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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선희] 내시의 딸 - 내시의 딸 18

작성자aja_aja|작성시간26.06.17|조회수53 목록 댓글 0

[변선희] 내시의 딸 - 내시의 딸 18

 

감나무 집에 미옥이 엄마가 오고 난 후 식구는 더욱 많아졌다.

밥 한번을 하더라도 솥 하나에는 어렵다고 할 만큼 대식구가 되고 난 후 머잖아 영윤의 책이 나왔고

그 책이 나오던 날 한권 받아도 될 것을 일부러 서점에 나가 한권을 사들고 들어오는데 아줌마가 우편물을 전해주었다.

이미 내가 산 영윤이의 책이었고 또 한 통의 편지와 소포였다. 간결한 글씨 흘림체로 내려쓴 그 글씨는 낯익었다.

이성훈씨의 글씨였던 것이다.
 “나는 사회주의 국가인 북한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내 고향을 찾아가는 것이다.”
그가 고향으로 떠났던 것이다.

오랜 세월 구척 담장 안에 갇혀있었고 밖으로 나와서도 결코 자유롭지 못하였으며 마음 또한 무거웠을 그 기간을 견디고

가장 인도적인 차원에서 장기수 북송을 마무리하였고 그 혜택으로 그가 북으로 떠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를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혈육으로 알았던 그가 떠나며 내게 남긴 글이었던 것이다.
 “미안하다. 승화야.

너에게는 너무나 미안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렇게 지금처럼 제대로 사랑받으면서 그렇게 살아가거라.”
나는 그 편지를 읽으면서 비로소 이성훈씨가 북으로 간 것을 알았다.

그렇게 장기수들의 북송이 된다는 이야기는 들었어도 막상 그가 떠났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잠시 멍한 마음으로 서있었다.
엄마와 마지막 만남 이후 그들은 어떻게 헤어졌던 것일까?

우리는 그 공항에 엄마와 이성훈씨 만을 남겨두고 그곳을 떠났고

우리는 예정대로 엄마가 그 분과 함께 떠나 어디에선가 살기를 바랐지만 엄마가 돌연 돌아왔던 것이다.
 “나는 너희 아버지를 가장 미더워한다.”
엄마가 했던 말이었다. 사랑했던 기억보다는 가장 미더워하는 사람과 같이 살겠다는 엄마의 의지는 진실이었던 것일까?
우리엄마가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았다.

부부로써 일생을 살아왔지만 성과는 무관한 생활을 하는 엄마가 어느 한편으로는 애처로웠던 마음도

분명히 있었지만 엄마는 그런 일상을 뛰어넘어 아버지를 의지하고 싶어 하였던 것이다.
내가 그렇게 멍청하게 서있는데 아주머니가 “왜 소포는 안 풀어보세요?”
 “아, 이 소포요?”
나는 무심하게 소포를 풀었고 그 안에서는 뜻밖에 옷 몇 벌이 나왔다.

우리 아이의 한복 한 벌과 내 옷인 듯한 한복 한 벌이었다.
 “한복이군요.”
아주머니가 먼저 옷을 펼쳐들었다.
 “세상에 이렇게 맞춤하게 한복을 꾸미다니… 너무 점잖은 색이네요.”
미색 한복에 자줏빛 깃을 들인 한복은 나에게 의외였다.

세상에 태어나 단 한번도 안아보지 못한 딸에 대한 어떤 그리움으로 그가 한복을 한 벌 샀던 모양이었다.

거기에 아들 아이 옷은 앙증스러운 그런 돌 복이었다.
 “이거 입어보세요. 어서.”
아주머니의 성화에 나는 안으로 들어가 옷을 입어보았다.

깃이나 소매나 품을 맞춤한 그런 옷이었다.
 “이거 가서 재신거에요?”
 “아닌데….”
 “아, 알았다. 혹시 암사동 사모님께서 품을 알려드렸나?”
우리 아주머니는 눈치도 빠르고 누구보다도 센스가 있는 사람이었다.

