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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마태복음 제12강-내가 이 일 할 줄을 믿느냐(말씀)

작성자김스데반|작성시간26.06.08|조회수112 목록 댓글 0

 

2026년 마태복음 제12강

 

내가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말씀 / 마태복음 9:18-38

요절 / 마태복음 9:28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맹인들이 그에게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어느 날, 한 대형 쇼핑몰에서 다섯 살 된 아이가 부모를 잃어버렸습니다. 아이는 사람들 속에서 울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아이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부모가 어디 근처에 있겠지” 하며 지나갔습니다. 어떤 사람은 잠시 안타까워했지만 곧 자기 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아이의 아버지는 달랐습니다. 아버지는 아이가 없어진 것을 알고 온 쇼핑몰을 뛰어다니며 찾기 시작했습니다. 엘리베이터도 타지 않고 계단을 뛰어다녔습니다. 땀을 흘리며 이름을 불렀습니다. 직원에게 부탁도 하고 방송도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아이가 자신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아버지는 울고 있는 아이를 발견했습니다. 아버지는 아이를 품에 안고 말합니다. “얼마나 무서웠니? 아빠가 찾고 있었단다.” 많은 사람들이 길 잃은 아이를 보고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이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느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긍휼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왜 우리의 구원자가 되십니까? 그분은 놀라운 권능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향하신 긍휼의 마음까지도 놀라운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권능과 긍휼하심이 오늘 말씀에 어떻게 나타납니까?

 

  18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말씀하고 계실 때 한 관리가 등장합니다. 다른 복음서에 보면, 그 관리는 회당장 야이로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회당에서 예배드리고 재판도 하고 교육도 받았습니다. 회당은 유대인들의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회당장은 회당의 책임자로 예배를 주관합니다. 대부분 회당장은 권위적이고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과 연계된 지역 유지였습니다. 그러나 회당장 야이로는 그 지역 사회에서 존경받는 지도자였습니다. 이런 그가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왜입니까? 자기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다른 복음서에 보면, 그의 딸은 열두 살 된 외동딸이었습니다. 얼마나 예쁘고 애지중지 키웠겠습니까? 아버지의 마음은 무너졌을 것입니다. 지위도 소용없고 재산도 소용없었습니다. 죽음 앞에서 인간은 무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회당장 야이로는 어떻게 합니까? 예수님께 나아와 엎드립니다. 당시 회당장들은 대부분 예수님을 반대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과 연계된 경우들이 많아서 그들 역시 예수님을 좋게 보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야이로는 자기 체면과 자존심을 내려놓았습니다. 이처럼 믿음은 자기 한계를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자기 체면과 자존심보다는 자기가 어찌할 수 없음을 깊이 인정하고 예수님께 도움을 청합니다. 야이로는 딸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께 대한 믿음도 있었습니다. 야이로는 예수님에게 말합니다.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 이것은 딸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아빠의 과도한 집착과 허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도 살릴 수 있다는 믿음이 야이로에게는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권능을 믿었습니다. 참된 믿음은 상황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권능과 주권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은 일어나 회당장 야이로를 따라갑니다. 제자들도 함께 갑니다.

 

