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디도서 제2강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하나님의 백성
말씀 / 디도서 2:1-3:15
요절 / 디도서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지난 주일 그레데 사람들에 대해 고대 선지자가 남긴 리뷰를 보았습니다.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뱅이라(1:12).” 이건 별점 빵점짜리 리뷰였습니다. 그레데 사람들은 당연 걸러내야 할 동네였습니다. 차라리 그레데 말고 좀 더 평점이 좋고 후기가 좋은 지역의 양들을 찾아다니는 것이 현실적으로 좋아 보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디도에게 이런 그레데 사람들을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가르치고 돕도록 격려합니다. 이런 사역을 감당할 힘은 어디서부터 비롯되는 것일까요? 또 그레데 사람들을 선한 일을 열심히 감당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끄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2장 1절을 보십시오. “오직 너는 바른 교훈에 합당한 것을 말하여” 바울은 디도에게 바른 교훈에 합당한 것을 말하라고 강조합니다. 이는 복음 진리와 일치하는 것을 가르치라는 말씀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복음 진리에 부합되지 않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예를 들어 거룩한 삶을 살려면 혼인을 금하고 금욕적인 생활을 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것은 힘들고 어려운 말씀이지만 왠지 고상해 보이고 그럴듯합니다. 하지만 이는 복음과는 부합되지 않는 가르침입니다. 이처럼 거짓 교사들은 율법, 철학, 사상 등과 같이 뭔가 있어 보이는 것들을 가르쳤으나 복음 진리와는 맞지 않았습니다. 이는 교회를 크게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당시 디도에게 맡겨진 교회 성도들은 참으로 다양했습니다. 늙은 남자와 늙은 여자, 젊은 여자와 젊은 남자, 그리고 종과 상전의 관계로까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 진리에 기초해 각 사람에게 합당한 가르침을 제시합니다.
먼저 늙은 남자에게 무엇을 가르치라고 합니까? 2절을 보십시오. 여기, 늙은 남자는 교회의 신앙 연륜이 있는 시니어 목자님들을 의미합니다. 이분들에게 필요한 방향을 크게 두 가지로 말씀합니다. 하나는 절제하며(temperate) 경건하며 신중하며(self-controlled), 다른 하나는 믿음과 사랑과 인내에서 온전해지도록 가르치라고 합니다. 먼저 절제와 경건과 신중함이 시니어 목자님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UBF 한 시니어 목자님의 이야기에 의하면 본문의 늙은 남자, 즉 시니어 분들은 자신이 그 모임과 교회 공동체에서 가장 어른이고 인생 경험이 가장 많기 때문에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가르치려고 말을 많이 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 때는 말이야” 하면서 자신의 경험을 기초로 사사건건 가르치려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런 말이 있습니다. “어른은 마음이 넓은 사람이다. 어른은 나이 어린 사람에게서도 배우려고 한다. 어른은 비우고 이웃에게 나눠주려고 한다. 어른은 적극적으로 이웃을 배려하며 살아간다. 어른은 나를 밟고 올라서라 한다.”
교회의 가장 큰 어른이 어떻게 절제하고 경건하고 신중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그것은 교회를 주관하시고 우리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의식할 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늙은 남자, 시니어 분들이 하나님 앞에서 절제하고 경건하며 신중함을 가지도록 잘 도와드려야 합니다. 절제와 경건, 그리고 신중함, 다시 말해 영적으로 품위 있는 삶을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도록 격려하며 섬기라는 것입니다. 이에 더해 바울은 시니어 분들에게 믿음과 사랑과 인내에서 온전해지고자 하는 영적 방향을 계속 붙잡도록 도우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세월과 신앙 연륜에 걸맞는 성숙한 영성과 내면성을 갖춘 시니어 목자님들은 주니어들에게 그분들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주님을 따르는 삶이 매력적이고 아름답다는 산 증명이 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바울은 늙은 여자, 즉 시니어 사모님들에게 무엇을 가르치라고 말씀합니까? 3절을 보십시오. 연륜이 있는 사모님들에 대해 제일 먼저 가르치라는 말씀은 행실이 거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영어성경을 보면 사는 방식이 존경받을 만한 것(to be reverent in the way they live)을 의미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이 시니어 사모님들을 존경하게 만들까요? 먼저 모함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을 비방하며 헐뜯고 깎아내리는 것이 모함입니다. 자리에 없는 사람을 흉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모함은 마귀의 성품입니다. 이런 것은 잠시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될 수는 있을지 몰라도 결과적으로 인간관계를 깨뜨리고 사탄 마귀가 역사하는 꼬투리를 제공합니다.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는다고 했습니다(벧전4:8). 허물을 덮어주고 기도해 주는 모습은 시니어 사모님들의 모습을 존경하게 만듭니다.
