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누가복음 제26강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말씀/눅19:11-27
요절/눅19:13 “그 종 열을 불러 은화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우리는 지난 주일 말씀에서 주님 재림의 때를 살펴보았습니다. 또 주님 재림 때까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배웠습니다. 오늘 말씀도 지난주 말씀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간 말씀을 통해 우리 성도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지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누가복음 19장 앞부분에서 예수님은 삭개오에게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 곧이어 므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무리들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 로마 정부를 무너뜨리고 이스라엘 왕국을 세우시고 새 나라의 왕이 되실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있는 곳은 여리고입니다. 예루살렘까지는 반나절 정도 걸립니다. 이제 새 나라는 곧 시작될 것이라는 기대 가운데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는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라고 외치며 열렬하게 환영합니다. 3년 동안이나 예수님을 따르며 동고동락했던 열두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도 예루살렘에 입성하면 예수님은 새 나라의 왕이 되실 것이며 자신들은 예수님 좌우편에 앉는 신하들이 될 것을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큰 오해였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압제 받는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죄와 죽음으로 고통받고 있는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무리가 기대했던 모습과는 달리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로마 군병들에게 체포당하십니다.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채찍에 맞으시고 창에 찔리십니다. 예수님의 이런 무력한 모습을 보고 무리는 분을 내며 십자가에 못 박으라 외칩니다. 제자들은 큰 충격을 받고 뿔뿔이 흩어집니다.
그동안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관해 많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도 여러 차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모두 자신의 욕망과 기대에 비추어 말씀을 듣기 때문에 그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꿈과 소원을 성취하기 위한 목적으로 말씀을 듣는다면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제대로 깨달을 수 없습니다. 겸손과 순종의 자세로 성령께서 말씀을 깨닫게 해주시도록 기도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들을 때 진리의 말씀을 밝히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은 깨닫지 못할지라도 나중에라도 깨달을 것을 기대하면서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교정해주기 위해 므나 비유를 더하여 말씀해 주십니다.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 12절을 보십시오.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 돌아오려고 먼 나라로 길을 떠났습니다. 이 비유는 당시 정치적 상황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로마제국의 통치를 받는 속국들에서는 왕이 되려면 먼저 로마에 가서 황제로부터 왕권을 받아 와야 했습니다. 헤롯 대왕과 분봉 왕이 된 그의 4명의 아들들도 로마에 가서 왕권을 받아왔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귀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귀인은 왕위를 계승할 귀족입니다. 그 귀인이 왕위를 받아 다시 돌아올 때까지는 수개월이 걸립니다. 그 기간 종들이 스스로 일할 수 있도록 돈을 맡겼습니다. 종 열을 불러 각각 은화 한 므나씩 주었습니다. 한 므나는 대략 일반 노동자의 4개월 봉급에 해당합니다. 귀인은 그 돈을 종들에게 주면서 말했습니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13).”
이 비유에서 귀인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종들은 택함 받은 제자들, 더 나아가 모든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를 말합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당장 하나님 나라가 임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십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40일 동안 이 땅에 계십니다. 이 땅에 계시면서 제자들과 오백여 형제들에게 나타나셔서 부활 신앙을 심고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사명을 주십니다. 그런 후,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십니다. 하나님의 보좌는 온 우주를 통치하는 자리입니다. 그 우편에 앉으셨다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통치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졌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28:18). 예수님이 하나님과 함께 통치하고 계시기 때문에 이 땅에서 온갖 사탄의 방해가 있지만, 하나님 나라는 계속해서 확장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세상에는 사탄과 그를 추종하는 악의 세력이 존재합니다. 완전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완전한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그날까지 주님의 제자들, 곧 구원받은 성도들은 이 땅에서 장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성도들의 살아가는 이유요, 삶의 목적입니다.
그러면 ‘장사’가 무엇일까요? 장사는 이윤을 남기려고 물건을 사고파는 것입니다. 많은 이윤을 남기기 위해 자본과 재능을 활용해 열심히 일하는 것입니다. 열심히 수고하여서 주인에게 유익을 남겨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생 동안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힘써 감당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가는 것입니다. 생명의 복음을 힘써 전하므로 죽어가는 영혼들을 살리는 것입니다. 양떼들을 잘 살피고 돌보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주님의 제자들이 하는 장사는 주와 복음을 위한 장사입니다. 마태복음 24장 45-47절은 말씀합니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의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 사람들은 이 세상이 전부인 양 이 세상을 엔조이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분명한 주의 사명 없이 인생을 살아가는 것처럼 괴롭고 힘든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종들로 부름 받아 일생 헌신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요, 복입니다.
