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시편 제4강
통촉하시고 감찰하시는 하나님
말씀/시11:1-8
요절/시11:4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다.”
어느 수도원에 훌륭한 원장이 있었습니다. 그는 많은 제자들 중 특히 한 아이를 지극히 사랑했습니다. 그 아이는 볼품없고 지능이 뛰어나지도 않은 아이였습니다. 그러니 다른 제자들의 불만은 대단했습니다. 원장은 다음과 같은 문제를 해결하면 그 아이를 사랑하는 이유를 말해주겠다고 했습니다. 제자들에게 작은 새 한 마리씩을 주고는 아무도 안 보는 곳에서 해질 때까지 그 새를 죽여 가지고 오라고 했습니다. 해질녘이 되자 제자들이 하나 둘씩 모이기 시작해 마당에는 새의 시체가 쌓였습니다. 그런데 원장이 특별히 사랑하는 아이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한참 뒤 돌아온 아이의 손에는 새가 산 채로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원장님은 아무도 안 보는 곳에서 새를 죽이라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아무리 조용하고 으슥한 곳을 찾아보아도 하나님은 보고 계셨어요. 그래서 새를 죽일 수 없었어요.”
이 세상은 악인이 번성하는 것 같습니다. 의인은 악인에 의해 고통당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런 불의한 시대를 보면서 하나님께 탄식합니다. 하나님은 너무 멀리 계시는 것 같습니다. 이런 시대를 외면하거나 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어느 곳에서건, 어떤 상황에서건 다 보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들을 나몰라라 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이 모르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보지 못하는 것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환난 가운데서 지켜보고 계시는 하나님을 발견합니다. 이 하나님은 단순히 현실만을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마음까지도 다 보시는 분이십니다. 다윗은 이 하나님께서 통촉하시고 감찰하셔서 의인을 구하시고 악인을 심판하실 것을 바라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환난 가운데서 바라본 다윗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a절을 보십시오.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십 광야 엔게디 요새로 피할 때입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쫓겨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계속 도망할 수밖에 없는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대한 자신의 확신을 피력합니다.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다윗은 사울의 쫓김을 당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 피하였다 말합니다. 사무엘상을 보면, 사울은 시기심에 불타 다윗을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다윗에게 창을 던지고 활을 날리고 칼을 들었습니다. 군사를 풀어 다윗을 벼룩 잡듯 죽이고자 쫓아다녔습니다. 한 번은 다윗이 너무 배가 고파 놉 땅으로 도망가 제사장 아히멜렉이 주는 떡을 먹기도 하였습니다. 이에 사울은 놉 땅의 제사장 85명을 죽였습니다. 다윗은 두려워하여 가드왕 아기스에게 가서 침을 질질 흘리며 미친 척하기도 하였습니다. 한 번은 십 광야 수풀에 숨었습니다. 사울이 주는 포상금에 눈이 멀어 십 사람들이 다윗을 신고하였습니다. 다윗은 다시 도망해 마온 황무지에 숨었는데 사울이 와서 포위하여 이번에는 독안에 든 쥐와 같이 되었습니다. 그때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침략해 사울이 물러감으로 간신히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그 후 다윗은 사울을 두 번이나 죽일 수 있는 상황에서 용서해 주었는데도 사울은 다윗을 죽이고자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너무 지쳐 블레셋 아기스에게 다시 피하였습니다. 이처럼 다윗은 사울을 피하여 이스라엘 광야와 블레셋 땅으로 도망 다녔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스라엘 광야로 피하였다, 블레셋 땅으로 피하였다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여호와께 피하였다’ 말합니다. 왜 이렇게 말하는 것일까요? 다윗은 광야나 블레셋 땅으로 피하면서도 항상 하나님이 자신을 보호해주실 것을 확신했습니다. 다윗은 언제 어디로 피난가든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여 주시도록 기도하였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겼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도 압살롬의 세력에 쫓겨 예루살렘을 떠나 마하나임으로 도망갔습니다. 압살롬에게는 지혜가 뛰어난 전략가 아히도벨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도망가면서도 아히도벨의 지혜를 어리석게 해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다윗은 그때도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고 간절히 의지하였습니다. 다윗은 이처럼 환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자신을 완벽하게 보호해주실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그런데 1b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내 영혼에게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찌함인가?” 다윗이 하나님께 피하자, 다윗 주위의 사람들은 다윗에게 새가 산으로 도망치듯 ‘네 산’ 곧 다윗의 산으로 도망하라 말합니다. 다윗에게는 큰 유혹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현실적인 유익과 방법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새가 산으로 도망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산에는 나무가 무성하여 새가 숨을 곳이 많습니다. 새들이 조잘거리는 소리를 듣고도 어디에 있는지 좀처럼 발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새들은 자기가 사는 산이 있습니다. 자신의 산은 자신이 숨을 곳을 잘 압니다. 사람들은 다윗에게 하나님의 산이 아닌, ‘네 산’ 다윗의 산으로 도망치라 말합니다. 다윗이 가지고 있는 현실적인 지혜나 지식, 물질, 권력의 산을 의지하라고 말합니다. 사울에게 계속 쫓기기보다 현실적인 방법으로 사울에게 복수해라 합니다. 사울이 너를 미워하였으니 너도 사울을 미워하라 말합니다. 사울이 죽이려고 하니 네가 먼저 사울을 죽이라 말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자신의 산으로 도망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생각과 현실의 유익과 현실적인 방법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다윗은 환난의 때에 하나님의 산으로 피하였습니다. 시편 121편 1,2절은 말씀합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다윗은 환난의 때일수록 힘들수록 고난이 닥칠수록 하나님의 산으로 피하여 날아갔습니다.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의 산으로 피하였습니다.
