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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마태복음 제13강-열둘을 내보내시는 예수님(말씀)

작성자김스데반|작성시간26.06.14|조회수106 목록 댓글 0

 

2026년 마태복음 제13강

 

열둘을 내보내시는 예수님

 

말씀 / 마태복음 10:1-42

요절 / 마태복음 10: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오늘 말씀은 제자 훈련 가운데 전도에 관한 말씀입니다. 전도를 즐겁게 하는 분들도 물론 있지만 ‘전도’라는 말을 꺼내기만 하면 부담을 가지는 경우들이 많을 것입니다. 전도에는 어려움이 따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고난과 박해에 관한 말씀이 길게 나옵니다. 물론 오늘날에도 이런 고난과 어려움들이 있지만 예수님 당시에는 더더욱 심했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이 대부분 복음 전파하고 선교하다 순교했습니다. 우리도 쉽게 생각해 보더라도 전도하다 외면당하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꾸 외면당하는 시간을 보내다 보면 하기 싫어지기도 하고 자신감도 없어집니다. 지금까지 뭐 했나 이런 생각이 들면서 마음고생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이런 고난과 부담감이 주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에 대한 공증임을 말해줍니다. 더불어 복음 전도자에 대한 내외적 열매와 상에 대해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복음 전도자의 삶에 대해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또 우리를 향한 주님의 소원은 무엇일까요?

 

  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예수님은 열두 제자들을 부르시고 복음 전도자로 파송하십니다. 파송하시면서 그냥 보내셨습니까? 아닙니다. 감당할 수 있도록 권능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 훈련을 하시면서 그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주님의 긍휼을 가진 목자로 세워지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들을 통해 양 무리를 회복시키고 하나님의 나라 세워가기를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복음 전도자로 소집한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열두 제자입니다. 그들은 이제껏 예수님을 따르며 배워온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천국 복음이 무엇인지 목자 없는 양들을 향한 긍휼의 심정이 무엇인지 배웠습니다. 그러나 전도는 배운다고 해서 전도가 아닙니다. 실제 전도를 통해 복음을 전하고 영혼들을 섬겨 하나님 나라를 건설해 가야 합니다. 이렇게 하도록 그동안 천국 복음에 대해 제자들을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권능, 즉 귀신도 쫓아내고 병도 고치는 능력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또 보내실 때는 크게는 열두 명이 다 함께, 작게는 두 명씩 짝을 지어 움직이도록 하실 때도 있었습니다. 동역해서 전도하는 것이 훨씬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캠퍼스에 전도하러 혼자 나가다 보면 위축되어 커피만 마시고 돌아오기도 쉽습니다. 그러나 둘 셋이, 또는 여러 명이 함께 가면 힘이 나고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 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열두 제자를 전도 훈련 보내시는 예수님은 그들에게 구체적인 전도 전략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전도 대상을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으로 특정해 주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궁극적으로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세상 만민에게 복음이 전파되길 원하십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택함 받은 백성이라는 우선권과 제자들의 현재 수준을 고려할 때 단계적 접근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복음을 전파하는 일과 치유와 회복하는 일을 하도록 사역의 방향을 설정해 주셨습니다. 이 일들은 모두 이제까지 예수님이 하셨던 일입니다. 이제 제자들이 예수님의 대리자들이 되어야 했습니다. 셋째, 예수님은 전도에 필요한 자원들을 하나님이 예비하신 사람들로부터 공급받도록 하셨습니다. 복음 전도자는 주님께 거저 받은 은혜들을 나누는 사람이기에 거저 주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필요한 자원을 자신이 다 챙겨가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 기동성이 떨어져 얼마 지나지 않아 한계에 부딪히고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전도한 성이나 마을에서 합당한 자, 곧 천국 복음을 영접하는 자들을 찾아내 그 집에서 먹고 자는 문제를 해결 받도록 도우셨습니다. 넷째, 예수님은 전도자를 영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서는 미련 없이 떠나도록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영접하지 않는 사람을 만나면 나에게 문제가 있거나 복음 자체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복음 전도자가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대로 했는데도 그들이 복음을 영접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에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 전도자는 복음에 대한 부정적 반응 때문에 위축되거나 복음 자체를 변질시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들 잘못입니다.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까지 복음 전도자의 책임은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복음 전도의 시작은 무엇으로부터일까요?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복음을 전해야 할까요? 교회를 부흥시키려는 열심일까요? 아닙니다. 복음 전도는 지난주 말씀에서 예수님이 기도 제목을 주신 것처럼, 추수할 일꾼으로 쓰임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추수하는 일꾼은 어떤 마음 자세가 있어야 합니까?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 마음이 있지 않다면 전도는 시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다면 전도는 의무적인 게 되고 아주 힘든 중노동이 됩니다. 그러나 전도가 심정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요즘 부흥 집회나 유명 강사들의 온라인 강의를 들어보면 ‘전도 전략’에 대한 특강이나 세미나가 참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에 대한 확신과 더불어 성경에 대한 아는 지식도 준비하고 여러 전도 전략과 도구들도 준비하는 게 필요합니다. 5월에 있었던 선교사 목자 수양회 때 각대륙별 선교 전략 세미나 강사들이 거의 1년에 거쳐 연구하고 정리해서 선교 전략을 발표했습니다. 선교사님들에게 큰 은혜와 도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부족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전도할 동역자들도 많지 않은데 전도를 포기해야 할까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제자들도 모든 것이 다 준비되었고 다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전도를 위해 보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주님도 제자들을 전도 훈련 보내면서 오죽했으면 제자들을 보내는 것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다고 했을까요? 불안하기도 하고 못 미덥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전도 안 하면 누가 그 시대를 섬길 수 있을까요? 우리도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내가 아니더라도 복음 전도자들은 많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내가 안 하더라도 다른 전도자들이 하면 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복음 전도자로 세우시고 하나님 나라 건설을 이루어나가길 간절히 원하십니다.