  예수님이 회당장 야이로의 집으로 가시는 도중에, 또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20절을 보십시오.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인이 등장합니다. 이 여인은 12년 동안 피 흘리는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부정한 사람으로 취급받았습니다. 또 가족과 사회로부터 격리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그가 가진 재산을 다 쓰고도 더 악화되었다고 기록합니다. 12년 동안의 고통, 12년 동안의 눈물, 12년 동안의 절망과 좌절, 이를 생각해 보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육신도 마음도 다 포기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그녀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합니다.“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자신의 현실과 부정한 자로 인식되어 격리되어 있어야 하는 사회 구조를 생각해보면, 사람들 앞에 나설 용기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달랐습니다. 그녀의 믿음이 두려움을 뛰어넘게 했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만지러 나아갈 용기를 갖게 했습니다. 그 여인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예수님 뒤로 몰래 다가왔습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예수님의 겉옷 가를 만졌습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 여인이 예수님의 겉옷을 만지는 순간, 예수님은 그를 알아보셨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시고 그녀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이 임하게 되었음을 말씀해 주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구원’은 단순히 병 고침만이 아니라 완전한 전인적인 회복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토록 여인을 괴롭혔던 혈루증이 예수님이 구원을 선포하시는 순간, 즉시 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권능을 믿는 믿음이 여인을 혈루증으로부터 구원해 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여인을 어떻게 불렀습니까?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놀라운 것은 예수님이 그녀를 “딸아” 이렇게 불러주신 것입니다. 12년 동안 부정한 여인으로 낙인찍혀 격리되고 배척되었던 여인입니다. 소외되어 극도로 외로움을 가지고 있을 여인입니다. 이런 여인이 하나님의 딸로 회복되는 순간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질병만 고쳐주신 것이 아니라 상처받고 고독한 영혼도 치유해 주신 것입니다. 사실, 다른 사람들이 이 여인이 혈루증을 앓고 있는 것을 알게 되면 부정한 여인이 사람들 사이에 나아왔다고 정죄하고 손가락질하며 침 뱉으며 저리 가라고 따돌렸을 것입니다. 학교에서 왕따나 조리돌림을 당한 아이들을 상담하신 목자님들은 그 아이들이 상담할 때 이야기하는 게 두려움과 공포라고 이야기합니다. 사회적인 존재라 살아가야 하는 인간인데 그들에게 배척당하고 따돌림당하고 그런 상황 속에서 건져줄 사람 없을 때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이 여인도 12년 동안 그런 사회 환경 속에서 많은 사람들 사이로 나아온다는 게 두려웠을 것입니다. 이런 여인의 내면까지도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그리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안정시켜 주십니다. 또한 이 여인의 믿음을 귀하게 보십니다. 앞에서 살펴봤던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 같으면 여인의 믿음을 믿음으로 보지 않고 샤머니즘이라고 판단하며 정죄하고 멀리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에게는 예수님의 권능에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 자체가 능력이 있다기보다는 예수님에게 치유의 권능이 있음을 여인은 믿었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믿음, 예수님의 권능을 믿는 믿음이 없으면 예수님에게 아무리 몸을 들이대며 비벼 댄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예수님의 권능 자체는 아닙니다. 권능을 가지신 예수님이 우리의 믿음을 원하시고 우리의 믿음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예수님께서 일하시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이 두려워하고 있는 것도 다 아시고, 12년 동안이나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도 다 아십니다. 또한 여인인 가진 믿음 또한 너무나 귀한 믿음으로 보십니다. 이것은 그 여인에 대한 인격적인 사랑과 긍휼에 기인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난 주일 말씀에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근본적으로 한 영혼 한 영혼에 대해 인격적으로 긍휼과 사랑의 마음으로 다가오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 내면의 고통과 두려움들을 아시고 살피시고 도와주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혈루증 앓는 여인을 돌보시는 동안, 그 시각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서는 이미 딸의 장례식이 한창이었습니다. 당시 장례식에는 전문적으로 음악을 연주하고, 곡소리를 대신 내며 슬픔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이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24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들이 비웃더라.” 사람들은 이런 예수님을 비웃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죽음은 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달랐습니다. 예수님에게 죽음은 잠자는 것과 같습니다. 죽음은 마지막이 아닙니다. 그 아이는 의학적으로는 분명 죽었지만, 예수님에게는 죽음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합니까? 소녀의 손을 잡으십니다. 