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마태복음 제14강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말씀 / 마태복음 11:1-30
요절 / 마태복음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사람들은 누구나 쉼을 얻고 누리기를 원합니다. 특히나 경쟁이 치열한 사회 속에서 긴장되고 스트레스를 받는 생활이 연속된다면 더욱 이런 마음이 들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이 쉼을 얻는 방법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물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쉼은 우리가 단순히 며칠 일 안 하고 놀거나 푹 자고 일어나는 이런 차원의 쉼은 아닙니다. 이런 쉼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쉼은 주님이 주시는 은혜, 하늘의 신령한 은혜, 천국의 은혜와 결이 같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천국의 은혜를 어떻게 누릴 수 있을까요?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쉼을 얻고 누릴 수 있을까요? 이 시간 말씀을 통해 진정한 쉼을 얻도록 초청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영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천국의 은혜는 침노하는 자들의 것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제자들을 전도 여행을 보내신 후, 여러 동네를 다니시며 가르치시고 전도하셨습니다. 그때 세례요한은 헤롯 왕에 의해 억울하게 옥에 갇혀 있었지만, 제자들을 통해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다 듣고 있었습니다. 세례요한의 반응이 어떻습니까? 세례요한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3)?” 세례요한은 도리어 예수님이 메시아가 맞는지의 여부를 의심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행적이 자신의 기대와 사뭇 달랐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메시아가 오시면 알곡과 쭉정이를 구분하여 알곡은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울 것이라 생각했습니다(마3:12). 불의한 헤롯 왕을 심판하고 억울하게 옥살이하고 있는 자신을 당장 구해 주리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5절을 보십시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예수님은 이런 일들을 자신이 확실히 메시아라는 증거로 제시합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일들이 이사야서에 메시아가 오셔서 하실 일로 예언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은 성경 속에서 예수님을 바라보기보다 자신의 기대가 담긴 메시아를 생각하다가 실족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이 실족했다고 해서 결코 평가절하될 사람은 아닙니다. 그는 어떤 권력 앞에서도 흔들리는 갈대와는 달랐습니다. 신앙의 지조를 지키고자 했습니다. 또 부드러운 옷을 입고 부와 명예를 최고 가치로 여기고 사치와 향락을 즐기는 자들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요한은 믿음의 심지가 굳었고, 의를 위해서는 목수 바쳐 싸우는 의로운 투사였습니다. 메시아의 선구자라는 주어진 사명에 충성을 다한 사람이었습니다. 11절. 예수님은 이런 요한을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요,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보다 큰 이가 없다고 칭찬하셨습니다(11). 그런데 예수님은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요한보다 더 크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극히 작은 자는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거듭 나 천국을 경험하게 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이 어떻게 천국을 경험하게되었습니까? 12절을 보십시오. “세례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여기, ‘침노한다’라는 말이 부정적으로 보이는 것 같지만 여기서는 긍정적인 의미로 쓰였습니다. 첫째는, 들어가서는 안 될 것 같은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간 것 같은 뉘앙스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르게 생각해 보면, 천국은 자격 없는 사람들이지만,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들어가는 곳임을 생각하게 합니다. 둘째는, 천국에 대해 적극적이고 열정적인 반응을 보이며 소원 있는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가기에 합당하다는 의미입니다. 지붕에 올라가 천장을 뚫고 친구인 중풍병자의 침상 채 예수님 있는 곳으로 내렸던 친구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믿음으로 나아갔을 때 그들은 예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돌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나왔던 나병환자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외치며 따라왔던 두 맹인을 생각해 보십시오. 모두 다 적극적이고 영적 소원을 가지고 열정적인 반응을 보이며 예수님께 나아왔던 자들입니다. 이들은 다 다 천국을 침노했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권능과 긍휼을 믿는 믿음으로 온갖 어려움을 헤치고 적극적으로 예수님께 나아왔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은혜를 얻고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치유와 회복이 있는 나라, 구원과 생명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 천국의 은혜를 경험하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천국의 가치를 알고 기를 쓰고 천국을 향해 나아오는 자, 천국의 은혜를 얻고 누리기 위해 열정적인 자, 이들이 천국의 주인공이 됩니다.
