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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예절

조선유학의 거장들 -이퇴계

작성자源俊 上溪 21世 60年生|작성시간17.09.01|조회수104 목록 댓글 2


조선유학의 거장들 -이퇴계



이퇴계에 대한 한형조의 글을 읽는다. 첫 장면부터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온다.


<연세대 이광호 교수로부터 들은 이야기이다. 오래전의 일로, 서울대 철학과에서 석사논문을 발표하는 자리였는데, 주자와 퇴계의 천인합일(天人合一)을 입에 담자, 분석철학을 전공한 이명현 교수가 ‘거 무슨 무당 푸닥거리하는 소리냐’고 말을 막았고, 이광호 교수는 ‘논어 한 줄이라도 읽어보신 적이 있느냐’고 되받는 소란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 사단이 지금 동양철학이 처해있는 사태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동양철학은 여전히 비의적(秘儀的) 안개 속에 있다. 그 바깥을 한 편에서는 몰이해와 편견이, 또 한편에서는 근거 없는 찬양과 숭배가 둘러싸고 있다.>


천인합일, 나는 이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우선 그 의미가 명백하지 않다. 그냥 말 그대로 우주와 내가 하나 되는 것, 자연과 내가 하나 되는 것, 존재하는 전체와 내가 하나 되는 것이라는 의미라면 아마도 무당 푸닥거리라고 능히 말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주자나 퇴계도 이런 경험을 했다고 스스로 착각할 수 있지만, 적어도 유한한 인간인 한에 있어서 이러한 경험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러한 지적은 <논어> 한 줄을 읽었건 혹은 읽지 않았던 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아주 상세한 따라서 매우 많은 도움이 되는 각주가 달려 있는 이광호 교수의 <성학십도> 번역 역자서문에 다음과 같은 겸손한 내용이 있다.


<아직도 유학사상의 내용이 무엇이며 그 중에서도 퇴계의 사상의 내용이 무엇이라고 남에게 설명할 자신이 없다. 유학과 퇴계 사상의 내용이 애매하서가 아니라 자신의 이해가 충분하지 못한데 반해 세상의 유학에 대한 비판의 논리는 너무나 강하기 때문이다. 공부를 하며 깊은 맛이 조금씩 느껴질 때는 ‘진리가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소고기, 돼지고기가 입을 즐겁게 하는 정도만이 아니라’는 퇴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기쁨이 조금씩 쌓이며 가슴 속이 훤하게 밝아오면 ‘아, 인간의 위대함이여, 진리의 위대함이여’ 하는 탄성이 새어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사물에 대하여 과학적 시각이 길러준 벽이 너무나 두터워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보기를 거부한다. 긴 역사를 통하여 수많은 철인과 현인들이 삶의 진리를 역설하였지만, 모든 사상이 과학 앞에 빛이 바래버렸다.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긴 역사를 통해 엄청난 영향을 미친 공자와 맹자, 그리고 여러 선현들이 몸소 실천하며 직접 체험한 것을 바탕으로 가르치고 보여준 내용이 경전 가운데 그대로 남아 있지만 아무도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온통 비판의 음성만 높다. 설익은 주제에 음성을 높였다가는 빗발치는 비판을 스스로 견디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선현에게도 누만 끼치게 될까 두려울 뿐이다. 남에게 설명을 못하더라도 스스로라도 확실하게 알고 싶다는 것이 역자의 오래 전부터의 솔직한 소망이다.>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는 자리에 주자와 퇴계의 천인합일이 무당 푸닥거리라고 했으니, 그 머쓱한 장면이 능히 상상이 간다. 그렇지만 나는 이런 대단한 겸손함이 인간적으로는 공경스럽지만 학문적으로, 혹은 철학적으로는 그렇게 공감할 수 없다. 수많은 철인과 현인이 역설한 삶의 진리가 과학 앞에서 모두 빛이 바래져 버린 것은 아니다. 아마도 우리가 합리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과학적 세계관에 대립되는 그런 주장의 빛이 바래져 간 것은 아니었을까?