그러자 소녀가 살아서 일어났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시신을 만지면 부정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의 부정함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왜냐하면 죽음도 다스리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만물의 창조주로서, 우리 인간의 생명의 주관자, 생명의 수여자가 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예수님의 생명의 능력이 소녀의 죽음의 권세를 몰아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어린 딸을 살리시는 사건을 통해 예수님이 생명의 주인이요, 생명의 주관자이심을 배우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관리인 회당장 야이로와 혈루증 앓던 여인, 이 두 사람을 통해 배우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향한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원하십니다. 우리의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기뻐하십니다. 우리의 믿음은 예수님이 역사하시는 통로가 됩니다. 또 우리는 생각해 볼 대목이 있습니다. 당시 율법은 죽은 시신을 만지면 부정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죽은 딸에게 손을 얹어달라는 것은 부정하게 될 것을 각오하고라도 도와달라는 것입니다. 혈루증 앓는 여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에 피 흘리는 여인을 부정하다고 간주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둘 다 부정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떻게 했습니까? 관리인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려주려고 함께 갑니다. 죽은 소녀의 손을 잡아줍니다. 또 혈루증 앓는 여인이 자기를 만졌음에도 불구하고 부정하다고 내쫓지 않고, 부정하다고 멀리하지 않고 여인을 안심시키고 여인의 믿음을 귀하게 여기시고, 여인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해 주시고, 구원을 선포해 주십니다. 이것은 다시 사회적 통념과 율법을 뛰어넘은 인격적인 사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들의 고통에 깊이 공감하는 긍휼의 마음에 기인한 것입니다. 딸이 죽었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제가 하윤이를 조수석에 태워 운전하며 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신호를 지키지 않은 큰 차가 교차로에서 속도를 내며 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차로에 주차된 차들이 있어서 그 차가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차가 보이는 순간 반사적으로 왼쪽의 중앙선을 넘으면서까지 왼쪽으로 사정없이 차를 돌려 충돌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 순간 사고가 제대로 났으면 우리 하윤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하니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이런 상황도 슬픈데 죽었다면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습니까? 혈루증 앓는 여인도 12년 동안이나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공감하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회적 통념을 뛰어넘어서라도 그들의 고통을 깊이 공감하시고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도와주셨습니다. 이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하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고통스러운 문제가 있습니까?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습니까? 한계에 매여 힘들어하고 있습니까? 우리를 깊이 공감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주님께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인격적으로 다가와 주시는 사랑과 긍휼의 주님을 우리가 신뢰하고 그분께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럴 때 주님의 도우심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주님을 통한 회복과 치유의 역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2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가실 새 두 맹인이 따라오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중동 지역은 건조하고 모래바람이 많이 불어 눈에 관련된 질병도 많았고 맹인도 많았다고 합니다. 아무튼 두 맹인이 예수님에게 나아와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에 대한 호칭이었습니다. 그들은 눈은 보지 못했지만, 영적인 눈은 열려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단순한 선지자로 보았지만, 이들은 예수님이 약속된 그리스도이심을 믿은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예수님이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즉시 고쳐주시지 않으셨다는 점입니다. 두 맹인이 계속해서 예수님 가는 길에 따라가면서 불쌍히 여겨달라고 했으면 즉시 고쳐주시면 얼마나 좋을까요? 예수님은 길에서 바로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한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 맹인들은 계속 따라와 예수님에게 다가왔습니다. 28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예수님은 너희들 눈 뜨고 싶으냐? 이렇게 묻지 않으셨습니다. 이 질문은 내가 이것을 할 능력이 있다고 계속해서 믿고 있는 것이냐? 연속적인 신뢰성을 물어보고 계시는 대목입니다. 예수님은 눈 뜨고 싶냐는 소원을 물어본 것도 아니고, 문제의 심각성에 대해 물어본 것도 아닙니다. 문제의 크기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현재형을 써서 예수님의 능력을 계속 믿고 있느냐? 즉 상황이나 시간에 따라 요동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이 일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계속 믿고 있느냐? 이런 말입니다. 두 맹인들은 예수님이 길에서 즉시 응답하지 않으셨음에도 끝까지 따라와 집 안까지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질문에 “주님, 그러합니다”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이것을 이루어 낼 수 있다고, 너희들의 눈을 뜨게 해줄 수 있다고 계속 믿느냐?” 이같은 예수님의 질문에 두 맹인들은 강한 확신의 대답을 합니다. “네, 그렇습니다. 틀림없습니다.” 이런 의미의 답변입니다. 이들의 믿음은 단순히 눈 뜨게 되는 것에 대한 희망이 아니라 예수님이 메시아이시며 능력의 주님이시라는 분명한 믿음 고백입니다.

