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자료실에서 송재선생 자명소를 보다가 문장의 띄어쓰기나 줄간 간격이 너무 좁아서 읽는데 애를 먹었습니다. 그리하여 다른 이를 위하여 제가 한글 2007에 옮겨서 다시 쓰게 된 것입니다. 괘념치 마시가 바랍니다
진성이씨송재선생 자명소
眞城李氏 松齋先生 自明疏
신은 「아무리 따사롭고 보드라운 바람이 온 누리를 소생시키고자 하드라도 낮은 골짜기에서만 솔솔 불고 높이 우뚝 솟은 봉우리까지는 이르지 못하면 그 곳에 있는 풀은 마를 수 밖에 없고 나무는 죽고 말게 된다」는 시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 말은 봄이 되어 따뜻하고 부드러운 바람이 높고 우뚝한 산꼭대기까지 골고루 미처야만 온 산의 만물이 각각 그 삶을 누릴 수 있는데, 훈풍이 온 산에 다 미칠수는 없는 것이어서 지나치는 곳에 있는 풀은 마르고 나무는 죽게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만 백성에게 베푸시는 어진 정치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바람과 같사와 멀고 가까운데 골고루 미처 모든 백성이 넉넉한 생활을 하고 형편이 나아지지 않은 이가 없는데, 그 중에 신과 같은 자는 홀로 죽고 마른 초목이 되어 이 암담한 실매듭을 안고서 그 있을 자리를 찾지 못하니 심히 슬프고 아픕니다.
신은 지난 임신년(1512년 중종 7년 44세)에 노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사직하고 멀리 고향에 돌아와 있었사온데 병을 얻어 자리에 누운지 수년동안 사람을 만나지 아니하고 있어온 바 지난 갑술년(1514년) 봄 이월 십육일에 내리신 어명에 이르시기를 「연산조때 승지 누구 누구는 반정하던 날 궁궐에서 숙직을 하다가 화가 미칠 것을 모면하려고 폐한 임금을 속이고 앞을 다투어 달려 나왔으니 모든 공훈기록을 깎아서 충신의 절의를 높이도록 한다. 등등」하셨음을 신하된 도리를 다하여 자세히 읽어 보았습니다.
신은 본래 의거에 처음부터 참여한 것이 아니고 의거과정에 우연히 참여하여 적은 공이 있을 뿐이여서 공훈을 사양하였음에도 외람되게 공훈명부에 이름이 올라 항상 마음이 편안하지 않았는데 이제 훈을 깎으신다는 명령을 받자오니 신의 마음이 비로소 편안하오나, 다만 위기를 모면하려고 임금을 속이고 달아났다고 하셨는데 그것은 신이 한 행동이 아닌데도 그 날 숙직하던 여러 승지가 똑같이 행동한 것으로 처분하셨으니 그렇지 않은 저로서는 너무나 마음 아파하는 바입니다.
숙직한 승지들에게 내리신 처벌이 제가 한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면 마땅히 내리신데로 벌을 받고 아무런 말을 못할 것이오나, 제가 한 일과는 전혀 다르오니 그 날 제가 한 일을 상세히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 신하된 자가 임금을 속이고 갑자기 닥친 위기만 모면하려고 신하된 도리를 다하지 아니하고 구차하게 무작정 달아나는 한심한 행동을 하였다면 이런 신하가 어찌 사람의 무리에 섞일 수가 있아오리까.