이제 이 집안의 어떤 일도 다 알고 보니 그렇게 추리를 하였고 나도 그렇게 추측하였다.
 “사모님께서 보셨으니 이리 배색을 잘 이루셨지.”
아주머니가 감탄하면서 아들아이를 안고 와 옷을 입혔다.
 “좀 크지만 좋으네요.”
아이가 싫다고 벗고 싶어 하는 것을 입혀보고 있는데 어느덧 서늘한 그런 가을바람이 불어왔다.
 “이제 완연한 가을이에요. 귀뚜라미도 울고.”
아주머니가 열어놓은 문으로 들어온 먼지를 걸레로 닦아내면서 말하였다.
나는 이상하게 자꾸 눈물이 나왔다. 자꾸만 자꾸만 나는 눈물이 나왔다.

이성훈씨가 떠났다는 편지, 그리고 자꾸 엄마가 생각났지만 눈물을 감추려고

방에 들어가 한복을 옷장 안에 걸어놓다가 문득 생각한 것은 작은아버지였다.

내 아버지였는데, 어릴 때 누구보다 나를 더 사랑하고 아껴주던 작은아버지.

내 생부가 이성훈씨가 아니라 우리 작은아버지였는데 나는 지금 작은아버지가 생각났던 것이다.
 “나 좀 나갔다 와요.”
 “그래요. 그럼.”
아주머니가 내 얼굴에 눈물을 흘깃 보았나 보다.

아무런 말도 없이 부엌으로 숨었고 나는 부엌으로 따라 들어가 술 한 병을 갖고 나왔다.
 “술을요?”

나는 대답 없이 그렇게 혼자 초안산으로 갔던 것이다.
거기 우리 아버지가 가장 그리워하는 조부님의 산소가 있었고 거기 좀 아래에는 작은아버지의 산소도 있었던 것이다.

나는 비석골 공원 가까이에 차를 세우고 혼자서 부지런히 산을 올랐다.
초안산에 오르던 것은 늘 아버지와 함께였던 기억이 났다.

누구보다도 초안산을 좋아하는 우리 아버지.

아버지가 초안산을 좋아하는 것은 조부의 산소가 있는 이유가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아파트가 들어선 초안산은 이제 제법 사람들도 많았다.

집 가까이에 있는 산이라 사람들은 즐겨 초안산을 찾게 된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 몇몇 사람들이 초안산에 골프연습장을 세우려 하였다.

이미 있는 묘들을 밀어버리고 골프연습장이 설 때 많은 사람들이 반대를 하였던 모양이었다.

그곳에 아버지도 있었다.

그렇게 사람들의 반대가 되고도 골프연습장은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산 다람쥐가 또르르 굴러가는 모습이 보였다.

행동이 재빠르고 의심이 많아 그렇게 구르듯이 달려가다가도 주위를 살피는 모습이 여간 귀여워 보이지 않았다.
오른쪽으로 향하여 올라가는 내 곁에 사람들이 지나갔다.

초안산이 좋아 운동 삼아 초안산을 오르는 사람들이리라.

그 곁으로는 오래된 소나무 숲이 보였다.

이 숲은 원래 이렇게 초안산에 있던 숲이 아니었다.

오밀조밀한 무덤. 그 무덤 앞에는 연꽃을 새긴 향로석도 있고 유난히 공을 들인 흔적이 보이는 무덤들이 대부분이었다.
 '어쩌면 저 무덤들은 다 같이 여인들의 무덤은 아니었을까?’
조부의 묘를 정한 것을 보면 어쩌면 이곳도 궁궐의 생활과 무관하지 않은 사람들의 묘가 있었던 자리일 수도 있다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저렇게 공을 들이고도 그 후로 자손들이 돌보지 않는다는 것은 그들은 다같이 자손이 없는 사람들일 수도 있고,

그렇다면 궁궐에서 일하던 궁녀들의 무덤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 무덤들이 오밀조밀 들어선 숲에 소나무가 울창한 것은 어느 누군가가 일부러 그 무덤들을 무시하느라

소나무 숲을 마련한 것이다.
묘에는 오랜 시간 흘러온 해묵은 솔잎이 쌓여 마치 먼지를 뒤집어 쓴 듯 온통 회색빛이었다.

그 누구도 찾아주지 않는 그런 무덤들.