13절을 다시 보십시오. 귀인은 모든 종에게 장사밑천으로 똑같이 은화 한 므나를 주었습니다. 모든 종에게 똑같이 한 므나를 주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사람은 모두 집안 배경이나 신체적 조건, 재능 등이 각각 다릅니다. 장사할 수 있는 조건이 다른 것입니다. 많은 재산을 물려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훌륭한 부모님의 영향을 받고 자란 분도 있습니다. 그래서 고귀한 성품과 총명한 지혜를 소유한 분들도 있습니다. 더군다나 건강하고 아름다운 신체를 가진 분도 있습니다. 이를 보면 세상이 참 불공평하게 보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달란트 비유에는 각 사람의 재능에 따라 달란트를 다르게 주었다고 했습니다. 어찌보면 이것이 더 현실적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오늘 므나 비유에서는 똑같이 한 므나씩 주었습니다. 이는 장사할 수 있는 조건이 똑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생각해보면, 여기 한 므나는 뭘 말할까요? 먼저 복음과 구원의 은혜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 중에 구원의 은혜가 없는 자가 없고 복음이 주어지지 않은 자도 없습니다. 이 복음과 은혜를 가지고 열심히 장사해 생명 구원의 열매를 남겨드려야 합니다. 또 한 므나는 인간의 생명이나 일생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한 생명을 주셨고 일생을 살아가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신에게 주어진 일생 속에서 장사할 수 있습니다. 남의 장사가 아니라 나의 장사를 할 수 있습니다. 또 한 므나는 한 인간의 재능이나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각 사람마다 독특하게 창조하셨습니다. 세상에는 똑같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없는 독특한 재능 또한 가졌습니다. 특히 구원받은 모든 성도는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재능을 부여받았습니다. 어떤 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전하고 가르치는 재능을 부여받았고, 어떤 분은 전도를 잘하고 사람을 잘 사귀는 재능을 부여받았습니다. 어떤 분은 예술적인 재능을 살려 교회를 잘 섬기기도 합니다. 어떤 분은 찬양과 악기를 잘 다루는 재능이 있습니다. 세상에 재능을 부여받지 못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런 재능들은 각기 다를 수 있지만 주님을 섬기는 가치적인 측면에서는 모두 다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문제는 모두 같은 한 므나를 받았지만 다른 사람의 재능과 비교하여 받지 않은 것처럼, 적게 받은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독특한 재능을 잘 개발하여 사용하지 않고 남과 비교하면서 자신이 받은 재능을 무가치하게 여기고 수건에 싸두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이 본문에 나오는 세 번째 종과 같지 않을까요? 또 우리는 주님을 섬길 기회, 주와 복음을 위해 일할 기회가 다 똑같이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이런 한 므나를 가지고 장사해야 합니다. 이윤을 남겨야 합니다. 주님께 유익을 드려야 합니다. 결국 우리 인생과 시간, 복음과 사명, 재능과 일할 기회들을 살려 주님 영광을 위해 열심히 일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장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14절을 보십시오. 백성들 가운데는 귀인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귀인이 왕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귀인이 왕위를 받으러 가자, 사신단을 뒤로 보내 귀인이 우리의 왕 됨을 원하지 않는다고 고했습니다. 이는 왕권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당시 많은 유대인이 예수님의 왕권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자신들의 왕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이 복음을 듣지만 영접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왕권을 인정하지 않고 배척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왕 됨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은 27절 말씀처럼 예수님의 재림 때에 반드시 심판받게 됩니다.
그러면 귀인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15절을 보십시오. 백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귀인은 왕위를 받아 돌아왔습니다. 돌아온 후, 귀인은 은화를 준 종들을 불러 어떻게 장사했는지 알아봅니다. 이는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하지 않은 백성들도 심판받지만, 예수님의 제자들, 곧 모든 성도도 주님 앞에서 반드시 결산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고린도후서 5장 9,10절은 말씀합니다.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이 말씀은 우리에게 큰 경각심을 심어줍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우리가 이 세상 사는 동안 무엇을 했는지, 어떤 자세로 인생을 살았는지 반드시 확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번뿐인 일생을 함부로 살면 안 될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그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야 합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아야 합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장사해야 합니다. 그러면 종들은 어떻게 장사를 했습니까?
