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사도행전 제7강
순교자 스데반
말씀/행6:8-7:60
요절/행7:59,60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오늘은 스데반 이야기입니다. 스데반은 초대교회 첫 순교자로 젊은 나이에 메시지 한 번 전하고 순교합니다. 그러나 그의 순교는 복음 역사에 큰 기폭제가 됩니다. 이 스데반은 어떤 사람일까요? 스데반의 메시지의 핵심은 무엇이며, 스데반의 신앙은 어떠한가요? 이 시간 말씀을 통해 스데반의 순교자적 신앙에 대해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언제 스데반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지는 모릅니다. 아마도 오순절 베드로의 메시지를 통해 믿게 되었지 않을까 싶습니다. 분명 예수님을 믿은 지 많은 세월이 흐르지는 않았음이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스데반은 ‘충만’의 대명사입니다. 제가 자녀 한 명을 더 낳았으면 ‘충만’이라고 이름을 지을까도 생각했었습니다. 아무튼 뭐가 그리도 충만합니까? 6장 3절, 5절, 8절에 보면, 스데반은 성령, 지혜, 믿음, 은혜, 권능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충만은 차고 넘치는 것입니다. 스데반의 충만은 예수님으로부터 주어졌습니다. 아마도 그는 예수님을 배우기 위해 늘 말씀을 공부하고 묵상하고 말씀대로 살고자 했을 것입니다. 스데반의 순교 시, 기도만 봐도 그렇습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7:59,60).”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기도와도 닮았습니다. 스데반은 늘 예수님을 배우고 예수님과 동행하고 예수님에게 순종하려고 하고, 기도할 때도 예수님을 간절히 의지했을 것입니다. 끊임없이 예수님을 닮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을 닮으려는 그의 모습 속에는 주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지혜와 믿음과 은혜와 권능이 충만했습니다. 그의 공식 직분은 ‘재정구제부장’이라 명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같은 충만함으로 재정과 구제를 충성스럽게 담당했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 사이에 큰 기적의 역사를 행하기도 했습니다. 또 뒤에 나오는 스데반의 설교를 보면, 성경 말씀에도 매우 능통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스데반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각 나라에서 온 자유민 대표 논객들입니다. 자유민들은 포로로 이방 땅에 끌려갔다가 로마에 의해 해방되어 예루살렘에 돌아와 자기들의 회당을 형성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나서서 스데반과 논쟁하지만, 스데반 한 사람을 당해낼 재간이 없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사람들을 매수해 거짓 증인으로 세워 스데반을 체포당하게 만들었습니다. 거짓 증인들은 스데반이 하나님을 모독하고 ‘성전’과 ‘율법’을 무시하고 어긴다고 고소했습니다. 성전 예배와 율법은 유대교를 떠받치고 있는 두 기둥과도 같은 것입니다. 거짓 증인들의 말이 참이라면 유대인들로서는 도저히 스데반을 가만 놔둘 수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체포했을 때도 동일한 내용으로 고소했습니다. 그렇다면 스데반도 예수님과 같은 길을 가게 되지 않을까요? 아마도 스데반은 이미 이런 위협을 느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15절을 보십시오.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 같았습니다. 그것도 공회원들, 즉 스데반의 적대자들이 본 스데반의 모습을 묘사하는데도 천사의 얼굴처럼 평온함과 확신으로 광채가 났습니다. 정말 스데반이 하나님을 모독했다면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을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을 것입니다. 스데반이 천사의 얼굴을 한 것은 그가 평소 늘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의 마음이 늘 하나님께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광채를 덧입어 천사의 얼굴이 될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함을 덧입을 때 이 어두운 세상에 생명의 빛을 발하는 영광스러운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스데반을 석방하기보다 대제사장은 본격적으로 심문합니다. 스데반은 자기를 변명할 수 있었지만 이 기회를 이용해 복음을 변증합니다. 동시에 스데반의 신앙고백이고, 죽음을 예감하고 전하는 유언적 메시지입니다. 그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스데반은 구약성경을 인용해 하나님이 언약으로 주신 인류의 구원자 예수님을 증거하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 유대인들의 죄를 지적합니다.