구약에서 천국은 선택된 소수만이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천국 문이 활짝 열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에 들어올 수 있는 자를 제한하지 않으시고 누구든지 회개하고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오기만 하면 천국을 얻을 수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천국은 사모하며 열정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찾는 자들의 것입니다. 천국은 누구에게나 열려있지만, 열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찾는 이들이 천국을 얻고 소유하게 됩니다. 우리가 지금도 천국의 은혜를 맛보고 누리려면 우리가 예수님을 뜨겁게 사모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열정적으로 반응하고 순종하는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천국의 은혜를 적극적으로 사모해야 합니다. 감나무 아래서 감 떨어질 때까지 입만 벌리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은혜 주시면 받고 아니면 말고요.” 이런 식의 자세는 곤란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한시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저에게 천국의 은혜를 넘치도록 부어주세요.” 이렇게 주님을 붙들고 주님에 대해 적극적이고 열정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천국의 은혜를 얻고자 하는 뜨거운 영적 소원을 품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늘의 복과 생명과 은혜를 풍성히 누리는 삶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천국의 은혜는 주님께 합당한 반응을 하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17절을 보십시오.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당시 아이들은 장터에 모여 두 가지 놀이를 주로 했다고 합니다. 먼저, 결혼식 놀이입니다. 신랑, 신부, 주례를 정하고 한 아이가 피리로 결혼행진곡을 불면 그 가락에 맞추어 다 함께 춤을 추는 놀이였습니다. 다음은, 장례식 놀이입니다. 한 사람이 곡을 하면 나머지도 가슴을 치며 우는 시늉하는 놀이였습니다. 그런데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고, 슬피 울어도 가슴을 치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분위기가 ‘쎄’하게 되고 놀이는 거기서 끝나게 됩니다. 왜 아이들은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고 슬피 울어도 가슴을 치지 않았을까요? 자기가 하고 싶은 놀이가 따로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시대 사람들이 이 아이들과 같았습니다. 세례요한이 와서 회개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죄로 인하여 슬피 울거나,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요한을 귀신 들렸다 하며 공격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구원의 잔치를 여셨지만, 그들은 함께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예수님을 먹기를 탐하고 술을 즐기는 사람, 또 죄인들의 친구라며 공격했습니다. 왜 이러는 것입니까? 자기 생각과 감정과 주장을 고집했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들의 놀이처럼 예수님께 제대로 합당하게 반응하지 않고 도리어 예수님을 공격하고 예수님을 기뻐하지 않은 이런 모습을 잘 나타내는 대표적인 세 곳의 동네가 있었습니다. 그곳이 어디입니까? 바로 고라신, 뱃세다, 가버나움이었습니다(21,23). 모두 갈릴리 바다 주변에 있는 장소들로 예수님이 공생애 사역 기간, 가장 많은 권능을 행하신 지역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완악했습니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망가졌을까요? 그들에게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그들의 높아진 마음이 문제였습니다. 주님이 하시는 일을 겸손하게 영접하기보다는 이러쿵 저러쿵 판단하고 태클만 거는 교만함이 문제였습니다. 천국의 은혜를 경험하려면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이 하시는 일에 적극적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울어야 할 때 울고, 웃어야 할 때 웃어야 합니다. 내 나름대로 놀이를 포기하고, 주님이 이루시는 놀이에 반응하는 삶이 천국 백성으로서 합당한 삶의 모습입니다. 주님의 놀이에 반응하는 삶이 바로 천국의 은혜를 누리는 삶입니다.
가면 갈수록 오늘날 시대가 무관심, 무반응의 시대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자기와 관련된 일 이외에는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이런 무관심은 자신을 지나치게 사랑하는 이기주의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보면, 복음 역사나 이웃에 대한 관심은 별로 없고, 자신만을 위해 살아갑니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가, 되지 않은가에 따라 움직입니다. 이런 무관심은 신자로서 하나님 앞에 큰 죄악입니다. 무반응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식고 세상의 것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또는 세상의 잔재미나 깊은 죄의 세력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무관심과 무반응을 극복해야 합니다. 장터에 앉아 있는 아이들처럼 자기 하고 싶은 놀이만 생각하고 주님이 이루어가시는 일들에 대해 무관심, 무반응해서는 안 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우리가 가진 신앙이 결국 마지막에는 정서와 감정으로 드러나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과 주님의 역사에 대해 적절한 정서적, 감정적 반응을 보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같이 놀자 하는데 “싫어요.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놀이를 할꺼예요.” 이러면 되겠습니까? 우리가 주님과 함께 울기도 웃기도 하며, 천국의 은혜를 주님과 함께 공유하고 누리는 삶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천국의 은혜는 예수님께 나아와 예수님과 함께하며 예수님을 배우는 사람이 얻고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은 교만하고 마음이 완악한 자들로 인해 마음이 상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때 예수님은 겸손히 배우고자 하는 제자들을 바라보고 큰 힘과 위로를 얻으시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리셨습니다(25,26).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천국의 비밀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 숨기시고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들에게 나타내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은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고, 더 이상 듣지도 배우지도 않으려는 사람들입니다. 또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기 때문에 예수님을 간절히 의지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반면,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들은 순수한 믿음으로 천국 복음을 영접한 사람들입니다. 