16,17절을 보십시오. 첫째 종이 주인에게 나아와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주인이여, 당신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그는 장사를 잘해서 대박을 터뜨렸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그에게 어떻게 말합니까?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주인이 그 종을 칭찬함은 당연합니다. 왜냐면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기 때문입니다. 그는 장사를 잘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인의 칭찬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주목할 수 있습니다.
첫째, ‘대박’을 터뜨린 그에게 주인은 ‘충성했다’라고 칭찬한 대목입니다. ‘충성’은 ‘믿을 만함’, ‘신실함’을 의미합니다. 종은 분명 장사하여 이윤을 크게 남겼으므로 “장사를 잘했다.” “성공했구나”라고 칭찬하는 것이 합당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그가 돈을 많이 벌어서 칭찬했다기보다는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했으므로 칭찬했습니다.
여기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그 종은 주인이 원하는 바를 그대로 했습니다. 주인은 종들에게 한 므나씩을 줄 때 그 돈으로 성공하기보다는 충성하기를 바랐습니다. 주인이 돈을 잘 벌어주기를 바랐다면 악한 종의 한 므나를 첫 번째 종에게 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공’은 결과를 말한다면 ‘충성’은 과정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인이 종에게 바라는 것은 ‘성공’보다는 ‘충성’이었고 ‘결과’보다도 ‘과정’이었습니다.
둘째, ‘지극히 작은 것’이라고 말한 대목입니다. ‘지극히 작은 일’은 한 므나로 장사한 일입니다. 그 일이 정말로 작은 일일까요? 한 므나를 4개월 봉급, 대략 천만 원으로 생각하면 그리 적은 돈만은 아니고 그 돈으로 장사하는 일도 작은 일은 아닙니다. 그것도 지극히 작은 일이라고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주인이 앞으로 맡길 일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아주 작은 일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주인은 종이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해서 칭찬했습니다.
아주 작은 일에 충성하는 것이 왜 그렇게도 중요할까요? 작은 일에 충성하면 큰일에도 충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충성의 본질은 같습니다. 작은 일에 충성하는 것이 모든 충성의 기초요,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주인은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한 종에게 무엇을 줍니까? 주인은 그 종에게 열 고을 다스릴 권세를 줍니다. 이것은 왕의 다스림에 참여함을 의미합니다. 그 종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더 큰 책임을 맡습니다. 그 종은 더 이상 종이 아닌, 왕과 함께 통치자가 됩니다. 그 정체성이 바뀝니다. 그가 한 일은 지극히 작은 일이었지만 그가 받은 상과 영광은 대단히 큽니다. 그 핵심에는 충성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왕으로 다시 오심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성도들과 교회는 주님 재림의 때까지 우리에게 맡겨주신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우리와 교회에 맡기신 아주 작은 일이 무엇일까요? 삭개오 같은 한 사람을 아브라함의 아들로 삼는 일, 즉 구원하는 일에 쓰임 받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한 사람을 찾아 구원하는 일에 힘쓰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가리켜 ‘목자’라고 부릅니다. 이 일은 상대적으로 큰일일 수도 있고 작은 일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장차 우리에게 맡길 일에 비하면 아주 작은 일입니다. 우리가 그 작은 일에 충성할 때 큰일도 맡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충성’보다도 ‘성공’을 말들 합니다. 교회에서마저도 ‘충성’보다는 ‘성공’을 말합니다. 사실 우리 삶에서 성공도 중요합니다. 성공 없이는 미래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영적인 세계에서도 성공도 중요한 부분입니다. 성공한 경험들이 우리 신앙의 동력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충성은 보지 않고 성공만 본다는 데 있습니다. 성공한 사람만을 인정하고 충성한 사람은 별로 눈을 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성공보다도 ‘충성’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을 맡기시고 충성하기를 바라십니다. 주님은 부족함이 없으신 분이시기에 우리에게 뭔가 재물과 성과를 원하기보다 우리 심중과 자세에서 충성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오늘도 주님이 맡기신 일에 충성하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4:2).” 또 그는 사역자들의 자세를 말할 때도 충성을 강조했습니다.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딤후2:2).”
