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마태복음 제19강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말씀/마16:13-28
요절/마16:15,16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교회의 핵심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말씀은 3가지 부분에서 기독교의 핵심을 말해줍니다. 그것은 첫째, ‘예수님은 누구신가’, 둘째, ‘그가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가’, 셋째, ‘그러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가’입니다. 이 시간 이 3가지를 함께 살펴보면서 우리가 우리 신앙의 초점을 어디에 맞추어야 하는지 생각해보며 은혜 나누고자 합니다.
I. 주는 그리스도 (13-20)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으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의 무리를 떠나 이곳 한적한 곳에 와서 제자들과 교제하고자하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그동안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해 무엇을 배웠는지 테스트해보기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들에게 두 개의 질문을 던지십니다. 먼저는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고 하느냐’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더러는 세례요한이요, 더러는 엘리야요,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에 하나라고 한다는 대답을 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사람들은 다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요,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회개의 메시지를 외치고, 우상숭배자들과 싸우고, 민족을 위해 눈물을 흘린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 보기에 예수님은 훌륭한 사람이었지 그 이상은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잘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하는 그들에게 예수님은 아직 그들 신앙에 결정적인 분은 아닙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이 자기 신앙에 결정적인 존재가 아니라면 그것은 아직 기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분명히 아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님이 이번에는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헬라어 원문에는 ‘너희는’이라는 단어가 강조됩니다. 이 말씀은 다른 사람은 그렇게 말한다고 치자. 그러면 이제까지 나와 함께 지내온 너희들에게 나는 누구냐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시고 이제까지 늘 함께 하셨습니다. 이런 가운데 제자들이 예수님으로부터 말씀을 배우고 예수님의 하시는 일들을 하나하나 보게 하셨습니다. 함께 고생하고 함께 웃고 또 함께 울기도 했습니다. 이러면서 그들은 무리와는 달리 예수님이 누구신지 인격적으로 깊이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예수님을 제대로 알게 되었습니까? 누가 뭐래도 자기들이 믿고 고백하는 예수님이 있습니까?
제자들의 대답이 어떠합니까? 1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제자들 중에 먼저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질문이 떨어지자마자 선뜻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그의 대답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첫째 예수님은 ‘그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NIV영어성경을 보면 ‘Your are the Christ’ 곧 인류가 이제까지 기다려오던 성경에 약속되었던 바로 그 그리스도, 곧 구원자라는 것입니다. 이 고백은 예수님에 관한 핵심적인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죄로 인해 타락하여 멸망의 길을 가게 되었을 때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기로 작정하시고 계획하셨습니다. 특히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여 구원자 그리스도를 보내주시겠다고 많은 선지자들의 예언을 통해 때마다 줄기차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 예언과 언약의 말씀을 따라 그리스도를 기다려왔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리고 예수님을 배우면서 “아, 이분은 우리가 기다려왔던 바로 그 메시야, 곧 그리스도시구나”하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감격적인 일입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이렇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심을 계기로 마침내 이 아름다운 신앙고백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고백에는 놀라운 사실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불릴 자격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능력이나 말씀이나 인격을 볼 때 이분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해도 조금의 부족함이 없다는 뜻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해준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인간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격상시켜 한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글자 그대로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성품, 그 인격 자체가, 그 본질 자체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얼마나 놀라운 발견이요, 깨달음입니까? 참으로 인류역사 속에서 너무 위대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는 베드로만의 고백이 아닙니다. 사도 요한도 그의 서신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이시라(요일1:12,2).” 또 마태는 이 예수님을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신 임마누엘의 하나님이라고 기록하였습니다(마1:23).
베드로의 이 고백은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여기에 경이로운 진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천지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다니, 성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이렇게 보내주셨다니, 이 사실은 모든 신앙적 경이로움의 중심에 우뚝 서 있습니다. 물론 베드로가 이런 신앙고백을 했을 때 그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님을 얼마나 이해했는지는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 예수님에 대해 분명하게 안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은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베드로는 이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요? 그의 영적 통찰력이 남달랐기 때문이었을까요? 이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어떠합니까? 1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여기서 ‘바요나 시몬아’라는 말은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는 말인데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베드로는 그저 한명의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인간일 뿐이지, 그 이상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것도 죄인 된 인간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무엇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인간 베드로가 하나님의 축복하심과 계시로, 그리고 은혜로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그 어느 누가 천금을 가지고 있다 한들 이 비밀을 스스로 알 수 있겠습니까? 옛날에 S그룹 회장이었던 분이 죽기 전에 기독교의 구원에 관해 물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목사님이 열심히 설명해주었지만 그는 끝내 예수가 누군지 알지 못했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회의 속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아들인 같은 그룹의 회장 집안은 원불교 집안입니다. 이것을 알고 보니 정말 그들에 관한 모든 것이 부럽지 않게 됩니다. 왜냐면 그들은 모르고 우리는 알기 때문입니다. 모르고 알고의 차이가 어떠합니까? 롬10:9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 우리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이렇게 신앙 고백할 수 있으니 우리는 정말 복 받은 사람들 아닙니까? 이는 세상에 더 없는 축복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으면서 아직도 뭐가 부족한지 자기에게는 하나님의 축복이 더 필요하다며 축복을 간청합니다. 물론 우리가 필요한 이런저런 복이 있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이런 복에 마음이 매여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내면의 공허감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이때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는 우리의 신앙고백과 함께 이미 복 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해야할 축복, 그 어떤 것이 더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이 축복을 적극적으로 누려야 합니다. 구원과 영생을 받은 자로서의 감사와 기쁨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알고 이제는 믿음 안에서 도전하며 역동적인 삶을 살고자해야 합니다. 이로서 우리의 삶 곳곳에 감추어져있는 또 다른 복들을 깨달아가면서 이를 누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으로 인해 충만한 기쁨 속에 감사하며 주님께 찬양을 올려드려야 합니다.