사람들은 소나무 숲 덕분에 이 숲에 묘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지나치리만큼 이제 묘는 소나무 숲에 덮여있었다.
소나무는 묘를 피하여 심어진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보란 듯이 묘 사이로 커다란 소나무가 솟아있기도 하고 묘를 의식하지 않고 총총히 박힌 소나무는

거기 이름 없는 묘들의 지붕이 되어있었다.
어디선가 산새가 우짖었다. 아름다운 소리였다.

후드득 산새가 날아가기도 하고 얕은 나뭇가지에 앉은 새들이 나뭇잎 사이로 얕게 뛰어다니듯 옮겨 앉고 있었다.
초안산은 그런 산이었다.

오래 전부터 거기 있었지만 개발에 밀려 자꾸만 자꾸만 산은 허물어지고 거기 남은 묘들은 이제 사람들의 기억 밖으로

밀려나 숨듯이 거기 숲 속 그늘에 가려져 있는 것이다. 나는 문득 내 생모라는 이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이곳에 잠들어 나를 보고 있을까?'
평소에도 묘라면 먼저 무섬증이 들곤 하였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가슴이 에여왔다.

얼마나 기구한 운명의 소유자였기에 하나뿐인 자식을 낳고 첫국밥도 못 먹고 그렇게 세상을 떠나가야 했을까?

아버지가 나를 데려온 것은 엄마를 위해서였다고 하였다.

아기가 죽자 갓 태어난 나를 엄마에게 데려다 주어 천우신조로 엄마도 살리고 나도 살게 되는 그런 운명이 되었고

나는 진짜 엄마를 얻은 것이다.

내 어렸을 때 왜 그렇게도 작은아버지가 좋았던 가하는 생각이 났다.

작은아버지는 내게 삼촌 이상의 그 무엇이 있었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하여도 내가 무슨 말을 하여도 아버지보다 먼저 내 말에 귀 기울였던 작은아버지.
평생을 가장 불우하게 살았던 사람도 우리 작은아버지였다.

단 한번의 사랑으로 아이를 얻었지만 그 대가는 그 아이를 낳는 여인을 잃는 것이었고 갓 태어난 핏덩이를 안고

형수에게 안겨주며 삼촌으로 살아야 했던 작은아버지.

그러나 정작 새로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도 아버지의 강압에 전혀 사랑하지 않는 여인을 맞아들이고

그 여인에 의하여 갈가리 찢기고 망가지는 아픈 가슴을 겪었던 것이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거기 우리 작은아버지의 산소에 갔다.

비록 평생을 호강 한번 안 하고 늘 일만 하면서 살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아버지의 보살핌 덕으로 산소의 떼는 좋았고 언제나 제대로 관리된 아주 양지바른 곳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 산소 앞에 서서 절을 하였다.
 "우리 승화는 절을 그렇게도 잘 해."
내 절하는 모습을 보려고 온갖 화장품 빈 갑을 얻어 내 소꿉으로 가져다주던 그런 다정한 삼촌이었다.
 "그래, 승화야."
늘 눈을 가늘게 뜨고 웃으면서 나를 바라보던 작은아버지는 나를 많이도 업어주었다.
그 분잡한 상갓집에 나를 데려가면서 "내 가다가 업어주지 뭐."
그러면서 언제나 나에게 등을 내밀었었다.
다소 등이 굽고 살이 없어 딱딱한 느낌이었어도 나는 작은아버지의 등이 넓은 바다만큼이나 넓었고 편안하였다.

길이 아무리 구불텅거리고 사방이 아무리 깜깜해져도 나는 작은아버지의 등에 업혀서는 그대로 잠이 들 수 있었다.
그때도 나는 작은아버지가 어떠한 경우에도 나를 놓지 않을 것 같은 확신이 있었다.

그 확신은 나를 작은아버지 등에서 그대로 잠들게 하였고 그 당시에 아버지는 다소 건강에 문제가 있으니 하면서

오히려 건강에 문제가 있는 아버지가 다행스러웠다.
나는 아버지의 등에 업힌 일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 아버지는 늘 완고하고 무서운 사람이었다.