이런 모습은 둘째 종에게서도 나타났습니다. 18,19절을 보십시오. “그 둘째가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주인은 그에게도 말했습니다.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둘째 종도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했습니다. 그도 자신의 역량에 맞게 다섯 고을을 다스리게 됩니다.
그런데 또 한 사람은 어땠습니까? 20,21절을 보십시오. 그는 한 므나를 수건에 싸서 보관했습니다. 장사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왜 이렇게 했습니까? 21절에 보면, 그는 주인이 엄한 사람인 것을 무서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인을 “맡기지 않은 것을 찾아가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분”으로 오해했습니다. 주인을 억지 부리는 폭군으로, 착취하는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주인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에 그는 주인에게 충성하지 못했습니다.
주인은 그 종에게 어떻게 말합니까? 22절을 보십시오. “주인이 이르되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심판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로 알았느냐?” 그는 나쁜 종입니다. 왜냐면 주인을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인은 종이 주인을 생각한 그 기준으로 종을 동일하게 심판합니다. 종은 두려워했던 주인의 진노를 자신이 고스란히 그대로 받게 되었습니다. 사실, 종이 주인을 정말로 엄한 사람으로 알았다면 주인의 돈을 은행에라도 맡겨야 했습니다(23). 그러면 주인이 돌아와 은행에서 이자라도 찾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인이 그에게 원하는 바를 몰랐습니다. 주인과의 관계가 어긋나 있었습니다. 결국 그는 작은 일에 충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24,25절을 보십시오. 주인은 그가 가지고 있던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를 가진 사람에게 주라고 했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말합니다. “주여, 그에게 이미 열 므나가 있나이다.” 주인이 뭐라고 대답합니까? 26절을 보십시오. “주인이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누구든지 있는 사람은 더 받겠고 없는 사람은 있는 것마저 빼앗깁니다. 주님께 더 많이 충성한 사람은 주님의 사랑을 더 많이 경험합니다. 하지만 주님께 충성하지 않은 사람은 주님의 사랑을 받지 못합니다. 있던 것도 뺏깁니다. 주님의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충성스럽게 섬기는 사람이 주의 은혜를 풍성하게 경험합니다. 그러나 충성하지 않는 사람은 주의 은혜의 풍성함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측면에서 충성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우리는 주와 복음을 위해 섬기다가도 눈에 보이는 열매가 없으면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는 회의에 빠질 때가 종종 있습니다. 수고하고 헌신하고자 마음먹지만 이런 나를 누가 알아주나? 수고하고 힘쓰나, 농땡이를 부리나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세번째 종이 생각한 것처럼 우리 주님은 그리 인색한 분이 아닙니다. 첫째 종이 열심히 장사하여 열 므나를 남겼을 때 열 고을을 다스리는 큰 권세를 주었습니다. 둘째 종이 다섯 므나를 남겼을 때 다섯 고을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었습니다. 이는 장차 우리 주님과 함께 통치자로서 영원토록 왕 노릇하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수고한 대로 보상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수고는 하나도 헛되지 않습니다. 반드시 행한 대로, 장사한 대로 넘치도록 돌려주십니다. 눈물로 씨를 뿌리면 기쁨으로 거두도록 해주시는 게 성경적 원리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수고와 헌신과 희생을 잘 아십니다. 그에 따라 반드시 분에 넘치는 상과 영광으로 보상해 주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님의 장사하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묵묵히 충성스럽게 사명을 감당하면 열 므나, 다섯 므나의 결실을 하는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설령 우리가 주와 복음을 위해 일생을 헌신해도 많은 열매를 남기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변함없고 한결 같은 모습으로 이 일을 감당할 때 주님은 이런 우리를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칭찬하실 것입니다. 주님 다시 오셔서 우리 일생을 결산하실 때 반드시 칭찬해주실 것입니다.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17).” 계시록 2장 10절도 말씀합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주님은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하는 사람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 영광스러운 생명의 면류관, 의의 면류관을 씌워 주십니다. 그날을 소망하면서 이 땅에서 주와 복음을 위해 줄기차게 열심히 장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