가령 이퇴계의 <성학십도> 첫 그림이 <태극도>이다. 그 그림에는 익숙한 이야기가 나온다. 무극인 태극이 있다. (이것은 “무극이면서 태극이다”라고 주어도 없이 번역한 것보다 훨씬 명백하다.) 그것이 움직여 양을 낳고 고요해지면 음을 낳는다. 음과 양이 변해 오행을 낳는다. 오행이 생겨남에 따라 각각의 것들은 그 본성을 갖는다. 건도는 남성을 이루고 곤도는 여성을 이룬다. 이 두 기운이 교감하여 만물이 화생하고 끊임없는 변화가 생긴다.


사실 이 익숙한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일까를 생각하면 아찔해 진다. 나는 이 오묘한 이야기를 믿는가? 나는 안 믿는다. 무슨 그 한계가 없는, 그 끝이 없는 태극이라는 궁극적 진리, 실체, 존재가 있단 말인가? 그것이 있다는 합리적 근거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냥 무극인 태극이 있다. 아니다. 물리적 세계가 있다. 그것도 어느 날 빵 폭발하여 그렇게 되었다. 그렇게 생성된 세계는 원인과 결과의 메커니즘에 따라 움직인다. 이 염병할 과학적 세계관이 아마 퇴계가 아주 중요한 것이라고 간주하고 <근사록> 첫 장에 놓인 이 주장들을 처음부터 부정한다. 어찌할 것인가? 과학이 우리를 망쳤고, 따라서 이 과학기술의 시대에 우리는 불행하며 고통스럽다고 이야기해보았자 그렇게 큰 설득력이 없다. 오히려 과학적 세계관이나 그 형이상학이 부당하다는 것을 말해야 한다. 아니면 이러한 존재론, 혹은 우주 본체론을 포기해도 주자나 퇴계가 말하는 삶의 진리가 별로 손상 받지 않는다는 것을 이야기하면 되지 않는가?


이런 문맥에서 한형조는 다음처럼 이야기한다. 그에 의하면 동양철학은 진짜 어렵다. 그 실질의 그림자를 엿보기조차 힘든다. 왜 그렇게 어려운가? 그것은 <근본적으로 그 사유가 낯설기 때문이다.> 그는 세계와 삶을 바라보는 시선을 두 가지로 구분한다. 하나는 물질적, 세속적, 현세적이고, 다른 하나가 정신적, 종교적, 금욕적이다. 앞의 것은 근대적 코드이고, 뒤의 것은 근대 이전의 영원의 철학에 속한다. 우리는 근대성의 원리에 따라 물질의 삶을 산다. 그러나 근대 이전의 동서 고인들은 후자의 삶을 추구한다. 유교, 노장, 불교가 그렇고, 스토아, 기독교, 스피노자, 라이프니츠의 전근대와 니체와 하이데거, 심층생태주의의 반근대가 그렇다. 따라서 그는 우리에게 낯선 동양철학을 접근하기 위해 하나의 방법적 제안을 한다. 그것이 바로 근대적 발상을 에포케시키는 것이다. <감히 고백건대, 주자학은 내가 그 동안 의식 무의식적으로 익힌 근대적 발상을 에포케, 괄호 치는 만큼만 꼭 그만큼만 자신을 열어 보여주었다.>


그런데 왜 근대적 발상을 에포케시켜야 하는가? 그것은 전근대적이며 혹은 반근대적 씨앗을 보여주는 동양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왜 이해해야 하는가? 그 속에 대단한 진리의 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대단한 진리의 말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그것이 전근대가 되었건, 근대가 되었건 탈근대, 혹은 반근대가 되었던 간에 바로 영원한 철학적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적합하다는 것을 보여주면 된다. 그의 이분법에 따르면 근대에는 영원한 철학적 문제가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존재론, 우주 본체론의 철학적 문제에서 우리에게 낯선 그 동양철학의 주장도 하나의 철학적 주장이고, 근대의 과학도 하나의 철학적 주장을 하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하이데거도 하나의 철학적 주장을 하고 있다. 문제는 우리에게 어떤 철학적 주장이 많은 설득력을 가지고 있으며, 문제 해결력을 갖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아마도 천일합일이 무당의 푸닥거리라고 부른 것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리라.


