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겸재 정선은 34세에 처음 금강산에 다녀왔다. 이듬해 그린「풍악도첩」은 금강산의 감흥을 담아낸 대표적인 기록화이다. 모두 13첩의 편화와 1첩의 발문으로 구성됐으며, 겸재의 그림 중 최초로 연도를 정확히 표기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내금강?외금강?해금강의 주요 명승의 인상적인 장면을 담아 금강산의 형세와 특징을 실감나게 보여준다. 마치 관광명소 가이드 역할의 홍보용 엽서모음집 같다. 특히 작품 <백천교>는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림 중앙에 흰 모자를 쓴 인물이 재밌다. 교통경찰처럼 수신호로 이동방향을 안내하느라 분주하다. 자세히 보니 왼쪽 소나무 숲에도 챙이 넓은 흰색 모자를 쓴 몇 무리가 더 보인다. 군데군데 검은 갓을 쓴 이들은 양반네들이겠지만, 도대체 이들의 정체는 뭘까? 이들은 바로 승려들이다. 통일신라시대 창건된 유점사(楡岾寺) 아래의 백천교(百川橋)는 가마를 타고 금강산을 유람한 양반들이 나귀로 갈아타고 돌아가는 환승구역이었다. 조선시대의 금강산 유람은 말 그대로 히트 관광상품이었다. 그러다보니 양반들을 가이드해 줄 인원 또한 많이 필요했다. 이 역할은 대개 승려들이 맡았다. 당시로선 억불숭유 정책으로 불교가 홀대받았고, 마침 금강산에 인접해 사찰들이 많아 복잡한 지리를 안내하는데도 용이했을 것이다. 지금이야‘스님’들이 유람용 가마를 메는 가마꾼 겸 관광가이드에 나섰다는것이 상상이 안 가지만, 고깔 쓴‘가마꾼 스님’들은 그림에서처럼 당시의 시대상이기도 했다. 그렇게 고단한 하루도 웬 종일 모셨던 양반네가 우측 하단에서 대기하던 하인들이 몰고 온 나귀 등에 올라타는 순간 끝나게 된다. 그래서일까? 백천교는 시름을 내려놓는 휴식의 공간이며, 새로운 귀로 여정의 시작점이다. 백천교는 너나 할 것 없이 마찬가지로 설렘의 장소였을것 같다. 전통 수묵화는 물에 채색하지 않는다. 다만 그 흐름의 방향을 연상시키는 선묘로 표현한다. 작품 <백천교>의 남다른 묘미 역시 그 유려한 물결표현에서 찾을 수 있다. 끝을 알 수 없는 저 너머 계곡을 가르고 굽이굽이 흘러나오는 물살의 표현은 마치 쉬엄쉬엄 유랑에 나선 선비의 걸음걸이를닮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