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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진주UBF 요한복음 제3강-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신 예수님(주일말씀)

작성자김스데반|작성시간21.05.23|조회수456 목록 댓글 0

2021년 요한복음 제3강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신 예수님

말씀/요2:1-11

요절/요2:9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이 찾아가신 곳은 갈릴리 지역 '가나'라는 한 마을의 혼인잔칫집입니다. 그런데 그곳은 포도주가 떨어진 바로 '결핍'의 자리였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진 잔칫집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결국 맞닥뜨리게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잘 보여줍니다. 풍성한 듯 보이지만 참된 기쁨이 없는 인간 세상의 자리가 예수님으로 인해 어떻게 최고의 기쁨을 누리는 자리로 변하게 되는지 이 시간 보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계시고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점입니다. 그 첫 무대는 갈릴리 지역 가나라는 마을의 한 혼인잔칫집입니다. 이것이 과연 우연일까요? 구약에서 혼인관계는 하나님과 자기 백성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중요한 비유였습니다. 또 혼인잔치는 하나님의 구원하심이 우리 인간에게 주는 은혜의 풍성함과 참 기쁨을 상징해왔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서 62장 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이를 기초로 볼 때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볼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우리를 신부로 삼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신랑이십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바람난 신부인 우리를 용서하시고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신랑이십니다. 이 예수님께서 공생애 첫 표적을 행하시는 장소로 선택하신 곳이 혼인잔칫집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혼인잔치에서 풍성함이 있고 기쁨이 넘치듯 우리 인간에게 구원의 은혜의 풍성함과 구원으로 인한 참 기쁨을 주시기 위해 오신 분이십니다. 죄 많은 우리 인생들을 용서하시고 신랑과 신부로서의 관계를 회복하시기 위해 친히 찾아와주신 최고의 신랑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혼인잔칫집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진지라(3a).” 당시 유대 혼인잔치는 일주일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이때 쓸 포도주를 최소 결혼식 일 년 전부터는 담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측을 잘못했던 걸까요? 어쨌든 포도주가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한창 무르익은 잔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하객들의 소란이 점차 커졌습니다. 여기저기서 불평이 나왔습니다. 잔치 분위기는 엉망이 되고 하객들은 집으로 돌아가고자 했습니다. 신랑 신부는 풀이 죽어 어쩔 줄 모르며 멀뚱멀뚱 땅만 쳐다보고 있습니다. 보통 혼인잔치는 신랑 측이 준비하는데 신랑 부모님도 당황하고 어쩔 줄 몰라 안절부절입니다. 흥겹고 기쁨이 넘치던 자리에 핵심적인 결핍이 생겼습니다.