또 많은 술의 종이 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성은 나이가 들면 갱년기 호르몬 변화로 불안감과 우울감이 상승하고 화가 많이 나고 짜증과 분노가 순간순간 치밀어 오를 수 있다고 합니다. 술에 의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레데 사람들 중에 시니어 사모님들이 그런 경우들이 있었습니다. 오늘날은 꼭 술은 아닐지라도 자신의 감정 조절을 위해 많은 드라마나 많은 유튜브, 많은 스마트폰 서핑의 종이 되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것들에 대해 주의를 시키고 절제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대신에 시니어 사모님들은 선한 일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주님 안에서의 올바른 신앙 자세에 대해 가르치고 말씀에 기초해 선한 행실을 하도록 가르치는데 힘을 기울이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가정과 교회, 사회 공동체 속에서 거룩한 삶의 모범을 보이고 하나님의 말씀, 즉 복음 진리와 올바른 삶의 윤리들을 젊은 여자들, 즉 주니어 자매들에게 또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복음적이고 품격 있는 시니어 사모님들의 삶입니다.
그러면 젊은 여자들, 주니어 사모님들에게 주시는 방향은 무엇입니까? 4,5절을 보십시오. 젊은 여자들, 주니어 사모님들에게는 가정에서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당시 거짓 교사들은 가정을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영향으로 무너지는 가정들이 많았습니다(1:11). 오늘날 이단 신*지도 신*지를 위해 부녀자들을 가출하도록 해서 교회나 신*지 교인의 집에서 생활하도록 했습니다. 집안과 가족들을 섬기기보다 오직 신*지 일에만 몰두하도록 한 것입니다. 이로 인해 가정이 파괴되고 가족들의 눈에서 피눈물이 마를 날이 없는 가정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정을 이룬 분들이 가정에 충실하도록 돕고 가르쳐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신중하고 순결하고 가정을 충실히 섬기며 남편이나 자녀들을 잘 돕고 섬기도록 해야 합니다. 이는 남편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사랑하지 않고 자녀를 잘 섬기지 않고 서로 존중하지 않는 삶을 산다면 그 가정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선 자녀들이 힘들어집니다. 주변에도 덕이 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산다고 하면서 정작 가정에, 부부 사이에 불화가 있어 세상의 비난의 대상이 되면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훼방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는 서로에게 신실하며 서로를 존중하며 가정을 꾸리고 자녀들을 섬기는데 있어 서로 동역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 성도들의 말보다 우리가 어떻게 사는가에 지대한 관심을 가집니다. 성도들의 가정이 아름답고 화목한 가정을 세워가게 되면 “하나님 믿는 사람은 정말 다르구나” 하면서 성도들을 부러워하고 성도들처럼 하나님을 믿고자 하게 될 것입니다.
젊은 남자들에게는 어떤 가르침이 주어집니까? 6절을 보십시오. 젊은 형제들에게는 신중함(근신)을 가르치라고 했습니다. 여기, 신중함은 ‘self-control’입니다. 젊은 형제들은 열정과 에너지가 넘쳐납니다. 많아도 너무 많아 통제가 안 됩니다. 아무거나에 막 꽂힙니다. 술에 꽂히고 게임에도 꽂히고 걸그룹 뉴진스에도 꽂히고 이성에게도 눈이 돌아갑니다. 해야 할 것은 안 하고 하고 싶은 것만 하다가 인생을 허비하기 쉽습니다. 따라서 젊은 시절, 스스로 절제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며 근신하는 삶을 살아갈 때 규모 없던 삶에 열매가 맺히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젊은이들을 근신하도록 돕는 것은 많은 잔소리로 되지 않습니다. 7,8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디도가 범사에 선한 일의 본을 보이라고 말합니다. 앞장서서 본 보이는 사람이 찐 리더입니다. 또 젊은이들로 하여금 교훈에 부패하지 아니함을 보이도록 도우라고 합니다. 이는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은 일관되고 온전한 상태를 유지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말과 그의 삶이 일치되는 것입니다. 또 가르침에 있어 단정함과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도록 도우라고 합니다. 이는 인기를 얻거나 관심을 끌기 위해 경박하거나 저속한 언어, 즉 막말을 사용하지 말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말들은 복음의 진실성과 경건함을 떨어지게 합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당시 사회에서 종과 상전의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로 적용하면 직장 상사와 부하 직원과의 관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직장에서 부하 직원은 직장 상사를 마음에 안 든다고 들이받기보다 순종하여 회사 본연의 임무를 잘 감당하고 회사의 수익을 창출하고 회사에 유익이 되게 해야 합니다. 회사의 것을 사적으로 사용해서도 안 됩니다. 신자는 어떤 상황, 어떤 공동체에서도 하나님의 성품인 참된 신실함을 나타내야 합니다.
