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혜린의 <홀로 걸어온 길>에서

작성자Byron Kim|작성시간11.05.09|조회수43 목록 댓글 0

 

<홀로 걸어온 길> 에서... 

  나에게는 고향이 없다.

  아스팔트 킨트라는 단어는 나에게도 쓸 수 있는 단어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부임지를 따라 이북의 끝인 신의주에서 보낸 2년간은 내 어린 나이와 함께 잊혀지지 않는 그리움 때문에 고향이라는 글자를 볼 때면, 언제나 내 뇌리에 떠오르는 것이 신의주다. 초등학교 1학년을 수료했을 때 나는 서울을 떠나 그곳으로 갔다.


  <중략>


  나는 응석받이 어린애 (spoiled child)였다. 나에 대한 편견 때문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자주 말다툼한 것을 보아도 그것을 알 수 있다.

  물질, 인간, 육체에 대한 경시와, 정신, 관념, 지식에 대한 광적인 숭배, 그리고 내부에서의 그 두 세계의 완전한 분리는 그러니까 거의 영아기부터 내 속에 싹트고 지금까지 나에게 붙어있는 병인 것이다.

  아버지는 가끔 나를 데리고 부둣가를 가셨다. 내 눈에는 바다보다도 더 넓게 보였던 압록강이, 녹색으로 흐르는 것을 바로 눈 앞에 볼 수 있는 곳엔 백러시아인이 경영하는 다방이 많았다. 벽돌 페치카가 놓인 다방에서는 축음기를 틀고 금발이 허리까지 오는 러시아처녀가 음악에 따라서 노래하고 있었다. 스텐카라진 같은 러시아 민요였던 것 같다. 거기에ㅓ 나는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어떤 날 나는 부둣가에서 뗏목이 떠내려 오는 것을 본 일도 있었다. 집채보다 더 큰 뗏목에는 수명의 남자들이 타고 있었고, 모두 검붉게 탄 건강한 체구들이었고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나는 뗏목이 안 보이게 될 때까지 부둣가의 콘크리트 바닥에 앉아서 바라보고 있었다. 무언지 전신이 뒤흔들리는 듯한 감동이 내 어린 마음을 찔렀다.


  먼 데에 대한 그리움, 어디론지 멀리 멀리 미지의 곳으로 가고 싶은 충동은 그때부터 내 마음속에 싹튼 것 같다.

  그때부터 내 눈은 실향병(失鄕病: die heimatlosen)의 눈, 슬픈 눈으로 된 것 같다.

  어쩌면 내 천성에 유랑 민족 짚시의 피가 한방울 섞여 있는지 모르고, 그것이 이국적 도시에서 보낸 유년기로 인해 눈뜨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혼자 살고 싶었다. 내 일생을 인식에 바치고 싶었다. 자유롭게.....


  <중략>


  작은 우연이 일생을 결정하기도 한다. 인간은 유리알처럼 맑게, 성실하고 무관심하게 살기에는 슬픔, 약함, 그리움, 행수를 너무 많이 그의 영혼 속에 담고 있다.

  의식과 무의식이 일체가 되고 그와 객체 관계가 지양되는 투명한 순간은 우리에게 그렇게 자주 주어지지 않는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분열된 의식과 전 우주에 대한 고독감에 앓고 있다. 인식과 플라툰이 말하는 에로스와 합하려는 노력만이 우리를 고독에서 구출한다.

  그러나 우주선이 달세계로 가는 시대에 사는 인간은 영혼의 소박함을 잃은 지 오래된다. 사랑도 변형된 호기심인 경우가 많고 사랑의 행위에서도 지적인, 너무나 지적인 것인 현대인이다. 누구나가 자기의 원칙과 독백 속에서 감금되어 있다. 자아에 망집하고 있다.


  <중략>


  유년기 - 그것은 누구에게나 실낙원이다.

  [더 이상 어린이가 아니라는 것은 부도덕한 일이다]라고 어떤 시인은 말했다. 어린 시절의 놀라움, 신비와 호기심,, 감동에 넘친 지루하지 않은 한 페이지다. 그리고 우리는 몇살이 되어도 그 장을 펼쳐보고 싶어진다.

  영원한 그리움 - 그것은 고향에 대한 것이다. 원류(源流)에 대한 동경... 영원한 고향에 대한 거리감을 앓는 것, 그리고 그곳으로 귀향하려는 노력을 플라톤은 향수라 했다.

  어릴 때 우리는 모두 초시간적이고 불사신이었다. 존재의 상처를 모르는 이상주의자였다. 성장한 뒤에도 어린 마음을 상실치 않는 이상주의자, 즉 영원한 유아는 현식과 부딫칠 때 늘 생사를 건 모험을 하게 된다. 킬케고오르는 말했다.

  [어린애로서 즉 아이디얼리스트로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은 지난 일일뿐더러 종종 카타스트로프(破局)를 가져온다.]

  생에 좌초한 [어린애들] 위에 디디고 서서 개가를 울리는 것은 어느 세대에나 영원한 속물들, 인간을 목적으로 알지 않고 수단으로 아는 바리새인들, 현명한 준법자들, 투철한 리얼리스트들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마음의 고향이, 이데아가 없다. 따라서 유년기가 없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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