  이 같은 파국의 자리, 위기의 상황에서 누가 나섭니까? 3b절을 보십시오.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아마도 마리아는 단순한 하객이 아니라 일손을 거들기 위해 이 자리에 와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왜 예수님께 말하는 것일까요? ‘포도주가 없다’고 말한 것은 그저 단순히 사실을 알려주려던 것은 아닙니다. 포도주가 떨어져 큰일 났으니 어떻게든 해결해 달라는 의미였습니다. 노르웨이 루터교회 목사로 복음주의 진영에서 강력하고 경건한 지도자였던 오 할레스비는 이것을 ‘기도의 시작’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문제가 생기면 걱정만 하고 기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우리에게 있는 문제를 들고 주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리아의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의외의 반응입니다. 여기 ‘여자여’라는 표현은 결코 무례한 표현은 아닙니다. 당시 여자들을 존중하는 표현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를 이렇게 호칭할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게다가 이어진 대답은 좀 냉정하게까지 느껴집니다. ‘왜 이 일을 나와 연관시키십니까?’ 이런 뉘앙스를 풍기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이는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님과의 관계가 예전과 같지는 않을 것임을 암시해줍니다. 이제 막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는 예수님은 더 이상 마리아의 아들이기에 앞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살아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예수님은 어머니든 누구든 사람의 권위 아래 있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긴급한 필요나 소원에 따라 무조건 움직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대로 행동하시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아닌 여자를 존칭하는 ‘여자여’로 호칭하시고 또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다’라고 덧붙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때’라는 용어는 중요하게 사용됩니다. ‘때’라는 용어는 요한복음 전체에 긴장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사람들은 또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자신들의 때를 따라 자신들의 시간표대로 움직여주실 것을 요구합니다. 단편적인 예로, 마르다와 마리아가 오라비 나사로가 중병에 걸렸으니 예수님에게 당장 와서 고쳐 주실 것을 기대하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른 곳에서 이틀을 더 머물다 가십니다. 왜냐면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고 나서야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필요와 요구에 따라 끌려 다니시는 그런 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 행동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때’에 대해 무지한 사람은 예수님에 대해서 도무지 예측이 안 되는 분, 심지어 냉정한 분, 무심한 분이라는 인상을 갖게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도 주님이 우리의 기도에 대해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라고 말씀하실 때가 있습니다. 기어이 수치스러운 그 자리, 고난의 그 자리에 계속 그대로 머물러 있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시험에 대한 합격이나 취업을 위해 기도해 왔지만 계속 실패할 때가 있습니다. 자녀를 위해 기도하지만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사람들은 이러기 쉽습니다. “하나님, 이러다 망하게 생겼습니다. 도대체 언제까지입니까?” 하지만 주님은 오늘도 냉정하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라는 대답만 하십니다. 냉정한 대답조차 듣지 못하고 그저 침묵만 하실 때도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원하는 때와 예수님의 때가 어긋나고 있음을 느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그 답을 마리아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하인들에게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라고 말합니다(5). 마리아는 예수님의 대답을 듣고 거절당했다고 여기거나 마음 상해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하셨지, 하지 않겠다고, 못해주겠다고 말씀하지는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때가 이르면 그 문제를 해결해주시겠다는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였습니다. 포도주는 지금 필요한데 왜 지금이 때가 아닌지 그 이유를 이해할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때가 이르러 주님이 일하기 시작하실 때 무엇이 필요할까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아무래도 도울 하인들이 필요할 것 같았습니다. 며칠 동안 함께 일하며 친해진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무엇이든 순종할 수 있도록 준비시켜 놓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역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리아의 이런 태도야말로 예수님께서 본격적으로 일하시기 시작하도록 하는 방아쇠 역할입니다. 예수님은 하인들로 하여금 돌 항아리 여섯 개에 물을 가득 채우도록 하셨습니다. 돌 항아리 여섯 개를 채우려면 대략 600리터 정도의 상당한 양의 물이 필요합니다. 게다가 지금 필요한건 물이 아니라 포도주입니다. 바쁘고 피곤한 하인들이 이 명령에 순종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인들은 어땠습니까? “아귀까지 채우니(7b)” 사실 아귀까지 채울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아귀까지 채운 것을 보면 억지로 순종한 것이 아니라 마음을 드려 순종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더 순종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십니다. 그 물을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완전 연회장을 물 먹이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그러실까요? 하인들도 곤욕을 치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하인들은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물론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예수님의 기적은 하인들의 순종이 없어도 일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순종했을 때 하인들은 가장 실감나게, 또 가장 극적으로 예수님의 기적을 경험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앞에서 하나님의 때가 되어야 주님께서 일하기 시작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이때부터 ‘하나님의 때’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합니다. 과연 그 때가 언제일 것인가? 언제 병이 낫고 언제 결혼을 하고 언제 취업을 하고 언제 자녀가 생기고 언제 자녀들이 변화되고 언제 가정복음화가 이루어질 것인가? 그러나 대개 주님은 그 때를 정확히 명시해주지 않으십니다. 왜 지금은 아닌지 구체적인 설명도 없으실 때가 많습니다. 이러면 우리는 원망하기 쉽습니다. 내 때를 요구하거나 아니면 쉽게 포기해버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들은 주님이 일을 시작하실 때 정작 내가 주님과 함께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나타내줍니다. 오직 하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일하시는 주님께서 사사로운 요구를 앞세우는 사람과 어떻게 함께 일하실 수 있겠습니까? 주기도문에서처럼 우리는 다만 대범하게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이 주님의 때에 일하시도록 우리는 기다리며 환경을 예비해야 합니다. 어찌 보면 주님은 우리를 위해 기꺼이 일하려 하시지만 정작 가장 큰 장애물은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일지 모릅니다. 이 사실을 깨우쳐주려고 거절하는 듯 모습을 보이시며 잠시 멈칫하신 게 아닐까요?