그러나 당시 그레데 섬의 분위기는 거짓말하고 속이고 자기 배만 채우고 일하기에 게으른 분위기였습니다. 대다수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가는데 나 혼자만 경건하고 신실하게 산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나만 따돌림을 당하고 나만 손해를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왜 신실하게 살아가야 할까요? 10b절을 보십시오. “이는 범사에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려 함이라.” 이 부분의 원어를 직역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매력적인 것으로 만들게 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교회의 매력은 큰 행사나 집회에 있지 않습니다. 광고나 전단지, 방송 등을 통해 나타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의 매력이 입증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중심적이고 거짓되게 살아가는 시대 가운데 성도들이 삶의 현장에서 신실하게 살아갈 때 세상 사람들은 성도들의 이런 삶을 보고 기독교에 매력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15,16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우리가 바른 교훈을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바른 교훈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가르치는 것입니다. 실제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영향력 있는 삶을 살아가도록 돕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처럼 믿음의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삶을 살 때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믿지 않는 자들이 주님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있게 될 줄 믿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삶을 어떻게 인도합니까?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살도록 가르치고 인도합니다. 이 부분의 영어성경을 직역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불경건함에 대해 ‘say no!’하도록 가르치고 세상 정욕에 대해서도 ‘say no!’하도록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구원을 받았을지라도 우리 안에 수십 년간 형성된 경건하지 못한 죄성과 세상 정욕에 대한 욕망들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이로 인해 신자는 구원받은 후에도 세상으로부터 유혹과 시험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와 함께하시며 말씀과 진리로 우리를 가르쳐 주십니다. 과거에는 ‘say yes!’했던 불경건함의 유혹 앞에서 이제는 ‘say no!’ 할 수 있게 됩니다. 세상 욕망과 정욕의 시험 앞에서 항상 ‘오~예!’하던 자가 이제는 ‘say no!’ 하도록 가르치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줍니다.
이뿐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어떤 소망을 갖게 합니까? 13절을 보십시오. 여기 ‘복스러운 소망’은 영원한 생명을 주는 소망입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다’는 것은 재림의 영광을 기다리는 신자의 삶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영생과 주님의 재림의 영광을 소망하며 살아가게 합니다.
이처럼 구원받은 우리를 양육하는 주체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유대 율법주의자들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할례, 즉 살을 베어내는 결연한 결단과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삶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오늘날, 통제 불가능한 ‘금쪽이’를 양육할 수 있는 것은 ‘심리 상담’ 같이 비싸고 강력한 솔루션이라고 말들 합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은혜는 너무 물러터져 보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은혜에는 한 푼의 값도 받지 않습니다. 가격이 없거나 싸 보이면 힘없고 질 떨어져 보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야말로 악하고 거짓말쟁이, 게으름뱅이들인 그레데 섬 사람들과 같은 구제불능의 인생도 능히 양육하심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디도에게도 다른 것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성도들에게 제대로 가르치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 신자들을 양육하여 변화시키는 주체는 디도도, 사도 바울도 아닙니다. 우리는 동역하는 일꾼일 뿐입니다. 율법도 도덕도 인간의 솔루션도 다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고 우리 신자들을 양육해 나갑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14절을 보십시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자기 몸을 속량물로 내어주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 목적이 무엇입니까?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사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원체 그레데 섬 성도들의 삶은 불법적이고 거짓이 많고 정욕과 불경건함이 가득했습니다. 예수님은 죄로 죽어가는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또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의 십자가 상의 은혜를 영접할 때 우리는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에서 벗어나 깨끗함을 얻게 됩니다.