다윗이 자신의 산으로 피하지 않고 하나님께 피하였다는 것은 철저히 하나님의 방법을 따라 행한 것을 의미합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쫓겨 도망 다녔습니다. 사람들은 다윗에게 인간적인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인간적인 방법으로 사울을 대하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의 방법으로 대하였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두 번씩이나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그는 죽이지 않고 사울을 살려주었습니다. 한번은 다윗이 엔게디 골짜기의 굴에 숨었습니다. 사울은 다윗이 그 굴속에 있는 줄도 모르고 발을 내리고 그 굴속에서 볼 일을 보았습니다. 다윗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대적을 다윗의 손에 붙인 것이니 죽이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의 방법을 따라 사울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종을 치는 것은 하나님이 금하신 것이므로 기름 부음 받은 종을 치지 않았습니다. 또 한 번은 사울이 하길라 산으로 다윗을 쫓아왔습니다. 사울의 신하들이 사울을 가운데 두고 다 잠이 들었습니다. 다윗은 그곳에 이르렀는데 다윗의 부관 아비새가 단번에 창으로 사울의 심장을 꽂아죽이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는 것은 하나님이 금하신 것이므로 하지 않겠다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다윗의 산으로 피하라고 하였지만 다윗은 철저히 하나님께 피하고, 어리석다할 만큼 우직하게 하나님의 방법으로 사울을 대하였습니다. 예수님도 사람들에게 모욕과 멸시를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을 인간적인 방법으로 멸하지 않았습니다. 하늘의 천군천사로 그들을 멸하지 않았습니다. 하늘에서부터 불을 내려 그들을 태우도록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십자가를 끝까지 참고 감당하셨습니다. 결국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은 부활하사 죄와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온전한 승리를 거두셨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어려움이 있을수록 ‘네 산’ 자기 산으로 피합니다. 인간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을 떠난 후,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사람은 수풀 뒤에 숨어 자신을 가리고자 하였습니다. 이때부터 인간은 자아가 지나치게 커졌습니다. 현대인들의 가장 큰 문제는 자아의 산이 비대하게 커진 것입니다. 자아가 커질수록 자신의 생각이 많아지고 자신을 의지합니다. 자기주장이 많아지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없어도 자기 힘으로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특히, 자기 생각을 따라 물질의 산, 권력의 산, 또는 사람 중심의 산으로 피합니다. 하나님 없이 돈이나 권력의 현실적인 방법으로 해결하고자 하거나 사람을 의지해 해결하고자 합니다. 어떤 사람은 문제해결보다는 게임을 비롯한 자기만의 동굴로 숨어버립니다. 사람들은 이런저런 자기만의 산에 피하여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 자신이 만든 산에 피하면 그 산은 언젠가는 다 타서 사라지게 될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의지하고 피하는 산은 우리에게 진정한 도움이나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어줄 순 없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께 피하여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2절을 보십시오. “악인이 활을 당기고 화살을 시위에 먹임이여. 마음이 바른 자를 어두운 데서 쏘려 하는도다.” 원어에는 ‘보라(For look)!’라는 단어가 앞에 나옵니다. 그만큼 상황의 긴박함을 말해주는 표현입니다. 지금 악인이 활을 당기고 화살을 먹입니다. 악인은 의인의 심장을 향하여 화살을 당깁니다. 마음이 바른 자를 어둔 데서 쏘려고 합니다. 사울은 이유 없이 숨어 다윗을 죽이고자 합니다. 사울의 마음에는 악이 있어 반복하여 활을 당깁니다. 사울은 시기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를 시기로 죽이려고 합니다. 다윗은 긴박한 생명의 위험 가운데 있습니다. 창세기의 가인이 시기하여 아벨을 죽이고자한 것과도 같습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 없이 인간적인 생각이나 방법들을 동원하기 쉽습니다. 그런 유혹들이 매력적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러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저런 현실의 문제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탄은 우리를 끊임없이 공격합니다. 학교에도 문제가 있고 가정에도 문제가 있고 직장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사탄은 절망과 의심과 불신과 슬픔의 화살을 날립니다. 세상적인 방법으로 인간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라고 속삭입니다. 자녀교육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하지 말고 세상의 가치관대로 하도록 합니다. 