그 날 숙직 승지들이 잘못하였다고 하신 일에는 저는 전혀 관계가 없아온데 잘못이 없는 저에게 처벌을 같이하오니 이것이 신이 통분하고 눈물 흘리는 까닭인 바 만번 죽임을 당할지라도 신이 당일 행한 바를 있는 그대로 말씀드려서 임금님이 사실을 명백하게 알 수 있으시도록 스스로 진실을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신은 물러난 임금님으로부터 승지로 임명된지 한 달 정도 지난 반정하던 날 승정원에서 숙직을 하고 있었는데 밤중에 남쪽 담장 문졸이「밖에 변이 있다」고 알리므로 신은 승정원의 아전에게 속히 나가서 염탐하고 「만약 큰 일이 있거든 병조와 도총부에 가면 무슨 일인지를 가장 먼저 확실하게 알 터이니 너는 거기를 자세히 알아보라」하였더니 「병조와 도총부가 다 나가고 관청이 비었더라」고 보고하기에 변이 있다고 판단되어 곧 윤장 등에게 알리고 함께 차비문으로 나갔더니 연산군께서 듣고 곧 나오시기에 신 들은 모시고 꽤 오래 앉아 있었습니다.
연산군께서는 신들에게 「나가서 변을 자세히 살피라」고 말씀하시고 이어 표신을 내리시니 윤 장 등은 변이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므로 밖에 나가는 것이 두렵고 위축이 되어 나가지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표신을 신에게 전하므로 신은 직위가 끝이어서 마음으로는 의심스럽고 두려우나 사양하지 않고 밖으로 나가는 중에 승정원 문 밖에 이르러 검열 김흠조를 만나서 함께 돈화문으로 향하여 변을 살피려던 중에 홀연히 윤장의 아우인 부장 윤종이 보였고 그가 와서 하는 말이 「나오는 것이 왜 늦었는가 두 세 대신이 의거에 앞장을 서니 모든 조정 신하가 지금 대부분 대궐 문 밖에 모였는데 숙직하는 승지만 나오지 않아 나의 형 윤장을 찾으려고 들어왔노라」하고 의거하여 전하를 추대한 일을 자상하게 말하였으므로 신 또한 비로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하던 진상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미 밖에 나왔고 궁궐 안과 밖이 막혔으며 또한 의거를 듣고 보니 사세가 다시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으므로 곧 김흠조와 의론하여 거취를 결정하고, 나가서 의거한 대신을 뵈었더니 대신이 말하기를 「나오는 것이 왜 늦는가」하고 또 말하기를 「승지 강혼은 진성군 저택에 가서 모시고 있고 한순은 궁궐을 지키고 있으며 김준손은 성 밖에 있어서 아직 들어오지 못했는데 지금 대비전의 대명을 받아야 하니 또한 승지가 없어서는 안된다」하고 곧바로 신을 인솔하고 함께 경복궁에 가서 왕대비로부터 다음 임금을 결정하시는 대명을 받은 후에 전하의 수레를 맞이하여 들어왔고 즉위 하실때에는 곁에 시위하여 따라갔으니 신이 그날 한 일은 이것이 전부입니다.
이미 신은 표신을 받아 나왔고 또 윤종의 보고를 듣고 김흠조와 만나 의론하여 나왔사온데 어찌 모면하려고 임금을 속이고 황급히 다투어 나왔다고 말 할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처음 나올 때에 아직 바깥 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모두 밖에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직위가 가장 낮은 신에게 명령을 미루니 어길 수 없어 명령에 따라 나온 것이니, 임금을 속이고 급히 달아나지 않았음은 명백하지 않사오니까.
뒤에 나온 승지들이 마침내 당기고 밀리고 하다가 나오지 못하고 그 와중에 한 일에 대해서는 신은 알 수 없으며 신은 신의 일을 밝힐 뿐 어찌 남의 일에까지 미치겠습니까. 또 신하로서의 절개와 의리를 다하려 함에는 반드시 그럴 만한 바탕이 있어야 하는데 반정하던 날은 절의를 지킬 만한 자리가 못 되었습니다.
신이 절의에 힘썼다고 하면 ※도인 비와 ※석지분여가 ※양공의 난리에 달려가 죽은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신이 만약 궁궐 안에 있다가 무슨 난리가 났는지 몰라 덜컥 겁이 나서 또는 반역하는 난리가 일어났는데 임금을 버리고 지름길로 나왔다면 어찌 다만 절의가 없다는 말로 그칠 일이겠습니까.