요즘 현대주의자들의 설교는 텅 비어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만일 우리의 삶속에, 그리고 교회에서 듣는 말씀 속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빠진다면 참 공허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말씀을 전할 때 그리스도를 말하지 않고 정치, 경제, 슬픈 삶의 이야기, 그래서 눈물을 흘리고 들어가 자리에 앉는다면 그 메시지가 아무리 우리에게 공감이 되는 말이라고 해도 그것은 신앙적으로 공허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오늘도 할 일이 많습니다. 어떤 분은 집안정리를 뒤로 하고 예배에 오셨을 것입니다. 학생들은 지금 이 시간에도 해야 할 공부가 있는데도 책을 덮고 예배에 왔습니다. 친구와의 약속을 뒤로 하기도 하고, 또 어떤 분은 몸이 피곤하고 아프기도 해서 쉼이 필요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가 지금 왜 이렇게 모여 있는 것일까요? 바로 예수님 때문입니다. 함께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고 예배하기 위해 모인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위로가 되고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배 가운데 우리는 잘못된, 혹은 잘못되기 쉬운 신앙을 바로잡고 회개하고 고칠 수 있는 방향을 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로 분열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연결시켜주는 중보자이십니다. 딤전2:5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그리고 이 예수님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 갈 수 있는 길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요14:6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 예수님은 우리의 확신이며, 인생의 방향이 되십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경우,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은 사회에서 추방을 당하고 심지어는 죽임을 당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변함없이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면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유일하고 참된 구원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이 고백은 죽음과도 바꿀 수 없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이 신앙고백은 우리 모두의 신앙의 출발점이 됩니다. 신앙고백 없는 신앙은 없습니다. 신앙고백에서부터 우리의 신앙은 출발합니다. 그것은 우리 삶속에서 본격적인 하나님의 축복의 시작인 것입니다.
더 나아가 18절을 보십시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여기서 ‘반석’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의미합니다. 카톨릭에서는 베드로가 예수님의 후계자이고 교황은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교황의 절대권위를 세우기 위해 ‘반석’을 베드로라고 해석하였습니다. 그러나 헬라어 원문을 보면 베드로(Πετρος)는 남성명사요, 고유명사인데 반해 반석(πέτρᾳ)은 보통명사요, 여성명사입니다. 무엇보다 불완전한 베드로가 교회의 반석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얼마 후에 예수님께로부터 사탄이라는 책망을 들었으며 또 예수님의 수난 기간 동안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반석되신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기초가 될 수 있습니다(고전13:11, 엡2:20,21). 베드로 자신도 벧전2:4,5에서 예수님만이 교회의 반석이 되신다고 고백했습니다. “사람에게는 버린바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돌이신 예수님께로 나아가 너희도 산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라.” 이처럼 예수님이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 신앙고백은 교회의 기초가 됩니다. 이는 반석처럼 흔들리지 않는 진리요, 아무도 이 신앙고백의 진리를 개인에게서, 교회에게서 빼앗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런 신앙고백은 교회의 반석이요, 교회의 시작이 됩니다. 여기 또 음부의 권세란, 죽음의 권세를 말합니다. 이때까지 죽음의 권세는 모든 인간에게 왕 노릇해왔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죽음의 권세를 이기셨기 때문에 죽음의 권세가 결코 교회를 이길 수 없는 것입니다. 죽음의 권세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신앙고백하는 교회를 지배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모임이 어디일까요? 청와대? 군대? 아닙니다. 죽음의 권세를, 지옥의 권세를 이기는 주님의 교회입니다. 가장 연약한 듯 보이지만 가장 강한 모임이 바로 교회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그리스도를 반석으로 교회를 세우시고 이 땅에서 주님의 나라를 확장해가심에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또 19절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천국열쇠를 주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신앙고백을 한 자들의 복음전파를 통해 많은 사람들을 천국으로 인도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천국 문을 여는 일이며 우리가 침묵하고 있는 것은 천국 문을 닫은 채로 두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의 신실한 전도자가 되어 천국 문을 열며 만민구원역사에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I. 그리스도의 길 (21)
21절을 보십시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시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여기서 예수님은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당신께서 그리스도로서 반드시 겪어야 할 필연적인 과정임을 강조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이 땅에서 하실 가장 중요한 일은 세상 죄를 위해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하기 위해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마10:45에서 ‘인자의 온 것은 …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가 없으면 구원도 없습니다. 그리고 삼일 만에 부활하시므로 당신께서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이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빼놓고 우리가 예수님을 말한다는 것 역시 공허한 일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데 이 땅에 오셨고, 천국복음을 전하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는 것으로 기독교가 끝났다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것이 내가 구원받는데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다 죄인입니다. 