 관계를 형성하려 했다.

 

 

 

거침없는 색채구사로 인해 야수파라는 별명이 붙었다


1905년에 마티스는 드랭, 블랑맹크, 마르케와 함께 파리의 가을 살롱전에서 합동 전시회를 열었는데 그들의 전시를 본 평론가 루이 복셀은 거침없는 색채 구사를 두고 그들에게 ‘야수들’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그리하여 20세기 미술에서 최초의 중요한 ‘이즘’인 포비즘, 즉 야수파가 탄생했다. 평론의 주요 표적은 마티스의 [모자를 쓴 여인, 1905] 이었다.

 

관례적인 방식으로 그려지던 형태는 진하게 칠한 물감자국으로 바뀌었다.

얼굴은 물감을 칠하는 행위의 영향을 가장 적게 받은 부분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모자와 의상의 폭발적인 색채 사이에

    꼼짝 못하고 붙들려 있다. 이 문제작 덕분에 마티스는 야수파의 지도자로 인정받았다.

 

 

 

그의 작품은 가능한 한 가장 솔직한 방법으로 감정을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를 갖고 있는데,

이를 위해 “가장 아름다운 파랑, 노랑, 빨강 등 인간 감각의 저변을 뒤흔들 수 있는 색깔을 사용해야 한다”

는 것이 마티스의 주장이었다. [모자를 쓴 여인, 1905]을 그리고 나서 불과 몇 달 후 그린 그림이 [마티스 부인의 초상화, 1905]이다. 그림이 완성되었을 때 부인마저 불쾌감을 느꼈다고 하는데, 이 그림을 본 사람들이 마티스에게 “부인을 왜 아름답게 그리지 않았나?”라고 묻자 “나는 작품을 통해 아름다운 부인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그림을 그렸을 뿐”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즉, 주관적인 느낌으로 색을 표현해내고 있다는 것이다. 단순하고 평탄한 색면에 얼굴은 중앙의 녹색 가르마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나뉘고, 경쾌한 터치에 의하여 단숨에 완성한 듯한 생생함을 지니고 있다.

 

러시아 출신 컬렉터 세르게이 슈추킨은 1908년부터 마티스의 작품을 수집하기 시작했는데, 그해 가을 살롱전에서 ‘푸른 조화’라는 제목으로 전시된 그림을 샀다. 이 그림이 처음 그려질 때는 ‘초록의 조화’라는 제목이었는데 슈추킨이 1909년에 그림을 배달받고 보니 그것은 놀랍게도 [붉은 색의 조화, 1908]로 탈바꿈해 있었다. 마티스가 그림을 다시 그렸던 것이다. 초록색으로 실내와 창문을 통해 보이는 봄철 정경 사이의 대비가 너무 약했고, 또 푸른색으로는 추상성이 부족했다.

왜냐하면 벽과 식탁에 걸쳐진 천의 실제 색이 푸른색이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마티스의 세계를 가장 대표적으로 집약한 작품으로 이 그림에서는 원근감이나 거리감, 입체감이 모두 무시되고 평면적인 공간 위에 화려한 장식미만이 부각됐다. 테이블보의 무늬와 벽지의 무늬가 연속적으로 이어지며 색채에도 음영이나 명암이 거부됐다.

 

 

 

빨강, 파랑, 초록 3가지 색채만으로 만들어낸 격렬한 이미지

슈추킨은 1909년 모스크바에 있는 자신의 저택 계단을 장식하기 위해 마티스에게 [춤, 1909]과 [음악, 1910]이라는 제목의 또 다른 작품을 주문했다. [춤, 1909]에서 색채는 춤을 춘다.

마치 무한한 생명을 갈구하는 듯 힘찬 몸짓으로 춤을 추고 있는 사람들. 하나의 톤, 그것만으로는 하나의 색일 뿐이다.

두 개의 톤, 그것은 화음이며 생명이다. 한 색은 단지 그 이웃의 색과의 조화에 의해서 가치를 가질 수 있을 뿐. 빨강, 파랑, 초록 3가지 색채만으로 격렬하고 풍부한 이미지를 만들어낸 마티스는 “나의 파랑과 빨강과 녹색의 조화는 충분한 스펙트럼과 가치를 만들어낸다” 라고 말했다.

 

댄스와 짝을 이루는 작품 [음악, 1910]은 댄스가 약동적인 것에 반해 정적이다.