7장 2절을 보십시오. 먼저, 아브라함입니다. 스데반은 아브라함이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부름 받았음을 이야기합니다. 유대인들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아브라함은 본래 이방 땅 메소보다미아에서 우상을 만들어 생계를 유지하는 아버지 아래서 살던 소망 없는 자였습니다. 자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영광의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고향과 친척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신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름받은 아브라함은 하란을 거쳐 약속의 땅 가나안에 정착했습니다. 그러나 죽을 때까지도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소유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자식도 없는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땅 가나안을 그와 그의 후손들에게 소유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또 아브라함의 씨로 말미암아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이 언제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둘째, 요셉입니다. 6,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다른 땅에서 나그네가 되어 400년 동안 괴롭힘을 당하다 나오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400년 동안의 애굽의 노예살이와 출애굽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를 위해 야곱의 아들 중에 요셉을 미리 애굽에 보내셨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의 조상들, 즉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종으로 팔아넘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셉이 애굽 땅에서 힘든 노예 생활을 할 때 그와 함께 계셨습니다. 그를 애굽의 왕 앞에 세우시고 은총과 지혜를 베푸셔서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셨습니다(10). 그리고 흉년과 기근의 때에 요셉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형제들을 애굽으로 초청하여 이스라엘이 크게 번성한 민족이 되게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시기심에 눈멀어 쓸모없다고 버렸던 요셉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많은 생명의 구원자(창50:20)’로 삼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이 시기하여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님을 하나님이 ‘인류의 구원자’로 삼으셨음을 상기시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함께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번성하여 많아졌더니”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 큰 민족을 이루겠다는 약속, 애굽을 심판하고 출애굽시키겠다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때가 가까이 왔습니다. 모든 것이 영광의 하나님의 신실하신 언약대로 이루어져 갑니다.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셋째, 모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떠받들고 존경했습니다. 그러나 20절을 보십시오. 실상 모세는 태어나면서부터 물에 던져져 죽을 운명 가운데 태어났습니다. 애굽 땅에 히브리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자, 여기에 위협을 느낀 애굽의 왕이 엄명을 내렸습니다. 히브리 여인들이 사내아이를 낳거든 나일강에 던져 죽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애굽의 공주가 어느 날 나일강에 목욕하러 갔다가 떠내려오는 갈대 상자 속의 모세를 불쌍히 여기고 건져다가 아들로 키웠습니다. 모세가 40살이 되었을 때 자신이 히브리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동족들을 돕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동족들이 오히려 자신을 배척합니다. “누가 너를 관리와 재판장으로 우리 위에 세웠느냐?” 결국 모세는 미디안 광야로 도망합니다. 거기서 40년 동안 나그네 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모세가 80살이 되었을 때 하나님이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만나주시고 그를 애굽의 왕에게 보내셨습니다. 스데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배척했던 모세를 하나님이 출애굽의 지도자로 세우셨음을 강조합니다. 35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보내신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가 당신을 우리의 지도자와 재판관으로 세웠소?” 하면서 거역하고 대적한 바로 그 모세입니다. 하나님은 이 모세를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는 지도자와 구원자로 삼으셨습니다. ‘이 모세’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키고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많은 기적을 행하며 이스라엘을 인도한 사람입니다. 바로 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했습니다. 3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스데반은 모세가 말한 ‘나와 같은 선지자’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암시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새(new) 모세요, 생명의 진정한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보면, 이스라엘은 모세에게도 불순종하고 자주 대적했습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시내 산에 올라간 사이, 그들은 산 아래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섬겼습니다. 그 후에도 이스라엘은 틈만 나면 하나님을 대적하고 우상숭배를 일삼았습니다. 43절을 보십시오. “몰록의 장막과 신 레판의 별을 받들었음이여. 이것은 너희가 절하고자 하여 만든 형상이로다. 내가 너희를 바벨론 밖으로 옮기리라 함과 같으니라.” 몰록(몰렉)은 암몬의 우상으로 어린아이를 태워드리는 인신 제사로 섬겼습니다. 또 ‘레판’은 앗수르의 신 ‘토성’을 가리킵니다. 별을 숭배한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도 이처럼 우상숭배로 점철된 이스라엘을 외면하시고 그들은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끌려가게 됩니다.