별로 대수롭지 않게 보아 넘길 일도 아버지는 아주 진중하게 너무 엄하게 이야기 하는 버릇이 있었고

때때로 나는 그 습관이 배인 아버지의 어투에 중압감을 느끼곤 하였던 것이다.
 "작은아버지, 저 승화가 왔어요."
나는 그 곁에 앉아 잘 자란 떼 사이로 간간이 질긴 뿌리를 내린 쑥을 뜯어내고 있었다.
 "저를 보고 계시나요?"
아버지라고 고쳐 불러지지는 않았다.

나의 기억 속에 가장 친근한 이름은 작은 아저씨, 작은 아버지였다.

그 이름을 새삼 아버지와 혼동하여 부르며 내 기억을 지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작은아버지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금방이라도 '승화야' 하면서 어디에선가 내게로 성큼 걸어올 것 같은 그런 느낌에 주위를 둘러보는데

갑자기 정말 어디에선가 "승화야."하는 소리가 났다.
나는 둘러보던 눈으로 다시 둘러보는데 거기 숲 속에서 허연 옷깃이 보이고 모시옷을 입은 아버지가 성큼 걸어 나타났던 것이다.
 "아버지."
 "승화구나."
정말 아버지였다.
 "승화가 와 있었구나."
거기 낯익은 음성은 희수오빠였다.
 "오빠."
 "내 혼자 온다고 하는데도 부득부득 따라나서는 구나. 허허."
아버지는 희수오빠가 대견한 모양이었다.
 "오빠."
 "언제 왔어? "
 "얼마 안돼."
내 곁으로 아버지와 희수오빠가 걸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 몸이 그렇게 불편하신데 초안 산에는 어떻게 오셨어요?"
 "내 아무렇지도 않다."
아버지가 그렇게 말하면서 작은아버지의 무덤을 훠이 둘러보았다.
 "자네는 편안하신가?"
아버지는 작은아버지의 묘 곁으로 와서 생전의 동생에게 하듯 그런 음성으로 물었다.
 "여기 자네 딸이 이렇게 장성해서 여기 서있네."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말에 희수오빠가 나를 쳐다보았다.
 "자네가 낳았고 자네하고 나하고 같이 기른 딸이 말일세."
 "아버지."
 "그래. 네가 이렇게 여기에 올 줄 내 알았다.

어려서부터 이상스럽게도 너는 네 숙부를 그렇게도 잘 따르더구나."
아버지가 거기 선 채로 작은아버지의 묘를 둘러보면서 말하였다.
 "아버님. 승화가 숙부님 딸이라니요?"
무언가 믿기 어려운 듯 희수오빠가 우리를 쳐다보았다.
 "그렇게 오래 지난 일인데 내 기억은 그 시절의 기억일수록 더욱 생생하다.

왜 그렇게 오래된 기억이 요즘 따라 자꾸만 더 생생해지는 걸까?"
아버지는 대답 대신 말하였다.
 "두 사람 다 따라 오거라."
우리는 말없이 아버지의 뒤를 따랐다.

작은아버지 무덤 바로 위의 무덤이었다.
 "예가 네 생모의 묘이다."
비석 하나가 없이 서있는 그런 쓸쓸한 무덤이었다.
초안산에는 규모는 별로 크지 않아도 웬만한 묘에는 다 묘비며 문인석이며 동자석이 있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더구나 무덤 위에 연꽃을 아로 새긴 아름다운 문양의 향로석이 있고 그 누군가 한 번도 돌보지 않는 그 무덤들은 그 옛날 그 시절의 영화로움을 비웃기라도 한 양 모두가 하나같이 쇄락해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하지만 봉분만 봉긋할 뿐 아무런 그 장식도 없는 그 묘는 누군가의 손길을 받은 양 늘 단장되어 있었다.
 "이보시게.

여기 당신의 여식이 이렇게 장성하여 왔소.

이제 편안하게 눈을 감으시게."
아버지는 그렇게 허공에 대고 공허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버지께서 그간 돌보셨어요?"

나는 아버지와 초안산을 온 적이 여러 번이었지만 이 묘 가까이 온 기억은 없었다.