  우리에게는 간절한 기도제목을 가지되 주님의 일하심에 순종하고자하는 자세 또한 필요합니다. 주님의 일하심이 어떤 결과로 주어지더라도 따르겠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는 단순히 나의 요구를 관철시키고자하는 어린아이의 땡깡부리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때보다 주님의 방법보다 앞서 가지 않아야 합니다. 이런 자세로 순종할 때 우리는 주님께서 친히 이루어 가시는 일들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9a절을 보십시오.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분명 하인들이 떠다준 것은 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연회장이 받아 마실 때의 그것은 분명 포도주였습니다. 그 이유를 연회장은 알지 못하되 하인들은 알았습니다. 포도주의 근원이 어디인지 순종한 하인들만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 포도주의 질이 어떠했습니까? 유대에서 어떤 잔치든 시작할 때 최상급 포도주를 내놓습니다. 그리고는 하객들이 포도주를 많이 마셔 맛이 둔감해질 즈음에 질 낮은 포도주를 내놓습니다. 이것은 사기가 아니라 당대의 상식이고 보편화된 방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만드신 포도주는 이탈리아의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 와인과는 비교할 수 없는 최상급 포도주였습니다. 예수님이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것도 놀라운 일입니다. 질 낮은 포도주면 충분한데 최상급 포도주를 공급해 주신 것도 놀라운 일입니다. 또 돌 항아리 여섯을 아귀까지 가득 채울 만큼 많은 포도주를 만드신 것도 놀라운 일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축복을 넘어서는 넘치는 풍요로움입니다. 자칫 수치를 당할 뻔했던 잔치가 신랑이 칭찬을 받는 잔치요 흥겨운 잔치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면 연회장의 칭찬에 신랑의 반응이 어떠했을까요? 자기가 숨겨두었던 포도주를 뒤늦게 내놓은 것처럼 가짜 겸허함의 태도를 취했을까요? 어쨌든 신랑의 반응을 저자 요한은 기록하지 않고 갑자기 결론을 냅니다. 생각해보면 여기서 신랑이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런 최상급의 포도주를 자기와 자기 가족은 준비한 적이 없으니 자신도 무척 어리둥절했을 것입니다. 포도주는 신랑이 책임지고 준비해야 했는데 말입니다. 사실 이 혼인잔칫집에서 최상급의 포도주를 준비한 신랑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우리 인생들의 참 신랑 되시는 예수님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여기 ‘표적’은 어떤 특정한 의미를 담은 기적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나타내주는 것입니다. 갈릴리 가나의 한 혼인잔칫집에서 예수님은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킴으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이 표적이 나타내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 예수님은 만물의 창조주로서 신성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저자 요한은 만물이 예수님으로부터 지은바 되었고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만물을 창조하신 그분 앞에서 모든 세상의 만물은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로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물도 만드시고 알코올 성분의 입자도 만드시고 포도도 만드신 창조주 예수님은 얼마든지 물로 포도주를 만드실 수 있습니다. 19세기 영국의 유명한 시인 ‘바이런’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이런이 캠브리지 대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일 때 신학 과목 기말고사에 ‘가나의 혼인 잔치’에 대해 논하시오’ 이런 문제가 나왔다고 합니다. 바이런은 답안지에 딱 한 문장을 쓰고 제일 먼저 시험장을 나갔다고 합니다. “물이 자기의 창조주를 보고 그 얼굴을 붉혔도다!” 바이런은 이 한 문장으로 최고점을 받았다고 합니다.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습니까? 예수님은 신성을 가지신 만물의 창조주이십니다.

 

  둘째, 예수님은 우리 존재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변화의 능력자이십니다. 저자 요한은 포도주로 변한 물이 담겨 있던 항아리를 필요 이상으로 자세하게 언급합니다.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 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6).” 유대인의 정결예식은 성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도록 몸을 씻어 준비하던 예식에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이 예식을 일상생활에까지 확대해 당시 유대인들은 외출하고 집에 돌아올 때마다 반드시 손을 깨끗하게 씻도록 했습니다. 종교적으로 부정한 것을 씻기 위한 의식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정결예식을 철저하게 지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밥을 먹었다가 바리새인으로부터 심한 질책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마15:19,20).” 여기서 유대 정결 예식은 한계가 잘 드러납니다. 정결예식은 사람의 겉만 깨끗하게 할 뿐입니다. 그러나 정작 사람을 더럽게 하는 마음의 악한 생각과 탐욕을 깨끗하게 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은 인간의 마음을 결코 깨끗하게 할 수 없는 유대 율법의 시대를 끝내시고 성령으로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시고 깨끗하게 하시는 새 시대를 열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셨듯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교육이나 제도도 사람을 변화시키는데 한계가 있습니다. 나 자신도 나를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오직 변화의 능력자 예수님만이 사람을 근본적으로 새사람이 되게 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외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남을 속이고 사기치고 방탕하게 살던 망나니가 있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호주머니에서 돈을 훔치는 것이 버릇이 되었습니다. 한번은 아버지가 소중히 보관하고 있던 금을 몰래 훔쳐 친구들과 돌아다니며 다 허비하기도 했습니다. 급기야 16살 때 사기죄로 고발되어 감옥에 까지 갔다 왔습니다. 그런데도 정신 차리지 못하고 이번에는 아버지의 편지를 위조하여 여권을 만들고 교과서를 다 팔아 생긴 돈으로 친구들과 스위스 여행을 떠났습니다. 처음 며칠 동안 그는 돈쓰는 재미와 세상 돌아다니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난 후부터 그는 알 수 없는 공허함으로 고통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스무 살이 되던 해, 어느 날 그는 친구의 전도를 받아 성경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성경공부를 통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공허하고 텅 빈 마음에 천국산 포도주를 아귀까지 가득 부어주셨습니다. 그는 난생 처음으로 내면에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참된 평강과 기쁨이 넘쳐나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그의 인생은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거짓말 잘하고 사기 잘치고 다른 사람 등쳐먹기 잘하던 그가 불쌍한 고아들을 모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고아원을 세워 운영하며 고아들을 위해 매일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그는 평생 5만 번이나 기도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이런 기도로 그가 일생동안 돌본 고아들의 숫자만도 수천 명에 이르렀습니다. 뿐만 아니라 70세 고령에도 불구하고 중국으로 나가 세계선교를 섬겼습니다. 그 후 20년 동안 90세가 될 때까지 세계 42개국을 돌아다니며 3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변화된 그의 이름은 조지뮬러입니다. 사실 이처럼 우리 모두가 변화의 능력자이신 예수님을 경험한 분들이 아닙니까?