직장에서도 세상의 지혜를 따라 뇌물도 적당히 주고 술도 잘 마시며 상사 비위를 잘 맞춰야 잘 될 것처럼 말합니다. 학교에서도 적당히 커닝을 하고 남이 쓴 리포트를 적당히 짜깁기해서 내야 잘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때에도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3절을 보십시오.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 표준 새 번역 성경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기초가 바닥부터 흔들리는 이 마당에 의인인들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터는 집을 짓는 기초입니다. 사회의 기초를 말합니다. 그런데 사회의 기초가 되는 법과 정의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진리의 터, 정의의 터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기초가 무너지면 집을 세울 수 없습니다. 지진이 나서 기초가 무너지면 교량도 집도 나무도 다 무너집니다. 기본을 제대로 하지 않을 때 oo병원처럼 화재가 나면 수많은 사상자를 낼 수밖에 없습니다. 사울이 다스리는 시대에 무엇이 의이고 무엇이 악인지 기준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사회적인 타락, 문화적인 타락, 영적인 타락이 오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의인들이라고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우리도 세상에 적당히 맞춰가면서 사는 것이 지혜로운 삶 아닌가 생각될 수 있습니다.
본문의 상황에서 사울은 왕이요 다윗은 사울에게 쫓기는 자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며 사람들에게 잘 보이며 살았습니다. 자신의 정권유지를 위해 충신이요 사위인 다윗을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자녀들도 자신의 정권을 위하여 이용하고자 하였습니다. 도엑과 같이 아첨하는 자들이 사울에게 모여들었습니다(삼상22장). 도엑은 한 자리를 얻고자 제사장 아히멜렉이 다윗에게 떡을 준 것을 고해 바쳤습니다. 또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왕이 되자, 레갑과 바아나가 이스보셋을 죽여 그 목을 가지고 다윗에게 왔습니다. 이들은 기회주의자였습니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키자 많은 사람들이 압살롬을 따랐습니다. 압살롬은 사람들의 마음을 훔치는 도둑이었습니다. 다윗 왕에 대해 불신을 심었습니다. 배 다른 왕자인 압논을 죽였습니다. 아버지 다윗에게 칼을 들이댔습니다. 이렇게 악한 압살롬이 왕이 되자, 사람들은 중상모략, 권모술수를 써서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 권세를 잡으려 하였습니다. 그것이 좋은 것으로 보였습니다. 이처럼 사회의 가치관과 질서가 흔들렸습니다.
오늘날 가장 큰 문제도 이런 가치관과 질서 체계가 무너진 것입니다. 이전 정권들을 보면 양파처럼 까도 까도 계속해서 부정부패가 나옵니다. 어디가 끝일지 모릅니다. 법질서가 흔들립니다. 또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버는 것을 최고의 선으로 생각합니다. 돈만 많으면 나이차이가 많이 나더라도 그 사람과 결혼하고자 미모의 젊은 여성들이 수백 대 일의 경쟁을 한다고 합니다. 세상적인 성공이 모든 선악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어갑니다. 교회도 제대로 된 신자들을 길러내는가 보다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이느냐를 가지고 평가합니다. 또 사람의 됨됨이보다도 학위를 가지고 사람을 평가하고 대우합니다. 그래서 가짜 박사들이 많이 나옵니다. 인간적인 잔꾀를 지혜로 생각합니다. 쾌락이나 재미를 선으로 생각합니다. 쾌락이나 재미를 위해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집니다. 성윤리가 무너졌습니다. 자신의 편함과 유익이 최고의 우선가치가 되어갑니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는 진리도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믿음으로 정직하게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렇게 가치관과 질서와 진리의 터가 무너진 사회에서 의인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4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다.” 그러나 다윗은 사회의 가치관과 질서가 무너졌을지라도 하나님을 의지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터로 삼았습니다. 모든 것이 무너져도 하나님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이 하나님은 성전에 계십니다. ‘성전에 계신다’는 말은 우리 삶 가운데 가까이 임재 해 계시는 하나님을 말합니다. 다윗은 모든 삶 가운데 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경외하였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보좌는 하늘에 있습니다. 이 말씀은 모든 것을 초월하시는 권능의 하나님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세계만민을 통치하고 계시며, 만물의 역사를 주관하고 있습니다. 세상만물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오고, 하나님으로 말미암고, 하나님께로 되돌아갑니다.
