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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인물 이야기

한국 최초의 여성 의사 박에스더

작성자김민창|작성시간12.05.14|조회수156 목록 댓글 0

이화학당 학생 김점동, 의사의 꿈을 품다.

입술이 갈라진 아이 하나가 부모와 함께 진료를 받으러 병원에 왔다. 속칭으로 ‘언청이’라 일컫기도 하는 구순구개열. 아이는 고개를 제대로 들지 못하고 있었다. 의사는 서양인이었고 통역을 맡은 이는 10대 중반의 소녀였다. 수술을 받으면 고칠 수 있다는 의사의 말을 통역을 통해 전해들은 부모와 아이는 크게 기뻐하면서도 말을 잇지 못했다. 외과수술이라는 것을 듣지도 보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수술을 받고 얼마 뒤, 붕대를 풀고 정상이 된 것을 확인한 부모는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렸다. 그들에게 그것은 하나의 기적이었다. 의사와 통역에게 연신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하는 부모. 때는 1890년대 초였고 장소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전문 병원 보구여관(保救女館)이었다.

보구여관(1912년 동대문으로 옮겨 신축한 이후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의 전신)은 1887년에 이화학당 설립자 메리 스크랜턴(Mary Scranton, 1832~1909)의 제안으로 서울 정동 이화학당 구내에 세워졌다. 당시 통역을 맡은 소녀는 박에스더(1876∼1910)였다. 이화학당에서 공부한 박에스더는 14살 때인 1890년 10월부터 메리 스크랜턴의 추천으로 보구여관에서 통역과 간호보조 일을 했다. 메리 스크랜턴은 1885년 의료선교사로 함께 내한한 윌리엄 스크랜턴(1856~1922)의 어머니였다. (메리 스크랜턴은 서울 마포구 합정동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장되어 있다.) 박에스더는 메리 스크랜턴을 처음 만났을 때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내가 열 살 때 스크랜턴 부인을 처음 만나러 가게 되었다. 매우 추운 날씨여서 부인이 나를 난로 가까이 오라고 했는데 나는 부인이 나를 난로에 잡아넣어 태워버릴 것만 같아 두려웠다. 그러나 부인의 친절하고 아름다운 얼굴이 이내 그런 생각을 떨쳐버리게 하였다.”

보구여관에서 일하면서부터 박에스더는 의사가 되려는 소망을 품었다. 박에스더의 본명은 김점동(金點童)으로 서울 정동에서 딸만 넷인 가난한 집안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김홍택은 선교사 아펜젤러의 일을 돕고 있었다. ‘에스더’는 1891년 김점동이 세례를 받으며 얻은 세례명이고, 1893년 결혼한 남편 박유산의 성을 따라 박에스더가 되었다. 보구여관에서 활동하던 의료선교사 로제타 홀(1865~1951)을 돕던 박에스더는 로제타 홀이 남편 윌리엄 제임스 홀과 평양 선교 책임자로 부임할 때(1894) 남편 박유산과 함께 평양으로 가서 조수 역할을 했다. 청일전쟁 와중에 전염병까지 유행하던 평양에서 윌리엄 제임스 홀이 발진티푸스에 걸려 세상을 떠나고 로제타 홀은 미국으로 돌아갔다.

“지금 포기하면 다른 기회가 오지 않을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귀국하게 된 로제타 홀은 늘 헌신적이며 영리했던 박에스더를 남겨둘 수 없었다. ‘박에스더가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도우리라.’ 로제타 홀은 박에스더 부부를 미국으로 오게 했다. 로제타 홀의 친정이 있는 뉴욕 리버티에 도착한 박에스더는 1895년 2월 리버티 공립학교에 등록하여 고교 과정 유학생활을 시작했다. 같은 해 9월부터는 뉴욕 아동 병원에서 일하며 생활비를 버는 틈틈이 대학 입학에 필요한 물리학과 수학, 라틴어 등을 공부했다. 그리고 1896년 10월, 20살의 박에스더는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Woman's Medical College of Baltimore)에 입학했다. 박에스더가 고학(苦學)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로제타 홀은 한국에 다시 와 있을 때(1897년 재입국) 박에스더에게 귀국을 권유하기도 했다. 그러나 박에스더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로제타 홀에게 보냈다.

“제가 지금 여기에서 이것을 포기하면 다른 기회가 오지 않을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해 노력할 것이고, 최선을 다한 후에도 도저히 배울 수가 없다면 그 때 포기하겠습니다. 그 이전에는 결코 포기할 수 없습니다.”

각고의 노력 끝에 박에스더는 1900년 6월에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한국 최초의 여성 의사이자 여성 의학박사가 탄생한 것이다. 의사의 꿈을 이룬 박에스더는 그러나 기쁨을 느낄 수 없었다. 유학 생활 내내 힘겹게 노동하며 뒷바라지 해주던 남편 박유산. 그런 박유산이 박에스더의 의대 졸업시험을 3주 앞둔 1900년 4월 폐질환이 빠르게 악화되어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현재 볼티모어 서쪽 로레인 파크 공동묘지에 ‘1868년 9월 21일 한국에서 태어나 1900년 4월 28일 볼티모어에서 사망했다’는 문구가 새겨진 박유산의 묘비와 묘가 있다.