저가 그러한 행동을 하였다면 불충에 대한 벌을 다시 내리신다고 해도 벌을 달게 받을 것이오나 이번에 신이한 일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하룻밤 의거가 있은 뒤에 종묘사직의 신령과 천지산천의 신과 온 나라 백성의 마음이 벌써 한 뜻으로 전하에게 모였는데 신이 하늘의 뜻을 알아보지 못하고 모시던 임금에게 절개와 의리를 지킨다고 정신 나간 행동을 하였다면 어찌 전하의 죄인이 될 뿐이겠습니까.
실로 천지산천 종묘사직 모든 백성의 죄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옛날 송나라 ※덕우황제가 잡혀서 북에 끌려갔을 때에 ※문천상은 죽지 않고 달아났다가 돌아와서 ※도종의 두 아들을 받들고 말하기를 「이러한 때를 당하여서는 임금보다도 사직이 우선이므로 내가 두 왕자를 받드는 것은 나라를 지키기 위한 계책이다. ※회제와 민제를 따라 북쪽으로 간 자는 충성이 아니고 ※원제를 따른 것이 충성이다. ※휘종과 흠종을 따라 북쪽으로 간 자는 충성이 아니고 ※고종을 따른 것이 충성이다. 덕우가 북쪽으로 감으로서 송은 이미 망했다. 오히려 도망쳐 와서 두 어린 왕자를 따른 것은 송나라 사직의 보존을 도모하고자 함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번 의거에 이르러 전하께서 나라 형세가 다시 피어나게 하셨으며 종묘사직이 다시 편안하고 튼튼하게 되었는데 신이 나와서 따르지 않고 다른 무슨 생각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신이 가만히 생각하오니 고명하신 전하께서 의거 하는 날 나라 형세가 모든 백성이 물러나신 임금을 지키는데만 힘쓸 형편이 아님을 어찌 모르시겠습니까.
다만 숙직하는 승지들이 임금을 속이고 구차하게 달아나려고만 한 행동이 너무 한심한 일이라고 그렇게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 벌주시는 일에 신이 관련되지 않았음이 분명한데도 신에게 같은 죄를 벌하시는 것이 옳은 일인지를 가려내는 것이 마땅할 것 입니다.
전하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안으로는 죄를 다스리는 부서로부터 밖으로는 시골 벽지의 이름 없는 백성일지라도 조그마한 억울함이 있으면 스스로 잘잘못을 밝혀서 옳고 그름을 가려낼 수 있는데, 하물며 신이 안고 있는 번민은 이들의 억울한 일에 비교할 정도가 아니니 어찌 밝게 다스리려하시는 전하께 의거하던 날 신이 한 일을 스스로 밝히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이 전하께서 내리신 벌을 전달 받은 즉시 수레를 타고 달려와서 저의 간절한 심정을 아뢰고자 하였으나, 도리어 다른 사람들이 신의 번민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지 못하고 반대로 신이 공훈이 깎인 것을 불평한다고만 여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맴돌아서 지금까지 미루어왔습니다.
곰곰이 생각하니 선비라는 사람의 깨끗한 행실이 마치 실의 흰빛과 같아서 한번 검은 물이 들면 비록 천 번 빨고 만 번 헹군다 해도 마침내 흰빛을 회복하기가 어렵습니다.
신의 평소에 행실이 한자 한 치의 조그마한 물듦도 없이 흰 실의 흰빛과 같이 깨끗하다고 어찌 말씀 드릴수 있겠습니까마는 지금 다른 사람의 허물에 억울하게 휩싸여서 진실을 밝히지 못하고, 일의 전말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일시적 의심에 묻힌 체 그 때 일어난 일을 사실대로 밝혀서 신의 몸을 깨끗이 설명하지 못하고 만세에까지 다른 사람이 잘못한 일을 신도 함께 잘못한 것으로 그대로 두고 지낼 수 있겠습니까.