  또 한 가지 생각해 볼 대목은 전도 전략을 세우는 주체가 우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전도 전략을 세운 주체는 제자들이 아니라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십니다. 복음을 받아들일 때는 어떻게 하고 받아들이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해라 말씀해 주십니다. 복음을 전할 때 할 말도 성령께서 주신다고 전도하러 나가는 제자들에게 용기와 힘을 실어주십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표면적으로는 사도들의 행적이 주로 나타나 있지만 분명 그 사도들을 이끄신 분이 성령이심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복음 전도 전략과 전도할 때 모든 필요와 할 말을 가르쳐주는 분 역시 성령님이십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예수님과 복음을 더 잘 배우게 하시고 주님 주시는 권능을 덧입게 하시고 전도를 위한 동역의 그릇이 이루어지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더불어 복음의 수용성이 작아지는 시대 속에서 복음을 힘 있게 전할 지혜 주시길 기도합니다.

 

  16절을 읽겠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 복음 전파가 쉽지 않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을 보내는 것이 마치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에서 양은 연약한 동물의 대명사입니다. 자신을 방어할 힘이 있는 것도 아니고 공격할 수 있는 위협적인 이빨이나 발톱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게다가 시력도 약합니다. 반면 이리는 물어뜯고 죽이는 맹수입니다. 이러면 양이 배고픈 이리의 밥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여기서 양은 아직 어리고 연약한 제자들을 가리킵니다. ‘이리’는 복음 전도자를 핍박하는 복음의 대적들을 가리킵니다. 이들 배후에는 사탄이 있습니다. 사탄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 복음이 전파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이 전파되면 하나님 나라가 건설되어 갈수록, 반대로 사탄의 자기 왕국이 무너져가기 때문입니다. 이에 사탄은 무슨 수를 쓰더라도 복음이 전파되지 못하도록 훼방을 놓습니다. 복음 전파의 방해꾼입니다. 여러모로 고난을 겪게 하고 핍박을 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실을 아시면서도 제자들을 보내십니다. 상황을 알면 안 보내셔야 할 것 같은데 그래도 보내십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라도 보내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목자 없는 양 같은 무리에 대한 예수님의 긍휼의 마음이 불같이 타올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조금 있으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나중에는 부활 승천하시면 더 이상 이 세상에 안 계시기에 연약한 제자들을 통해서라도 목자 없는 양 같은 무리를 돕고자 하는 목자 심정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자들은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해야 합니다. 뱀은 상황 대처 능력이 매우 뛰어난 동물로 지혜의 상징으로 여겨졌습니다. 뱀은 공격할 때와 피할 때를 정확하게 압니다. 특히 머리를 기가 막히게 잘 보호하고 피합니다. 뱀은 다른 곳이 좀 상처가 나고 꼬리가 잘려 나가도 바위틈이나 땅속의 굴로 들어가면 금방 상처가 재생됩니다. 그러나 머리를 공격받으면 죽습니다. 그래서 민첩하게 판단해 가장 먼저 머리 부분이 재빠르게 이쪽저쪽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처럼 제자들은 이리떼가 우글대는 세상에서 멍청하게 무대책으로 당하는 숙맥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뱀처럼 민첩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지혜롭게 대처해야 합니다.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을 알고 넘어지게 하는 함정을 민첩하게 피해 가야 합니다. 그렇다고 약삭빠른 기회주의자가 되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또한 비둘기같이 순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에서 비둘기는 순결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어떤 위협 앞에서도 타협하지 않고 복음의 순수성과 신앙 양심을 지켜야 합니다. 뱀처럼 지혜로우면서도 동시에 비둘기처럼 순결하기란 쉽지 않아 보입니다. 그러나 이 상반되어 보이는 듯한 두 자질은 복음 전도자가 꼭 필요한 균형 잡힌 자질입니다.