 

  셋째, 예수님은 우리에게 최상급의 기쁨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살다 보면 혼인잔칫집처럼 재미있고 살맛나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계시지 않아도 포도주가 있기에 흥이 나는 것이 이 세상의 삶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포도주가 떨어지면 순식간에 기쁨이 근심으로 바뀌고 순식간에 명예가 수치로 바뀌는 것이 이 세상의 즐거움이다.” 포도주 자리에 돈을 대입해 보아도 좋고 사람의 칭찬이나 인정, 사람 사이의 애정 등을 대입해 보아도 좋습니다. 나를 즐겁게 하고 흥이 나게 하는 세상의 재미들을 대입시켜 보아도 좋습니다. 이런 포도주의 결핍의 때에 우리는 그런 것들의 한계를 경험하게 됩니다. 저는 딸들의 애교를 통해 기쁨이 생겨납니다. 두 딸이 ‘아빠 힘내세요. 사랑해요’ 이렇게 말해줍니다. 좀 늦게 집에 들어가면 ‘아빠’ 부르며 제 품에 안깁니다. 웃음이 절로 생겨납니다. 그런데 어느 날 큰딸이 핸드폰에 한 남자아이 사진을 담아왔습니다. 누구냐고 물어봤습니다. 그런데 부끄러워서 그런지 얼굴이 붉어지면서 말 안 해주겠다고 비밀이라고 핸드폰을 가지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미주알고주알 다 말해주던 아이가 비밀을 만드니까 순간 서운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물론 아이들도 프라이버시를 지켜주어야 하겠지만 그래도 서운한 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지금도 아이들이 나의 기쁨의 일정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그래도 사람의 감정이라는 것이 때로는 기쁨이 되다가도 때로는 서운함이 되는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나의 기쁨이 순간 서운함으로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은 세상 재미들의 한계와 그 한계가 주는 결핍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우리를 기쁘게 해주던 것들이 사라져 버릴 때 고통을 겪습니다. 수치를 당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합니다. 현실적인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런 결핍에 빠진 바로 그 때가 새로운 복의 시작일지도 모릅니다. 왜냐면 예수님 안에서의 최상급의 기쁨을 맛보게 될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기쁨은 무엇일까요? 구원의 기쁨, 죄 사함의 기쁨, 영생의 기쁨, 사명인으로의 부르심으로 인한 기쁨,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기쁨, 주님과 동행하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의 죽음의 대가로 만들어주신 최고의 기쁨입니다. 우리 영혼의 본질적인 기쁨입니다. 다시는 고갈되는 일이 없을 영원하고 참된 기쁨입니다. 이를 경험한 바울은 옥중 고난 속에서도 이렇게 권면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4:4).”

 

  우리는 지금 이 예수님과 동행하고 있습니까? 예수님 안에 거하고 있습니까? 예수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만물의 창조주이십니다. 변화의 능력자이신 우리의 창조주께서 우리를 변화시켜 새 삶을 살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참 신랑이십니다. 우리의 결핍을 채우시고 예수님 안에서 참된 기쁨을 누리게 하십니다. 우리 삶이 참 신랑이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풍요롭고 기쁨 넘치는 혼인잔치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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