스데반이 왜 이처럼 모세와 또 이스라엘의 반역의 역사에 대해 자세히 설명합니까? 스데반 당시 유대인들은 모세가 예언한, 바로 ‘나와 같은 한 선지자’인 예수님을 배척했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들이 행하고 있는 죄악은 과거 조상들이 행한 죄악과 같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모세의 율법과 성전을 무시하고 파괴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큰 죄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는 반대입니다. 이스라엘 조상들이 하나님이 생명의 구원자로 세우신 요셉과 모세를 시기하고 거역했던 것처럼, 지금 유대인들도 하나님이 세우신 구원자 예수님을 배척하고 죽임으로 하나님께 큰 죄악을 범한 것입니다.
넷째, 성전입니다. 스데반은 모세와 더불어 성전에 대해 말합니다. 성전은 출애굽 당시 하나님이 모세에게 지으라고 한 성막이 그 기원입니다. 솔로몬 시대에 비로소 성전이 세워집니다. 그런데 성전의 본질적인 의미가 무엇일까요? 48-50절을 보십시오.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가 말한 바 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은 지극히 높고 크신 분이기 때문에 성막이나 성전에만 계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보좌이고, 땅이 하나님의 발판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성전에만 갇혀 계시는 분이 아니라 온 우주에 충만하신 무소부재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온 우주에 어디에라도 계시고 안 계신 곳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하나님은 성전에만 계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성전을 제외하고는 하나님의 존재를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요셉과 모세의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하나님은 메소보다미아에도 계셨고, 애굽에도 계셨고, 광야에도 계셨습니다. 또 스데반은 38절에서 ‘광야 교회’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그때는 성막조차 세워지지 않았기에 이것은 어떤 장소나 건물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일 뿐입니다. 예수님이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리라(요2:19)” 말씀하신 것도 건물이 아닌 예수님 자신이 성전 됨을 일깨우기 위함이었습니다. 결국 유대인들이 그토록 신성시했던 예루살렘 성전은 무너졌습니다. 지금은 그 한쪽 담벼락만 남았습니다. 그 앞에서 유대인들은 통곡하며 기도합니다. 그러나 과연 성전이 사라진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8장 20절에서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함께하시는 곳이 바로 성전입니다. 주님은 교회 건물 안에만 갇혀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현장 속에서 함께 계십니다. 스데반은 참된 성전 되시는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에 이제 그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드리는 이 시간뿐만 아니라 삶 속에서 주님을 경외하므로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51절을 보십시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스데반이 이스라엘의 긴 역사를 설교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나타나 있습니다. 너희 조상들처럼 지금 너희들이 성령을 거스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해 약속해주셨던 메시야 예수님을 시기하고 거역하여 죽인 너희 유대인들의 모습이 요셉을 시기하고 모세를 거역한 너희 조상들의 모습과 별반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생명의 구원자 예수님을 죽이고 믿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거스르는 죄악입니다.
스데반의 설교에 그들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꼭지’가 돌아버렸습니다. 스데반을 향해 이를 갈며 죽이려고 달려들 태세입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어떠합니까? 55,56절을 보십시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사람들이 날 쳐 죽이려고 돌을 들고 소리치며 달려옵니다. 그때 무엇이 보이겠습니까? 너무나 무서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눈에는 영광의 하나님이 보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이 보였습니다. 땅에서는 원수들이 스데반을 죽이려고 달려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에서는 스데반을 위한 천국 입성 축제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스데반’이라는 이름의 의미는 ‘면류관’입니다. 스데반은 자신의 이름처럼 장차 영광의 하나님이 주실 영광의 면류관을 생각할 때 기쁨과 소망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성난 이리 떼와 같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달려듭니다. 스데반을 성 밖으로 내동댕이치고 돌로 칩니다. 이마가 깨지고, 뼈마디가 으스러지고, 온몸에서는 붉은 피가 흘러내립니다.
스데반은 죽어가면서 기도합니다. 59,60절을 보십시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스데반의 기도는 십자가 위에서 기도하신 예수님을 닮았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스데반이 어떻게 고통 가운데서도 자기를 돌로 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의 십자가 용서의 사랑을 덧입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랑은 원수까지도 품는 용서의 사랑입니다. 스데반은 죽는 순간까지도 예수님을 사모하여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갔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은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렇게 훌륭한 스데반을 보호해 주시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도들이 복음 전하다가 감옥에 갇혔을 때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 옥문을 열어 내보내 주셨습니다. 이번에도 천사를 보내서 사람들이 던지는 돌을 다 흙가루로 만들어 버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도록 내버려 두셨을까요? 우리는 그 답을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을 것입니다. 스데반의 죽음은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스데반의 순교를 복음이 유대와 사마리아 전역에 전파되도록 쓰셨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로 인해 예루살렘 교회에 큰 핍박이 있어 성도들이 흩어지게 됩니다. 흩어진 성도들 마음마다 스데반의 순교신앙을 안고 나아갑니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하므로 복음이 온 유대와 사마리아로 퍼져 나갑니다. 또 이방인 선교의 전초 기지, 안디옥 교회가 개척되는 계기가 됩니다. 스데반의 인생은 길지 않았지만, 하나님 편에서 볼 때 ‘면류관’이라는 이름처럼 너무도 숭고하고 영광스러운 삶이었습니다.