 

  초기 기독교 당시 사도들을 비롯해 예수님을 따르는 성도들은 유대인들로부터 회당에서 채찍에 맞는 고초와 수모를 당해야 했습니다. 이방인들로부터 재판정에 서고 투옥되는 박해를 받아야 했습니다. 심지어 가장 가까운 가족들로부터 고발을 당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때 복음 전도자는 어떤 심정이 들까요? 곤혹스러울 것 같습니다. 복음은 좋은 소식입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면 환영 받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 복음은 세상의 논리와 가치와는 이질적인 것이기에 복음 전도자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미움과 외면, 배척과 박해입니다. 복음 전도자들에게는 잘 이해가 되지 않고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마음이 힘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가져오신 예수님이 사람들로부터 어떤 대접을 받으셨습니까? 권능으로 사람을 살리고 병자들을 고치고 귀신을 내쫓아 주었더니 귀신의 왕이라는 모욕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끝에는 미움을 받아 온갖 수모를 겪고 마침내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에게 속한 사람들이 복음을 전할 때 미움과 박해와 배척과 외면을 당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오히려 이때 예수님의 제자로 인증을 받은 것으로 여기고 자랑스러워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회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전도에 모든 시간을 쏟을 수는 없습니다. 직장 생활도 감당해야 하고 캠퍼스에서 학업도 감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 가정도 섬겨야 합니다. 생각해 보면 여기서 저기서 부지런히 일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가운데 복음 전파에 올인할 수는 없을지라도 시간을 내서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직장에서 직장 동료에게 말을 걸어봅니다. 복음을 전해봅니다. 캠퍼스에서 친구에게 말을 걸고 복음을 전해봅니다. 시간을 내서 복음을 전해봤는데 그 딴소리 할꺼면 저리 가라고 외면하고 배척합니다. 이러면 어떻습니까? 기분 잡치고 힘이 쭉 빠지고 다시는 복음 전하기 싫어집니다. 주눅이 듭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는 복음 전하는 것은 안된가보다 하는 관성에 빠지게 됩니다. 복음 전하는 것이 부담스럽습니다. 어느 순간부터는 ‘아무도 내가 믿는 자인지 모르게 하라’ 이런 말을 모토로 삼기 시작합니다. 신앙생활 하는 것도 티 안나게 적당적당히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을 전하다가 외면당하고 배척받을 때, 복음을 전하다가 이런 부담스러운 일들을 겪을 때 오히려 우리는 우리가 복음 전도자로 주님께 택함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신자로 살아가고 가족이나 직장 동료나 캠퍼스 친구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외면당하고 고난이 주어지고 배척과 핍박이 있습니까? 이런 상황들은 우리가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가고 있고 우리를 주님이 구원하시고 택하시고 복음 전도자로 살아가게 하셨음을 인식하는 시간들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 복음은 세상과는 대척점에 있기 때문입니다. 염려하고 두려워하기보다, 주눅 들고 힘 빠지기보다, 낙심하기보다 주님이 나를 택하셨구나, 내가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고 있구나 생각하며 위로와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물론 자기 죄 문제와 연약함으로 고난과 배척과 핍박이 주어지는 경우와는 다릅니다. 이런 경우는 회개해야 마땅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다가 외면, 배척, 핍박 등의 어려움이 주어지면 염려하기 쉽고 두려워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염려할 필요 없습니다. 두려워할 필요 없습니다. 그런 상황이 되면 성령께서 그 순간 할 말을 입에 넣어 주신다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다 보면 사람들의 외면이나 갈등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왕따를 당할 수도 있고 직장 상사나 동료, 때로는 친구들에게 찍혀 시달림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면 신앙생활하고 있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지 않으려 합니다. 두더지 같은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런 자세는 때로는 자기 신앙 양심과 부딪쳐 내가 이렇게 지내면 안 되는데 하는 죄책감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람을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26). 진리는 언젠가 다 밝혀지기 마련입니다. 결국에는 신자인 우리, 복음 전도자인 우리의 말과 생각이 참되고 옳았다는 것이 다 드러나게 됩니다. 복음 진리가 옳다는 것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됩니다. 또 사람이 아무리 박해를 해봐야 몸을 죽일 수는 있어도 영혼을 죽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몸과 영혼을 다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누구를 두려워해야 합니까?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이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한낱 미물인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 그냥 땅에 떨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하물며 참새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귀한 하나님의 자녀들을 하나님이 모른 채 하시겠냐는 것입니다. 우리의 머리카락 하나까지 다 세고 계신 하나님이 눈동자와 같이 지켜주시고 승리하게 하실 것입니다.