형태는 물론 색채 또한 인물의 빨강, 배경의 파랑, 녹색 식으로 철저히 단순화 되어 있는 만큼 화면상에서도 훌륭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마티스는 1906년 경부터 몇번에 걸친 아프리카 여행에서 아라베스크 무늬의 영향을 받게 되는데, 그것이 곧 색채의 단순화를 통하여 장식성을 달성하게 된다. 이 시기에 그린 그림이 [마닐라 쇼울을 걸친 마티스 부인, 1911]이다. 마티스 부인의 그림자가 벽 위에 얼마나 맑은 청색으로 놓이고 있으며 그것으로 인하여 온 화면을 얼마나 투명하게, 화려하게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작품이다. 

 

  

 

 

 

색채가 서로를 부르고 대답하는 단순한 그림의 매력


1916년 말 처음으로 니스를 찾은 이후 마티스는 매해 겨울을 니스에서 지내며 점점 지중해의 자연에 빠져들어 갔고, 1917년 경 니스에 거의 영구적으로 정착했다. 1935년~1936년(66세~67세)에 만든 작품은 대부분 누드다. 1935년에 그린 [분홍누드, 1935]에서 모델은 근접 촬영하듯 다가와 있고, 배경은 그저 장치일 뿐 원근법적인 깊이가 없다. 비평가 르네 슈보프는 이 작품을 보고 “단순화를 위한 줄기찬 노력 끝에 몇 가지 색채로 환원된 그의 그림은 그 색들이 서로 부르고 대답하며 노래를 부르는 그런 그림이다. 캔버스마다 아이의 꿈처럼 빛난다.” 라고 말했다.


1940년(71세) 마티스는 부인상 작품 중에서 정점으로 여겨지는 [루마니아식 블라우스, 1940]을 완성했다. 얼른 보기에 적, 백, 청의 세 가지 색만이 눈에 띄지만, 여기에는 적어도 열 가지 정도의 색채가 있다. 많은 색을 포함하면서도 이 그림은 단순 명쾌한 느낌을 주고 있으며, 통일된 평면적 장식성을 지니고 있다.

 

마티스는 1939년 70세에 아내 아멜리와 헤어지고 고독한 생활을 보냈다. 십이지장암 수술을 받은 1941년부터는 거의 모든 시간을 침대에 누워서 보냈다. 그러나 그는 화가로서의 삶을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기법으로 예술에 활기를 더했다. 그것이 바로 캔버스에 물감을 칠해서 그림을 그리는 대신 채색된 색종이로 형태를 만들어서 붙이는 기법이었다.

 

침대 위에서 붓 대신 가위를 들고 색종이를 오려나간 것을 계기로 마티스는 색채적 천재성을 자유분방한 감각과 함께 발휘하여 많은 걸작을 남겼다. 72세의 마티스는 “가위는 연필보다 훨씬 감각적이다”라며, 꽃과 구름, 별 등을 찬란한 색으로 표현하는 색종이를 이용한 작품을 만들었는데 이 무렵 완성한 작품들에는 절망이 아닌 어린아이의 쾌활함이 스며있다.

마티스는 1930년대 초부터 그의 모델이었던 리디아의 보살핌을 받으며, 니스가 내려다보이는 시미에의 레지나 호텔에 있는 널찍한 화실에서 살았다. 화실에 놓인 침대에 누운 채 기다란 장대 끝에 묶은 크레용의 도움으로 벽화 크기의 대형 그림을 그려야 할 때가 많았지만, 그의 작품에서 창조력이 약해진 조짐이나 슬픔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이 작품들은 그가 평생동안 그린 그림들 가운데 가장 대담하고 완숙하며 평화롭고 낙천적이었다.


 

 

색채에도 영혼이 있음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는 [푸른 누드 IV, 1952] 작품은 색종이로 만든 것이다.

그리고 마티스가 채택한 저 푸른빛은 ‘마티스 블루’라고 불린다. 마티스가 말년에 참여한 로제르 성당의 내부 장식은 최대 걸작으로, 마티스 예술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다. 아름다운 지중해의 니스는 마티스가 1917년에서 1954년연까지 인생의 거의 대부분을 그곳에서 살면서 작업해왔다.

그리고 천식과 심장병에 시달리던 마티스는 1954년 11월 3일 사망한다.

 마티스에게 있어서 색채는 보이는 그대로가 아닌 자신의 경험과 감정의 표현이었다.

“색채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그것이 무엇보다도 표현에 쓸모있게 되는 것이다.

                    나는 아무런 선입견을 갖지 않고 색을 캔버스에 놓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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