겸손히 배우고자 하는 예수님의 제자들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을 아는 특권과 은혜를 누립니다. 천국의 은혜를 얻고 누리며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님은 아직 이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초청하십니다. 28,29절을 보십시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여기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앞서 언급하신 ‘스스로 지혜롭고 슬기 있다고 여기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예수님께 합당하게 반응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오히려 배척하고 공격하던 자들입니다. 대표적으로 바리새인과 서기관 같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겉으로는 온갖 폼은 다 잡고 있었지만, 사실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입니다. 그들은 율법의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죄 짐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기진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을 향해 다 내게로 오라고 초청하십니다. 그리고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약속해 주십니다. 예수님에게 나아가면 예수님이 친히 다 이루신 구원을 값없이 주십니다. 예수님이 율법에 온전히 순종하심으로 얻으신 의를 선물로 주십니다. 예수님이 죄 짐을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로 가지고 가십니다. 참된 안식, 참된 쉼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온전히 쉬지 못하는 것은 항상 내가 최고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교만한 마음 때문입니다. 자기 중심성이 우리를 제대로 쉬지 못하게 만듭니다. 자신의 죄 문제가 우리를 제대로 쉬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온유하고 겸손한 분입니다. 이 예수님을 따르며 함께하게 되면, 우리는 교만을 내려놓고 나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는 겸손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배울 때, 우리 마음에 참된 평화와 안식, 진정한 쉼이 찾아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다 보면, 몸이 곤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처럼 우리 마음은 진정한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또한 예수님의 멍에를 메라고 합니다. 멍에는 소가 쟁기를 끌 때 이를 받쳐주기 위해 만든 목에 얹는 구부러진 막대를 말합니다. 이것은 소가 제멋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순종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또 소가 쟁기를 끌 수 있도록 힘을 받쳐주는 역할을 합니다. 멍에가 좋으면 소가 편히 짐을 끌 수 있지만 멍에가 좋지 않으면 불편하고 고통스러워 짐을 끌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들도 어떤 멍에를 메느냐에 따라 힘과 쉼을 얻을 수도 있고 고생만 할 수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멍에는 두 마리 소가 끄는 쌍멍에입니다. 두 마리의 소가 멍에를 멜 때 한 마리가 힘이 세면 다른 한 마리는 그냥 보조를 맞춰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가 혼자 멍에를 매면 힘들지만 주님과 함께 멍에를 메면 주님께서 그 멍에를 메고 앞서가시기 때문에 쉽게 멍에를 멜 수 있습니다. 존 칼빈은 우리가 주님의 멍에를 맨다는 것은 주님께 내 인생의 주권을 맡기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키를 예수님께 내어 맡기면 예수님께서 친히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앞서가신 예수님만 바라보고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내 인생을 책임져 주시고 의의 길, 선한 길, 생명의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또한 예수님을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 배운다는 것은 그분의 인격과 삶을 배우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배운다’라고 번역된 말은 ‘제자’라는 말과 어원이 같습니다. 예수님께 배우라는 것은 결국 주님의 제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겸손하고 온유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교만하고 성질이 좋지 않은 사람에게 가면 오히려 상처받고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그런데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에게 가면 힘과 위로를 얻습니다. 우리는 겸손하고 온유하신 예수님 안에서 마음껏 자유롭게 주님을 본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예수님을 배우는 삶을 살 때 우리 영혼에 진정한 기쁨과 쉼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배울 때 우리의 연약함과 약점들이 점점 사라지고 예수님의 거룩하신 성품을 덧입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 배우기를 쉬거나 멈추게 되면 그때부터 기쁨과 쉼이 사라지게 됩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애완견을 데리고 산책을 나옵니다. 어떤 주인은 애완견과 함께 아주 즐겁게 산책합니다. 그러나 어떤 주인은 개를 이끌려고 진땀을 빼기도 합니다. 개도 개 나름대로 목줄을 버티느라 목도 아프고 괴롭고 힘들 것입니다. 개도 힘들고 개 주인도 그리 기분이 좋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개는 자기 나름대로 가고 싶은 자기 길이 있습니다. 자기 놀고 싶은 곳으로, 자기 가고 싶은 곳으로 가고 싶기 때문입니다. 개의 길을 고집하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알아서 어련히 좋은 길로 인도할 텐데 개는 주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기 맘대로입니다. 우리 인생들도 그렇지 않을까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참된 쉼과 은혜를 얻지 못할 때가 많은데 왜일까요? 오늘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과 함께하며,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비롯해 주님의 성품을 배우려고 하지 않을 때가 바로 그때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천국의 은혜로 인도하기 위해 이쪽으로 가라고 하는데, 우리는 기어코 반대쪽으로 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하며 주님을 배우면 우리 마음은 쉼을 얻게 되어있습니다. 주님과 함께하며 주님을 배우고 닮아갈 때 우리는 천국의 은혜를 얻고 누리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과 동행하고 주님을 배울 때 참된 평화와 안식을 우리는 누리게 됩니다. 우리가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을 배우며 주님과 함께하는 삶을 통해, 천국의 은혜를 얻고 누리는 삶, 참된 평화와 안식을 누리는 삶이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