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씨앗
1960년대의 일이다. 내가 근무하는 학구 내에 두 개의 어린이 보호 시설(고아원)이 있었다. 그런데 그 시설들의 운영 방식이 매우 달랐다. A 시설은 일반 가정처럼 보모 한 사람이 4~5명의 아이들을 맡아서 기르고 있었고, B 시설은 그러한 가족 단위 개념이 없이 집단으로 수용하여 몇 사람의 보모가 함께 돌보고 있었다.
A 시설의 한 가정은 아이들의 연령도 조금씩 차이가 나게 하여 형, 누나, 동생으로 부르고 있었고 보모를 어머니라고 불렀다. 물론 보모도 말끝마다 ‘우리 순영이’라고 호칭하면서, 자기의 자녀처럼 여기고 있었고 자신도 결혼을 하지 않았다.
B 시설은 그러한 개념이 전혀 없었고, 책임 관리자를 원장님이라 부르고 보모들을 선생님이라 불렀다. 그리고 경제적인 지원도 부족한지 아이들의 영양 상태도 좋지 않았다.
내가 맡은 반에는 두 쪽 시설의 아이들이 다 재학하고 있었는데, 양쪽 아이들의 성격이나 행동이 눈에 띌 정도로 달랐다.
A 시설의 아이들은 보통 가정의 아이들과 전혀 다름이 없었다. 표정도 밝고 혈색도 좋았을 뿐만 아니라, 교우 관계도 원만하였다. 담임인 나에게도 슬슬 농담도 하고 옆에 와서 기대면서 장난을 걸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B 시설의 아이들은 전반적으로 건강 상태도 좋지 않았으며, 생기가 없이 늘 침울해 보이며, 무슨 말을 하면 눈치를 잘 살피곤 하였다. B 시설의 한 여학생은 머리가 매우 좋아서 성적이 매우 뛰어났기 때문에, 다른 아이들이 많은 관심을 보여 주는데도, 그 여학생은 항상 힘이 없어 보였고, 웃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러한 그의 표정을 읽으면서 나도 측은한 생각이 가슴에 일어 바로 보지 못할 때가 많았다.
나는 그 두 곳을 다 방문하였기 때문에 그 이유를 확연히 알 수 있었다. 그러한 차이점이 발생하는 근본적 요인은 사랑을 얼마만큼 받고 있느냐 하는 데 있었다.
A 시설의 아이들은 엄마와 형제들의 사랑 속에서 생활하지만, B 시설의 아이들은 그러한 사랑이 결핍되어 있었다. 나는 그때 사랑이란 것이 얼마나 위대하며 인간에게 어떤 힘으로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남아프리카의 어느 고아원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까닭 모르게 아이들이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 가기 시작하였다. 이 일이 큰 문제로 비화되어, 마침내 유엔에까지 알려지게 되어 의사들을 그 고아원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의사들도 병의 원인을 좀처럼 밝혀 낼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의사들은 정신과적인 문제로 빚어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러한 쪽으로 방향을 돌려 살펴보았다. 그 예상은 적중하였다. 그 고아원에서는 아이들을 그냥 먹이고 재우고 할 뿐, 일반 가정에서 볼 수 있는 사랑은 전혀 없었음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의사들은 다음과 같은 처방을 내렸다.
‘하루에 세 번씩 안아 주고 뽀뽀해 주고 쓰다듬어 줄 것’
마침내 이 처방은 주효하여 아이들은 원기를 회복하고 정상적으로 성장하였다. 이처럼 사랑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그러한 것이 아니다.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는 신비한 그 무엇이다.
‘나무 마을 윤 신부의 치유 명상’ 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의미 요법으로 유명한 프랑클이 어느 날 새벽 2시경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착 가라앉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밤 늦게 죄송해요. 저는 아무 희망이 없어요. 살 힘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약을 입에 막 넣으려다가 선생님의 전화번호가 생각나서 그냥 한번 걸어 봤어요. 전 이제 죽어요.”
프랑클은 다급하게 부인을 제지시키며 설득하기 시작했다. 어떤 경우라도 자살할 필요는 없다, 죽을 각오로 노력하면 극복하지 못할 어려움은 없다느니 하며, 그녀의 마음을 바꾸려고 노력을 했다.
한참 이야기를 나눴을 때, 그녀는 프랑클의 말대로 자살은 미루겠지만, 대신 좀 만나 줄 수 있겠느냐고 하였다. 프랑클은 그렇게 하겠다고 허락하고 그녀를 기다렸다. 그는 기다리면서 몹시 궁금하였다. 도대체 자신의 어떤 말이 그녀로 하여금 자살할 마음을 멈추게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여인이 도착하자 두 사람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후에, 프랑클은 그녀에게 물어 보았다.
“그런데 부인, 당신은 나의 어떤 말에 자살할 마음을 바꿨나요?”
여인은 잠깐 멍하니 프랑클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저는 선생님이 저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아요. 제가 자살할 마음을 바꾼 것은, 생판 모르는 여자가 밤늦게 전화해서 죽겠다고 넋두리를 늘어놓는데도, 전혀 싫은 기색이 없이 애를 써 주시는 선생님을 생각하니, 이런 사람이 있는 세상이라면 아직은 살아 볼 희망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죽겠다는 마음을 바꾼 거예요.”
자살을 눈앞에 둔 사람에게 보내 준 정성과 사랑이 사람을 살린 것이다.
여성의 모성애도 천성적으로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아기를 낳아 기르면서 후천적으로 습득되는 것이라는 어느 학자의 주장을 들은 일이 있다.
이와 같이 일반적인 사랑도 학습에 의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랑을 받아 본 사람이 남을 사랑할 줄 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어릴 때 남의 눈치를 보고 자란 사람은 커서도 남을 의심하고 눈치를 잘 보게 된다.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난 사람은 웬만한 일은 수용하고 받아넘기며 포용성을 발휘한다.
나는 어릴 때 할머니로부터 유달리 뽀뽀를 많이 받으면서 자랐다. 그런데 내가 철을 알고부터 동네의 작은 아이만 보면 볼에다 내 입을 문지르며 뽀뽀를 하였다. 누가 시켜서 한 것도 아니고 나도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은 물론 아니다. 할머니께서 내게 하신 것이 그대로 학습된 것이다.
이러한 뽀뽀법은 내 자녀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그래서인지 나의 뽀뽀를 받으며 자란 내 아들이 자기가 낳은 아이에게도 꼭 그대로 하는 것이었다. 사랑도 배운 대로 한다는 것을 새삼 발견한 것이다.
‘부모학’ 이라는 책들이 시중에 많이 나와 있는 것을 보았다. 부모도 옛날처럼 그냥 하면 되는 시대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어떻게 하면 좋은 부모가 될 수 있는가를 연구하고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아니, 사람을 죽이고 살리고 할 수 있는 사랑은 더욱 깊이 생각해야 하고 공부하고 실천해야 하는 높은 덕목이다.
넉넉하게 나의 사랑을 뿌리자. 그 사랑은 남에게 학습되고 흩어져 민들레 씨앗처럼 널리 퍼질 것이다. 그리 되면 그만큼 죽어 가는 사람이 다시 살아날 것이다.