또 이 예수님의 십자가 상의 은혜를 붙들 때 우리는 선한 일을 열심히 감당하는 영향력 있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대속의 은혜를 받기 전까지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일은 고리타분하고 따분해 보였습니다. 도무지 관심도 안 가고 이해도 되지 않고 부담스러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구속하시고 깨끗하게 하여 주시니 우리는 선한 일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여기 ‘선한 일’은 선하신 하나님을 믿고 선하신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으며 선하신 예수님을 배우고 닮아가며 선하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가는 삶이 선한 일입니다. 말씀에 기초하여 이웃을 사랑하고 구제하며 선행을 베푸는 것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구원받은 사람은 선한 일을 하고픈 열심과 심정이 샘솟게 됩니다. 선한 일을 할 때 기쁨과 만족이 임하고 영적 엔돌핀이 솟구칩니다. 과거, 죄악된 일, 무의미하고 어리석은 일에 열심을 내던 우리를 예수님의 보배 피로 구속하시고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감당하는 하나님의 백성 삼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일에 열심을 내므로 풍성한 열매를 맺는 삶 되기를 기도합니다.
3장 1,2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더 나아가 신자들이 세상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에게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말해줍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3장 1절에서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권세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고 하나님으로부터 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위정자들을 통해 국가를 유지하고 법 질서를 유지하므로 우리 삶이 보호받고 여러 유익들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일반적인 권위를 우리는 인정하고 존중하며 순종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사회 공동체가 유지될 것입니다. 다만 권세자로 세움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뜻대로 통치하지 않는 경우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움받은 권세자들, 통치자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세로 국민을 섬기고 국가를 위해 봉사할 수 있도록 중보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또 바울은 신자들이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준비하게 하라고 합니다. 이는 언제든지 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준비된 자세로 살라는 것입니다. 만일, 갑작스러운 재난을 만난 사람이 있다면 준비되어 있다가 구제에 적극 동참해야 합니다. 전도도 그렇고 사람을 섬기는 것도 준비된 마음 자세가 있어야 감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 어느 순간이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한 일을 할 기회를 뒤로 미루거나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신자들은 다른 사람과 화평의 관계를 맺고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람 관계성이 많은 유익이 있고 서로 협력하여 살아가지만 때로는 사람 관계성이 부담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부대끼며 사는 것이 스트레스일 때가 있습니다. 나의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게 만드는 인간들이 꼭 있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마다 짜증과 분노를 폭발시키면 이해는 되지만 은혜가 되지는 않습니다. 솔직함인지는 몰라도 덕이 되지는 않습니다. 반면, 신자가 범사에 온유함을 나타내면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이는 세상에서 신자가 살아가야 할 자세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이런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까? 먼저 우리가 어떤 존재였는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어떤 존재였습니까? 3절을 보십시오. 과거 우리는 어리석은 가치관을 가지고 어리석은 선택을 하며 어리석은 언어와 행실로 살던 자였습니다. 물질과 세상 정욕과 자신의 욕망을 따라 살던 자였습니다. 죄악되어 서로를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하며 힘들어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 없이 살던 자였습니다. 하나님의 진리와 말씀에 대해 거스르고 불순종하였습니다. 이것이 과거 우리 인생의 요약입니다.
그러나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어리석어 불순종하며 사탄에 속아 비참한 삶을 살던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주셔서 우리 사랑하심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이는 우리의 의로운 행실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심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자마다 성령을 보내주시고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 생명이 유지되고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삶을 본받으며 그리스도의 형상을 회복해 나가게 됩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토록 자비를 베풀어주셔서 우리를 구원해주시는 것일까요? 7절을 보십시오.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 구원 계획의 궁극적인 목표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와 그곳에서의 영광을 얻고 누리는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상속자 삼아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영광에 참여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면서 세우신 위대한 목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디도에게 이 은혜의 복음을 굳세게 말하라, 강조해서 말하라고 격려합니다. 이처럼 신자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확신을 가지게 될 때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에 빠지지 않고 악한 일에 빠지지 않으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받고 영생과 하나님 나라 상속자로서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주님 재림하실 때 사랑하는 주님과 사랑하는 성도들과 함께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토록 왕노릇하며 함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은혜에 기초해 성경적인 바른 교훈을 가르치고 성경적인 바른 삶을 살아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하나님의 백성들로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