무당의 푸닥거리는 어떤 의미에서 비과학적이며 탈과학적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나는 무당이 푸닥거려 그 간절한 마음이 하늘에 닿아 비를 내리게 한다는 소리 따위는 전혀 믿지 않지만, 그러나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서 그것에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믿는다. 오죽하면 그런 가능성에 기대를 하는가? 그런 가능성에는 그 나름의 생각과 가치, 고통, 희망 등이 담겨져 있다. 이 점은 퇴계의 <성학십도>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우주 본체에 대한 이론 뒤에 <인간이 가장 영묘한 존재>라는 주장이 나온다. 그 인간 중 가장 완전한 것이 저절로 도덕적 행위를 할 수 있는 성인이며, 노력하고 수양하는 존재가 군자이며, 그렇게 하지 않는 것들이 소인배이다. 그 도덕은 바로 인의(仁義)이다.


아마도 퇴계가 공감한 것이 인간과 자연 사이에 유비적 대응성이 있다는 주장일 것이다. 인간의 표준적 도덕성은 어디에 근거하는가? 그것은 바로 태극에 근거한다. 이 점을 잘 보여주는 것이 <성학십도> 두 번째 그림이다. 이제 자연은 마치 인간 가족처럼 된다. 따라서 하늘은 아버지고 땅은 어머니이다.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잘 해야 하듯이 하늘이나 땅에게 잘 해야 한다. 이 가족의 은유가 모든 것에 적용된다. 따라서 존재하는 모든 것이 나와 한 가족이며 형제이다. 이런 의미에서 맹자가 말한 것처럼 <나이 많은 이를 높이는 것은 천지의 어른을 어른으로 대접하는 것이요. 외롭고 약한 이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천지의 어린이를 어린이로 대하는 것이다. ... 천하의 파리라고 병든 사람, 고아와 자식이 없는 노인, 홀아비와 고부는 모두 다 내 형제 가운데 어려움을 당하여 호소할 데 없는 자이다.>


나는 <성학십도> 첫 그림 앞 부분을 별로 신뢰하지 않지만, 이 부분은 크게 공감한다. 가령 우리 사회의 불우하고 소외받는 사람들을 네 형제라고 여긴다면 사회 질서라는 이름으로 그렇게 엄청나게 적으로 간주하겠는가? 예수도 말한다. 이방인조차 네 형제로 대우하라. 그런데 예수를 믿는 놈조차 진짜 자기가 속한 계층에 있는 자들만 형제로 간주한다. 도대체 무엇을 그 교회는 <소망>한단 말인가?


그렇지만 이런 도덕적 내용에 대한 공감이 반드시 퇴계가 진리로 여긴 우주 본체론에 근거해야 하는가? 그렇다고 여긴다면 그러한 전략이 취하는 방법은 뻔할 것이다. 즉 과학적 세계관을 부정하고 한형조가 말한 것처럼 근대를 괄호치기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설득력을 갖고 있는가? 아마도 천인합일이란 이런 문맥에서 존재하는 모두 것들을 내 가족이나 형제처럼 간주하는 하나의 태도일 것이다. 그리고 그 합일의 증거는 진짜 소외받고 가난한 자를 진정으로 도와주는데에서 나타날 것이다. 사밀적이고 비유적인 언어로 제 아무리 표현해 보았자 그것은 아무런 감동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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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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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고향생각(元甲/49年,九老洞派 20世) | 작성시간 17.09.01 저도 동양철학은 어려워서 글을 읽어도 뭐가뭔지 ~~
  • 답댓글 작성자源俊 上溪 21世 60年生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7.09.01 아재 어르신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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