아버지는 늘 초안산에 와서 조부모님의 묘를 단장하고 여기에 와서 이렇게 벌초도 하고 때때로 떼도 입혔던 걸까?
 "아니야. 나는 그저 지나쳤을 뿐이다.

내가 여기 온 것은 네 작은아버지를 내다 버리러 와서 이었다.

젊디젊은 나이에 그렇게 허망하게 간 것이 못 믿어져서 나는 여기 와서 탄식하였다.

그렇게 적적하였냐고 그래서 그 사람을 그렇게 빨리 데려갔느냐고 원망을 했지.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여기 이 사람은 네 작은아버지를 그렇게 데려갈 만큼 모진 사람은 아니었어."
아버지가 어느덧 멀리 불암산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있었다.
 "어서 인사 드리거라."
아버지의 지시로 나는 거기 절을 하는데 갑자기 휙 하고 바람이 불었다.

어떤 서늘한 그런 바람이었다.

이제 여름이 다 가긴 하였어도 갑자기 오싹 한기를 느끼게 하는 그 바람이 내 등가로 흘렀다.
 "아, 날씨가 아직도 이렇게 덥구나. 산인데 바람 한 점이 없네."
나는 그런 희수오빠의 말에 뒤를 돌아보았다.

오빠는 정말 더운지 이마에 땀을 닦아내고 있는 중이었던 것이다.
 "이 분을 평생 돌보신 분은 저 산 아래 사시는 만신님이시다."
 "만신이요?"
내가 묻는데 오빠가 "무당이라 말입니까?"하는 것이었다.
 "허허 그래. 무당이 맞지.

그 만신님이 이곳을 돌보고 계셔."
나는 얼른 "그럼 제가 태어나던 때 그 집을 빌려주었던 그 만신이시란 말이에요?"
 "그렇다.

나보다도 연치일 텐데 아직까지 정정하게 이 초안산을 지키고 있는 사람이지."

나는 언젠가 그 무당을 본 적이 있었다.

초안산을 내려가는 계단에 묻힌 동자석을 꺼내던 그때 나에게 알 수 없는 덕담을 하던 그 할머니를 기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리 의리가 좋은지.

여태껏 이 묘를 돌보고 제사를 지내곤 한다는 구나."
 "그렇군요."
나는 내 생모의 얼굴을 전혀 모르고 그 말만을 들으면서 기가 막혔다.
어찌된 운명이 어릴 때는 내 생부라는 사람이 그토록 궁금하였고 또한 무시무시하였는데 어느 날 뒤바뀌어

내 생모란 이를 궁금하게 생각하게 된 것일까?
 "그럼 이 분은 왜 돌아가셨어요?"
희수오빠가 물었다.
아버지는 천천히 자리에 앉더니

"이 아이를 낳다가 그리 되었단다.

그 당시 네 어머니가 아이를 사산했어.

그 당시 나는 별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아이를 잃으면 다시 죽으려 할지도 모를 네 어머니를 위해 엄마를 잃고 사경에 빠진 어린 아기를 위해 나는 그것이 최선이었다."
나는 고개가 숙여졌다.
 "진작 알아서 네 숙부랑 단란하게 살았더라면 어쩌면 네 어머니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지도 모르지."
다시 바람이 불어왔다.

좀 전에 한기를 느끼던 그런 바람이 아니라 시원하게 이마를 스쳐가는 그런 바람이었다.

어디에선가 산새가 또르르르 꾀꼴 울었다.

초록으로 덮인 초안산은 아제 막바지 여름을 넘기면서 수풀 속에서 벌레들도 많았다.

모기가 날아다니고 풀벌레들이 많이 날았다.
그때 문득 희수오빠가 "아버님, 참 이상해요. 여기 산 모기들은 사람을 안 무는 걸요."
그러고 보니 아직 모기가 많아 여기 저기 날아다니는 데도 나는 단 한번도 모기에 물리지는 않았던 것이었다.