 

  지금까지 전도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보면 어떻습니까? 전도가 참 쉽지 않아 보입니다. 저도 전도하다 사람들에게 외면받는 것이 싫습니다. 사람들과 말하는 것을 엄청 좋아하는 저인데 왜 복음을 전하려고만 하면 움츠러들까요?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요? 22절을 보십시오.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우리가 다 알고 있는 상식적인 말 같지만 주님은 끝까지 인내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복음 전도자는 외면을 비롯한 여러 어려움을 끝까지 참고 견디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인내가 없다면 아무리 말을 잘하고 은사가 있어도 전도를 지속적으로 감당하기 쉽지 않습니다. 전도에는 왕도가 없습니다. 양들의 매몰찬 외면에 상처받을까 두렵습니다. 잘 아는 사람에게 전도하는 것은 내 정체성을 드러내야 한다는 부담이 있습니다. 어떤 전도이든 복음 전도자는 어느 정도의 부담감은 감수해야 합니다. 이런 부담감이 있다는 것 자체가 내가 신자이고 내가 주님의 택함 받은 자임을 공인받는 것입니다. “내가 전도하는 이유는 내가 전도해야 내 영혼도 살아나기 때문이다.” 이런 말을 하신 분이 있습니다. 우리는 전도를 통해 생명을 살릴 수도 있지만 내 영혼도 살아납니다. 전도를 통해 우리가 신자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믿음의 담대함도 배우고 예수님의 긍휼도 배우고 오래 견디는 인내의 성품도 키워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꾸준히 전도하되 전도가 우리 삶의 일부가 되기까지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수많은 환자를 돌보며 인턴, 레지던트 임상 실습을 거치며 의사로서 실력을 발휘할 수 있듯이 우리가 삶의 일부가 되기까지의 꾸준한 전도를 통해 예수님을 닮은 긍휼의 목자,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하는 영혼들의 목자로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는 복음 전도자를 외면하고 배척하는 사람만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40절을 보십시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복음 전도자인 우리를 영접하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습니다. 정훈, 성현, 요한 형제도 다들 복음 전하다가 만난 형제들입니다. 복음 전도자를 영접하는 사람은 단지 사람을 영접하는 차원을 넘어 예수님과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하늘의 상이 있습니다. 복음 전도자를 선지자처럼 영접하면 선지자와 같은 사역에 참여한 것으로 주님께 인정을 받게 됩니다. 복음 전도자를 의인처럼 영접하면, 즉 전도자를 하나님을 경외하며 바르게 사는 사람으로 영접하고 전도자를 존중하고 섬기는 사람도 하나님이 동일하게 기억해 주십니다. 하다못해 전도자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대접하면 상을 잃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처럼 복음 전도자는 하나님의 상이 세상 사람들에게 닿게 하는 축복의 통로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여러분! 복음 전도자를 영접하기만 해도 이렇게 큰 상을 누리게 된다면 복음 전도 당사자는 얼마나 더 큰 상을 누리겠습니까? 사람들의 외면, 배척, 때로는 핍박과 부담감을 마다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해 나서는 복음 전도자에게 하나님이 얼마나 큰 상을 주시겠습니까? 우리가 전도해서 교회에 데려왔냐 데려오지 못했냐에 너무 얽매이지 말고 전도가 우리 삶의 일상이 되기까지, 전도가 나와 상대의 생명을 살리는 일임을 인식하고 인내하며 전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를 하늘의 상을 받아 누릴 추수할 복음 전도자들로 택하시고 불러주신 주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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