죄가 대속되고 용서받아야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그리스도가 되시기 위해 십자가 대속의 죽음을 감당하시고 이에 대한 확증으로 부활하신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이를 계시해 주셨고, 그분의 아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으며, 성령님은 이를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면 그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아는 자유주의 신학에서는 예수님을 말할 때 십자가와 부활을 뺍니다. 자유주의 신학은 이성을 기초로 한 계몽주의에 그 뿌리를 두고 신학을 전개합니다. 그들은 인간이 좀 잘못하는 것은 있지만 죄인으로 보지 않고 인간은 노력하면서 얼마든지 선한 일을 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 만큼 그들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역을 배제합니다. 인간은 죄에서 구원받아야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가르치지 않는 교회가 어떤 설교를 하겠습니까? 그것 역시 텅 빈 설교입니다. 우리 죄를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장사 지낸지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이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우리가 생명을 얻고 누리고 있음에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우리 교회가 십자가만 달아놓은 교회가 아니라 말씀과 삶속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뚝 선,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이 묵상되고 이에 감사하는 교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III. 제자의 길 (22-28)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베드로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이 죽으신다는 말을 듣자마자, 반사적으로 억센 팔로 예수님을 붙들고 말했습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22).” 베드로가 이렇게 말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베드로에게는 사랑하는 예수님이 돌아가신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런 일이 절대로 일어나지 않게 하겠다고 합니다. 그는 예수님께 대한 찐한 의리가 있었습니다. 베드로의 이런 인간적인 생각은 예수님께 큰 시험이 되었습니다. 예수님도 인간이시기 때문에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지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말이라도 이렇게 해주니 위로받으셨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를 단호하게 책망하십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23).” 여기서 사람의 일은 십자가가 없는 길이요, 하나님의 일은 희생과 고통이 따르는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이 말은 자기 생각을 앞세워 하나님의 뜻을 망치는 일이 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베드로가 예수님을 생각해준다 해도 그가 하나님보다도 더 마음이 좋게 보이려고 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심하게 책망하신 후, 계속해서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가져야 할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 말씀해주십니다. 24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크신 뜻을 이루시기 위해 자기 생각을 부인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사명의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도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이 길이 비록 희생과 고통이 따르는 고난의 길이라 할지라도 따라야 합니다. 고통스럽다고 제자로서 마땅히 지고 가야 할 십자가를 부인한다면 그것 역시 공허한 제자생활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주와 복음을 위해 자기부인, 자기 십자가를 질 때만 비로소 내면에 만족을 얻고 거기서 삶의 보람과 기쁨이 있고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비로소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의 인격적인 소통이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기부인, 자기 십자가는 자기 말살이 아니라 자기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길이요, 참된 자아와 만나는 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통해 내면이 강해지고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거룩한 형상을 본받고 세상을 승리할 수 있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25,26)?”
또 27절을 보십시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는 모든 악한 자들을 멸하시고 세상의 모든 불의를 제거하십니다. 반면 진리를 따라 의롭게 산 자들에게는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을 상으로 주십니다.
결론 : 요즘 전통 기독교의 교리, 그리고 기독교인의 삶은 다원화 시대의 거센 물결 속에서 날이 갈수록 더욱 상대화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런 만큼 우리가 지향하는 십자가 중심의 복음신앙은 인본적인 모습으로 변화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자도도 흐려져 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시대의 신앙의 흐름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 속에 사는 기독교인들의 내면은 공허합니다. 그러다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나름대로의 신앙의 방향을 잡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대가 어떠하든 자기 생각으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제자의 삶을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각과 가치관은 성경적이어야 합니다. 오늘말씀처럼 예수님은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온전히 고백해야 합니다. 또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셨음과 사흘 만에 부활하시므로 죄에서 구원하심을 확증하신 것 또한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구원의 은혜를 누리고 감사하면서 이제는 주님이 가르쳐주신 제자도처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이제는 성경적인 제자도의 길을 가면서 주님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는 축복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