 "이 산 영령들이 안 계시오. 그라서 그렇소."
휘청거릴 듯한 자세로 단정하게 머리를 빗어 넘긴 예전의 그 무당 할머니였던 것이다.
 "할머니."
나는 그 할머니를 알아보았다.
 "무고하시었소?"
 "아이고, 홍대감님 이셨어라야."
할머니는 우리 아버지를 알고 있었다.
 "그람 이 새닥이?"
나는 새댁이라 부르는 그 할머니가 나를 쳐다보았다.
 "내 여식이라 부르는 조카라오."
 "하이고."
할머니가 갑자기 무서운 속도로 내게 달려들어 울음을 토해내었다.
 “그랐소이. 그랐소.

어쩐지 내 이 처자의 얼굴이며 심성이 자꾸만 떠올라 조석으로 빌었었소.

그 처자 복록을 내 조석으로 빌었었소.”
나를 끌어안은 할머니가 커다란 목소리로 울기 시작하였다.
 “어디서 이렇게 장성해 있었을꼬.”

나를 두고 이렇게 말해왔던 이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일찍이 공주할아버지가 그랬고 양어머니가 그랬고 내 진외가 사람들이

그랬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나를 왕실 종친의 혈육이라 여기며 감회를 느낀 것들이었지만

미혼모로 쓸쓸하게 아이를 낳으며 죽어갔던 내 생모를 기억하며 눈물 흘린 이는 아마도 여기 만신이 처음이었을 것이다.
 “살아있으니 이렇게 만나는 거이.”
눈물이 흐르는 그 무당할머니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그라치 그라치, 나야 뭐 늘상 그라치.

내 산에 갈 날이 멀지 않은 게 눈에 보여, 어디 누울 땅 하나 찾아두고 수시로 올라오지만

서두 내 죽으면 여기 버려줄 사람 찾은 것 같아 반갑소. 그리 해  줄 거지?”
만신은 하필 나에게 자신이 죽으면 장례를 치러달라는 부탁을 하였던 것이다. 아버지가 헛기침을 하였다.
 “허락해 주시소. 나는 그렇게 하고 싶소.”
희수오빠가 보다 못하여 말하였다.
 “그러겠습니다.

우리 승화하고 저하고 그렇게 하겠습니다.”
만신의 얼굴이 환하게 빛나며 우리들에게, “갑시다.

이내 집이 멀지 않으니 거기 가셔서 목이라도 축이고.”
아버지는 싫은지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만신할머니는 너무나 간곡하게 아버지의 옷자락을 끌었고 아버지도 헛기침 한 번으로 그곳으로 따라나섰던 것이었다.
우리들이 그렇게 한참을 산길을 내려가고 있었다.

그 산길에서 만신할머니가 혼잣말처럼, “멀리 가거라. 어서어서 숨거라.”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아무도 없는데 그 할머니는 계속 말을 하는 것이었다.
 “다리 한 짝이 없으니…”
그 소리에 숲 속을 보는데 거기 정말 한 마리의 토끼가 있었다.

그런데 그 토끼에게는 다리가 한 개 없었던 것이었다.
 “가 있거라. 내 있다가 다시 올게.”
마치 알아듣는 사람에게 하는 것처럼 토끼에게 그렇게 말하고 꼬불렁 꼬불렁 언덕길을 내려가는 것이었다.

나는 한 다리가 없는 토끼와 그 토끼가 야생인 초안산에 살고 있는 것이 신기하였다.

더구나 그 토끼는 만신 할머니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하는 양 숲 속으로 숨어버렸던 것이었다.
 “저 토끼가 할머니 말을 알아듣나요?” 내 말에, “하모. 하모.” 건성으로 이야기를 하였다.
희수오빠가 뒤에서, “사람들이 초안산에 내다버린 것이다.”
 “그래?”
 “요즘 애완동물을 집에서 많이 기르잖아.

기르다가 싫으면 이렇게 산에 버리는 거지.

아마 저 토끼도 사람의 손에 기르던 토끼일 거야.”
그 말에 만신할머니가, “맞소. 어째 말하는 품이 영신 들린 것만 같소.”하면서 웃는 것이었다.
 “초안산에는 버려진 것들도 많지. 아이들도 버림받고 산에서 울며 지나가고 거기 한 쪽에

세상이 두려워 죽으려고 오는 사람도 있고…

내 비 오는 날은 서러워서 귀를 틀어막는다.

