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군이 공개한 일본 원폭투하 사진
# 1945년 미국군에 의해 공개된 일본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 당시모습 약 14만명 사망
# 1945년 미국군에 의해 공개된 일본 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당시모습 약 7만명 사망
# 6일후인 8월 15일 항복을 선언하며 제 2차 대전이 끝났다
1. 원폭투하 한 미국 군사작전의 의미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Atomic bombings of Hiroshima and Nagasaki, 広島·長崎原子爆弾投下) 혹은 일본으로의 원자폭탄 투하(日本への原子爆弾投下) 사건은 1945년 태평양 전쟁 당시 승기를 잡은 미국이 일본 제국의 항복을 이끌어내기 위해 일본 제국의 도시인 히로시마(8월 6일)와 나가사키(8월 9일)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사건으로, 현재까지 최초이자 유일한 핵무기의 실전 투입 사례다.
수십만 명의 민간인이 희생당한 이 사건에 대한 윤리적, 법적, 군사적 논란은 오랜 기간 학계에서 양극화된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미국이 태평양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기 위해 원자폭탄의 사용이 정말로 필요했는지 여부 같은 근본적인 문제는 수십 년이 넘는 기간 동안 학계를 분열시키고 있다.
2. 3차 투하 계획 (취소됨) - 1945년 8월 19일
미국은 2번째 원자폭탄을 투하한 이후에도 일본이 항복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일본군이 절대 항복하지 않고 옥쇄와 자살 공격으로 저항하는 모습에 미국도 더 이상 기대하지 않고 일본을 확실한 방법으로 굴복시키는 것이 정답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미국은 원자폭탄을 최대 15개까지 준비해 놓고 일본을 타격할 계획이었다.
3. 한국인 원폭 피해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가 군수 도시였기에 강제로 끌려와 노동에 시달리다가 원폭을 맞은 안타까운 한국인이 상당히 많았다. 또한 원폭 투하 후에 일제에 의해 잔해 제거에 우선적으로 강제동원되어 피폭되는 경우도 많았다. 당시 히로시마 총 인구 약 42만명 중 20만명이 피폭, 9~16만명이 수개월 내에 사망했다. 히로시마 인구 중 약 14만명(3분의 1정도)은 조선인이었으며 피폭자는 5만, 그중 약 3만명이 사망, 생존2만명 중 1만 5천은 광복 후 귀국, 5천명은 일본에 잔류하였다고 한다. 현재 피폭자 후손 등을 모두 합친 히로시마 피폭자 총 집계 74만여명 중 10만명 정도가 한국인이라고 한다.
거기다가 부상자들은 일제에서는 자국민이 아니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았고, 이후에도 제대로 치료도 제공하지 않아 피해가 막심했다. 생존자 박남주 할머니의 증언으로는 히로시마 재일동포들은 현지 일본인들은 달리, 피폭을 당하고도 폭심지로부터 2㎞ 밖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4.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
1970년 4월에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가 건립되었다고 합니다.
높이는 5미터, 무게는 무려 10톤으로,
한국에서 모두 제작되어 히로시마로 운반해 건립했다고 합니다.
5. 원폭피해자 <이우왕자>
출생 1912년 11월 15일
사망 1945년 8월 7일 (32세)
고종의 손자로 의친왕 이강의 둘째아들인 이우는 흥선대원군의 장손 이준용이 사망한 뒤 양자로 들어가 운현궁의 4대 종주가 되었다. 왕족들 가운데 유난히 민족주의적 성향이 두드러졌던 그는 일제의 정략결혼을 피하고 박영효의 서손녀 박찬주와 결혼했다. 일본군 장교로 히로시마에서 복무하던 중 미군의 원자폭탄 투하로 인해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