비록 신을 의심하는 자라도 만약 한 번 신의 말을 자세히 살피면, 신의 고민은 숙직 승지들이 잘못한 일에는 신은 홀로 떨어져서 다른 일을 하느라고 같은 행동을 전혀 하지 않았는데 마치 같이 있고 같은 죄가 있는 것으로 함께 벌하시는 것은 억울하고 천만번 잘못된 처분이라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이지, 신의 공훈이 깎이는 것이 못마땅하여 드리는 말씀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은 명백합니다.
신은 「말(言)은 정(情)에서 나와서 정을 다하지 않는 것은 지극한 정이 아니고 정이 말에 움직여서 말을 느끼지 않는 것은 간절한 말이 아니다」라고 들었습니다. 신은 간절하고 지극한 심정으로 절박한 말씀을 드리는 것이오니 전하께서 한번 신의 그 날 행적을 살펴보시기만 하신다면 반드시 정의 지극함과 말의 간절함을 아실 것 이므로 어찌 전하의 마음속에 느끼시는 바가 없으시겠습니까.
엎드려 원하옵건대 전하께서 신의 행적을 살펴 주시옵소서
상소에 대한 임금님의 답에 이르기를 “지금 경이 짐에게 올린 글을 보니 경의 애매함을 알겠다. 뒤에 조정에 물어 세세히 의론하고 합당하게 처리할 것이니라 ”하셨다.
22世 冲 植 謹譯(열화 5권) 21世 長 洛 意譯(열화 23권)
후기(後記)
송재 이우(1469-1517)선생께서는 진성이씨 시조 휘 석(碩)의 5대손으로 예종 2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 노송정(老松亭)에서 태어나셨다. 자는 명중이시고 호는 송재이시다.
시조는 고려말엽에 진보현 아전이셨는데 사마시에 합격하시고 뒤에 아드님 송안군의 공적으로 봉익대부 밀직사에 추봉되었다. 시조께서는 천성이 공손․ 근엄하셨으며 사람을 대할 때 겸손을 으뜸으로 하여 덕(德)을 쌓으시고 인(仁)을 행하시었다. 아들 송안군이 안동으로 옮겨 사시고 명서업으로 벼슬에 나가시어 고려말 홍건적을 토벌한 공으로 송안군에 봉해지고 판전의시사를 지내셨다.
3세 휘 운후는 선생의 증조부이신데 군기시부정을 지내시고, 증손인 선생의 공적으로 사복시정을 증직받으셨다. 조부는 휘가 정이신데 영변 판관때 모린위 정벌에 공을 세우고 , 선산부사를 지내셨으며, 병조참의에 증직되셨다. 부는 휘가 계양이시고 호는 노송정이시다.
성균관 진사인데 아들인 선생의 공적으로 병조참판에 증직되었다가 손자인 퇴계 선생의 공적으로 이조판서가 가증되었다. 스님과의 인연으로 지금의 노송정터를 잡으실 때 귀한 자식을 얻을 자리라 하였는데 둘째 아들인 송재 선생과 손자인 온계․퇴계선생이 모두 노송정에서 태어나셔서 숙질 세 분이 문과에 급제하셨고, 퇴계 선생께서는 오늘날까지 동서양이 우러르는 성현으로 드러나셨다.
노송정께서는 아들 송재선생의 공적으로 진성군에 봉해지셨는데 학계에서는 이때부터 진성이씨로 불리게 된다고도 한다.
송재선생과 형님이신 휘 식 두 분은 함께 학문이 뛰어나시고 우애가 두터워서 모두 금과 옥같은 형제라고 기렸다. 송재선생은 풍모가 깨끗하고 단아하고 온화하셨으며 우애와 효성이 특별하셨다.
퇴계선생이 나시고 6개월 13일만에 백형이 돌아가시니 조카들을 친아들과 같이 기르고 가르치셨는데 39세때는 늙으신 어머님을 모시려고 외직을 청하여 진주목사로 가시는데 조카 하(河)와 온계선생을 데리고 가서 가르치셨고 평생을 여러 자질 훈육에 심혈을 기울이셨으며 퇴계선생에게는 특별한 정성을 다하셨다.