유학을 떠날 때까지만 해도 박유산도 공부를 하려 했으나 박유산은 아내의 재능이 더욱 남다르고 공부를 향한 뜻도 강하다는 것을 알았다. 부부가 모두 학업에만 전념할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 그래서 자신은 공부를 포기하고 아내 뒷바라지에 나섰던 것이다. 늘 헌신적으로 외조를 도맡았던 남편의 갑작스런 죽음 앞에서 박에스더가 느꼈을 깊은 슬픔. 박에스더의 귀국 소식을 전하는 <신학월보>의 1900년 12월 기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부인의학박사 환국하심. 박유산 씨 부인은 6년 전 이화학당을 졸업한 사람인데, 내외가 부인의사 홀 씨를 모시고 미국까지 가셨더니 공부를 잘 하시고 영어를 족히 배울뿐더러 그 부인이 의학교에서 공부하여 의학사 졸업장을 받고 지난 10월에 대한에 환국하였다. 공부가 여러 해 되었는데 그동안 박유산 씨는 세상을 떠나시고 그 부인이 혼자 계시니 섭섭한 마음을 어찌 다 위로하겠는가만…(중략)…미국에 가셔서 견문과 학식이 넉넉하심에 우리 대한의 부녀들을 많이 건져내시기를 바라오며 또 대한에 이러한 부인이 처음 있게 됨을 치하하노라..

매년 5천 명 이상의 환자를 돌보며 헌신한 박에스더

의사가 되어 귀국한 박에스더는 먼저 들어와 있던 로제타 홀과 함께 활동했다. 유학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로제타 홀의 조수였으나 이제는 사실상 동등한 입장에서 의료봉사에 전념하게 된 것이다. 박에스더는 보구여관에서 여성 환자들을 진료했고 간호양성소도 설립했다. 평양의 여성치료소 광혜여원(廣惠女院)에서도 진료했고 평양맹아학교(한국 최초의 맹아교육을 위한 특수학교로, 1894년 설립 당시에는 맹인소녀를 대상으로 하는 평양여맹학교였다가 1909년 농아학교도 세우면서 이름을 평양맹아학교로 바꿈)와 여자성경학원에서도 가르쳤다. 또한 황해도와 평안도 일대를 순회하며 진료봉사활동을 펼쳤다.

1900년대 초까지만 해도 남성 의사에게 몸을 보여줄 수 없다는 전통적인 관념에 따라 많은 여성 환자들이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진료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었다. 여성 환자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의료 현실도 열악하기만 했다. 그런 상황에서 여성 의사 박에스더의 활동은 이 땅의 많은 여성 환자들에게 유일한 희망과도 같았다. 박에스더가 귀국하여 활동한 10년 동안 매년 평균 5천 명이 넘는 환자들을 돌보아야 했던 것도, 박에스더의 헌신적인 사명감과 함께 그러한 상황 때문이기도 했다. 박에스더는 진료 활동 외에도 근대적 위생 관념을 보급ㆍ확산시키는 활동도 활발하게 펼쳤다. 최초의 여성 의사로서의 사명감과 돈독한 기독교 신앙이 박에스더를 받쳐준 힘이었다.

“그녀는 날마다 나에게 새로운 인생을 배우게 한다.”


박에스더는 심각한 과로로 폐질환에 걸리고 말았다. 그의 나이 34세 때인 1910년 4월 13일, 의사로서 10년 간 활동한 박에스더는 세상을 떠났다. 박에스더와 늘 함께 하며 물심양면으로 도왔던 홀 가족의 슬픔은 남달랐다. 로제타 홀의 아들 셔우드 홀(Sherwood Hall, 1893 ~ 1991)은 박에스더의 죽음을 계기로 폐결핵 전문 의사가 되어 한국에 결핵요양소를 세우겠다고 결심했다. 셔우드 홀은 1928년 해주에 한국 최초의 결핵요양소를 세우고 결핵 퇴치 활동을 뒷받침했으며, 1932년에는 결핵 퇴치를 위한 크리스마스실을 한국 최초로 도입했다. 셔우드 홀은 1940년 스파이 혐의로 일본헌병대에 체포된 뒤 벌금을 물고 사실상 추방당했다. 박에스더의 헌신은 세상을 떠나서도 빛을 발했던 셈이다.

박에스더는 한국 의료의 역사에서도 중요한 인물이지만, 한국 근대 과학의 역사에서도 한국 최초의 여성 과학자로 평가받기도 한다. 미국 감리교회 의료 선교의 역사에서 박에스더는 ‘유일한 동양인이자 유일하게 순교자의 숭고한 대열에 든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06년 11월 우리나라의 과학기술부는 박에스더를 과학기술 명예의 전당에 헌정했다.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 동창회에서는 2008년부터 ‘자랑스런 이화의인(醫人) 박에스더상(賞)’을 제정하여 동문 여의사에게 시상하고 있다.

로제타 홀은 자신의 일기에 박에스더에 관해 이렇게 기록했다. “그녀는 날마다 나에게 새로운 인생을 배우게 한다.” (로제타 홀은 남편 윌리엄 제임스 홀, 아들 셔우드 홀, 태어난 직후 세상을 떠난 딸 에디스 홀, 며느리 메리언 홀과 함께 서울 마포구 합정동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장되어 있다.) 박에스더는 단순한 한 사람의 의사가 아니었다. ‘최초의 여성 의사’라는 의미를 뛰어 넘는 의사였다. 그는 선각자이자 선구자라는 말에 명실상부한 인물이자 우리 시대에도 보기 드문 ‘의인(義人)으로서의 의인(醫人)’이었다.

표정훈 / 출판평론가
글쓴이 표정훈은 출판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며 [책은 나름의 운명을 지닌다], [하룻밤에 읽는 동양사상] 등의 저술서와 [고대 문명의 환경사], [자연, 그 경이로움에 대하여] 등 다수의 번역서로 독자들과 만나고 있다.

그림 장선환 / 화가, 일러스트레이터
서울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학과와 동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화가와 그림책 작가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현재 경희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http://www.fartzz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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