세상의 온갖 영혼들이 죄다 모여 슬프게 울부짖는데 너무 너무나 고통스럽다.”

그렇게 산길을 걸어 도착한 곳은 꽃들이 만발한 움막이었다.

꽃들이 단장된 것으로 보아서는 한가한 시골집 풍경처럼 정겨웠지만 그 지붕은 비닐로 덮고

또 어디서 얻어다 놓은 물건들로 보통 쇄락한 집이 아니었던 것이다.
 “여기 앉으소.”
평상을 가리키며 안으로 들어가더니 지체 없이 조그만 주안상을 가지고 왔다.
 “한 잔 하소.”
술이라면 평생을 그렇게 좋아한 아버지였지만 당뇨를 알고 난 후부터는 좀 체로 술을 입에 대지 않던 아버지가

얼른 그 술상 앞에 앉았다.

희수오빠도 별 다른 말없이 아버지에게 술을 따랐다.

아버지가 한잔을 마시는 것을 보고 만신할머니가 다가앉더니 자신의 앞에 술잔을 가져갔고

희수오빠가 한잔을 부으려는 것을 마다하고 스스로 술을 딸아 한 잔을 쭉 마시더니, “이거 받으소.”
나에게 내민 것은 보자기에 싼 물건들이었다.
 “이게 거기 생모가 내게 남긴 것들이라오.”
나는 거기 앞에 놓인 지갑을 열었고 그 속에서는 사진 한 장이 들어있었다.
 “어, 이 분은?”
나는 그 사진 속의 인물을 본 적이 있었다.

언젠가 초안산에서 일하던 작은아버지의 지갑 속에서 보았던 그 사진이었다.

나는 검은 원피스의 여인을 노진이 아줌마로 생각을 하였었고 또 그렇게 오랫동안 믿었던 적이 있었다.
 “정말 많이 닮으셨네.”
나는 그 사진을 다시 보았다.
가녀린 몸매, 그러나 눈이 크고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그 당시에 이런 원피스 차림이었다면 상당한 멋쟁이였을 것이다.

이런 멋쟁이 아가씨의 몸으로 초안산으로 와서 그곳에서 만난 낯선 남자와 하룻밤을 보내고

나를 잉태하고 또 그렇게 죽어갔던 그 운명에 가슴 아팠다.

태어나서 한 번도 엄마라 불러본 적이 없는 그런 낯선 이름.
내가 처음 노진이 엄마를 보았을 때 가슴이 철렁하도록 아름답다 느꼈고 이유 없는 친근함을 느꼈던 것도

어쩌면 내 생모에 대한 나의 무의식에서 비롯된 것이었을까?
 “거두어 두어라.”
아버지가 나에게 말하면서 술을 또 한 잔 마셨다.
 “진작에 내게 알려주었으면 좋았을 것을.”
만신할머니는, “그 처자가 죽어도 이야기를 하지 않았소. 내가 미리 알기만 했더라도 득달같이 달려갔을 거이지.”
어느새 만신할머니도 얼굴이 붉게 물들고 아버지도 그러했다.
그렇게 술을 마시던 만신할머니가 말하였다.
 “아가, 이자 그 지긋지긋한 이씨들 망령에서 벗어 나거라.

니는 남양홍가다. 어서 퍼뜩 나오거래이.”
갑작스러운 만신할머니의 말에 희수오빠가 놀라서 “아니, 아이더러 이씨 집에서 나오라니요?” 했지만

나는 그 뜻을 알 것도 같았다.
나는 언젠가부터 사직동 집이 너무나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나는 이제 종친의 핏줄도 아닌데 굳이 그곳에서 살 아무런 이유를 찾지 못하였던 것이다.
 “아니야, 오빠.

나 한참 전부터 사직동에서 나오려고 했어.

그 집은 사실 나하고 관련이 없잖아.” 
희수오빠도 그 뜻을 비로소 안 것 같았다.
 “그라치. 그라치.

초안산이 보이는 곳으로 오소.

어마니도 보고 아바지도 보고.”
만신이 중얼거리듯 말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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