뛰어난 문장과 강직하고 의연한 처신으로 거듭 승차를 하여 41세에 호조참판에 오르면서도 관직의 영달보다 연로하신 어머님 봉양과 자질 훈육을 위하여 여러번 사직하고 외직을 빌어 고향을 찾으셨으며 진주목사, 강원도 관찰사, 안동부사를 지내시면서는 가시는 곳마다 지성으로 백성을 돌보시니 모두가 어버이처럼 따랐고 매번 포상이 내려졌다. 또 사직하여 계실 때에 여러번 관직이 내려져도 뜻하지 않으시면 나가시지 않으셨고 모재, 농암, 충재 선생들과 시를 지어 귀전록에 남기시고 동국사략 두 권을 저술하셨다.
조카 온계선생은 절의를 다하신 충신으로 추앙받으시고, 퇴계선생은 당시뿐아니라 오늘날까지 동․서양이 퇴계학 연구에 몰두하도록 우뚝하시며, 자손으로 반초당 명익, 난은 동표같은 명신이 나셔서 문중을 드러나게 하시고 모두 불천위로 모셔졌음은 송재 선생의 훈육과 조상의 내력을 이어내린 음덕 때문이다.
다만 선생께서 일찍 돌아가시니 당대에나 지금이나 모두가 한스러워하고 더 크신 학문적 업적과 절의를 다하시는 관직 승차를 아쉬워 하지만, 한 문중을 크게 일으키시고 후손과 후학에게 충효에 어긋남이 없는 가르침을 주셨으니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그것은 다음 세대가 이어서 이루어야 할 일이다.
그 어지러운 시대의 조정에서 임금과 백성에 대한 충성심과 능력만으로 이전투구와 권모술수에 휩싸여서 뜻을 펴시기에 얼마나 고통스럽고 한스러운 일이 많으셨으면 하늘이 인물을 내시고는 일을 마치기도 전에 부르시는가.
30세에 등과하신 후 벼슬에 연연하지 않으시고 뜻에 따라서만 관직에 나가시면서도 38세에 동부승지 41세에 호조, 형조참판, 강원도 관찰사를 지내시는 승차를 거듭하셨으니, 간신 유자광을 파면하시라는 상소에 사직서를 같이 올리는 강직한 충성심보다 편의대로 관직을 지내셨으면 더 오래 사시고 삼공육경을 지내셨을지 모르나 선생의 뜻이 그러하지 않으셨다.
왕조시대의 임금은 제일 높은 분이고 죽이고 살리는 절대권력이다. 중종 반정때 숙직한 승자들은 잘못이 있으므로 공훈을 깍는다는 벌을 내리시니, 송재선생은 반정이 일어난 날 선생이 한일을 빠짐없이 아뢴다고 하시고, 그 내용에 따라 또 다른 어떤 벌이라도 받을 것이나, 반정이 있던 날 숙직 승지들이 잘못한 일이라고 지적하신 내용은 선생과는 전혀 관련이 없으니, 잘못한 승지들의 허물을 같이 행동하지 않은 선생이 같이 덮어 쓸 수는 없다는 글을 중종께 올렸고, 중종께서는 송재선생의 애매함을 알겠다는 답을 내리신 후 곧 처벌을 거두시고 이어서 고향인 안동부사를 명하셔서 2년을 재임하시는 중에 병으로 돌아가시니 향년 49세이시다.
중종반정은 선생께서 38세때 (1506년) 동부승지에 오른지 1달 후의 일인데 반정후 분의정국 공신에 봉해지고 우부승지로 승차하였다가 몇 달 후 외직을 빌어 진주목사로 나가시고 41세에 조정에 돌아와 호조 ․ 병조참판을 지내시다가 42세때 외직을 빌어 강원도 관찰사를 마치신 후 44세에 노모를 모시기 위하여 해직을 청하는 장계를 올리고 고향에 돌아오셨다. 그 중에 경상도관찰사를 명하셨으나 나가지 않으시고 11세이신 퇴계에게 논어를 가르치시며 시를 엮은 귀전록 1권과 동국사략 2권을 지으셨다.