우리와 가까이 함께 하시고 시공간을 초월하여 세상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눈이 우리 인생들을 통촉하시고 감찰하십니다. 유심히 우리 인생들을 살펴보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을 생각할 때 언제 어디서나 기도할 수 있으며,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하나님은 도덕과 의와 선의 기초가 되십니다. 우리 인생들의 터가 되십니다. 다윗은 터가 무너진 시대에 하나님을 터로 삼았습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가치관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을 마음의 첫 자리에 모셨습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보느냐보다 하나님이 어떻게 보느냐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이것이 옳은가를 따졌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가 통촉하시고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을 우리 인생의 터 삶아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여호와는 의인을 감찰하시고 악인과 폭력을 좋아하는 자를 마음에 미워하시도다.” 하나님은 의인과 악인을 구별하십니다. 하나님이 선악의 기초가 되십니다. 하나님은 의인을 유심히 지켜보시고 기뻐하십니다. 악인과 폭력을 좋아하는 자를 유심히 지켜보시고 미워하십니다. 하나님은 선악을 구별하여 의인을 인정하시고 상주시며 악인은 벌하십니다. 하나님은 쫓는 사울과 쫓기는 다윗을 유심히 지켜보셨습니다. 사울이 은밀하게 어둠 속에서 다윗을 죽이고자 하여도 하나님은 그것을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결국 악한 사울 왕을 폐하였습니다. 사울왕은 말년에 자신이 싫어하고 멸하였던 무당을 찾아갔습니다. 그는 결국 불레셋 사람에 의해 쫓기다 자살하여 죽었습니다. 하나님은 때가 되자 다윗을 왕으로 세웠습니다. 다윗을 통일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또 다윗을 메시야의 그림자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죄악된 자를 친히 심판하시고 믿음으로 사는 자를 친히 높여주셨습니다. 압살롬이 다윗을 반역할 때도 하나님은 압살롬을 친히 심판하셨습니다. 압살롬은 자신이 자랑하는 긴 머리가 수풀에 걸려 죽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인도하시고 이스라엘 왕으로 회복시켜주셨습니다. 어찌 보면 우리의 시각으로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더디 보일 수도 있습니다. 성격 급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너무나도 미약하고 느리게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반드시 역사하시고 정의를 세워 가십니다. 역사 속에서 보면 믿음으로 사는 자,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를 하나님이 친히 높이십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어떻게 보느냐를 중요하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속마음까지도 꿰뚫어보시는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가 진정으로 중요합니다.
6절을 보십시오. “악인에게 그물을 던지시리니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이 그들의 잔의 소득이 되리로다.” 하나님의 터는 마지막 날에 견고하게 섭니다. 하나님은 악인에게 그물을 던지십니다. 그물에 걸리면 고기가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그물에서 악인은 빠져 나가지 못합니다.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이 악인들 잔의 소득이 됩니다. 잔은 각자가 받을 몫입니다. 하나님은 악인의 몫을 알고 계십니다. 악인을 불과 유황이 타는 지옥으로 보내십니다. 그들에게 태우는 바람이 불어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영원히 고통당합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마지막 심판의 날에 완전하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 여호와 하나님은 의로우셔서 의로운 일을 좋아하십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분이시므로 의롭게 행하십니다. 정직한 자는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 앞에 우리는 정직해야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하든 신경 쓸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어지는 세상 속에서의 문제들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해야 합니다. 세상은 부정부조리가 득세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를 사모하며 하나님의 뜻을 좇아 정직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 대면하며 하나님의 인정과 칭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불의한 시대에 잠잠하신 하나님을 보면서 언제까지 잠잠하실 것이냐고 하나님께 호소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 속에서 불의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계획을 알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노래합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3:17,18).”
하나님의 정의는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이루어집니다(합2:3). 하나님은 다만 오래 참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딜지라도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 인생들의 모든 것을 통촉하시고 감찰하시는 분이십니다. 불꽃같은 두 눈으로 유심히 지켜보고 계십니다. 세상에서 당하는 우리의 억울함도 다 아십니다. 우리의 고통과 환난도 다 아십니다.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반드시 정의를 세워 나가십니다. 예수님이 오시는 그날에는 모든 정의가 완전하게 서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날을 소망하며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환난의 때에 우리가 세운 산으로 피하지 말고 하나님께로 피해야 합니다. 견고하고 흔들림이 없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터 삼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와 이 세상을 통촉하시고 감찰하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주시고 우리 삶을 인정해주시고 축복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