 

  우리는 현재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문제를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능력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도우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두 맹인은 육신적으로는 보지 못했지만, 예수님의 권능과 사랑과 긍휼의 마음을 보았습니다. 확신했습니다. 참된 믿음은 눈으로 보고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권능과 사랑과 긍휼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두 맹인들의 믿음을 기뻐 받으시고 그들의 눈을 뜨게 해주셨습니다. 우리의 예수님을 향한 권능과 사랑과 긍휼에 대한 믿음은 예수님의 도우심을 경험하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두 맹인들이 떠난 후, 사람들이 귀신 들려 말 못 하는 사람을 예수님에게 데려왔습니다. 예수님에게 데려왔는데, 귀신이 쫓겨 나가고 말 못 하는 사람이 말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권능으로 귀신을 내쫓아 말하게 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후로도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천국 복음을 전하시고 모든 질병과 귀신 들린 것을 비롯해 모든 약한 것들을 고쳐주셨습니다. 36절을 보십시오. 이 대목이 오늘 본문의 중심입니다. 예수님이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병든 자들을 고쳐주시고 귀신도 쫓아내 주시고 천국 복음도 전해주시고 여러모로 가르쳐주셨습니다.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36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여기, 불쌍히 여기셨다는 것은, 우리가 수도 없이 배웠습니다. 창자가 뒤틀릴 만큼 깊은 긍휼의 마음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보시며 몸과 마음으로 깊이 공감하시며 아파하셨습니다. 뭐 때문에 그렇게 불쌍하게 여기셨습니까?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하기 때문입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있었지만 참된 목자는 없었습니다.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목자의 역할을 제대로 해야 했지만, 그들은 영혼에 대한 관심에서 멀어져 있었습니다. 율법적인 사고방식, 그들의 기득권 등 이런 데 더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의 영혼을 보셨습니다. 사람들 내면의 죄와 두려움과 상처 속에 방황하고 고통하고 있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그들의 목자가 되어주셨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어린 딸 아이를 향한 아버지의 마음을 부모라면 누구라도 공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나아가 죽은 딸을 살려달라고 매달리는 것은 억지가 아니라 아버지의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일 수 있습니다. 혈루증 앓는 여인이 그 병에서 낫고자 하는 것이 욕심이겠습니까?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맹인이 눈 뜨려고 예수님에게 달려드는 것을 정죄하고 뿌리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구할 수밖에 없는 인생 문제 해결을 위해 나아온 그들을 긍휼의 마음으로 품어주시고 받아주셨습니다. 병에서 낫고 싶고, 좋은 직장 갖고 싶고, 자녀를 신앙적으로 잘 기르고 싶고, 목자로서 열매 맺고 싶고, 이런 것들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죄 문제도 아니고, 남들 사는 것처럼 살고 싶은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이 평범한 것조차도 내게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냥 자포자기하고 낙심하고 좌절하고 울어야만 할까요? 예수님에게 나아가야 합니다. 물론 예수님은 두 맹인이 나아갔을 때처럼 한동안은 침묵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절망하지 말고 예수님 앞으로 계속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은 분명 우리의 소원을 아십니다. 개인의 욕심이나 죄 문제가 아닌, 지극히 필요한 삶의 소원을 아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지금까지 된 적 없고 이뤄진 것을 본 일이 없어도 ‘내가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하시는 주님 앞에서 믿음으로 나아가야겠습니다. 일을 행하시고 권능을 나타내시는 것은 주님의 주권이기에 지금 당장 내가 원하는 결과가 나타날지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가장 좋고 선한 것을 내게 주실 수 있는 주님의 권능과 사랑과 긍휼을 믿는 믿음을 분명히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긍휼로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긍휼하심으로 영적인 눈을 뜨고 크고 작은 현실 문제들을 해결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죄로 고통하고 크고 작은 현실 문제로 괴로워하며 울부짖을 때 우리에게 공감과 긍휼의 마음으로 다가와 주셨던 분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우리가 인생의 여러 문제 앞에서 문제의 크기를 바라보기보다, 주님의 권능과 우리를 향하신 사랑과 긍휼을 믿고, 주님께 나아가 기도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입니다. 또한 우리가 영혼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추수할 것이 많지만 추수할 일꾼이 적은 것으로 보셨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목자 없는 양 같은 영혼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을 예수님의 사랑과 긍휼의 마음으로 다가가 돕고 섬길 목자들이 이 시대에 필요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영혼들에 대한 긍휼의 마음으로 불붙어 있습니까? 아니면 냉랭하게 식어 내 현실 문제에만 몰입해 있습니까? 우리가 주님의 긍휼의 은혜를 기억하고 우리 심령 또한 영혼들에 대한 긍휼의 마음으로 불붙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은 긍휼의 목자로 쓰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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