46세때인 1514년 2월 반정하던 날 숙직승지들의 훈급을 깎는 처벌을 받으시고, 9월에 자명소를 올리셔서 11월에 복권이 되시고, 47세때인 1515년 안동부사에 부임하셨다.
중종반정 의거가 있었던 날에는 당직 승지가 된 어려운 처지였으나, 모든 승지가 바깥에 무슨 변고가 났는지 몰라서 두려워하던 중에, 무슨 변인지 알아보라는 연산군의 지시를 승지가 된지 1달 밖에 안된 가장 낮은 직위인 선생에게 미루니, 선생은 상급승지들의 지시에 따라 혼자서 표신을 가지고 궁궐밖으로 나오신바, 벌써 의거가 성공한 상황이고 궁궐문도 막히었고 대명을 받는데 있어야 할 승지가 선생뿐이여서 의거 대신과 동행하여 왕대비의 새 임금을 명하는 대명을 받았다. 무슨 난인지 몰라 몸을 사리던 상급 승지와는 떨어져서 의거에 큰 공이 있으니 조상이 도우심인가.
그러나 선생께서는 의거에 의도적으로 참여한 것이 아니고 상황에 따라 우연히 공을 세우신 것으로 여기시고, 공훈을 받는 것을 꺼리어서 사양하다가 못내 공훈을 받으셨다.
그러므로 이번에 공훈이 깍이는 것은 오히려 마음이 가벼워지는 일이지만은 다른 숙직 승지들의 잘못된 행동에 같이 행동하지 않은 선생을 그날 숙직승지였다는 이유만으로 포함시켜 같은 허물로 벌주심은 억울하고 남의 허물을 덮어쓰고 지낼 수는 없다는 글을 임금께 올려서 복권이 되는 상황이 오늘날 TV사극을 보듯이 선명하고, 선생께는 공은 있고 허물은 전혀 없음을 임금과 역사가 증거하였으며, 이러한 자명소 기록을 퇴계선생께서 숙부 송재 선생 묘지 비문에 그대로 기록하고 숭모의 정에 목이메어 조카 황은 눈물로 이 글을 올립니다라고 기록하셨다.
반정이 있은 후 상당기간 조정에 계시면서 그때의 공을 크게 말하면 큰 공이 되고 원훈공신들과 의기 투합하였으면 거듭 승차하였을 것이고 이러한 처벌에서도 당연히 제외되어 나쁜 말에 잠시나마 빠져 들 일이 없었을 것이고, 높은 관직과 부귀영화만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선생께서는 오히려 공이 없는 공훈이라고 사양하시고 탐탁해하지 않으셨으며 공신과 대신의 허물도 가리지 않고 바로 잡으시고, 바른 정사와 충효에 일관하셨으며, 수많은 명현과 교류하시고 학문에만 힘쓰시면서 벼슬과 부귀에는 뜻이 없으셨으니, 오늘날까지 세상이 선생을 높이 추모함은 이 때문이다.
중종반정의 당사자인 중종 임금께서 내리신 벌에 대하여 당사자인 선생이 백 번 죽을지라도 진실을 빠짐없이 아뢴다고 하시고 직접 올린 글을 임금께서 살피시고 선생께는 잘못이 전혀없다고 답하신 것 보다 우선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어느 대신의 문서보다 우선한다.
선생께서 자명소를 올린 후 선생을 폄하하는 기록은 없고 있을 수 없다. 혹시 하찮은 기록이 있다면 그 문서의 수치일 뿐이다. 선생의 자명소를 알면 헛된 말을 할 수 없고, 모르고 말하면 말이 아니다.