전남 신안군 증도에는 순교자 문준경 전도사의 순교기념관이 있는 곳으로 유명합니다. 신안군의 복음화율은 68.5%입니다. 또 신안군에서도 2천 명 정도 사는 증도의 90%가 기독교 신자입니다. 증도에서 배출한 목회자와 장로는 240명이라고 합니다. 신안군 전체에서는 700여 명의 목회자와 장로들을 배출했습니다. 이 결과를 가져오게 한 결정적인 역할을 하신 분이 바로 순교자 문준경 전도사입니다. 문 전도사님은 17세에 결혼했지만, 아이를 낳지 못해 남편에게 소박맞고 쫓겨났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슬픈 운명 가운데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고, 그 인생을 온전히 복음을 전하는데 헌신했습니다. 신안의 수많은 섬들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온갖 문제 많은 사람들을 사랑으로 섬겼습니다. 그러다 6.25 전쟁 때 공산당원들에 의해 순교했습니다. 죄명은 ‘새끼를 많이 깐 씨암탉’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십자가에서 피 흘리며 죽어가는 예수님께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패가 붙은 것과도 같습니다.
무시무시한 죽창에 찔려 죽어가면서도 문 전도사님은 옆에 있는 자신의 수양딸, 백정희 전도사만은 제발 살려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리고 죽창을 들고 달려드는 자들을 향해 “당신들도 예수님을 믿으라” 권면했습니다.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는 외쳤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 영혼을 받아주시옵소서.” 공산당원들은 총알이 아깝다며 백정희 전도사만큼은 죽이지 않고 내무소에 수감했습니다. 이로써 백 전도사가 후에 순교현장의 생생한 증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문 전도사님은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살다가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거룩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여러분! 순교자 스데반 이야기, 문준경 전도사님 이야기를 어떻게 들었습니까? 사실 오늘날 우리는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죽을 일은 없습니다. 죽창에 찔려 죽을 일도 없고, 감옥에 갇힐 일도 없습니다. 물론 중국 공안과 무슬림의 핍박을 받는 선교사님들은 있지만, 우리는 외적으로 물리적으로 크게 박해받는 삶은 아닐 것입니다. 그래도 나름 평안하게 신앙생활 할 수 있는 환경 속에 살고 있기에, 우리는 영적으로 느슨해져서 세상 유혹에 넘어지기 쉽습니다. 지금은 스데반 때처럼 박해의 돌멩이가 아니라 안일과 쾌락, 물질주의, 상대주의, 이기주의 등의 솜사탕이 우리를 병들게 합니다. 우리가 이런 시대 분위기를 이기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는 스데반처럼 성령 충만, 말씀 충만, 사랑과 지혜와 용서로 충만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무엇으로 충만합니까? 우리의 머리와 생활은 무엇으로 가득 차 있습니까?
또 순교는 순교자적인 삶의 총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일상생활에서 순교자적인 삶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순교자적 생활이란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며 예수님을 따르는 생활을 말합니다. 스데반처럼 배척받을 각오를 하고 내가 서 있는 곳에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순교자적 삶을 사는 것입니다. 불신적인 가정과 직장 분위기에서 구별된 삶을 살고 믿음 중심을 지키는 것이 순교자적 삶을 사는 것입니다. 달콤한 세상이 주는 즐거움을 즐기기보다 문준경 전도사님처럼 예수님의 말씀 따라 사는 삶에서 주어지는 기쁨과 평안을 누리는 것이 순교자적 삶입니다. 우리가 죄악된 시대 분위기를 이기고, 늘 예수님을 배우고 예수님과 동행하고 예수님에게 순종하려고 하고, 끊임없이 예수님을 닮아가고자 하는 삶이 순교자적인 삶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우리가 이런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하고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