당시 조정에서는 선생의 뛰어난 풍모․문장․학문․언행을 시기하는 자와 권력에 끌어들이고자 하는 이들이 공연히 중종반정 때 선생이 하지 않은 일을 만들어서 선생을 모함하고 거짓말을 퍼뜨리니 이를 막아줄 세력이 없는 선생께서 괴로워하시고 퇴계선생께서도 한탄 하신 것은 그때는 시대가 그런 세상이어서 억울한 일로 중벌을 받고 삭탈관직되고 하지 않은 분이 없는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선생께서는 임금께 자명소를 올려서 중종반정때 숙직승지들에게 내린 처벌에 선생은 아무런 관련도 없다는 답을 받으시고 조정의 공론을 거쳐 복권되셨고 이로서 선생께서는 후대에 허물을 전혀 남기지 않으셨으니, 이는 큰 사람이 항상 몸을 깨끗이 하시고 후세를 염려하셨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무고히 남을 헐뜯어도 일일이 찾을 수도 없고 세도가 세상을 마음대로 희고 검게 하였지마는 오늘날에는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
혹 지난날 공연히 알지도 못하고 선생을 헐뜯는 말을 들었더라도 선생의 자명소와 임금님의 답을 보면 전말을 환하게 알 수 있다.
당시로는 크게 드러나지 않은 진성이씨 문중을 충효와 학문으로 크게 빛내셨고, 다만 한가지 중종반정때 당직승지들이 잘못하여 세상에 웃음거리가 되고 임금의 처벌을 받은 일에 대해서 선생께서는 그날 당직승지였지만은 왕명에 따라 다른 당직승지들과는 홀로 떨어져서, 도리어 중종의 즉위에 참여하는 전혀 다른 일을 하였으므로 당직승지들에게 내리는 벌에 선생을 포함시키는 것은 언어도단이라는 상소를 올려서 임금으로부터 무고함을 알겠다는 답을 받고 조정에서 복권․복직 되셨음은, 선생이 남의 허물을 덮어써서 그늘진 조상으로 후세에 남지 않으시겠다는 일념에서이지 다시 벼슬에 나가기를 바람에서가 아니니 진성이씨 후손뿐아니라 세상 살아가는 모든 사람의 사표가 되셨다.
21 世 長 洛 謹書
(眞脈悅話 제23호)
주(註):자명소(自明疏)=자기의 무죄를 스스로 밝히는 상소(上疏)
도인. 비(徒人. 費)=徒人은 內侍. 費는 春秋時代 齊나라 襄公의內侍로 公孫無知가 暴君 襄公을 죽 일 때에 죽음
석지분여(石之紛如)=齊나라 襄公의 臣下. 費와 함께 죽음
양공지란(襄公之亂)=제(齊)나라 양공의 난리
덕우(德祐)=남송 七대 황제 공종(恭宗)
문천상(文天祥)=남송 말의 충신. 주자학을 배움. 원나라 병에게 잡혀 순절했고,正氣歌로 유명함
도종(度宗)=남송의 육대 황제. 二子는 욱( )과 병( ) 원의 세조에 의해 임안이 함락되고 공종이 포로 가 되었다. 그 뒤 송의충신들이 받든 두 아들이 끝내 죽음으로써 송은 멸망했다.
회민(懷愍)=북송 흠종(欽宗)의 아들 懷帝와 愍帝
원제(元帝)=東晋의 첫 번째 皇帝
휘흠(徽欽)=북송의 휘종과 흠종. 금나라 태종의 변경 공격으로 붙잡혀서 중국 동북지방인 만주의 오지에 끌려갔다. 중국사에서 정강의 변이라 함.
고종(高宗)=휘종의 왕자로 부 휘종과 형 흠종이 북으로 끌려간 뒤에양자강 남쪽으로 피하여 임안 에 도읍하여 남송의 고종이 되었다.
표신(標信)=궁중에 변이 있을 때 궁궐문을 드나드는데 지니는 증표
자지(慈旨)=임금 어머니의 전교(傳敎:임금이 내리는 명령)
의역(意譯)=개개의 단어, 구절에 너무 얽매이지 않고 전체의 뜻을살리는 번역
후기(後記)=뒷날의 기록. 본문 뒤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